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19: 창조주시며 입법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가

마리아 아나빔 2011. 8. 1. 15:19

 

 

 

                             시편 19(1): 창조주시며 입법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가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하늘을 지으신 주 하느님을 찬양한다. 옛날 근동 여러 나라에서는 태양을 정의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전례에서는 이 한 구절을 정의의 주 예수께 응용하고 있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에 의하면 이 시편은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다. 시편 19편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지만 통일된 전 시편 중에서도 가장 숭고한 찬미의 노래의 하나이다. 작가는 하늘과 천체의 신비스러운 침묵에 가득찬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영광을 기리고 찬양한다. 모든 날은 그 다체로운 생명의 표현을 가지고, 다음 날에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모든 밤은 다음의 밤에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 한다.

 

이 시의 제 2부에서는 작가는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찬미를 쓴다. 율법은 완전하며, 마음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한다. 그것은 충실이며 참이며, 작은 자에게 지혜를 주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태양처럼 투명하게 밝히고 변함이 없는 바른 것, 황금보다 귀중하다고 꿀보다 달다고 한다.

 

    시편 작가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바라고 있지만,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얼마나 손쉽게 잘못을 저지르는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주께 향하여, 자신의 숨은 죄를 깨끗이해 주시고 특히 다른 모든 재앙의 근본이 되는 교만에서 자신을 지켜 주시고, 그리고 자신의 노래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기를 청하며 마무리 짓는다. 이 신비스러운 노래는 우주를 인도하시고 또 사람의 마음도 이끄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찬양하고 있다. 창조 사업에 나타나있는 하느님의 율법은 또 그 빛을 가지고 사람의 양심 안에 들어오고, 그리고 이성과 자유의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주와 역사에 조화를 세우려고 한다. 사람은 양심의 소리 곧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면, 창조의 세계의 모든 소리의 의식적 통역이 되고, 또 우주의 사제가 되는 것이다. 물리의 세계에 있는 것은 태양이지만, 인간의 윤리의 세계에는 하느님의 율법이 있다. 태양이 이 세상에 보내는 빛과 열과 생명은, 하느님의 법률이 인간에게 나누어 주는 빛과 열과 생명의 상징이다.

 

 

Text 안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에 따라서)

 

1절: 거저주시는 은총

 

     시편은 실상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다. 이 말은 “그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는 시편 구절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신랑이란 순결한 처녀와 맺어져 있다고 사도가 이야기 한 분이시다. 사도는 신랑의 순결한 친구답게 그 처녀를 두고 걱정한다. 뱀이 하와를 간교하게 속였듯이, 그리스도의 배필 된 이 처녀의 마음이 행여 그리스도께로 쏠리는 순결로부터 타락하지나 않을까 진정 염려하게 된다( 2고린 11,3 참조). 주님이시며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분에게 사도 요한이 말한, 은총의 저 충만함과 풍부함이 있는 것이다(요한 1, 14). 시편에서는 바로 이 이 영광을 두고 하늘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늘은 거룩하다. 땅으로부터 올려져 주님을 받들어가는 연고이다. 이러한 하늘은 언젠가 한 번 그리스도의 영광을 두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탄생 때, 일찍이 본 적 없는 별이 새로 나타났을 때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나오는 하늘이야말로 더없이 참답고 드높은 하늘이 아닐 수 없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들 음성은 온 땅으로, 그들 언어는 누리 끝까지 펴져나가는도다.” 여기서 목소리란 하늘의 목소리, 사도들의 목소리이다. 사도들은 우리한테 하느님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죄를 용서하시는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영광을, 사람이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을 필요로 하고, 또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그분의 은총으로 의로워졌다(로마 3,23). 오로지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다. “저희에게가 주님,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라는 시편저자의 마음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저 하늘은 바로 이 신비를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말없는 천체의 움직임은 사람의 말이 없을지라도 하느님을 알려 주고 있다”란 뜻이다.

