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엘’에서 본 성 빈센트의 정신
- 마리아 아나빔-
성서 안에는 ‘야훼의 가난한 이’로 산 이들이 있다. 그들은 후에 ‘남 은자’라는 의미로 ‘아나빔(Anawim)'이라 불리게 된다. 아무런 힘도 부도 권력도 갖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 이지만 메시아를 기다리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나빔은 오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의롭게 살았던 의인들이다. 나중에 그들 가운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그 말씀에 그물을 던지며 삶을 꾸려가는 성서나눔 그룹이 있다. 그 이름은 ‘말씀의 아나빔’이다.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회칙 ‘주님의 말씀’에서처럼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 그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 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다”고 하신 교회의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아래 제가 쓰고자 하는 내용도 ‘말씀의 아나빔’에서 거의 2년 동안 함께 나누었던 성서의 내용들 가운데 하나이다. 특별히 주제로 뽑은 것은 창세기 4장, 카인과 아벨의 사건 안에 다루었던 ‘고엘’과 가난한 이들의 보호자가 된 ‘성 빈센트의 정신’을 나누고 싶다.
성서 안에서 ‘고엘’의 개념
창세기 4장 14절에서 15절에 보면 다음의 내용이 있다.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자신의 제사 보다 동생의 제사를 즐겨 받으신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질투심에 불탔던 카인은 결국 그의 아우 아벨을 들로 꾀어내어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살해에 대한 결과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동생을 죽인 살인자라 말하며 그를 죽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형제살인의 고통과 압박감에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마침내 땅에서 울부짖던 아벨의 피에 응답하셨던 하느님은 이제 벌의 무게에 짓눌려 정처 없이 헤매며 울부짖는 카인에게 응답을 주신다. 하느님은 카인을 안심시키며 그에게 그의 구속자, 히브리말로 ‘고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카인의 이마에 표를 찍어주신다. 이 표는 그가 살인자라는 고발과 수치의 표시가 아닌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시이다.
고엘 풍습은 고대의 씨족이나 부족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당한 힘없는 사람을 위해 가까운 친척 중에 힘 있는 사람이 보호자로 나서는 것을 말한다. ‘고엘’은 피해자를 대신하여 복수해 주고 이편에서 잘못하여 노예로 팔려갈 처지에 놓이면 몸값을 지불하기도 한다. 피보호자가 빚에 쪼들려 밭을 처분해야 할 경우엔 ‘고엘’이 그 밭을 사두었다가 원임자가 갚을 능력이 생기면 되팔고, 능력이 없다하더라도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째의 희년엔 자동적으로 밭 임자나 그의 상속자에게 되돌려 주게 된다. 이 희망 때문에 밭을 처분한 사람이라도 그가 속한 씨족이나 부족을 떠나지 않게 된다. 이 고엘 제도는 씨족이나 부족 내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좋은 법이었다.
성 빈센트의 정신 안에 있는 ‘고엘’
성 빈센트의 정신은 온통 ‘고엘’의 정신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정신은 그의 여러 가르침과 편지들, 자매들에게 한 훈화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규범에도 ‘고엘’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또 사람들의 곤경으로 말미암아 성 빈센트는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여야 하겠다고 통감하였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하여 파견되시었다고 규명하고 있다 (루가 복음 4, 18; 생활규범 103조 참조).
따라서 성 빈센트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는 조건 없는 사랑을 행한 자비로운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그 정신의 실천적 방법을 찾는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시대의 불우한 사람들을 이웃으로만 보지 않고 그들 안에 “우리의 주님들”까지 발견한다. 이 말은 그가 가난한 이들 안에 있는 ‘고엘의 원주인’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고엘의 원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다. 그 후 그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고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 시대의 많은 가난하고 억압 받으며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영적 육적의 위로자, 보호자, 변호자인 ‘가난한 이들의 고엘’이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고엘’이 되고 그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성 빈센트에게 삶의 존재 이유이고 전부이다. 그러기에 ‘가난한 이들의 고엘’이 된 그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이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간다. 그래서 그는 당시 봉쇄의 담을 헐고 그의 자매들의 손에 빵과 수프 남비를 들게 하여 길거리로 나서게 한다. 병자들의 집, 본당, 감옥, 병원, 전쟁터, 이국땅 등 가난한 이들이 있는 모든 곳이다. 즉 성 빈센트에게 있어 ‘고엘’의 활동 영역은 세상 한 가운데 이다. 그는 끝임 없이 세상과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 ‘가난한 이들의 고엘’에게 필요한 것은 순명과 거룩한 겸손 그리고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그를 지켜주는 격자가 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돌보심과 배려에 맡겨드리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와 항구함이다.
