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8: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인간의 존엄성

마리아 아나빔 2011. 7. 12. 09:17

 

 

                                                                   시편 8: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인간의 존엄성

 

들어가면서

 

    시편 8편은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찬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찾고 감사하는 찬양의 노래이다. 특히 이 시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인간에 대한 물음’(8,5)은 인간을 창조물의 으뜸으로 삼으시고 존엄성과 위대함을 부여해 주신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 이 시편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8, 2ㄴ-4)는 하늘과 땅에 드러난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찬미이며, 후반부(8,5-9)는 인간을 창조물의 으뜸으로 삼으신 하느님에 대한 찬미이다. 본문의 시작( 8,2ㄱ)과 끝(8,10)에는 하느님 이름의 존엄함을 찬미하는 후렴구가 있으며, 8,1은 머리말이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엄성과 위대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정체성과 사명을 알고 그것을 삶에서 구현해야 한다.

 

 

Text 안에서

 

머리말(8,1)

 

   지휘자에게 이 시편을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두 가지 지시어와 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시편”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미즈모르(רומןמ)’는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 라는 뜻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악기를, 어떻게 연주하며 노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기팃에 맞추어”하는 표현이 있지만 기팃이 악기 이름인지 어떤 가락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기팃이 ‘가트’라는 도시에서 사용하던 악기라는 의견도 있고, 포도 수확 때나 올리브기름을 짤 때 부르던 노래 또는 노랫가락이라는 주장도 있다.

 

후렴구(8,2ㄱ/10)

 

    시편 8을 읽거나 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거나 귀에 들어오는 것은 2절과 10절이다. 이는 첫 머리와 끝에 반복되는 하나의 후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시편의 구조적 특성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시작과 마침에 반복되는 내용이 시편의 틀 또는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전체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테두리이며, 따라서 2절과 10절의 내용이 시편 8전체를 규정짓는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며, 테두리요 배경인 이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주님, 그분의 이름, 그리고 이 이름에 대한 시편 기도자들의 감탄이다. “주(야훼) 저희의 주님”이라는 칭호는 임금(주인)인 동시에 지배자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소유)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온 땅에”라는 표현이 주님의 지배영역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전체를 뜻한다면, “저희(우리)의”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보다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보편적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편8의 주관심사가 인간이라는 점은 본문의 일독으로도 뚜렷하다. 인간에 대한 고찰과 묵상의 출발점과 종착점, 그 테두리와 배경이 야훼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전우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편 작가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낀다. “주 저의 하느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라는 표현은 창조주 야훼의 권능과 업적이 창조된 세상과 모든 인간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뜻이다. “당신 이름”이라는 표현은 “하느님 당신”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의 계시와 현존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름은 근본적으로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을 가진 사람의 본질을 앎과 통한다. 본질을 알면 조종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다.(창세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줌)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지배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을 계시함으로써 당신의 본질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신다. 더 나아가 인간에게 당신에 대한 일종의 ‘이용권’을 주신다. 이는 하나의 지배권과도 같은 것이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부를 내어주신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은, 예컨대 기도에서 일종의 담보나 보증과 같이 작용한다. “당신의 이름 때문에, 주님/ 저의 죄 크오니 용서해주소서”(시편 25,11) 여기서 ‘이름’이라는 용어가 하느님을 가리키는 칭호처럼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찬미합니다.”라는 표현은 “하느님, 당신을 찬미합니다.”라는 뜻이다. “존엄하십니까!”라는 말을 직역하면 “크십니까!”이다. 이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인간의 생각과 헤아림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것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런데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옵니까!”에서 ‘이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이름은 그분의 본질을 나타내고 그분을 대표하지만 그분 자신은 아니다. 일종의 거리가 있다. 이로써 우리는 여기서 ‘계시된 하느님과 감추인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하게 된다.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보이시는 하느님,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감춰진 존재로밖에 인식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았다고 한 그 순간 하느님은 절대적 타인으로 저 멀리 떨어져 계시며, 또는 감추어 계신 분으로 드러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인식에 있어서 어떤 교만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게 구약성서의 저변에 깔린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시편작가는 이러한 하느님과의 거리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존엄하고 장엄한 현존을 느낀다. “이 세상은 하느님 영광의 무대다”라는 말이 있다. 바로 우리 시편의 말씀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시편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인간이고 이 인간의 영역은 땅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역인 이 땅에 충만한 하느님의 현존을 시편작가는 처음과 끝에 부각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미(8, 2ㄴ-4)