 

2절: 창조와 하느님의 영광

 

“창공은 그분의 손의 솜씨를 알리도다” 하느님의 영광을 두고 한 말은 이제 하느님 손의 솜씨를 두고 되풀이 된다. 여기서 그분 손의 솜씨가 어떠한가? 하느님은 만물을 당신의 말씀이신 분을 통해서 만드시었다. 만일 하느님이 손으로 땅을 만드시었다면 사람만 손으로 만드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만드시었다면 사람도 말씀으로 만드시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만드신 것이 손으로 만드신 것이요, 손으로 만드신 것이 곧 말씀으로 만드신 것이다. 말씀으로 만드신 것은 지혜로 만드심이요, 손으로 만드신 것은 권능으로 만드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권능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1고린 1,24). 따라서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생겨난 것치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했고 지금도 이야기하고 앞으로도 이야기할 것이다. 하늘, 그러니까 거룩한 하늘이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땅으로부터 올려져 하느님을 받들어가며, 계명을 우레처럼 내리고, 지혜로 화답을 해준다. 하늘이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되, 우리가 부당한 사람이면서도 구원을 받았다는 그 영광을 이야기한다. 이 부당한 인간은 바로 저 가련한 처지에 있었던 돌아온 탕자의 작은 아들이 누구보다도 잘 깨달았다. 그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았지만 오직 곤궁에 빠진 다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하느님의 이 영광으로 우리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이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루가 15,21).

 

그리고 하늘과 창공은 굳건한 마음을 가리킬 뿐 소심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진리들이 선포된 것은 사실 불경한 사람들, 하느님의 원수들, 세속을 사랑하는 사람들, 의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 사이, 한마디로 야만적인 세상에 그것이 알려졌다. 그런데 창공이 알린 다고해서 저 야만스러운 세상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늘은 하느님의 저 영광, 그 영광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입고 우리가 선업을 행하도록 창조 받은 그 영광이다.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지음을 받아 선행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를 만드셨을 뿐아니라, 만약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라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것도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지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된 것은 아니다(시편 99,3 참조).

 

3절: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는도다”

 

    여기서 대낮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소식을 전한다. 그 대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한다.”는 밤처럼 애매모호하다. 낮이 낮에게, 성인들이 성인들에게, 사도들이 사도들에게 전한다. 그들을 두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은 뚜렷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밤은 밤에게 앎은 전한다는 것은, 사도들은 주님이 그들과 함께 세상에 계실 때, 그리스도로부터 들은 바를 시시각각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주었다. 낮이 낮에게, 밤이 밤에게, 전날이 다음날로, 전날밤이 이튿날 밤으로 전하여 이 교리가 밤낮 없이 설교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낮이 낮에게, 밤이 밤에게”라는 말은 영이 영에게, 육이 육에게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은 “낮이 낮에게”는 영적인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뜻이고 “밤이 밤에게”는 육적인 사람들이 육적인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뜻이라 풀이한다. 양편다 말을 듣기는 하는데 같이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건네주는 말처럼 듣고 육적인 사람들은 전해주는 지식처럼 듣는다. 또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을 건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앎을 전한다”고 풀이한다.

 

4-5절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들 음성은 온 땅으로 퍼져나가도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성령이 그들위에 내리자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서 영이 그들에게 일러주는 대로 여러 가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4).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들 음성은 온 땅으로 퍼져나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음성은 온 땅으로, 그들 언어는 누리 끝까지 퍼져나가는도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단자는 교회에 “들어가지” 않는다. 음성이 온 땅으로 퍼져나간 것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6절: 형제간의 사랑

 

“ 대낮에 당신의 장막을 치시니, ” 이는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가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는 일이 없게, 이단자들의 무리 뒤편에 가리워져 있지 않게 하시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누군가를 가리켜 이렇게 기록하였다. “너는 그 일을 취도 새도 모르게 했지만, 너는 이 일로 대낮에 당하리라”(2사무 12,12).

“대낮에 당신이 장막을 치시니, 그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도 같도다.” 말씀이 사람이 되실 때에 그분은 신랑처럼 당신의 신방으로 동정녀의 품을 찾아내셨다. 인간성과 결합하여 지극히 순결한 신방에서 나오듯이 그곳을 나오셨는데, 자비심으로 모든 사람 아래에 드는 비천한 분으로서 나오시고, 위엄으로는 모든 이들 위에 서는 힘 있는 분으로 나오셨다. 그리하여 “용사처럼 길 달리기를 좋아하신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잠시도 멈추지 않으신 채로 전속력으로 당신의 길을 달려가셨다. 이런 일을 이루신 신랑이 대낮에 당신의 장막을 치신 것이다. 눈에 잘 뜨이게 당신의 장막을,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다.

 

7절: 성령

 

“하늘 끝에서 나와 다시 끝으로 돌아가니.”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빨리 달려가신 길은 하늘끝에서 나와 전속력으로 다시 끝으로 돌아가신 다음에는 당신의 영을 보내시었다. 이 영이 내렸던 사람들에게는 불같은 혀들이 갈라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나 각자에게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사도 2,3). 성령은 불꽃에서 나와 육의 검불을 살라 버리고 금을 녹이고 정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그 뜨거움 앞에서 숨을 수 없도다.”라는 말씀이 따라 나온다.

