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1(지혜, 교훈 시)

마리아 아나빔 2011. 6. 22. 15:32

 

 

 

                                              시편1(지혜, 교훈 시)

 

 

들어가면서

 

      머리글이 없는 시편 1과 2는 시편 전체(시편집)에서 서문(서곡)과 같은 구실을 한다. 이들은 가끔 한 시편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사도 13,33에 대한 몇몇 그리스말 수사본들과 유다교 전통), 행복 찬양으로 시작하고(1,1) 행복찬양으로 끝맺는다(2,12). 시편 1은 ‘교훈시편’의 유형에 속한 것으로 윤리적 교훈과 메시아사상을 간추려 설명한다.

 

1) 지혜의 시편

 

     시편 1은 이스라엘의 포로시대에 이은 교훈적, 지혜적 문학류에 속한 것으로, 솔로몬 성전 파괴를 경계로 하여 계약의 궤는 벌써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심은 율법과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것이 선민의 지혜자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생명적 중심이 되었다. 이 문학류에 속하는 것이 1, 18, 118편 등이다.

 

이 시편은 계약의 시편이라고 하며, 성전의 전례의식에서 신도의 전도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 제 1편의 시에는 곧바로 전 시편에 항상 현존하고 있는 두 유형의 인물이 나타나는데, 한 편은 의인이고 한 편은 불경자, 죄인이다. 이것이야말로 죄가 들어온 이후의 인류의 역사의 축도인 사람의 두 얼굴, 두 가지 길, 두 가지 운명이다.

 

시편 1은 이 두 가지 인물을 눈앞에 둠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좌우하는 선과 악의 싸움, 또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싸움을 묵상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 시편 기도의 요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어느 교부들은 시편 1을 전체의 도입과 같이 생각하였다. 이 시는 한 개의 그림에 나타난 두 가지 그림으로 나뉘어져 있다.

 

둘째의 그림은 그 대조로 악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시편작가는 이 곳에서 그러한 사람의 운명에만 언급한다. 이러한 사람은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도 같은 것이며, 심판날에 단죄되고,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의인의 집회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마지막 절에는 이 두 가지 인물을 내려다보듯, 최고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나타나신다. 하느님 밑에서 진리와 하느님의 지식에 비추임을 받고 있는 의인의 길은, 멸망으로 가는 악인의 어두운 길과 대립하여 나아간다.

 

첫째의 그림에는 의인의 도덕적 결백성과 하느님의 율법을 굳게 지키고 사는 삶에 대한 칭찬이 있다. 이런 사람은 악인의 나쁜 생각을 따르지 않고, 또 종교를 비웃는 사람과 사귀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주님의 법을 기쁨으로 삼는다. 그것을 묵상하고 그 깊은 맛을 씹으며, 그 말씀을 스스로에게 응용한다. 이리하여 의인은 물이 흐르는 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수확 때에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풍요로운 생명에 넘치는 나무같이 나타난다.

 

2) 시편에서 소중히 여기고 있는 의인의 이상은 그리스도께만 실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1베드 2,22). 우리는 모두 아담을 통하여 불경자의 권고를 따르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로마 5,12).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로마 5,19).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히브 10,7),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시고, 불순종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데려가기 위하여 그분의 순종을 항상 완전하게 실행하셨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냇가에 심어놓은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셨던 것이다.

 

시편의 상징적인 형상은 하느님께서 처음 낙원에 심은 생명나무와 그 뜰을 기름지게 하는흐르던 강을 연상케 한다(창세 2,9-10). 똑같은 상징의 본은 메시아 시대의 번영을 알리기 위해, 에제키엘도 사용하고 있다(47,7-12). 그리고 요한도 또한 묵시록의 영상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하늘의 예루살렘을 낙원과 같은 모습으로 본다(묵시록 22, 1-2).

