창세기 나눔

창세기 2, 18-25: 짐승들과 여자(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2)

마리아 아나빔 2010. 6. 17. 20:01

 

 

 

 

도입기도: 집회 26, 1-4

 

좋은 아내를 가진 남편은 행복하다

그가 사는 날수가 두 배로 늘어나리라

휼륭한 아내는 제 남편을 즐겁게 하고

그 남편은 평화롭게 수를 다하리라

좋은 아내는 큰 행운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그런 아내는 행운으로 주어지리라.

그 남편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마음이 즐겁고

얼굴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창세기 2, 18-25: 짐승들과 여자(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2)

갈수록 긴박감이 고조되는 이야기풍과 교육적인 덕담을 엮어가면서 성서 저자는 시원에 관한 설화를 계속해서 완결시킨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기는

 

1) 아담의 고독,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명제이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사막에서 종족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살게 될 때 유목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독감과 위험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동시에 인간은 홀로 설 수 없고 반드시 관계를 맺을 상대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하느님은 상황을 타개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보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시고 아담은 여전히 불만인 채로 남는 것처럼 이야기가 꾸며지고 있다.

 

2) 짐승들이 창조되고 아담 앞으로 줄지어 가며, 아담은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준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성서적인 배경에서는 단순히 작명이라는 지적 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권위와 지배권 및 주권을 행사하고 역할을 부여하는 행동이었다. 즉 성서에서 이름을 지어 주는 행위는 이름을 받는 존재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 존재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담은 모든 짐승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짐승 하나하나를 마음 먹은 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3) 그리하여 하느님이 남자의 생명의 일부(갈빗대는 극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로 여자를 빚어주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외과 의사처럼 작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옹기장이 같은 하느님’등과 같은 관습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한 이 묘사를 통해서 성서저자의 여자에 관한 교리교육은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고 진지해지고 있다.

- 아담의 깊은 잠은 하느님의 창조가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인간이 알아차릴 수 없음을 뜻한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께서 이루신 창조의 결과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 짐승을 창조하고 여자의 창조를 ‘지연’ 하는 것은 문학적인 기교로 보인다. 여자가 목숨이 붙은 모든 존재들(사람에게 소속되는 존재들)위에 뛰어난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목숨이 붙은 다른 존재들은 인간의 본성과 동등하지 못하다.

- 성서저자는 하느님이 아담의 생명의 일부를 이용하셔서 여자를 빚어내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여자를 만드시는 데 무슨 재료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본성으로 되어 있음을 남자에게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즉 여자도 똑같이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명을 얻은 육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도 남자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 남자와 똑같은 지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그 어느 피조물도 할 수 없는 동반자요 도움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창세 1,28과 달리 이 설화에는 생명의 전수에 관한 언급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에 남자와 여자의 상호관계, 인격적 관계, 친교를 이뤄 살아갈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 성서 저자는 여기 원천적인 관계이고 근본적인 인간 관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_ 이 관계는 모든 차원에서 남녀가 주고 받는 협력과 상호보완을 위해 영속적인 관계이다. 그 가운데서도 정신적, 정서적 차원이 첫 번째 차원을 이룬다.

이 사실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도 나타나고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라고 하는 아담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이 장면을 두고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몸이 되었다(창세2,24) 는 해설을 붙이는 성서 저자의 말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말씀은 신약안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이 담긴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원초적인 계획 안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는 교회법 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즉 교회법 안에서 혼인법은 교회법이기 전에 신법이고 자연법이다. 그러므로 한번 거행한 혼인은 풀 수 없는 관계로 불가해소성으로 묶이게 된다. 이리하여 인간(남자와 여자)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완결을 본다. 그리고 하느님은 각 사람이 당신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를 바라신다.

 

 

* 참고문헌: 구약성서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성염, 바오로딸, 2001, p.150-151.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정태현, 생활성서사,1990, p.22-25.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p.3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