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3, 1-7: 인류의 첫 범죄
이 성서는 인류의 첫 범죄를 다루고 있다. 이 실낙원 설화의 등장인물은 넷이다.( 아담, 이브, 뱀 그리고 하느님) 범죄 이전의 넷의 관계는 무척 평화로웠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순식간에 이 평화롭던 관계기 깨지고 만다. 도대체 인간이 범한 죄가 무엇이기에 이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을까?
이 설화를 기록한 성서 저자는 지상낙원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던 것이 아니다. 자기가 처한 문화적 배경에서 뱀, 생명의 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같은 언어와 상징들을 모아서 설화를 구성하였다.
1. 하느님께서 첫 남녀에게 요구하신 규율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금하심은 인간이 생명나무에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명나무는 창세 2. 9과 설화의 마지막 구절인 3,24에 언급되어 있다. 생명나무는 고대 근동에 널리 펴져 있던 상징으로서 불사의 선물, 신성들과 통교하는 선물을 주는 나무로 여겨졌다. 그 대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유혹의 나무는 성서에만 나오는 상징이다. 이 나무 열매에서 성서 저자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표상하고있는데, 셈족의 어법에 따르자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과 맞서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자세를 가리킨다. 사실 선과 악은 하느님이 마음 내키시는 대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고,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있는 하나의 실재요, 특히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간에게 깊이 새겨진 실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이다. 인간이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도덕적 자율성’은 인간의 선익을 도모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짓이고, 궁극에 가서는 피조물로서의 인간 조건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 ‘선과 악’은 윤리적인 규범을 말하기보다 인간에게 도움과 구원을 가져오거나 손해와 파멸을 가져다주는 어떤 행위의 구체적 결과를 가리킨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안다’는 표현은 자신의 구원과 파멸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기 위해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말은 그들이 자신의 구원과 멸망을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나섰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런 행위는 자신들을 만드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에 도전하는 오만불손한 행위인 것이다.
- 성서에서 ‘안다’는 표현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로 지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2. 뱀은 고대인들에게 영악한 짐승 또는 지혜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리고 뱀은 다산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범죄설화에서 아이를 낳는 여인의 편에 서게 된다.
- 그러므로 뱀이 유혹자로 등장함은, 가나안의 이교종교에서 이 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이 종교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나안 종교에서 뱀은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경작하는 땅이나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아울러 마술의 상징물이었다. 특별히 주문과 의식을 알아서 신들의 능력을 장악하려는 마술의 상징물로 숭상을 받았다.
성서 저자의 의도에서 본다면 이 동물을 유혹자로 이용하는 것은 매우 도전적인 행동이다. 선과 악을 설정하시는 참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은 하느님이 아닌 사물에서, 우상이나 마술에서 생명과 행복의 길을 찾으러 나선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정작 발견하는 것이라고는 무력함과 죽음뿐이다.
아담과 하와가 당한 유혹에는 그 뒤 모든 유혹의 표본이 들어 있다.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유혹적인 암시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기로 몰고 간다. 뱀도 하와더러 금지된 과일을 먹으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뱀은 하와와 대화를 시작한 다음, 하느님을 이기적이고 거짓말쟁이며 당신의 권력에 신경을 쓰고 하와나 아담이 당신과 같아 질까봐 겁내는 분으로 묘사한다. 뱀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이 계명을 내리신 동기는 이기심이요 시기심이라는 것이다.
하와는 꾀임에 빠지도록 자신을 내버려 둔다. 하느님이 정말 자기와 아담의 행복과 선익을 바라시는지 의심한다. 자기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의심한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유혹자의 말을 믿게 된다. 두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슬러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고 또 하느님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스스로 자기 행복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열매를 따먹었다. 그렇지만 이 행위는 악이 무엇이지를 알게 해주었을 뿐 두 사람에게 선과 악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하였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좀더 들어가 보면
뱀이 여자에게 묻는 말은 아주 교활하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 이 질문에는 거짓과 진실이 함께 들어 있다. 즉 하느님께서 어떤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금하신 것은 진실이지만 모든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진실이 담긴 거짓말에는 속아 넘어가기가 쉽다. 뱀의 진실 반 거짓 반의 질문으로 여자의 호기심 어린 반응을 유도한다.
