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가난한 자들
성서 안에서 가난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가난이란 우선 궁핍의 구체적 상황이다.
그것은 하나의 악이고 스캔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직도 불행한 사람들이 있고
불의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는 점으로 보아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유배 중의 예언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하느님의 통치)를 예고했었다: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이 없을 것이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산상설교는 그러한 맥락에 자리하고 있다.
가난이란 때때로 영적인 태도로 숙고되기도 한다:
자신의 무력함과 가난함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 의 태도,
이 경우는 마음의 가난함이 문제이다.
마태오복음서가 산상설교를 통해 행복한 자들이라고 선포하는 anawin(가난한 자의 복수형)이
바로 그 가난한 자들이다.
영적 가난의 이상은 스바니야와 함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이상은 유배에서 귀환하였을 때 꽃피게 되며,
신약시대 초기의 즈가리야나 엘리사벳, 시므온, 안나, 마리아들처럼,
대사제들이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는 단순한 사람들의 계층을 구성하게 된다.
순례자들의 시편집은 유배 이후에 편집된 것으로서 그러한 영성을 잘 표명해 주고 있다.
그처럼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의 삶은 단순하다.
자연과 근접해 있는 촌사람인 그는 가족과 형제들간의 우정,
그리고 평화가 가져다주는 평범한 기쁨을 맛본다.
그러한 것들은 유식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그가 느끼는 깊은 종교적 감정을 드러내준다:
모든 것은 그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그와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그 하느님은 인간과 가까이 계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분은 인간이 어떤 일을 하든 그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 그분은 인간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가난한 자는 그분께 신앙과 온전한 신뢰를 통해 응답한다.
그 하느님은 당신 백성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에 거처하신다.
가난한 삶은 그처럼 삶 전체가 순례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백성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출애굽 때부터
그리고 바빌론으로부터의 해방 때부터 항진하고 있는 그런 백성이다.
그 백성은, 모든 백성들이 동일한 신앙으로 일치를 이루어 바로
그 하느님과의 통교와 기쁨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순간까지 행진하고 있는 것이다.
- 구약성서의 길잡이, E. 샤르팡티/ 안병철, 성바오로 출판사, 1991, P. 262- 2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