 

    찬미의 배경이 땅에서 하늘과 전체로 바뀐다. “하늘 위에”(8,2ㄴ)는 천상에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8,3)를 직역하면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힘을 세우셨나이다. 당신의 적대자들 때문에, 적들과 대항하는 자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이다. 아기와 젖먹이는 엄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 저자는 이러한 아기와 젖먹이처럼 인간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하느님 앞에서 아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입으로부터 힘을 세우셨나이다.”라는 표현은 해석하기가 어렵다. 칠십인역은 ‘힘’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오즈(ןע)’를 ‘찬양’ 또는 ‘찬미’라는 뜻을 지닌 ‘아니노스(αίνος)’로 옮겼고, 불가타도 같은 뜻을 지닌 “라우스(laus)'로 옮겼다. 고대 번역본의 해석을 보면 아기와 젖먹이의입에서 나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권능, 주권, 위엄에 대한 찬양이며, 그러한 찬양이 하느님께 대항하는 자들을 멈추게 하는 힘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적대자들’은 누구인가? 이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인간을 상징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우주 권능에 저항하는 신화적 성격의 적들, 곧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우주적 혼돈 상태를 의인화한 것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8,3은 아기와 젖먹이의 마음을 지닌 의인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할 때 그분을 거스르는 원수는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자신이 지천함을 깨닫고 입을 다물게 된다는 뜻이다. 곧 의인의 찬미는 하느님의 절대적 창조 권능과 완벽한 창조를 찬양하는 것이며, 이러한 찬양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신화적 세력이나 혼돈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증언하는 힘이라는 의미이다.

계속해서 저자는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하늘과 전체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하느님의 권능과 신비하심을 찬양한다(8,4). “손가락의 작품들”(8,4ㄴ)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장인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하느님의 세상 창조가 그분의 세심한 배려와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 아기들의 찬미와 하느님의 적들(3)

 

    3절의 분위기는 2절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 이유는 첫째 하느님의 적, 곧 하느님께 대항하고 항거하는 자들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우선 시편 8절 창세기 1-2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점들 중의 하나가,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혼자서, 누구의 도움도 반대도 없이 창조하시는데 반해 시편 8에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반대 세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력은 구체적으로, 첫째는 이스라엘 주변 문화권에 널리펴져 있었던 우주 생성에 관한 신화의 잔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서 이 하느님의 적들을 그분의 창조 질서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면서 나타내신 뜻에 대항하고 이를 거역하는 세력이다. 조질서는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세계도 포함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창조 섭리에 반대하고 거역하는 세력은 신화적인 세계관이나 고대 세계관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도 존재하고 있으며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어떤 비인격체들이 아니라, 바로 나나 너 같은 사람들을 매체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에 대한 대항자로서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등장한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력과 이에 맞선 젖먹이 아기들, 어처구니없는 대적관계다. ‘하느님의 적들’하면 곧 바로 힘, 거대함, 영리, 교활 등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젖먹이들, 그러니까 두세 살 미만의 아기들에게서는 그 반대되는 연상만이 가능하다(마태오 21, 14-16). 이러한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무엇으로 하느님께서는 “요새”를 만드신다고 3절은 말한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입으로 나오는 것이란 ‘찬미’이다.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찬미, 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아기들과 젖먹이들은 단순하고 순진하다. 그래서 순수한 경탄이 가능하다. 둘째, 이들은 말을 잘못한다. 표현을 잘 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이 추론된다. 첫째,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만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는 점과 둘째, 이 찬미는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찬미의 노래로 창조 섭리와 창조 질서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전멸시키신다. 그렇다면,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나의 가능성은 바로 시편작가를 위시해서 이 시편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시편 작가는 온 세상, 하늘, 온 우주를 대하고 서 있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이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마주 대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 무기력, 무지를 느끼며 감탄과 이에 따른 찬미를 하긴 하지만, 더듬거리는 유아적 찬미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는 젖먹이 아기와 같을 수밖에 없음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선 전혀 힘이 없는 것으로,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바로 더듬거릴 수밖에 없는 아기의 찬미로 당신의 적들을 멸망시키는 것이다.(마태 18, 3-4).

