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기도: 시편
창세 3, 8-9: 하느님의 재판
1.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본래는 하느님과 한 쌍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였다. 그러나 원죄 이후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자마자 아담과 하와가 보인 첫 반응은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도망해서 몸을 숨기는 행동이었다. 하느님이 무슨 대응을 하시기도 전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은 심문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신다.
2.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두 사람이 눈에 뜨지 않아 둘을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의 놀라움을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하느님 편에서는 ‘책임’을 강조하시는데 인간 편에서는 책임을 피하려고 남에게 탓을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악의 기원이 인간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비로 보여 진다하더라도 그러나 뱀을 빼놓고서도 사람은 뱀이 내어놓는 그 유혹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할 수 있다는 진정한 문제가 남아 있다. 사람은 자기가 내린 결단에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을 벗겨내려는 온갖 심리학적 사회학적 생물학적인 이론은 결국 인간을 한낱 로봇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유스럽고 책임 있는 인간 존재를 파괴하고 만다. 나아가 우리는 죄 곧 자신의 선익과 자신의 행복을 거스르는 부정적인 선택이 인간 사회와 인간 유대를 무너뜨린다는 것도 유념 부정적인 선택이 인간 사회와 인간 유대를 무너뜨린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여자, 아담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로 맞아들이던 여자가 이제 잘못과 악의 원인이 되는 유혹하는 여자로 보여 지고 거부당한다. 사실 양편다 자기들의 선택과 결단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서도 탓이 있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 질문은 하느님의 원초적인 계획에서 벗어나 자기본위로 살아가는 아담 이래의 모든 인류에게 던져지고 있다. “사람아, 너는 나의 원초적인 창조계획 안에서 너의 위치를 똑바로 인식하고 살아가느냐? 너와 나 사이의 관계, 너와 동료 인간들 사이의 관계, 너와 이 세상 사이의 관계가 창조의 질서 안에 평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느님은 세기를 두고 모든 인류에게 줄기차게 물어 오신다. 한편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한 남자와 여자, 그리고 뱀은 그분을 거슬러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된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갈비뼈에서 여인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은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여자 친구의 출현을 반갑게 맞는다. 그러나 아담은 함께 범죄를 저지른 후 혼자만 공범의 올가미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느님이 인생의 동반자로 주신 여인을 배반하고 고발한다. “ 당신께서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열매를 따주어서 먹었습니다.” 함께 저지른 잘못 이후 오늘날에도 여인들이 남자의 도움 없이 혼자서 범죄의 결과를 짊어지는 수가 허다하다.
결국 여기서 배우자에 대한 고발과 배신은 결국 그를 맡겨 주신 하느님께 대한 고발이요 배신이다. 여인도 하느님 앞에서 혼자 책임을 지기를 원치 않는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고 말하며 하느님께서 가장 영리하게 만드신 피조물을 고발하고 있다.