 

8절: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시도다.” 이것은 다름 아닌 성령이다. “주님의 법은 참되어 미숙한 이를 슬기롭게 하는도다.” 오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미숙하고 작은 사람들을 그렇게 하신다. 이것도 바로 성령이다.

 

9절: “주님의 규정들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도다.” 이것이 성령이다.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도다.” 몸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빛을 준다. 외적 인간의 눈이 아니라 내적 인간의 눈에 빛을 준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다.

 

10절: “주님을 경외함”, 노예들의 두려움이 아닌 “순수한” 경외심이다. 흔쾌히 사랑하여 받드는 경외심이다. 무서워 떠는 분에게서 벌 받는 일을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사랑하는 이로부터 결별함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다. 즉 순수한 경외심이다. 사랑이 완전해져도 이 경외심은 내쫓지 않고, 그야말로 “영원히 이어지는” 경외심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고 이 두려움을 선사하고 넣어주고 부어준다. “주님의 심판들은 진실이니 그 자체로 의롭도다.” 분열의 언쟁에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일치의 사랑에로 이끌어간다. 성령은 그런 분이다. 지금은 한 사람이 만민들 가운데서 모든 언어로 말씀하신다.

 

11절: “금보다, 많은 순금보다 더욱 보배롭도다.” 많은 금처럼, 많은 보물처럼, 많이도 보배롭다. 한사코 더욱 귀하다. 그러나 이단자에게는 하찮은가보다. 이단자들은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우리와 함께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도다.” 이 말씀은 그르침에 빠지는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다. 사실 열이 있는 사람한테는 꿀도 쓰고 건강을 회복한 사람한테는 꿀이 건강에 귀한 음식으로 달고 감칠맛 난다.

 

12절: “당신의 종도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니.” 주님의 심판이 감미롭다면 말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간직함으로써 당신의 종이 이를 맛보나이다. 당신의 종이 이를 간직함은 현세에 감미롭고 후세에는 구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를 지키면 큰 상급을 받으리이다.” 하지만 이단자는 자신의 긍지를 더 사랑하므로 이 광휘를 보지 못하고 또한 감미로움을 맛보지 못한다.

 

13-14절: 죄의 두 가지 형태

 

 “허물을 누가 알리이까?”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 지 알지 못하옵니다.(루가 23, 34). 그래서 시편 작가는 이 단맛을 간직하는 이, 애덕의 감미로움과 일치의 사랑을 지키는 이가 하느님의 종이라 한다. 시편저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사오나. “허물을 누가 알리이까?” 라는 말씀이 있어서 주께 청하오니, 내가 사람인 이상 그 어떤 죄악도 비밀리에 숨어 있는 일이 없게 하여주소서! 주님께 애원하오니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주소서!” 우리가 노래한 것은 이 말씀이었고 노래를 하다 보니 다시 이 말씀에 이르렀다. 과연 그 어느 인간이 죄악을 제대로 헤아릴 것인가! 그 어둠이 보인다면 죄악도 보이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죄악을 뉘우칠 때는 우리가 이미 빛 속에 와 있다는 말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가 정화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를 낫게 해줄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시는 까닭이다. 그래서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주소서!”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린다. 시편 작가는 말씀드린다. 나의 죄악이 나를 더럽히고 있사오니 이 죄악에서 나를 깨끗이 해주소서.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주소서. 딴 사람들의 죄에서 당신의 종이 벗어나게 해주소서.” 라는 말뜻이 그러하다. 이 두 가지 죄악, 자기 죄악과 남의 죄악은 원조의 범죄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악마는 자기 죄로 타락하였고, 아담은 남의 죄악으로 타락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을 간직하고 그것을 지켜 큰 상급을 받게 될, 하느님의 종 역시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거만한 발길이 제게 닿지 않도록, 악인들의 손이 저를 내쫓지 않도록 하소서!”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주소서, 주여!” 곧 “딴 사람들의 죄에서 당신의 종이 벗어나게 해주소서!”