 

- 대자연과 하느님의 손길(4절)

 

    4절은 밤하늘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시편 8이 저녁에 거행된 전례에서 불렀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편 8이 말하는 하늘을 꼭 밤하늘에만 한정시킬 당위성은 없다고 본다. 다만 밤하늘이 우선 바라보기에 더 쉽고, 사람에게 쉽게 친근감을 준다. 물론 이런 밤하늘도 우리는, 특히 도시인들은 먼지 낀 막 같은 것을 통해서 보고 있다. 인공적인 빛과 먼지로 하늘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편작가가 보고 감탄했을 근동의 밤하늘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이러한 물론 낮 하늘을 포함한 하늘의 전체들을 시편작가는 하느님의 손가락이 빚어낸 것으로 본다. 마치 예술가가 정성을 다하여 작품을 빚어 내듯이 그는 창조물에서 예술가 하느님을 본다.(태양에 대해서는 시편 19, 1-9). 시편 8의 작가에게는 자연과 하늘, 곧 예술가이신 하느님의 작품이 인간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묵상의 출발점이다.

 

 

인간에게 존귀함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찬미(8, 5-9)

 

   저자는 하느님의 창조 작품 중 하나인 인간에 대해 숙고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초월성과 권능을 찬미하기 위해 사용된 의문사 ‘마(המ: 8, 2,10)’는 인간과 관련해서도 사용되었다(8,5). 이 의문사는 본래 ‘무엇?’이라는 뜻을 지녔지만 이 시편에서는 형언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상태, 곧 놀라움과 장엄함과 압도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감탄사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묵상을 통해 얻은 인간 존재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하나의 물음 형태로 표현하기 위해 의문사 ‘마’를 사용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물음 형식으로 번역된 8,5을 직역하면 “사람이 무엇입니까? 이처럼 그를 기억해주시니, 사람의 아들이 무엇입니까? 이처럼 그를 찾아주시니.” 여기서 “사람”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에누쉬(שׁונא)’는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 곧 나약하고 한계성을 지닌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벤 아담(םדאןב)’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피조물인 인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8,5에는, 인간이 비록 나약하고 한계 있는 존재이지만 절대 권능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존재이며, 많은 창조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하느님께서 보살피기 위해 찾아주시는 존재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이처럼 유독 인간만을 기억하고 보살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묵상을 통해 얻은 해답을 8,6-9에 들려준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다른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된 이유가 8,6에 나온다. “신들보다 조그만 못하게 만드시고”(8,6)를 직역하면 “그(인간)를 하느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이다. 여기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표현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칭호 “엘로힘”이다. 엘로힘은 본래 ‘신들’이라는 뜻을 지닌 복수 명사이지만 유대인들은 야훼를 가리키는 단수 칭호로 사용했다. 그런데 칠십인역은 이 용어를 하느님이 아닌 천상 존재들을 가리키는 복수 명사로 해석하여, ‘메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천사들보다’라고 옮겼다. 인간을 하느님과 비교하는 것이 불경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말 성경은 천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신들(천상 존재들) 보다”라고 옮겼다. 하지만 이 구절이 창세기 1, 26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면 ‘천사들’ 또는 ‘신들’이라고 옮기지 말고 ‘하느님’이라고 옮기는 것이 옮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하느님을 지상에 형상화한 피조물)대로 창조되었지만 하느님과 똑같은 존재가 아닌 ‘닮은 꼴’(하느님의 모상이지만 그분보다 못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인간 존재만이 지니는 본질적 특징이며,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보증해 주는 토대이기도 하다. 참고로 히브리서 저자는 8,5-6을 인간이 되어 죽음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 말씀으로 이해하였다(히브 2, 6-9).

 

    하느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만들어진 인간은 그분의 지상 대리자(8,6)로서 창조 세계를 다스릴 지배권(왕권)을 받았다(8,7).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양 떼와 소 떼”는 모든 집짐승을, “들짐승들”은 모든 들짐승들을 가리킨다(8.8). 땅 위의 모든 짐승뿐 아니라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8,9)도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대상이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8,9)은 바다 깊은 곳에 사는 신비하고 두려운 세력을 가리킨다. 사실 바다는 고대 유대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바다 깊은 곳에는 악한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세력까지도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인간의 왕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 “사람이 무엇이옵니까?”(5절)

 

