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22(21) : 개인 탄원시편

마리아 아나빔 2011. 8. 12. 19:24

 

 

 

                                         시편 22(21) :개인 탄원시편

 

들어가면서

 

    시편 22는 개인 탄원의 기도를 담은 시편이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자신에 대해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확히 기도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속한 일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어떤 구체적인 개인의 정체를 끄집어내기에는 부족하다.

 

어째든 시편작가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함께 당하고 있다. 그것이 육체적 고통이 먼저인지 정신적 고통이 먼저인지 선명하게 구분할 수도 없다. 인간은 결국 하나이다. 더구나다 구약성서는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원론적 인간학을 알지 못한다. 아무튼 기도자가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곧 원초적 고통을 원초적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어떤 특정한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뿌리,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 보인다. 이 고통의 심연을 어떤 특정한 언어로써가 아니라 근본적인 언어로써, 결국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의 것이 될 수 있는 언어로써 표현한 것이다. 사실상 이 시편은 한 개인의 기도로서 끝나지 않는다. 이 시편은 그 역사를 통해, 이미 구약성서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 고통의 밑바닥에는 더욱더 견디기 힘든 신앙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인간을 저버리신 하느님, 멀리 떠나버리신 하느님, 멀리 계신 하느님, 대답이 없는 하느님으로 인한 고통이다. 이것이 기도자의 그 큰 고통의 뿌리이다. 결국 모든 아픔의 근본이 여기에 있으며, 아울러 그 아픔을 낫게 하는 해결의 열쇠 또한 여기에 달려 있다.

 

     이 모든 고통은 23절에 와서 ‘아니타니’(“당신께선 저에게 대답해주셨나이다!”) 라는 하느님의 응답으로써 사라진다. 기도자의 그 처참했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라 마지막 숨을 내쉬던, 그 고통이 한 순간에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인간과는 그 본질상 엄청난 거리가 있는, 인간으로서는 한 치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는 분이시다. 그러며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안주하고 계신 분이신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멀리 계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또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응답인 인간의 찬양 위에 좌정하고 계시는 분이다. 곧 인간의 찬미 중에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멀리 계신 하느님과 가까이 계신 하느님은 두 하느님이 아니라 한분이신 것이다.

 

     시편 22의 기도자는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여러 차원들을 두루 경험한다. 절망의 나락, 원초적인 육체의 고통, 정신적 고통, 신앙의 고통, 그리고 인간이기를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벌레와 같은 현실로서 묘사되는 상황까지도 경험한다. 그러나 이제 찬미의 차원으로 옮아간다. 생명력으로 넘치는 찬미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차원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 이스라엘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개인 역사의 시작으로도 돌아간다. 그런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영원의 차원으로 전망을 넓힌다. 자기에게서 시작하여 후손들을 통해 끝없이 이어지는 찬미의 차원이다. 이는 자기 개인 또는 자기 씨족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비록 탄원하는 부분에서는 기도자의 외로운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만, 그는 항상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 중의 한 사람이다. 가난한 이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 하느님께 정당한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이스라엘의 전례 공동체 - 이들은 결국 하나로서 기도자를 중심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바친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차원을 벗어나서 온 세상, 모든 민족들, 모든 사람들이 우주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상하고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와 시편 작가와 함께 하느님께 마땅한 경배를 드리리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예수께서 시편 22의 2절을 인용하여 십자가 위에서 기도드렸다면, 이 사실에 근거하여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예수께서는 구약성서의 기도자들이 경험하여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는 언어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의 그 원초적 고통으로 들어가신다. 가장 원초적인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심으로써 그분께서는 모든 고통과 연대성을 이루신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께서 가장 밑바닥까지, 곧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차원,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벌레와 같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곳까지 가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편 22의 기도자보다 더 깊이 내려가신다. 기도자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랐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음을 넘어서서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신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인간 존재의 최저 차원까지도 당신의 연대성 안으로 끌어들이신다.