 

흐르는 물은 하느님의 생명의 상징이며 나무는 사람에게 주는 이 신적생명의 풍성함과 풍요함의 상징이다. 여기서 또 강생의 신비도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힘이 강한 무성한 나무와 같이, 그 뿌리를 말씀의 신적인 생명에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시작하신 일은 당신의 부활로써 당신과 인류를 영광스럽게 그 목적을 이루셨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열매는 또 당신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인간인 것이다.

 

교회는 이 시편에서 찬양된 의인에다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 신비의 선언처럼 본다.

 

    실제로 부활주일과 그 주간에, 전례는 그리스도의 입에 이 시를 둔다. “나는 존재하는 것이며 죄인의 길에 머물지 않고, 주의 법을 낙으로 삼는다.” 그 날에는 악인과 사탄 및 그 수하에 남겨 두신 무서운 운명이 더욱 뚜렷해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서운 판결이다. 그들은 진리를 거스리며 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의 손과 같은 태도를 지니고, 구원을 거부해 왔다. 그래서 의인의 집회에는 그들의 장소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태 3,12).

이 시편에 있는 악인의 처벌에 관한 말씀은 부활축일의 빛에서 보면 종말론적 의의를 지녔다. 그리고 완고하게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에 응용할 수 있다.

 

3) 그리스도 부활의 빛 안에서 교회는 주일마다 이 시편을 외우고, 그 속에 주님의 계명뿐 아니라 교회의 신비도 바라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그리스도께 나타난 정의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주일에, 교회는 특히 주님의 말씀과 법의 낭독과 묵상에 전념하고, 교회에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의 실천에 노력한다. 교회 안에서 참 포도나무가지(요한 15,5)와 하느님의 나뭇가지(로마 11,17)가 발전하는 것이다. 그 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서 말씀의 물과 성사의 은총의 샘으로 자란다. 십자가의 나무에서 성체에까지 주님은 구원의 과실과 양식으로서 자신을 교회에 주신다. 생명의 수액은 줄기에서 가지로 흐른다. 교회의 언제나 변하지 않는 청춘과 풍요함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하는 그 성인들에게 나타난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법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영원한 지복의 샘을 찾아보는 인인들의 세대가 뒤를 잇는다.

교회에 맡겨진 사명도 이루어진다. 세계에 대한 교회의 선교와 전례행사의 집행은 사람의 구원을 겨냥하고,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공으로 이끌려 간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착한 사람들에게 지정하는 길(6)이며, 이 길은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

 

4) 은총 안에 사는 사람은 시편이 말하는 의인, 냇가에 심어진 나무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생명의 길로 걷고 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선언하셨고(루가 11, 27-28), 이와 같은 사람을 자기의 어머니, 자기의 형제라고 하셨다(루가 8,21).

 

예수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난 사람들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요한 15,5-6).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익게 만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온유, 진실, 그리고 절제이다.(갈라 5,22-23). 예수님께서는 또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고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고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14)고 말씀하셨을 때,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두 가지 길의 주제를 되풀이한 것이다. 또 이 주제는 특히 사도시대의 교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디다케 1,5).

 

시편으로서 말하면 의인의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법률, 그들이 걸어야 할 길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주제는 시편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시편 1은 참으로 시편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책의 도입으로 보아도 좋다. 그것은 이 시가 의인과 하느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그것을 밤낮 묵상하며 하느님과 자신의 끊임없는 대화의 표현과 인도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1. 구조

 

시편 1은 간단한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A(1-2): 의인의 소개

B(3): 의인의 운명

A' (4ㄱ) : 악인의 소개

B'(4ㄴ-5): 악인의 운명

C(6): 하느님의 섭리

 

먼저 의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단순한 소개에만 그치지 않고 “행복하여라!”라는 행복 찬양을 하고 있어, 시편 1 전체를 악인에 대비되는 의인의 행복 찬양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의인의 소개에 이어서 의인의 운명이 그려지는데, 여기서 운명이라 함은 ‘운명론적 운명’이 아니라 의인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인에 반대되는 인간으로서 4절 1행에서는 악인이 소개되는데, 의인의 소개에 비해서 훨씬 짧게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앞에서 서술된 의인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악인을 내세운다. 이어서 같은 구조로 악인의 운명 또는 미래가 묘사된다. 끝으로, 6절에서는 하느님의 섭리가 말해진다.