그러므로 성 빈센트의 정신 안에서 ‘고엘’이 되어 준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온갖 고통 받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동받아 한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고엘’이 되어주기 위해 직접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시대에 행하신 일을 계속하며 그분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 빈센트의 정신에 나타난 ‘고엘’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고엘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이다. 또한 태초에 고통과 두려움에 떨며 방황한 ‘카인의 고엘’이 되어주신 하느님과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이다.
삶의 자리에서 찾는 ‘고엘’
우리는 현 시대와 지금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고엘’을 새롭게 해석 해 볼 가치가 있다.
성서와 성 빈센트의 정신 안에서 ‘고엘’은 서로 상통하는 면들이 있다. 즉 약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고,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구원자가 되어준다. 또한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자가 되어주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힘이 되어준다. 병든 이들에게는 치유자가 되어주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그리고 분열이 있는 곳에는 일치와 평화가 되어준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고엘’이다. ‘고엘’ 안에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한없는 자비와 사랑이 담겨 있다. 그래서 ‘고엘’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이다.
구약시대에 ‘고엘’은 하느님의 목소리로 정의를 외친 예언자들이다. 신약시대에 ‘고엘’은 죄에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의 구원자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에서는 문둥병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성 다미아노, 켈커타에서 돌봄 없이 죽어가는 이들을 도왔던 마더 데레사 그리고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일한 킹 목사가 바로 ‘고엘’ 이다. 그리고 16세기의 암흑의 시대를 살았던 성 빈센트가 바로 ‘가난한 이들의 고엘’이다. 이들 모두는 진정 그 시대의 영적 육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고엘들’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누가 ‘고엘’ 인가? 또한 우리 각자는 누구의 ‘고엘’이 되어 줄 것인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의 사제나 수도자로서, 특히 ‘고엘’의 정신을 살아가는 빈첸시안으로서 자문해 보아야 한다. 물론 교회의 가르침 안에 그리고 성 빈센트의 영성 안에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서의 말씀과 하느님 사랑에 비추어 질문해야 한다. 이것만이 이 시대에 우리가 의미를 두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고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 ‘고엘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 빈센트가 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엘’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가장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이주노동자, 이주 여성, 해체가정의 아이들, 가장 연약하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며 그들의 변호자가 되어주는 삶이다. 이러한 ‘고엘’은 예언자적 삶이다.
구약성서 안에 있는 ‘고엘’을 통하여 성 빈센트의 정신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성 빈센트의 정신은 바로 가난한 이들의 고엘이 되어 주기위해 오신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의 ‘고엘’이 되어 행한 그 분의 정신과 사명이다. 따라서 ‘고엘’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인 ‘연민’(compassio)과 ‘측은지심’(misericordiae)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하느님의 ‘고엘’은 창조 이후 원죄를 저지른 첫 인간에게, 동생을 살해한 카인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절정은 하느님이 직접 ‘고엘’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또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고엘이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 일에 전 생애를 바친 성 빈센트에게 있다. 또한 ‘고엘’은 환대의 마음속에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에 ‘고엘’을 살아 내는 가이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그분 사랑의 표징인 ‘고엘’이 녹아 있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따라서 말씀에 맛들임으로 복음적 가치와 ‘고엘’의 정신인 성 빈센트적 사고로 우리 삶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일이다. 그리고 성서와 성 빈센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읽고 해석하며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 다음, 이 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새로운 고엘’이 되어 우리 이마의 땀과 팔의 근육으로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와 성 빈센트가 되어 봉사하는 삶을 사는 일이다.
빵의 기적에서 물고기 두 마리 같은 작은 나눔을 꺼내놓으면서, 더 많은 이들이 말씀에 그물을 던져 성 빈센트의 정신을 낚아 돌리는 ‘말씀의 아나빔’으로 살아가기를 초대하는 마음도 가져본다. 말씀을 나누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우리 안에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곤 하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시대에 그러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들 사이에 주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배고픔과 새로운 목마름을 일으키십니다(아모 8,11).” 라고 하신 교황님의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초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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