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23(22):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신뢰의 노래

마리아 아나빔 2011. 9. 6. 21:03

 

 

 

                        시편 23(22):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신뢰의 노래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소박한 동시에 따뜻하고 사랑 깊은, 신뢰가 가득 차 있는 신뢰 찬미가이고 신뢰시편이다. 이 두 가지 그림에서 시편작가는 자신의 하느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는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기르시고, 푸른 목장에서 쉬게 하시고, 고요한 물가에 함께 가시어 정의의 길을 인도하시고 자신을 지키고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한다(1-4).

 

    둘째 그림은 하느님께서는 깊은 사랑으로 맞아 주시는데, 적으로부터 온 박해에 대하여 위로하기 위해 호화로운 식사를 마련하시고,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당신 집에서 몸소 대접해주시고 귀중한 포도주로 즐겁게 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시편저자의 생활을 사랑과 자비로 채우신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이 은혜를 항상 즐길 수 있도록 왕의 성전에 있기를 갈망한다(5-6).

 

    이 시편은 성서에서 몹시 중요하게 보고 있는 목자와 손님이라고 하는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하느님 편에서 오는 자비와 사랑과 작가의 신뢰와 밝은 위탁을 노래한다. 그러나 저자의 개인의 기분을 넘어서 이 시를 전례행사 때에 노래하고 하느님을 항상 목자(창세 49,24; 시편 80,2; 이사야 40,11; 에제키엘 34장) 로서, 또 사랑 깊은 손님으로서 품어온 이스라엘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이시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Text 안으로

 

시편 23은 목자와 양의 관계, 나그네와 그를 환대하는 주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노래한다. 일부에서는 바빌로니아 유배를 배경으로 귀환과 재건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참목자이시며 왕이신 하느님을 예배하는 전례에서 하느님과의 통교에 감사하고 그 기쁨을 표현하는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 시편의 첫째 부분은 참된 목자처럼 당신 백성을 이끌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구원섭리에 감사하는 노래이며, 둘째부분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주인처럼 언제나 당신 백성을 넘치는 사랑으로 돌보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노래이다.

 

목자이신 하느님(23, 1ㄴ-4)

   저자는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묘사한다.  고대 근동에는 이 표현을 많이 사용했는데, 특히 유목민 출신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떼'의 이미지를 통해 더욱 쉽게 이해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구원 역사 안에서 자신들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개입 행동을 가리키기 위해서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목자는 양떼에게 주인인 동시에 그들을 보호하는 삶의 동반자이다. 참된 목자는 주인이면서도 양떼를 위해 희생을 자처하며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주님이 바로 그러한 복자와 같은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기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라고 노래한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이 저자에게는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른 풀밭은 '연하고 싱싱한 풀'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로 마음을 끌리게 하는 장소나 상황을 가리킨다. 또한 시간적 한계에 관계없이 활력잇고 생생한 생명력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저자를 활력이 넘치는 생명력을 지니도록 보살피고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잔잔한 물가'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메누훗'은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휴식이나 쉼의 자리를 제공하는 '물' 또는 '샘'을 가리키는 '메누하'의 복수이다.  '메누하'는 특히 따뜻하고 안락한 안식처나 휴식처 또는 그러한 가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라는 표현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은 영혼의 생기를 돋우어 주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이며, 그러한 주님과의 관계를 가족관계처럼 느낀다는 고백이다.

 

"바른 길"이란 윤리적 의미를 올바른 길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서 걸어야 할 올바른 삶의 길을 가리킨다. " 어둠의 골짜기"와 "재앙"은 인생 여정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역경과 고난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 역경과 고난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과 그분께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면 전혀 '두려움 없이' 바른 길을 걸 을 수 있다.