 

2. 주석

 

1-2절: 의인의 소개

 

 1절: “행복하여라!”하는 말은 우선 문법적으로 기원형이 아니다. 곧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행복하도다”로 옮길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행복찬양’은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로써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구체적으로 축하하는 말이다. 한 예로 마태오 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진복선언’을 연상하게 된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나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그러면 누가 축하를 받는가? 그에 대한 서술이 1절의 남은 부분과 2절에서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1절에서는 ‘... 하지 않는 사람’식의 부정의 형태로, 그리고 2절에서는 ‘...하는 사람’식의 긍정의 형태로 묘사된다. 1절에서 부정적으로 축하받는 사람이 누구인가는 말해지지 않지만,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서 5절과 6절에서 직접 지칭되는 의인이다. 곧 하느님을 거역하는 사람들과 분리되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음으로써 죄와 악에 물들지 아니한다. 의인은 첫째 악인들의 여러 가지에 대해서 “아니오!”하고 대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여기서 “결의”는 서로 제안하고 상의해서 결정한 바로서 구체적인 행동방식이다. “길”은 도(道)로서 생활방식, 세계관을 나타내며, “자리”는 결의와 길이 결정되는 곳을 말한다. 이들은 서술하는 동사와 그 내용을 보면 우선 동사는 역행으로 나열되어 있다. 먼저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길에 들어서고, 다음에 걷는 것이 자연적인 순서인데 반해, 여기에서는 거꾸로 ‘걷다-들다- 앉다’의 순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그 내용이 원천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곧 먼저 결정 사항인 “결의”, 다음에 더욱 포괄적인 세계관인 “길”, 그리고 끝으로 이 모든 것이 정해지는 “자리”를 말하고 있다. ‘서다/않다’는 단순한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죄인들의 행동과 생활방식에서 우러나는 구체적인 태도를 말한다. 여기에서 위에 말한 세 가지 행동의 강도가 점점 더해 감을 볼 수 있다.

 

“오만한 자(또는 빈정꾼)” 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자를 말하며, 주로 잠언에 나타난다. 이들은 기질이 강하고 회의적이며 냉소적인 사람들로서, 주님의 법과 규칙을 스승의 훈계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하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한다. 이들에 대한 정의가 잠언 21,24에 잘 내려져 있다.

 

악인들의 행동방식 하나 둘을 따르지 아니하다,

악인들의 생활방식 자체를 따르지 아니하다,

악인들이 행동.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자리에 동참하지 아니하다.

     여기서 이 셋은 별개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아니하고, 결국 동질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종교적인 명칭들이다. 곧 이들은 하느님께 반대하는 자들로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이를 거스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조소하는 자들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생활방식은 하느님의 가르치심과 그분의 도(道)를 따르지 않고 자기들만의 ‘길’을 추구하게 된다. 의인은 먼저 이러한 죄인, 악인들을 멀리해야 하며 그들의 존재양식에,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에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이는 구약성서, 특히 지혜 문학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반면 의인은 하느님의 가르치심에서 최고의 기쁨을 얻는다. 그리고 악인들과 상종하지 않고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의 가르치심과 계속해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통교를 이룬다. 의인 먼저 “아니오!”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 “아니오!”는 하느님의 가르치심과 그분 자신에 대해서 “예!”라는 대답을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히브리말로 ‘토라’로서 단수다. 흔히 ‘법’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조금 길더라고 ‘가르치심/ 가르침’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하느님의 가르치심은 지적인 교육보다는 계시로써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신 은혜로운 가르치심의 총체를 말한다. 곧 하느님의 의지, 인간이 행하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뜻을 의미한다.

