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 43-44장:요셉의 형들이 벤야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다

마리아 아나빔 2011. 5. 3. 10:51

 

 

 

                          성서나눔 44(창세기 43-44장):요셉의 형들이 벤야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다

 

 

 

들어가면서

 

 

     형제들을 다시 만난 요셉은 벤야민을 보고 다시 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형제들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곡식 자루에 돈과 함께 요셉의 잔을 넣어 함정을 만든다. 영락없이 걸려든 형제들에게 그 죄를 물어 잔이 나온 벤야민만 종으로 남으라고 선언하자, 유다가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서며 아버지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이 과의 성서본문은 야곱의 아들들이 두 번째로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내려간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벤야민까지 대동하고 자신을 찾아온 형들을 요셉은 관리인에게 반갑게 맞으라고 지시한다. 저자는 여기서 엘로힘 전승에서 야훼전승으로 옮긴 것 같다. 왜냐하면 야훼계전승의 주인공은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이다. 환영만찬은 요셉의 사택에서 베풀어질 예정이었다.

형제들은 관리인의 안내로 요셉의 사택으로 불려가게 되자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제 또 무슨 액운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인가! 겁을 잔뜩 집어 먹은 그들은 자신들이 요셉의 집으로 불려 가는 원인을 지난번에 양식을 사러 내려올 때 되돌려 받은 곡식 대금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 짓고서 관리인에게 미리 선수를 친다. 일전에 양식을 사가지고 올라간 후에 곡식 자루를 풀다보니 곡식 대금이 그대로 남아서 그 돈을 다시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외로 관리인은 그 돈의 출처를 하느님께 두면서 자신은 분명히 대금을 받았다고 그들을 안심시킨다. 관리인의 말은 물론 이미 주문해 둔 내용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역할은 이방인의 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시사된다. 이처럼 하느님의 역할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언제나 뒷 배경으로 가리워진 채 나타난다.

 

 

Text 안에서

 

 

창세 43, 15-44, 13: 은잔이 나오는 자루 임자는 나의 종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요셉이 어떤 악의가 있어서 한 일은 아니다. 단지 벤야민에 대하여 형들이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옛날과 같은 마음가짐이었다면 벤야민을 버리고 돌아갔을 것이다.

 

- 베냐민을 데려왔으니 무고한 간첩혐의도 벗겨지고 시므온도 감옥에서 풀려난다. 더구나 이집트 재상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진수성찬을 받고 보니 형제들은 그 동안 쌓였던 노고와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느낀다. 재상은 첫 번째 회견 때와는 달리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로 형제들을 맞아 주고 있다. 노친네의 안부까지 물어주고 특히, 막내동생 벤야민에게 각별한 친절을 보인다. 벤야민은 요셉과 같은 부모의 아들들이며, 열 두 살에서 열 다섯 살 정도의 나이차이가 있다. 요셉은 자신이 동복동생인 베야민을 만나 이야기를 건네는 도중 북받치는 감정을 누를 길 없어 자기 방으로 물러가 한참 울고 돌아온다. 아마도 나이 어린 벤야민을 보는 순간 돌아가신 어머니 라헬에 대한 그리운 생각과 어머니 없이 자란 동생에 대한 연민이 갑자기 마음에 솟구친 것 같다. 그리고 요셉이 두 번째 꿈을 꾼 무렵, 곧 그가 팔리기 조금 전은 37장 9절의 “열 하나”라는 수에서, 마땅히 벤야민도 태어난 후라고 풀이 된다. 요셉의 형제들은 연회 석상의 자리가 요셉의 의도적인 배려로 나이순으로 지정된 것을 모르고 하인들이 어떻게 자기네들 나이를 알아보았을까 의아해 한다. 히브리인들인 형제들은 이집트의 관습대로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이집트의 재상인 요셉과 겸상하지 않았는데 요셉은 형제들에게 음식을 자기상에서 날라다 주게 한다. 가장 큰 대우를 받아야 할 맏아들을 제치고 막내인 벤야민에게 특별대우가 베풀어지고, 다섯 배의 음식이 이 꼬마에게 주어진다. 요셉의 상에서 음식을 날라다 준 것은 호의에 넘치는 예우의 표시다. 벤야민에게 특별한 몫을 주었는데,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예는 사무엘 상 9장 23- 2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이집트인의 관습을 말하고 있다. 히브리인, 아직은 나라가 없는 사람들, 동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이집트인은 싫어하였다. 힉소스의 백성이 벌써 이집트에서 떠나갔던 시대임을 암시하고 있다.