 

"막대와 지팡이"는 목자의 필수품이다. 막대는 가축이 다른 길로 가지 못하게 회초리질을 하거나 경고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지팡이를 두드리는 데 필요하다. 지팡이는 목자가 적을 퇴치하거나 덤불을 헤쳐 길을 가는데 긴요하게 쓰인다. 두 가지 모두 양떼에게 안전과 확신, 목자의 현존을 상징하는 필수품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느님께서도 백성을 이끄시기 위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을 활용하셨다. 이스라엘은 바록 하느님을 직접 뵈올 수없거나 그분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그러한 상징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손님을 맞는 주인이신 하느님(23, 5-6)

  저자는  주님을 자신의 천막에서 손님을 맞는 주인처럼 묘사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와 신뢰의 찬양 노래를 부른다. 유목민에게 나그네를 환대하고 보호하는 것은 명예가 달린 덕행이었다. 나그네를 맞는 주인은 그 손님이 요구한다면 길레는 사흘도안 환대할 의무가 있었으며, 그가 떠날 때에도  어느 정도 그 영정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 주인의 환대 의무는 나그네가 죄를 지은 도망자일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자는 이러한 유목민의 관습을 주님가 자신의 관계로 묘사한다.

 

  "상"은  히브리어 '슐한'으로 음식이나 다른 무언가를 올려놓을 수 있는 식탁이나 밥상 또는 책상을 말한다. 저자는 주님께서 이러한 식탁을 원수가 보는 앞에서 차려주셨다고 말함으로써 주님과 자신의 특별한 관계,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배려를 강조한다. 게다가 주인이신 주님께서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셨다"고 말한다. '향유'는 잔치의 풍성함을 더해주는 요소이며, 손님에게 향유를 발라주는 행위는 손님에 대한 주인의 융숭한 환대와 축제의 기쁨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행위는 주인에게 손님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곧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암시한다.

 

  주인의 환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저자의 잔을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술잔을 가득 채우는 행위'는 귀한 손님을 맞이했다는 표시이며, 손님에게 머무르는 동안 풍요롭게 지내라는 초대이다. 또한 '술잔'은 친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자는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관대함과 배려가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 주인의 환대는 손님이 천막에서 머무는 동안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주인은 손님이 천막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해도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호의'는 '복과 사랑' 또는 '선하심과 인자하심' 또는 '선과 신의'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저자의 삶을 그러한 두 버팀목을 통해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집"은 에루살렘 성전이나 주님의 천상 왕궁을 의미할 수도 있다. 긔고 "사오리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베샤브티'는 '돌아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일 수 있다. 주님의 집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면 성전 전례에서 체험하는 하느님과 하나 된 기쁨을 그분의 이끄심과 보호 아래 일상에서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또는 유배지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유배에서의 해방이 계속해서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언제나 주님의 보호와 은총 아래 해방된 삶을 살 것이라는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주님의 집이 천상왕궁을 가리킨다면, 저자의 최종목적지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머무는 그분의 천상 왕궁이며, 그분의 보호와 은총 아래 현재 그곳을 향해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러한 주님의 집은 주님과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에서 단순한 동거가 아니라 사랑의 유대관계로 맺어진 일원으로 산다는 뜻을 지닌다.

 

  반면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에서 처럼 "아쉬울 것 없어라"는 표현은 '부족함이 없어라'로 옮길 수 있는데 이는 참된 목자와 함께하며 그를 따르는 양떼에게 모든 것이 풍성하게 마련돤다는 것을 뜻하지만 은 않는다. 왜냐하면 참된 목자를 따르는 삶은 온갖 위험에서 벗어난 삶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굶주림과 목마름을 겪을 수 도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주님께서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둘러싸 주변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목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빼앗을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반드시 당신께서 바라시는 목적지로 양떼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저자가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현존과 이끄심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영혼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음을 느낄 수있다.

 

1)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목자며 손님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온갖 이해를 넘은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사람을 맞이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인류라고 하는, 길에서 헤매는 양을 찾으러 오셨다(루가 15, 4-6). 그리스도야말로 양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그것을 다 알고 계신 착한 목자이시다(요한 10, 14-15).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을 자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좋은 목초를 가지고 기르시고, 그 양들을 세례라고 하는 평안한 물가에 이끄시고, 그리고 자신에게서 솟아나오는 영의 산물을 가지고 힘을 새롭게 하신다.(2-3; 요한 7,37-39).