    5절의 질문과 감탄으로 시편 8은 그 절정에 도달한다. 대자연에 대한 묵상은 결국 그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인 인간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인간이 비록 대자연 앞에서 왜소하고 보잘것없지만 그 자연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주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바로 자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을 돌아봄은 동시에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된 질문이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지속될 물음이다. 인간의 모든 지적인 노력이 결국 이 한 마디 질문에 귀착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당면하게 되는 인생의 여러 질문 중 가장 근본적이며, 인간에게 답과 결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본질상 묻는 존재, 질문자다. “사람이 무엇이옵니까? 당신께서 그토록 기억해 주시다니!” 이 질문은 ‘너’라는 존재에게 드리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너는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나와 동등한 입장에서 나와 같이 질문을 던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대자연을 당신의 뜻에 따라, 각자에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창조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너’에게 드리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국 ‘너’로부터 주어진다. 종국에 가서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신비에 대한 감탄이다. 이 신비의 근원, 이 인간이라는 신비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탄인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일반적인 인간을 지칭한다.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말 ‘에누쉬(שׁונא)’는 나약하고 덧없는, 죽어야하는 유한한 인간이다. 인간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아담’이다. 이 단어 역시 그 어원은 땅, 흙의 뜻을 가진 단어 ‘아다마’와 관계있다. 창세기는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창세 3,19).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 이 세상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인간은 바로 이러한 인간이다. 나약하고, 흙으로 빚어져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덧없는 인간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기억해주시고 돌보아 주신다. 기억해준다는 것은 ‘생각해 주다’이다. 이는 단순히 사고해달라는 청이 아니다. 청하는 사람을 위한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히브리말에서는 돌보아줄 대상에게 몸을 굽히고 다가와서 그 대상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뜻을 지닌다. 전우주의 창조주- 주인께서 덧없는 존재인 먼지와 같은 인간을 생각해주시고 돌보아 주신다. 무한히 크신 존재께서 무한히 작은 존재를 생각해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위대함이 있다. 이 위대함으로 인해서 인간 역시 위대해지는 것이다.

 

- 위대한 인간(6절)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생각해주심’으로써 여타의 피조물과는 차원적인 차이를 지니게 된다. 피조물이면서도 다른 피조물과 같은 차원에 속하기보다 차라리 신적인 차원에 더 가깝다. 먼지 같으면서도 신(神)같은 인간, 이 수수께끼 같은 신비의 인간은 특수한 인간이 아니다. 임금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다. 양반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다. 고위층도, 집권층도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모든 사람이며 동시에 각 사람이다. 어떠한 구분이나 차별도 없는 모든 그리고 각 인간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시편이 2천 수백 년 전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2천 수백 년 전에, 현재 20세기에도 이상적 실현과는 요원하게 보이는 놀라운 만민평등사상과 민주주의사상을 말하고 있다. 인류가 원시적 생활을 벗어나면서부터 인간 사회에는 사회 계층이 있어왔다. 사회의 발전은 계층의 발달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시편 8은 모든 사람을 왕적인, 더 나아가 신적인 지위로 들어 올린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광과 존귀”는 임금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이들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사실 “영광과 존귀”는 하느님의 것이다. 이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마치 임금에게 왕관을 씌워주시듯, 당신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신다. 관을 씌워주셨다 함은 지배권을 부여하셨다는 말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물의 지배자로 등극시키신 것이다.

 

- 만물의 지배자 인간(7-9절)

 

    신적인 영광의 관이 씌워진 통치자인 인간의 지배를 받는 대상들이 이제 7-9절에 열거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주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또는 물이다. 시편은 우선 땅의 동물을 두 부류로 나뉜다. 양떼와 소떼, 곧 가축과 그 밖의 모든 들짐승들이다. 여기에 하늘의 새들이 더해지고, 끝으로 바다, 물의 동물들이 인간의 지배 하에 드는 것으로 나열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지배권 또는 지배 영역의 제한 내지 한계를 본다. 첫째, 원 의미의 ‘하늘’은 인간의 지배 영역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하늘은 본디 하느님의 고유 영역으로 생각되었다. 인간이 오을 수도, 근접할 수도 없는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우주선과 로켓이 개발된 20세기 후반기에 와서 비로소 가능해진 사실이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래서 시편 8의 작가 역시 천체들이 인간의 지배 영역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질문을 던짐이 없이, 그 질문 자체가 그에게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단순히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바라보았다. 고대인들은 예외 없이 천체들을 신 또는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일 따름이었다.