 

2)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이 시편의 기도자와 예수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이로써 시편 22를 가지고 예수의 수난을 서술하게 된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마태 27,46.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 큰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고 한다면, 그분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저버려진 절망 속에서 돌아가신 게 아닌가라는 질문은 이제 의미가 없다. 예수께서는 시편 22를 끝까지 기도하셨는지, 또는 하실 수 없었는지 역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음,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의 그 고통을 우리가 약화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가장 절망적인 상태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객관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듯이 보여 지는 죽음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나의 하느님’ 이시다.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신뢰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신뢰 위에 계신다. 이 신뢰로 인하여 절망이 절망이 아니고, 하느님의 멀리 계심이 멀리 계심이 아니며, 하느님의 저버리심이 저버리심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신뢰 속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고통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시편 22의 기도자가 경험하지 못했던 죽음의 심연까지 이르러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극심한 절망적 상황에 처했을 때 드리는 이 시편의 기도는, 바로 이렇게 돌아가신 예수와의 연대성 속에서 신뢰와 함께 드리는 것이 된다.

 

Text 안에서

 

마태오 복음 27장 46절에 있는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 말은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시편 22절의 1절 전반부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예수님께서 부르짖으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인용하신 구절이기에 시편 22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길게 32개의 절로 구성된 시편 22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2절에서 22절

까지의 탄원과 22절 3행에서 32절까지의 찬미가 그것이다. 그래서 한때 일부 학자들은 시편 22가 서로 독립된 두 개의 시편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신빙성은 별로 없다.

이 시편의 구조는 대략 아래와 같다.

 

2절 1행 하느님 -나(하느님께 버림받은 자신을 하소연)

2절 2행- 3 나 ---- 하느님

4-6 하느님 - 역사(-나)

7-9 하느님 - 나 - 사람들

나(의 역사) - 하느님

12 간청(원수에 대한 압박을 하소연)

13-14 원수 - 나

15-16 나

17-19 원수 - 나

20-22 간청

23 감사의 노래

 

    시편집에서 ‘나’라고 하면 이는 거의 항상 혼자 떨어진 개체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나’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이어서 27절은 찬미의 주체로서 “너희”를 부른다. 이 주체를 28절은 더욱 확대시킨다. 곧 온 세상과 만백성들의 찬양이다. 마침내 30절에는 모든 인간으로 확대된다. 더 나아가 나의 후손들까지 이르게 된다. 상당히 긴 시편 22의 전체적 흐름은 이러하다.

 

1> 탄원: 2-22절

 

일반적으로 ‘하느님’은 히브리말로 ‘엘로힘’이다. 그래서 나의 하느님은 ‘엘로하이’가 된다. 그러나 시편 22의 2절 1행에서 ‘하느님’은 그냥 ‘엘’이어서, ‘나의 하느님’은 ‘엘리’가 된다. 시편작가는 “엘리 엘리”하고 짧게, 그리고 반복해서 자기의 하느님을 부름으로써 이 긴 시편을 시작한다. 이는 시편집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현상이지만, “엘리 엘리”하고 절박하게 외치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이렇게 자기의 하느님을 반복해서 부름으로써 이미 시편 벽두에서부터 기도자와 기도의 대상, 곧 하느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고백되고 있다. 곧 나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또 구원을 베푸셔야하는 나의 하느님을 그러나 현재 그렇지 못한 관계를 하느님께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 “버리셨나이까?” 라는 질문은 이미 저버려진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 또는 보다 객관적으로 표현해서, ‘인간이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상태’는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상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이는 특히 예레미야 예언자,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고 많은 영성가들에게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과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표현 사이에 있는 기도자의 자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한탄, 원망과 그리움, 그리고 아픔과 외로움을 혼자서 가슴에 품고 버려진 기도자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기도자는 이해할 수 없이 멀리 떨어져 계신 하느님, 자기를 버리신 하느님께 ‘왜?’, ‘어찌하여?’를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작가는 그 이유를 도저히 알수 없지만, 버렸다고 생각하는 하느님을 향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향하여 서 있는 인간이며, 자기의 하느님께 이제 그 모든 것을 털어 놓는 기도자다.