3. 아담의 경우에나 여자의 경우에나 다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최종 책임을 하느님에게 뒤집어씌운다. “당신이 함께 살라고 맺어 주신 여인이 따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가장 간교하게 만드신 들짐승인 뱀이 따먹으라했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께서 ”왜 따먹었느냐“고 추궁하실 때 ”제 실수로 그렇게 되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빌었던들 하느님은 모두를 용서하셨을 것이다. 선악을 책임지려했던 당당한 마음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우리는 인류의 첫 범죄인 원죄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죄는 모든 관계를 엉망으로 만든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고 동료를 고발하고, 피조물과도 갈라진다. 그러므로 정해진 분수를 외면하고 그분의 원초적인 창조계획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던 것이 바로 첫 인류가 지은 원죄였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3, 15: 첫 복음
1. “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성서 저자는 최조의 단죄를 기술하면서 참으로 저주를 담은 단죄는 단 하나, 유혹자에게 내려진 단죄뿐이라는 사실에 시선을 집중한다. 유혹자는 아무런 정상참작이나 심문도 없이 즉각 저주를 받는다. 왜냐하면 뱀은 다른 피조물에게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악을 일으킨 장본인인 까닭이다. 뱀은 그의 악의 소행으로 인하여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땅먼지 위를 배로 기어다니며 살게 되었고 인간과는 세세대대로 원수 관계에 들어간다. 이것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독사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미움이 이 판결문의 배경에 깔려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이 판결문은 인간과 뱀 사이에 맺어진 현실적인 원수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청중과 독자들을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행위 못지않게 악이란 존재도 신비스러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에게서도 인간에게서도 나오지 않는 이 악이 이미 창조의 세계 안에서 불가사의하게 자리잡고 인간을 피멸시키기위해 오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악의 만남은 사막에서 유목민과 독사의 만남처럼 필연적으로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으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낙원의 원조가 악의 세력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놓은 후 인류는 이제 끊임없이 이 악의 세력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 세력과의 싸움은 인간이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그의 숙명이라고 하겠다. 아무도 이 처절한 싸움에서 제외된 사람도 자유로운 사람도 없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 판결문의 내용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해석하였다. 이런 해석은 창세기의 저자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교부들은 이 판결문에 등장하는 여인과 여인의 후손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에 대한 예언으로 끌어낸다. 이 여인은 악의 세력에 동조한 아담의 아내가 아니라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고 여인의 후손은 자연 죄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 성인(130-202)을 비롯하여 교부들은 창세기 3장 15절을 최조의 복음, 또는 원복음이라고 불렀다. 하느님께서 타락한 인류의 첫 조상을 악의 세력에서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구세주를 보내시어 악의 세력을 정복할 계획을 첫 인간의 범죄 직후부터 이미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339-397) 은 뱀의 머리를 짓밟는 사람을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해석한 필로(기원전 20-50년경)의 견해를 받아들였는데 이 견해가 라틴어 성서역본인 불가따에서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 역본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 내의 마리아 신심이 두터운 사람들은 이 여인을 성모님으로 이해하여 그분이 사탄을 직접 정복하리라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성서 해독은 창세 3, 15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분”(갈라 4, 4)의 오심을 알리는 첫 번 소식으로 해석해왔다. 바오로의 말에 의하면(로마 5,12-21), 그는 둘째 아담으로서 악마의 모든 흉계를 물리치고 새 인류의 조상이 될 분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초세기부터 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아 부수다가 여자에게서 새로운 하와요 새 인류의 어머니로 표상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도 악과의 투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악을 이기고 승리하리라는 산 희망이 생김으로써 오히려 그 싸움은 더욱 치열해지고 고무되고 활발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의 가장 잔혹한 상징인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사실상 악을 벌써 쳐 이기셨다.
우리 모두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타고났다면, 또한 우리 모두가 은총을 입어 그리스도의 새로운 인류의 일원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유보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그리스도 이전에 살고 간 사람들을 포함하여 만인에게 해당된다. 만민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불리움 받았고, 성부께서만 아시고 실행하시는 방법으로 실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유혹자에게 내려진 처단과 저주의 말씀 속에 인류에게 내려진 ‘첫 기쁜 소식’이 담겨있다. 유혹자가 패배하고 비하를 당한 뒤에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어야 하는 행위로 표상되어 있는데 여자에게 관계된 말씀이 내린다. 여자는 유혹자와의 투쟁을 할 것이고 여자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투쟁을 할 터인데, 마침내 여자의 후손 하나가 일어나서 뱀의 머리를 밟아 부수고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확보하리라.
성서는 세상에 홍수처럼 번지는 모든 악이 첫 쌍에서 비롯하여 남녀 인간 전부에게서 비롯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이런 상황이 하느님께로부터 기원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우리’ 탓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함만이 아니라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두고 단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천명하려는 것이 성서 저자의 본 의도이다. 창세 3, 15은 유혹, 범죄, 수치 그리고 파국적인 결과들로 엮어져 있는 3장 전체를 알아듣게 비춰주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점이요, 계속해서 인류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점이다.
* 참고문헌: 구약성서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성염, 바오로딸, 2001, p.156-159.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정태현, 생활성서사,1990, p.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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