 

“주님”은 하느님의 이름이다. 칠십인역과 라틴말의 불가타역은 이 고유명사를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 키리오스(Kyrios)와 도미누스(Dominus)로 옮겼고, 유다교에서는 일찍부터 역시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Adonay)로 대체해서 읽어오고 있다.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심성이기에, 이 번역에서도 야훼를 ‘주님’으로 옮겼다.

 

      여기서 가능한 것은 시편 1의 토라가 이미 기록된 하느님의 가르치심, 곧 ‘거룩한 책’을 지칭할 수 있다. 우리는 물론 시편 1이 씌어졌을 때 구약성서가 어느만큼 기록되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편 1이 시편집 전체의 입문 또는 서론과 같은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 시편 1이 말하는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글로 쓰인 부분에만 국한 시킬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결국 주님의 가르치심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가르치심의 총체로서 그 일부만이 문서로 기록된 것이다. 2절 2행의 ‘되새기다’는 중얼거린다는 뜻으로서, 하루 종일 낮이고 밤이고 계속해서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혼자 읽고 묵상함을 뜻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매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묵상하고 공부하였다.

 

3절: 의인의 운명

 

      의인의 소개에 이어서 3절에서는 이러한 의인의 장래가 묘사된다. 이 서술에서 중요한 사실은 의인이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는 비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팔레스티나에는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건기일 때는 땅이 바싹 마르기 때문에,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물가, 곧 마르지 않는 냇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냇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더 나아가 관개수로를 생각하게 한다. 냇가는 비가 안 오면 마를 수 있지만, 수로는 대개 끊이지 않는 수원지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무의 성장이 확실히 보장되는 곳이다.

 

     의인은 이러한 나무와 같이 하느님의 가르치심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양분을 섭취하여 성장하고 제때에 열매를 맺어간다. 이것은 단순히 열매를 맺는다거나, 자신을 위해서 결실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곧 공동체룰 위해서 자기에게 요구된 때에 자기의 결심을 내놓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구약성서에서 의인을 나무에 비유한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시편 92, 13-15; 예레 17, 7-8).

 

4절 1행: 악인의 소개

 

     의인을 소개하고 그의 운명을 묘사한 다음, 이제 4절 1행에서 시편은 의인에 반대되는 악인을 내세운다. 이 소개는 단 한 마디 “그렇지 않다”라는 말로 이루어진다. 이로써 악인의 운명이 의인의 그것과 정반대임을 이미 시사하고 있다.

 

4절 2행- 5절: 악인의 운명

 

     시편 1은 의인을 나무에 비유하고 악인을 겨에 비유한다(4절 2행). 여기에서는 까부를 필요도 없이 바람만 불면 흩어져 사라져버리는 겨를 연상하면 된다. 겨는 나무와 그 열매와는 반대로 본디 쓸모없는 존재다. 또한 몸속으로 들어간다든지 하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주지해야 할 사실은 바람은 단순한 기상 조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5절 6절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결국 일으키시는 바람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바람이 흩어버리는 겨’와 ‘냇가에 심어진 나무’는 시편 1의 중심을 이루는 비유들로서, 이들은 여러 가지 서로 상반되는 연상들을 불러일으킨다. 곧 나무는 꿋꿋함, 지속, 번영, 풍성, 유용, 감싸줌, 생명,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데 반해, 겨는 흩날림, 무상, 멸망, 허무/공허, 무용, 귀찮음, 죽음, 비존재를 등을 연상하게 한다.

 

이미 4절의 바람과 겨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예고된 바 있다. 이제 5절에서는 이에 대해서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어떠한 심판이냐가 문제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최종적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서 의인들의 공동체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만, 악인들은 심판 때 감히 머리를 들 수 없을뿐더러, 의인들의 모임에 끼지도 못하게 된다.