 

    4절에 달과 별들은 하느님의 손가락의 작품들도 표현되어 있다. 8-9절에 나열된 인간의 지배권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7절에 의해서 하느님의 손의 작품들로 불리운다. “손가락의 작품들- 손의 작품들” 손가락과 손은 동일하다. 이로써 해를 포함한 달과 별들이, 인간이 지배하도록 인간의 발아래 두어진 여타의 피조물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또한 아무런 차원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지배권 또는 지배 영역의 두 번째 제한과 한계가 있다. 인간이 인간 발아래 놓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민족과 국가들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한다든가. 다른 사람들 위에 서서 다스리는 데에 있지 않다.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나이다” -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인간의 발아래 두지는 않으셨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아무렇게나 다스려도 괜찮은 것인가?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라는 말은 인간이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이해에 따라 다스릴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즉 관리자이다. 결국 항상 하느님께 대한 책임 밑에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수행한다는 뜻이다.

 

후렴구(10절)

 

후렴구 8,2ㄱ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묵상을 결론짓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시편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동일한 후렴구는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만이 찬미의 시작이며 마침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오면서

 

    우리는 여기에서 냉철한 눈으로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과 현실의 인간을 대비시켜 보아야 한다.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상이 과연 나와 너라는 인간 현실, 우리로 표상되는 인간상과 부합하는지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나 너가, 또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과연 신들에 비해서 조금만 못하게 만들어졌는지? 더러운 누더기로 몸을 감싸고 구걸하는 사람에게서, 술에 취해 고성방가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찾아 볼 수 있는지? 또는 자연의 지배자로서 그 위엄을 찾아 볼 수 있는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서, 자신의 조그만 이익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서 쩔쩔매고 있는 자신을, 과연 저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과 차원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 존래로 인식할 수 있는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솔직히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편 8은 과연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 허황된 꿈속에서 불려진 노래인가? 한마디로 시편 8은 하느님의 창조 섭리, 그분께서 본디 원하신 바를 노래한다. 그래서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은 원초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원초적 인간, 완전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본디 당신께서 원하신 완전한 인간상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세계로 보내신 것이다. 인간 세계 밖에서 인간을 그쪽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어 다른 인간들을 자기와 함께 끌어올리는 것이다.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시편 8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비롯한 다른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시편이 노래하는 인간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달은 막연히 장차 언젠가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으로 이미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원조며 우두머리시다. 이로써 여타의 모든 인간들도 어떠한 구별이나 차별이 없이 인간이라는 근본 연대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연관관계가 성립된다. 바로 이 연대성으로 인간이라면 모두 시편 8이 노래하는 그 인간상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그 인간상을 우리 자신에게서 아직 완전히 실현시키지 못했음에 대해선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연대성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지금 설사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동지로 만든다. 모든 인간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충분히 자각할 때, 우리는 형편없는 거지에게서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한 인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나약한 어린아이에게서, 병들어 쓰러진 환자에게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이미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동물보다도 한 사람에게서도 동물과는 차원적인 차이를, 적어도 그 씨앗을 볼 수 있다. 아울러서 더럽고 죄악스럽게 보이는 나에게서, 너에게서,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께서 바로 이런 나와 너를, 우리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목숨까지 바치셨다는 신비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충분히 자각할 때 우리는 남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또 완전한 사람, 그리스도의 영광과 광채가 자기네의 성인들 얼굴에 반영된 것을 바라본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스스로 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사목헌장 41).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고 인도되고 있는 교회는 자신을 위하여 그 완전함을 찾아 구한다. 이리하여 인류의 역사의 종말의 완전함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그분의 사랑의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사목헌장 45)

 

    이 신앙에서 출발한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인간이 활동에 의하여 이 시에 노래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 성인들로 말미암아 실현된 위대함과 완전함을 실현하는 데 돕는 단 하나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

“ 교회는 성서와 함께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현대 사목헌장 12)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인간 활동의 의미와 가치가 생긴다.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 인간을 향한다. 인간이 활동을 통하여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기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신을 초월한다. 이 같은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외적 재산의 축적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 활동의 규범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목 헌장 35)

 

 

 

※ 참고문헌: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282-298.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딸, 2007, P.109--119.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42-43.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11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