 

- 2절 2-3행에서 기도자는 자기의 동일한 원망과 탄원의 자세를 세 번에 걸쳐 조금씩 달리 표현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인 “소리쳐 부르건만”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본디 짐승, 특히 사자의 ‘울부짖음’을 표현할 때 쓰인다. 버리고 떠나버린 하느님께 대한 울부짖음으로서, 극한적인 고통에서의 부르짖음을 사자와 포효에 비유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떠나가셨음은 인간에게 구원 역시 멀리 사라졌음과 비구원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에 공허와 절망에 빠진 기도자의 외침만이 대답 없이 메아리치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기도자는 ‘엘리’ 하며 다시 한번 하느님을 자기의 하느님으로 부른다. 기도자에게 비록 지금은 대답이 없어도 자기의 하느님께서 계신 것이다. 그러기에 절망적인 상태이지만 절망은 아니다. 이러한 상태는 밤낮으로 지속된다.

 

- 시편작가의 현재 상황은 그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결국은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 일이기도하다. 그래서 시편 22의 4절은 “그러나”로 시작하는 하느님께 대한 서술로써 절망적 상태에서 부르짖는 기도자와 대답 없는 하느님, 기도자의 고난과 하느님의 ‘무위’를 대립시킨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핵심적인 본질로서, 본디 구분됨, 섞일 수 없음을 뜻한다. 곧 거룩함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섞일 수 없고 건널 수 없는 구분을 말한다. 그러나 기도자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을 말한다. 하느님은 그 본질상 인간과 철저히 다르신 분으로서 인간에게서 떨어져 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시편 기도자는 비록 멀리 계신 분이시지만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인간에게 변함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상기한다. 바로 4절 2해애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고 계신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선 혼자 떨어져 계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여기서 “찬양”은 ‘알렐루야’, 곧 ‘너희는 야훼를 찬양들하여라.’ 의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의 복수다. 이 복수형으로 씌어진 ‘찬양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구원을 베푸시고, 이스라엘은 이에 찬양을 받을 하느님의 구원 업적들을 뜻한다. 이 찬양들 위에 하느님께서는 마치 왕좌에 앉으시듯 좌정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멀리 계신 하느님이신 동시에, 당신의 구원 업적을 통해서 그리고 백성의 찬미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시다.

 

-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5-6절은 신뢰와 구원과 관련해서 서술하고 있다. 신뢰라는 단어가 네 줄로 된 구절에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시편작가는 신뢰가 있기에 하느님께 부르짖을 수 있고, 이 신뢰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상황에 절대적 기초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분에게서 저버려진 상태에서도 신뢰하기 때문에 “엘리 엘리” 하고 그분을 부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구세사의 이상적인 형태를 그리고 있는데, 백성의 신뢰와 하느님의 구원, 이 둘이 어우러져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 자신과 하느님과의 대칭, 구원역사의 바탕 위에 시편작가는 대답 없는 하느님을 향한 외침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는 자신에 대한 하소연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저는 벌레, 인간이 아니오이다.”라는 표현으로써 자신에 대한 하소연의 시작을 가장 강도 있게, 가장 처절한 언어로 장식한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 지니는 품위,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 마치 먼지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되어 버렸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욕거리, 백성들의 조롱거리”에서 다시 한번 명예를 중시하는 고대 중동인들을 생각할 수 있다. 벌레와 같은 자기의 현실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람들의 모욕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모욕은 자기를 보는 이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입술을 비쭉거리다, 머리를 흔들어대다”는 조롱거리가 된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몸짓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렇듯 시편의 기도자를 괴롭히는 것은 비단 이들의 자세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이다. 더욱 괴로운 것은 자기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들어 자기를 멸시하는 그들의 말이다. 곧 ‘네가 하느님께 신뢰한다니, 어디 하느님께서 한번 구해보시라지’라는 비아냥이다. 기도자는 실제로 주님께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주님께 맡겼으니”를 직역하면 ‘주님께 굴렸으니’가 되는데, 이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를 구해주셔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서 시편작가의 주장, 곧 하느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그의 말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기도자는 이러한 현실과 자신의 내면 사이에 있는 괴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 이러한 괴리감을 시편작가는 이제 10-11절에서 자기 개인의 역사를 도입하면서 강조한다. 우선 그 첫머리에서 “그러나”라는 말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자신의 현실을 하느님과 대칭시키고 있다. 기도자는 자기 존재의 시초로 돌아간다. 곧 어머니 뱃속으로 되돌아가고 있으며, 시편작가는 이를 매 행에서 말하고 있다: “뱃속”, “제 어미 젖가슴”, “모태”, “제 어미 뱃속”. 하느님께선 자기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자기의 하느님으로서 마치 산파와 같이 출생을 도와주고 그를 어머니의 젖가슴에 평화롭게 안겨주셨다. 여기에서 하나의 독특한 신관이 태동한다. 곧 산파로서의 하느님이 그것인데, 이것에 대해선 어떤 신학적 설명보다도 묵상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 시편작가는 벌레와 같이 버림받은 처참한 상황에서 공동의 역사와 자기 개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또한 동시에 이를 하느님께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자기 고통의 근원을 하느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데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멀리 계시지 말라는 간청을 한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환난은 하나의 세력으로서 기도자를 덮치려고 가까이 다가온다. 그를 가운데 두고 멀리 떨어져 계신 하느님과 바로 곁에 다가온 환난이 세력 다툼을 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실제로 하느님은 자기 가까이에 계셔야 하고 불행은 멀리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전도된 현재의 상황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이러한 현실을 이제 하느님께서 뒤집으시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소연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이제 13-19절에서 시편작가는 자신과 원수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느님께 하소연한다.