 

주님의 양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호와 안식을 얻고, 모든 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세상의 나그네길이라고 할 음산한 골짜기를 지나서 정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3-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신자와 함께 계신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에 사시고, 그리고 생명과 성덕의 당신 계명을 가지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신다(2).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벗들에게 식사를 마련하시고(잠언 9,1-5) 가난한 자, 시달린 사람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신다(루가 14,16-23).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빵이신 당신 몸을 주시고, 마음에 하늘의 기쁨을 주는 신약과 구원의 잔(루가 22,19-20)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시어 당신 제자들을 축성하시고, 세상 끝까지 그들과 함께 사신다(마태 28,20).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맺어놓고, 그리고 우리들 위에 보호의 날개를 펴신다(6).

 

세례와 견진과 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고, 그것으로써 우리를 당신 나라의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하기 위하여 영원의 목장과 잔치에로 이끌어 주신다. 우리의 거처는 주님의 집이 되리라.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언젠가 돌아오시어 우리를 데리고 그분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해주시기 때문이다(6; 요한 14,3).

 

 

2) 교회는 그리스도의 양떼이다. 이 양떼는 그분의 제물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되고, 세례의 물에 의하여 깨끗해지고, 하늘의 빵과 포도주로 자라고, 성령의 기름으로 강화되는 것이다.

 

교회는 또 하느님의 가족이어서 하느님께 의해 그 식탁 주위에 소집되고, 적에 대하여 강화된다. 이 시편은 특히 세례 후와 성체예절 때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기도가 되었다. 교부들의 전통은 이 시에 풍성한 해석을 베풀고, 그리고 성사적 의미에서 세례와 견진과 성체의 전례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예언으로서 해석하였다.

 

옛날은 이 시편은 첫영성체를 받기 위하여 새로운 수세자가 성당에 가는 동안 부활의 밤에 노래하였던 것이다. 그 본문은 “주의 기도문” 및 “신경”과 같이 소중한 것으로 여겼고, 그리고 구도자에게 암송시켰다고 한다.

 

이 시편에 의한 전례는 이 세상의 길을 걷는 나그네를 타이르고, 받쳐준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신 주께서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모든 나그네의 지팡이이시며, 받침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걷고 있는 순례와 나그네는 영원한 나라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나그네의 상징이다. 이 시편에 표현되어 있는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는 죽음이라고 하는 어두움에 갇힌 골짜기를 지나서, 영원한 생명의 평안과 고요한 물가의 목장이, 영원한 쪽으로 건너갈 때, 신자의 동반자가 된다. 그것은 교회가, 참된 나라에로 통하는 길을 열으신 주님께서는 특히 이 때에 신자와 함께 계시고 그들의 멀고 먼 여행에 길동무가 되어 주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의 인도자인 동시에 종착지이시다.

 

영원한 생명에 있어서 이 시편의 예언적인 말씀이 온전히 완성될 것이리라. 사도요한은 자신의 영상에 의하여, 하느님께 뽑힌 자는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묵시록 7,16-17)라고 보증하고 있다.

 

3) 어떠한 신자도 이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 목자이시며 신적인 귀한 손님이시다. 주님께서는 각자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사람의 불운과 마음의 시련을 겪을 때 우리와 함께 계시고, 유혹에 대한 무기를 주시고, 그리고 당신 아버지의 은혜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다(4-5).

 

이 세상 나그네길은 온갖 위험으로 위협을 받고, 또 우리의 나약함과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불안한 것이 되지만, 그것에 대한 시편의 말씀은 우리에게 용기와 신념을 부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우리를 정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맞으러 오셨던 것이다(3). 우리의 입으로 시편의 말씀을 노래하고 있는 사이에 마음속 깊이 은총이 내리고,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노래하는 것이 실현된다.

 

님의 말씀은 우리를 확고하게 맺어놓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우리의 생활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께 대하여 믿고 있는 그 근원이 되신다. 이 기도는 세례의 물과 성체의 빵과 같이 귀중한 것이다.

 

 

※ 참고문헌: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72.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197-200.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딸, 2007, p. 12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