 

6절: 하느님의 섭리

 

6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써 지금까지 말해진 것들의 이유와 근거를 대고 있다. ‘주님께서 아시다.’는 단순히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동반하고 보살핌을 뜻한다. 이런 의미의 앎으로써의 의인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진다.

 

     의인의 길은 하느님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반면, 악인의 길은 하느님의 어떠한 개입도 없이 저절로 멸망한다. 곧 악인들의 길은 그 길 자체가 멸망인 것이다.

 

3. 전체적 고찰

 

시편 1은 두 길, 곧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제시하며, 이 두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결정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이 선택과 결정은 동등한, 또는 거의 같은 가치를 지닌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의인의 길에는 목표가 있다. 그것은 생명, 곧 하느님과의 생명 공동체이다. 이에 반해 악인의 길은 겨와 같이 날려서 없어지는 길이다. 6절에 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바대로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의인의 길이 존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인 반면에 악인의 길은 무(無), 비존재,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악인의 길은 목표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택하느냐, 아니면 무를 택하느냐에서 선택과 결정의 대상은 결국 의인의 길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시편 1은 시편집의 서론 또는 입문과 같다고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금 언급된 결선택과 결정이 시편집을 읽고 노래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전제 조건, 성서를 대하는 사람의 전제 조건, 그래서 결국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시편 1과 논조가 이른바 단순논리 또는 흑백논리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물론 심리학 또는 인간학 등이 발달하지 않은 그 옛날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단순하게 고찰했음도 사실이다. 또 자혜 문학이나 시편 1과 같이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시편에서 인간들을 간단하게 의인과 악인으로 나눔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시편 1과 같은 말의 근저에는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탕까지 이르는 철저함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을 말하기 때문이다(시편 109참조). 하느님 앞에서 인간들은 결국 구분되기 마련이다. 그분 앞에서 인간에게는 철저한 결단, 자기 존재의 뿌리에서부터의 결단이 요구된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자세,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는 용납될 수 없다. 철저한 결단, 그리고 최종적 결단을 내려야한다.

 

나오면서

 

   시편 1편은 한 의인과 여려 명의 악인의 대결 구조를 통해 ‘참된 의인’이란 어떤 사람이며,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가르쳐준다. 인간이 율법에 어떻게 응답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참되 의인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시편집이라면, 시편 1편은 전체 구조 안에 첫 번째 시편일 뿐 아니라 150편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어떤 사람이 참된 의인인지 가르쳐주며, 둘째 부분, 의인과 악인의 본질을 가각 ‘시들지 않는 나무’와 ‘바람에 흩날리는 겨’의 이미지를 통해서 알려주고, 마지막 부분은 악인과 악인의 최종운명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을 비교해 보고 의인만이 누리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말하는 현세적이고 감각적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신앙적 토대를 세워야 한다.

 

    성경 저자는 신앙인을 주님이 가르침을 낙으로 삶고 밤낮으로 묵상하는 의인이라고 규정하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삶이 신앙인에게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다. 이것을 인생 목표로 설정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인)은 주님께서 하늘에 마련해 두신 축복에 모든 희망을 두고(콜로 1,5), 말씀을 실천하는데 방해가 되는 온갖 역경을 인내해야 한다. 그러한 모습이 다른 이들 눈에는 못나고 고통스럽게 보일지라도, 신앙인은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삶이며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삶임을 알기에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감사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이에 대해 바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사실 “장차 우리에게 제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그러므로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바오로 사도가 제시하는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소망하고 실천해야 하는 삶, ‘하는 일이 잘되는 , 성공한 의인의 삶’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의 계명만이 삶의 참된 원리며 주님만이 구원의 원천이라는 말을 수 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귀로 듣고 잊어버리는 신앙인이 많다. 그만큼 세속적 행복과 성공을 더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과 성공은 얼마안 가서 사라지는, 참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면 즉시 그만두고, 참된 행복과 성공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삼는 신앙인이 되자.

 

 

 

 

 

※ 참고문헌: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202-210.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딸, 2007, P.101--10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31.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8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