 

- 우선 13-14절은 원수들을 동물의 은유로써 표현하고 있다. 수소들과 바산의 황소들은 둘 다 힘을 상징한다. 바산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에 위치한 지방으로서 소 사육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이 지방의 소들은 이스라엘 땅의 다름 어떤 곳의 소들보다 힘이 세다고 여겨진다. 여기서는 힘센 수소들에 의해서 포위된 작은 동물을 연상하게 함으로써 기도자는 자기에게 닥친 위험을 그리고 있다. 13절 보다는 14절이 더욱 심각한 위기를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소가 아니라 희생물을 잡아채고 짓찢는 사자를 등장시켜 위험이 그 극에 달해 있음을 말하고 있다.

 

- 15-16절은 이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소연한다. “물처럼 저는 엎질러지고”라는 비유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표현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동번역」은 “물이 잦아들 듯 맥이 삐지고”로 옮기고 있다. 우리말에서 ‘엎질러진 물’은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뜻한다. 그러나 시편의 은유는 이와는 다르다. 기도자는 자신을 물에 비유해서, 그 물이 아마도 메마른 먼지 바닥에 엎질러졌다고 한다. 이 은유에 대한 연상을 계속한다면, 기도자는 물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말이 된다. 물이 가늘 것들과는 달리 그릇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이제 자기의 그릇이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떠나 멀리 계시기 때문에 자기는 엎질러진 물과 같이 존재의 바탕을 상실한 인간, 곧 벌레라는 말이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때도 이러한 연유로 해서 기도자는 이제 희망이 없는 인생이다. 땅바닥에 흘린 물은 결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가망이 있다면 오직 하느님께만 있다. 이 유일한 희망이신 하느님께 시편작가는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 “ 제 뼈는 다 풀어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처럼 되어 제 속에서 녹아 내리나이다.”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전반적으로 묘사한 다음, 이제 여기에서는 뼈와 마음(심장)이라는 생명의 중요한 두 요소를 들고 있다. 살은 빠지더라도 다시 붙을 수 가 있겠지만 뼈가 ‘풀어져버리면’ 가망이 없다. 피가 생명의 근본이라 하면, 마음/심장은 삶의 원천이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의지적인 인간의 중심부다. 그런데 이것이 녹아내린다는 것(팔레스티나의 따가운 햇빛 속을 암시)이다. 곧 생명은 어떻게 붙어 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삶이 빼앗긴 그러한 상황이다.