 

- 그러다가 이 축제의 분위기가 요셉의 마지막 술책 때문에 갑자기 경색된다. 요셉의 관리인은 형제들에게 양식을 챙겨 주면서 각 사람의 곡식 자루에 양식 값을 다시 넣어 두고 막내 벤야민의 곡식 자루엔 재상의 은술잔까지 넣어 놓는다. 이 은술잔은 점을 치기 위해서도 사용되는데 잔속에서 물이나 기름이 만들어 내는 형상을 보고 뭔가를 예견하는 것 같다. 후에 이스라엘에서는 점을 치지 못하게 엄금하였다(레위 19; 신명 18:10). 그러나 고대의 사제라든가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상습적으로 그런 점을 치고 있었다. 점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가 있다. 다음의 한 예는 바빌론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물이 들어 있는 그릇에다 기름을 떨어뜨리고, 그 기름이 퍼지는 모양이나 움직임을 보고, 규정에 따라 길흉을 읽는다. 요셉 자신은 꿈의 판단능력을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한다. 따라서 점을 쳐서 앞날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은 이집트 현인처럼 행동하고, 형제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믿고 있다. 15절에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질문은, 분명히 이 뜻을 지니고 있다. 창세기에 “점친다”는 이 동사가 나오는 다른 대목은 단지 하나 뿐이며, 이교도 라반으로 하여금 말하게 된다(창세 30,27). 어째든 성서에서는 이런 식의 점을 단죄하지만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요셉의 점치는 관습에 아무런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집트 고관의 한 습관으로 여길 뿐이다.

 

- 다음날 아침 형제들이 도시에서 나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은 관리인더러 그들의 뒤를 급히 쫓아 은잔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게 된다. 형제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영문을 몰라 하면서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훔친 자는 죽이시고 자신들도 재상의 종이 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하나하나 곡식 자루를 풀다 보니 이게 웬 말인가? 하필 야곱이 그처럼 애지중지하며 귀여워하던 막내 벤야민의 자루 속에서 은잔이 나온 것이다. 성물을 훔친 죄는 사형이니 벤야민은 이제 죽게 되었다. 그러나 요셉의 관리인은 관대하다. 은잔을 훔친자만 나라의 종으로 삼겠다는 것이고 형제들은 무혐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형들은 극도의 심적 고통을 드러내는 표시로 자기네 옷들을 찢고 다시 떠나온 도시로 무거운 발길을 돌린다.

 

- 창세기 17장에 ‘전능하신 하느님’이란 뜻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서 쓰이고 있는 이 ‘엘 샷다이’는 엘로힘 전승과 야훼전승에 여기 이외에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저자 혹은 편자가 사제전승을 본따서 여기에다 삽입했다거나 혹은 이미 있던 말을 바꾼 것으로 간주된다.

 

이 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요셉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형들이 아직도 자신들의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특별대우를 받는 동생에 대해 질투와 미움을 보내지 않는지 시험해 보려고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빈틈없는 계획을 짜서 실행에 옮긴다. 요셉의 의도는 시련 앞에서도 형제들이 참다운 우애를 통하여 사소한 이해관계를 떠나 서로 받아들이고 상호협조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막내의 곡식 자루에서 이집트 재상의 은술잔이 나왔을 때 막내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발뺌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형제들 중 한 사람에게 닥친, 그것도 가장 연약한 막내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공동 연대감을 느끼고 함께 책임을 나눠지려고 한다.

 

 

창세 44, 15-34: 아버지께 닥칠 불행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서 전체에서 가장 휼륭한 연설 중의 하나로 꼽히는 유다의 연설을 담고 있다. 이 연설에 나타난 유다의 풍부한 인간성과 희생정신은 호소력 있게 전달되어 요셉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속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이 장의 후반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유다의 이야기는, 요셉의 전기의 정점을 이룬다. 요셉은 형제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과거의 죄를 후회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회개하여 선덕을 쌓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얻었다. 이 전에는 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한 아들 요셉을 시샘하여 요셉을 종으로 이집트에 팔았고, 무정하게 아버지를 속여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막내아들 벤야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또다시 아버지를 슬프게 할 수 없다. 이런 효심에서 형제들은 이집트에 종으로 머물 각오를 한다.

 

전에 요셉을 팔자고 제안했던 유다는, 특히 자신이 아버지에게 주장한 보장(약속)(43:9)에 대하여 마음을 바꾸지 않고, 벤야민 대신 종으로서 남겠다고 간청한다. 요셉은 그들의 개과천선을 증거를 더 찾을 필요가 없었다. 유다가 마지막으로 늙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그 말투는, 요셉을 깊이 감동시켰다. 더 이상 자신이 신분을 감출 수가 없을 만큼 컸다. 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다음 장의 머리말에 기록된다.