 

죄에 굴종함

 

“그들이 제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나의 죄악과 남의 죄악이 내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오면 제가 온전하고 깨끗해 지리이다” 하지만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감히 말씀드리지 않고 주님께 간청하여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빌고 있음을 다른 시편에서 보여준다. “당신 말씀으로 제 발걸음을 굳게 하시고 어떤 불의도 저를 다스리지 않게 하소서!(시편 118,13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주인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신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우리 안에 만들어 놓는 바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선한 종으로 만들었는데, 우리는 우리 마음에 아주 사악한 주인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우리를 만들어 주신 분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오면 제가 온전하고 깨끗해 지리이다, 커다란 죄악으로부터” 여기서 커다란 죄악은 교만이라 생각한다. 교만은 천사를 떨어지게 만들었고 천사를 악마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추방해 버렸다. 그 죄는 참으로 크며 다른 모든 죄악의 머리요 뿌리이다. 정말 “오만은 죄의 시작이다”(집회 10,13) 라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주에게서 멀어질 때 생긴다(집회 10, 13. 12).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다운 겸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교만이란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다. 바로 이 원인, 이 커다란 죄악, 영혼들의 저 거창한 질병이 전능하신 의사를 하늘로부터 이끌어 내렸고 그분은 종의 모습을 취하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으며, 수모를 당하셨고 나눔에 매달리셨다. 그토록 휼륭한 약의 구제력으로 이 병을 낮게 하셨다. 하느님이 이토록 자신을 낮추신 사실 때문에라도 인간이 교만해진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15절: “당신 앞에서 드리는 제 입의 말씀과 제 마음의 생각이 당신 마음에 들지이다.”

 

     내가 이커다란 죄악에서 깨끗하여지지 못한다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들 귀에는 솔깃할지 모르지만 주님 마음에는 들지못하리이다. 교만한 영혼은 사람들 마음에 들기를 원한다. 그리고 겸손한 영혼은 은밀히, 하느님만 보시는 데서 하느님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의 선업을 두고 사람들 마음에 드는 일이 있더라도, 그 선업을 흡족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모르나. 선업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자기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바 그것입니다.”(2고린 1,12). 그래서 “주님, 저의 도우심, 저의 구원자시여!” 선업에는 도우심이요 악업에서는 구원자이시나이다. 당신의 사랑 안에 내가 머물도록 도움이 되어 주소서. 나의 사악함에서 벗어나게 구원자 되소서.

 

 

나오면서

 

    성 바울로는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은, 만물의 보편적인 밀접한 이치이며 우주의 질서와 조화의 절대적 원리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도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손합니다.

 

이리하여 우주는 하느님의 이(理), 곧 그분의 영광의 광채인(히브 1,3)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을 기원으로 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지탱되고 있는 것이며, 우주는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죄가 들어 온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재건자이시며 새로운 세계와 인류의 샘, 하늘에서 오신 새로운 아담이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초자연적인 신분으로 높이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원되고 새롭게 된 세계의 정의의 태양으로 보고 있다. 그분의 장막은 하늘과 처녀 마리아의 태중이다. 육신이 되셨을때, 신랑과 같이 처녀 마리아의 태중을 새 자리로 하시고, 그와 같이하여 인간성에 합쳐지고, 누구보다도 겸손하게 낮추시고, 자비의 얼굴을 취하시고, 그러나 그분의 세력 때문에 누구보다도 강한 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이 거처에서 나오셨다. 그리고 세상에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 쪽으로 가는 길을 여셨던 것이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또 그분 자신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율법이다. 죄지은 일 없는 깨끗한 율법이 자유를 가지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율법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아버지께서 지혜자들에게 감추시고 작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생명과 활동의 원리이시다. 그리스도적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 계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살고 활동하는 법률이며 거기에 질서와 조화를 가져다주고, 그리스도의 영은 이와 같은 질서를 실현하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힘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생을 통하여 매일 우리들 눈앞에 이 거울을 두고 그 거울에 비추어 우리가 어떠한 자이어야 하는가를 본다. 이리하여 울리는 예수께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바라고보, 거기에서 또 이 세상 것에 대한 깨끗함과 자유, 정의와 사랑, 형제에 대한 자비를 펴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배움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비틀어진 우리를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다시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시는 장막, 신랑인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영혼들과 만나시는 혼례의 방이며, 전례의 의식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해마다 교회의 하늘을 용사처럼 그 신비의 길을 걸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충실한 자녀인 교회는 그리스도께 가르침을 배우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벌써 기쁨과 보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편작가와 똑같이 교회도 자신의 입에 올린 말과 애정을 주께서 기뻐하여 주시기를 간청한다. 끝으로 참된 지혜의 근원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그 경외와 한없는 위대함과 자비에 대한인식이지만) 으로 창조계와 하느님의 율법 곧 그분의 계시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주님의 영광과 완전함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도 그 영광과 완전함이 반영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 강론.해설, C.보르고뇨, 성염옮김,

                바오로딸, 1995. p13-28.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63-64.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171-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