 

- 이러한 상황을 16절은 계속 묘사하고 있다. 옹기에는(불로 달군 것이기 때문에) 습기가 없다. 팔레스티나의 뜨거운 햇빛 속에 뒹구는 옹기를 상상해 볼 수 있겠다. 혀가 입속에 들어붙는다는 것은 열이 많이 났을 때 그러한 것처럼, 내적인 열과 외적인 열로해서 기도자의 혀까지 붙어버린 인생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작가가 “당신께서 저를 죽음의 흙에 앉히셨나이다.”라고 토로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원인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제2의 원인일 뿐이고 제 1의 원인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흙’ 또는 ‘먼지’는 인간이 만들어진 재료면서, 동시에 인간이 죽으면 돌아가는 곳이다.(창세 2,7; 3,19). 기도자는 이미 거기에 앉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이다.

 

- 17-19절은 13-14절에 이어서 다시 한번 원수들의 적대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17절은 개의 은유를 사용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들은 굶주린 개들을 뜻하며, 자기의 상황을 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로써 원수들을 수소, 황소, 사자, 개로 비유함을 끝내고, 이제 17절 2행부터는 직접 “악당의 무리”로 표현한다. 지금까지는 원수들이 에워싸고 으르렁대기만 했으나, 이제는 “제 손과 제 발을 묶었나이다”에서 보여 지듯, 그들의 희생물인 기도자에게 직접 손을 댄다. ‘사자와 같이 저의 손과 저의 발’이 된다. 어쨌든 17절 3행의 말은 시편작가가 이제 완전히 적대세력의 제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이어서 18절은 원수들이 희생물을 잡아 놓고 좋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뼈만 앙상하게 남고 옷까지 벗겨진 기도자의 모습이다. 인간으로서 마지막 것까지 강탈당한 상태를 나타낸다. 원수들은 강탈을 마치고 이제 희생물에 대한 노략질을 한다. 속옷까지 벗겨진 기도자, 그야말로 죽음에 직면한 최후의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아무런 반항 없이 적들의 처분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다.

 

- 이 마지막 순간에 직면하여 기도자는 다시 간청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먼저 나오는 “멀리 계시지 마소서”라는 간청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동물의 비유가 되풀이 된다. 지금까지 세 종류의 동물들이 각각 따로따로 나오다가 여기에서는 연달아 한꺼번에 등장한다. 게다가 ‘소-사자- 개’의 순으로 나왔는데, 여기에서는 ‘개-사자- 소’의 순으로 방향을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표현방법으로 21절 1행의 간청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 제 생명”은 ‘저에게 하나밖에 없는 것, 저에게 유일한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칼”도 지금 목에 칼이 들어온다는 사실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은유적으로 절박한 위험, 곧 죽음의 위험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것은 하느님을 “저의 힘이시여”라고 부른 것이다. 자신에게는 어떠한 힘도 없으며, 아무런 반항의 여력도 없다. 이 절박한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주님에게만 있다. 그 주님께서 바로 자신을 구해주실 힘 그 자체시기 때문이다.

 

 

2> 찬미: 22절 3행 -32절

 

- 23절부터 찬미가 시작되고, 22절 3행(“당신께선 저에게 대답해주셨나이다.)은 탄원에서 찬미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이룬다고 “구조”에서 말한 바 있다. 이 행은 히브리말로 ‘아니타나’라는 제 음절로 된 한마디의 말이다. 고통 속에서 탄원하는 정서가 이 ‘아니타니’를 고비로 해서 완전히 180도 전환하여 찬미의 정서로 바뀌는 것이다.

 

- 3절의 “저의 하느님, 제가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선 대답하지 않으시나이다.”와는 반대로 기도자는 여기에서 “당신께선 저에게 대답해주셨나이다.”라고 기쁨에 넘쳐 소리 지른다. 대답 없는 울부짖음, 응답 없는 하느님, 자기를 버리고 멀리 떠나 가버리신 하느님, 이 모든 근원적 문제가 이제 이 한 마디 말로써 뒤엎어진다. 이러한 반전의 근거로 첫째, 주관적인 정서의 급변이다. 기도자가 기도를 올리고 간청을 드리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이 마음속에 생겨 탄원의 자리에서 이미 하느님께서 감사드리고 찬미 드린다는 것이다. 둘째,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약이 사제 또는 전례 예언자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설이다. 이른바 ‘구원신탁’을 말한다. 이는 사제 또는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신탁으로서, 기도자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떠나지 않고 옆에 계시면서 너에게 도움과 구원을 베푸시리라’라는 내용이다. 어쨌든 이로 인해 일대 전환이 이루어져 이제 찬미와 감사의 노래가 시작된다.