여자는 뱀에게 즉각 반응을 보인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열매든지 따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한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만 하셨는데, 여인의 대답 가운데에는 ‘만지지도 말라’ 라는 과장이 덧붙여져 있다. 즉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규율을 마음대로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여인은 이미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여인이 허점은 드러내자 뱀은 즉시 거기에 달라붙는다. “ 하느님이 금하신 이유는 너희가 그 열매를 먹기만 하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기 때문이야” 간이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를 기록하면서 창세기의 저자는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즉 최상신의 권위에 대한 하류 신들의 끊임없는 도전은 고대 근동 신화들의 공통된 주제였다. 그러므로 여인에게 제시된 유혹의 내용은 하느님이 정해 주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자신의 구원과 멸망까지도 통제할 권한을 쟁취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 된다.
3. 여인은 유혹에 져서 열매를 따먹고 남편에게 따준다. 이 열매의 이름은 성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라틴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이 열매를 사과라고 부른 것은 라틴어로 사과가 똑같이 말룸(malum)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열매를 먹은 두 남녀는 뱀의 말대로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알몸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부를 가리고 하느님 눈에 띄지 않도록 숨는다.
성서의 저자의 말로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두 사람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깨닫았다고 한다. 그리고 알몸인 것이 예전과는 달리 대단히 부정적인 상태도 변한다. 타인들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두려움과 수치를 느꼈고, 그 일로 두 사람은 저 유명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앞가림을 한다.
이 기록에는 두 가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 하나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 알몸을 드러내지 않도록 엄격히 규제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습의 반영이다.
- 다른 하나는 인간이 초월적 위치를 탐낸 후 형상 없는 초월자 앞에서 자신이 몸뚱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 자신들의 알몸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창세기 2장을 끝내면서 성서저자는 남녀가 알몸이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방해를 느끼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즉 자기들끼리도 자기들을 알몸으로 만들어주신 하느님 면전에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구절이다. 그것은 뒤따라 나오는 3장과 결부되는 요소이기 때문만이 아니라(창세 3, 7.21)하느님의 원초 계획에 따른 인간 조건이 어떤 것이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구절은 그야말로 성적인 차원에서 남녀 관계의 평온함과 안정됨을 가리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몸이라는 처지는 인간 존재가 근본적으로 피조물임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그렇다고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과의 관계나 동료 인간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완전한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다. 알몸이라는 처지는 친교의 투명성, 단순함, 그리고 전인적인 상호 신뢰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가려야’ 할 필요가 없고 가면을 쓸 필요가 없고 방어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과의 친교와 우정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친교는 인간관계에서도 행복과 균형을 도모해주는 것이다.
- 또한 여기서 유의할 점은 유혹자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약속한다.
사실 하느님과 같아지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원초 계획이다. 이것은 신약성서가 명시하고 있는 바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지니도록 미리정하셨다고 단언하였고(로마 8,29) 요한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성부의 말씀으로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한다.(요한 1,12) 또한 그의 첫째 서간에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I요한 3,1-2)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과 비슷해지겠다는 열망 자체가 ‘원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충만한 행복을 이루게 될 우리 존재의 완성, 궁극적인 이 실현을 아버지 하느님의 결정적인 선물, 최고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나름의 방법을 써서, 하느님과 맞서 가면서 그렇게 되겠다는 주장이 원죄를 구성한다. 과연 원죄는 우리 각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께 드려야 할 모든 신뢰를 거부한 채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행복을 얻으려는 욕구를 깊이 체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욕구야말로 원죄와 다른 모든 죄의 대전제가 된다.
인류가 범한 첫 죄악은 인간을 인간 이하로 끌어 내리는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원초적인 계획, 곧 세상을 좋게 만드시고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에게 세상을 아름답게 관리하고 보존하도록 맡기신 계획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의 비참만을 깨닫게 되고 만다. 절대자 앞에서 흙으로 빚어진 자신의 허약한 육체를 부끄럽게 느낄 따름이다.
* 참고문헌: 구약성서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성염, 바오로딸, 2001, p.151-156.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정태현,생활성서사, 1990, p.26-27.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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