 

- 지난 과에서 살펴본 대로 요셉은 관리인에게 명하여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의 은술잔을 집어넣게 한 다음 다시 형제들을 붙들어 그것을 확인시킴으로써 그들에게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운다. 형제들은 옷을 찢으면서 다시 나귀에 짐을 싣고 요셉에게 돌아온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사택에 들어가 보니 요셉은 노기가 충천한 채 자신의 자리에 않아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주도권을 더 이상 맏형인 르우벤이 쥐지 않고 유다가 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형제들이 요셉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부복하자 요셉의 불같은 호통이 그들 위에 떨어진다. “나같은 사람이 점도 못 칠 줄 알았더냐? 라는 요셉의 말은 자신을 낮추었다가 높이는 표현이 아니라 사람이란 파라오와 동등한 위치의 사람, 신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처럼 위대한 사람’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점을 친다’는 말은 미신에 빠진 허약한 사람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지식을 갖춘 사람과 연관된 말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나이순대로 정확하게 식탁의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을 보고 이미 그가 그런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다.

 

- 이 때 유다가 용감하게 형제들을 위해 대변자로 나선다. 유다는 한껏 자신을 낮추고 자신들에게 뒤집어씌워진 누명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음 세 마디 말에서 우리는 유다가 변호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찌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 내셨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유다는 요셉을 이집트인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야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유다가 말하는 자신들의 죄란 요셉의 술잔을 훔친 죄가 아니라 그 옛날 요셉에게 저지른 죄를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은술잔을 훔친 혐의는 막내 벤야민에게만 해당되고 유다를 포함하여 다른 형제들은 무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는 은잔 절도에 대한 책임을 막내에게만 뒤집어 씌우지 않고 형제적 연대감을 시사하며 형제들 모두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나선다. 앞으로 살펴 본 것처럼 “소인들 중 누구한테서라도 은잔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고 관리인에게 말하던 것과는 달리 유다는 여기서 동생 베야민을 위해 죽음의 형벌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도 않고 모두가 단체 노예가 될 각오만을 시사한다. 영리한 요셉이 이러한 유다의 생각을 모를 리 없다. 그는 능청스럽게 “그렇게 할 수 없다. 잔이 나온 사람만 내 종이 되고 너희 나머지는 아버지에게 평안히들 올라가거라”고 명령한다.

 

- 여기서 유다의 명연설이 터져 나온다. 요셉의 명령에 당황한 유다는 진실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유다의 연설은 자신의 격한 감정을 충분히 조절하고 공손한 태도로 시작된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선조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앞서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때 취하던 겸허한 태도와 견줄 만하다. “소인이 한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노여워하지 마시고 들어 주십시오. 어른의 막강한 세력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에 못지않으십니다.” 유다는 그들에게 간첩혐의를 씌우고 시므온을 투옥시킨 요셉의 잘못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항변도 없다. 벤야민을 데려왔으니 이 모든 혐의가 풀렸고 요셉이 자신들에게 티무니 없는 누명을 씌웠음이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다만 가나안에 계신 늙으신 아버지 요셉만을 걱정하면서 요셉의자비심에 호소하고 있을 따름이다.

 

- 유다는 막내 벤야민의 동복형인 요셉을 잃은 아버지가 막내를 애지중지하는데, 식량을 얻기 위해 부득이 이 아이를 데려 내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유다의 말투에서 벤야민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를 원망하거나 질투하는 감정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요셉을 잃고 난 후 요셉의 동복동생 벤야민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에 대한 유다의 효심은 대단하다. “그 애가 만일 아버지를 떠나면 아버지는 숨이 넘어갈 형편이어서”라는 유다의 말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염려가 드러난다. 유다는 “만일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만난다면 그 때엔 늙은 백발이 슬퍼하며 지하로 내려가는 꼴을 보겠느냐”라는 야곱의 한탄도 전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목숨은 그 애의 것과 하나로 얽혀 있으므로 애가 없는 것을 보면 곧 숨이 넘어가실 것입니다”라는 늙으신 아버지에게 닥칠 정황에 대한 유다의 예측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결론으로 유다는 막내 대신 자신이 종으로 남겠으니 그 애만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께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막내를 데려가지 않았을 경우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차마 볼 수 없겠다는 것이다.

 

- 유다의 책임 있는 태도와 강인한 용기와 희생심, 늙으신 아버지에 대한 그의 섬세한 효도, 그리고 이집트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고 당당하게 사건의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들은 성조사 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형들의 속셈을 떠보려는 요셉의 술책은 이 유다의 태도 앞에서 여지없이 무력해지고 만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66-278.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72-176.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383-393.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83-85.

                오경, 성서와 함께,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 편저, 2006, 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