 

- 하느님께 대한 찬미는 선포의 성격을 지닌다. 시편작가는 자기에게 구원을 베푸신, 또는 베푸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레에게 전하면서 그분을 찬미하리라고 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그분을 대표하고 그분의 본질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을 위한 구원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이름을 “형제들” 앞에서 전하는 것, 이것이 찬미의 첫걸음이다. 여기에서 “형제들”은 우리가 전례 중에 ‘형제 자매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처럼 이스라엘 안의 전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감사와 찬미는 개인의 일이라가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와 함께 이루는 일이다. 이제 시편작가는 이러한 공동체를 하느님을 향한 찬미에로 부른다.

 

- 시편작가는 지금까지 하느님께 직접 말씀을 드렸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곧 공동체에게 말을 한다. 이 공동체가 24절에서 세 개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지만(“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야곱의 모든 자손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 이는 결국 동일한 공동체를 가리킨다. 야곱 또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같은 공동체로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다. 주님을 경외함은, 시편 86에서 말했듯이 종교 심성의 근본으로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결국 정당한 이스라엘의 후예며 감사와 찬미의 전례에도 정당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경외함은 하느님 사랑으로 들어가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과 공동체는 또한 밀접한 관계 아래 있고, 탄원 중에는 혼자 있을 수도 있었지만 찬미에서는 혼자 있지 않다. 물론 22절까지 기도자는 자신이 철저히 혼자임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다고 할 수 없다.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분,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유일하게 멀리 계시다고 여겨지는 하느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결국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기도자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깊이 자각하고 바로 그 공동체의 역사 안에서 자기의 믿음과 신뢰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탄원은 혼자 드릴 수 있을지 몰라도 감사와 찬미는 그렇지 않다. 모두가 함께 감사, 찬양해야 한다. 적어도 공동찬양에는 모든 이가, 또는 다른 찬양 시편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부름을 받는 것이다.

 

- 찬미에는 항상 근거와 이유가 있다. 이제 25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시편작가는 여기에서 우선 자기가 경험한 하느님의 구원을 일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절에서 22절까지의 한탄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그러한 절망적인 처지가 하느님의 들어주심으로 완전히 반전되었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그러한 존재와 약속에 충실하게 “가련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 25절 3행의 “그에게 당신 얼굴 감추지도 않으시며” ‘멀리 계시다’에 반대되는 말이다. 곧 하느님께서는 가련한 이가 도움을 청할 때, 귀머거리처럼 가만히 계시지 않고, 적극적으로 들어주신 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떠나가심, 하느님이 멀리계심,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이런 것들은 기도자의 생각일뿐, 하느님께서는 그를 업신여기지도 싦어하지도 않으시고, 그를 버리고 멀리 떠나가지도 않으셨음이 드러난다.

 

- 그런데 기도자가 왜 그러한 생각 속에 고통스러워했고, 자기의 하느님께 왜 그러시냐고 외쳤던 것인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인간의 현실과 하느님께서는 떠나지 않으셨다는 하느님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받아들여할 것인 인가? 이것은 삶의 신비이고 신앙의 신비중의 하나이리라. 시편작가 자신도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멀리 떠나가버리셨다고 몸부림치며 한탄하던 하느님께서 바로 옆에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또한 비단 자신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공동의 경험이다. 그래서 특정한 한 인물을 지칭하지 않고,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없음을...” 등의 표현을 통하여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개인에 국한된 현상이 아닌 공동적인 것이기에 이에 대한 찬미 역시 일반적으로, 공동적으로 거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공동 찬미가 이루어지는 곳을 26절은 “큰모임”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생소한 현상으로 어떻게 하느님을 직접 2인칭으로 칭하다가 다음 순간 갑자기 3인칭으로 말하고, 또 다시 2인칭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나 하고 의아해진다. 이는 시편집 전체가 하느님 면전에서 불리워지고 또한 시편을 노래하는 주체는 비록 개인이라 할지라도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이 공동체 자체도 하느님 면전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곧 하느님- 개인 - 공동체가 유기적인 관계 아래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한순간 하느님께 말씀드리다가도 다음 순간 함께는 공동체에게 직접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세 개의 주체가 한 자리에서 함께 말하고 있다.

 

- 이러한 큰 모임에서 자기의 ‘찬양이 온다’는 말은 찬양의 대상이 옴을 뜻한다. 구원, 곧 찬양의 대상이 되는 구원의 행위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항상 전례의 모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시편은 다음과 같이 한 마디로 하느님께 고백한다. “당신께로부터 저의 찬양이 오나이다. 큰 모임에서”. 이 말은 4절 2행의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고 계신 분”을 상기시킨다. 이 말에는 자기가 처한 지금의 현실은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찬양이라고 부를 수 없게 하는 상황이니, 이 전도된 상태를 다시 원상 복귀시켜주십사는 간청을 담고 있다.

 

- 시편의 기도자는 하느님을 찬양함이 동시에 자기의 서원을 채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탄원시편에서는 기도자는 하느님께 감사 또는 찬미의 서원을 한다. 이제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니 정당한 전례 공동체, 곧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 앞에서 그 서원을 채우겠다는 말이다. 가난한 이들이 배불리 먹으리라는 27절의 말은 감사, 또는 찬미의 제사 뒤에 거행되는 잔치를 그 배경으로 한다. 이 찬치에는 성전 전례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도 -기도자는 자신이 이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즉 그 가나한 이들 역시 주님을 찾는 경건한 사람들로서 음식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3행의 “너희 마음 길이 살지어다!”는 시편작가가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복을 기원하는 말이다.

 

- 시편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28절) 기도자의 전망이 갑자기 무한대로 펼쳐진다. “세상 끝들”, “민족들의 가문들”, 그리고 두 번 나오는 “모두”라는 말이 이를 드러낸다. ‘세상 끝들’이라는 표현은 그 끝으로 가는 도중에 거치게 되는 모든 곳들을 내포한다. 결국 ‘온 세상’이다. 온 세상이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와서 마땅한 경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온 세상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결국 온 세상이 이를 기억하고,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는 보편사상이 선포되어 있다. 한 개인의 탄원과 찬미에서 출발하여 이러한 세계적인 전망으로 펼쳐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30절 1행의 “권세가둘”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본디 ‘기름진’의 뜻을 지닌다. 기름진 사람들이 바로 잘사는 사람들, 권세가들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 말을 ‘땅(세상)에 잠든 모든 이들’로 고쳐서 번역하기도 한다. 이 번역을 따를 경우 죽은 이들도 하느님의 찬미에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구약성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죽음과 하느님, 죽음과 찬미, ‘셔올’(저승)과 전례 사이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그 거리가 극복되고 죽은 이들이 하느님께 찬미와 경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세상의 모든 권세가들”과 “흙으로 내려가는 모든 이들”이라는 우리의 번역을 따른다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항상 배불리 먹어서 건강에 넘치는 사람들이며, 후자는 건강이 다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는 두 개의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서 이 두 극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하나의 수사학적 표현 방법이다. 예를 들면, ‘늙은이도 어린이도’, ‘부자도 가난한 이도’ 등등의 표현이다. 이들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30절은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하느님을 경배하리라는 말이다.

 

- “ 내 영혼이 그분을 위해 살고” 어쨌든 시편의 기도자는 이제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리라는 결심을 말한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삶은 비단 자기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자손드을 통해서도 영원히 이어진다. 구약의 사람들은 죽더라도 자기 자손들 속에 그 생존의 일면을 계속한다고 생각했다. 구원을 베푸신 주님을 위함은 일시적으로 끝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찬미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행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저버리시지도, 멀리서 방관만하고 계시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행동하는 하느님이시다. 이로써 4-6절의 말이 신앙 고백이고, 신뢰의 고백이며, 진리임이 드러난다. 28-30절에 시편작가의 전망이 수평적으로 무한히 뻗어나간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제 4차원적으로, 곧 시간의 차원에서 영원과 무한을 향해 펼쳐지고 있다. 그 영원은 당신 정의를 베푸신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영원함이다.

 

 

 

 

※ 참고문헌: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87-118.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42-43.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11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