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빈센트의 향기를 성경 안에서

시편 8과 오브랩 되는 빈센트 영성

마리아 아나빔 2011. 8. 6. 11:47

 

 

                                       시편 8과 오브랩 되는 빈센트 영성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면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 5-6)

 

     이 구절은 시편 8의 절정이다. 시편 8은 하느님의 권능과 인간의 존엄성을 노래하고 있다. 시편저자는 대자연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그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인 인간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게 된다. 자연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봄과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에게 가고, 다시 그 하느님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이 시편에 흐르고 있는 것은 먼지와 같이 사라져갈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그 하느님이 소중이 여기는 인간에 대한 존엄함과 감탄이다. 그리고 그 맥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사람이 되어 오신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또 한번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고 품위를 되찾아주시는 분이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에 오브랩 되는 또 다른 인물인 성 빈센트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이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된 질문이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지속될 물음이다. 인간의 모든 지적 노력이 결국 이 한 마디 질문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당면하게 되는 인생의 여러 질문 중 가장 근본적이며, 인간에게 답과 결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 본질상 묻는 존재, 질문자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이 시편에서 이 질문은 ‘너’라는 존재에게 드리는 질문인데 이 ‘너’는 나와 동등한 입장에서 나와 같이 질문을 던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바로 당신의 뜻을 따라 인간과 이모든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이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그의 창조주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기에 이 ‘너’에게 드리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국 너인 ‘하느님’ 로부터 주어진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이 질문은 인간이라는 신비에 대한 감탄이 된다. 또한 이것은 이 신비의 근원, 이 인간이라는 신비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탄의 찬미가가 된다.

 

그러므로 시편작가의 신비의 감탄이 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라하면 영과 육을 지닌 존재이다. 만약에 인간이 육체가 없으면, 유령이고, 그렇다고 영이 없이 육체만 있으면, 우린 그것을 인간 이라하지 않고 시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과 육이 통합된 전인적 존재이다. 여기에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이성’의 가치를 부여하고 신학적 인간학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성’을 부여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다양하게 인간의 구조들을 분석하여 자아(ego), 의식 있는 자아의 이상적 상인 페르소나(persona), 무의식(id),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self), 더 나아가 자기실현을 최종목적으로 이야기 한다.

 

 

구약성서에서 인간

 

    구약성서 안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란 아주 일반적인 인간을 이야기 한다. 히브리말로 ‘에누쉬’는 나약하고 덧없는 죽어야하는 유한한 인간이다. 인간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아담’이다. 이 단어 역시 그 어원은 땅, 흙의 뜻을 가진 단어 ‘아다마’에서 파생된다.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 이 세상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인간은 바로 이러한 인간이다. 나약하고, 흙으로 빚어져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덧없는 인간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기억해주시고 돌보아 주신다. 기억해준다는 것은 ‘생각해 주다’이다. 이는 단순히 사고해달라는 청이 아니다. 청하는 사람을 위한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히브리말에서 돌보아줄 대상에게 몸을 굽히고 다가와서 그 대상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는 전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덧없는 존재인 먼지와 같은 인간을 생각해주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의미이다. 무한히 크신 존재께서 무한히 작은 존재를 생각해 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위대함이 있다. 이 위대함으로 인해 인간 역시 위대해지는 것이 시편 8의 작가가 느꼈던 인간에 대한 묵상이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생각해주심’으로써 여타의 피조물과는 차원적인 차이를 지니게 된다. 피조물이면서도 다른 피조물과 같은 차원에 속하기보다 차라리 신적인 차원에 더 가깝다. 먼지 같으면서도 신 같은 인간, 이 수수께기 같은 신비의 인간은 특별한 인간이다. 하지만 이렇듯 특별한 인간은 임금도, 귀족도, 양반도, 부자도, 고위층도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모든 사람이며 동시에 각 사람이다. 그 어떠한 차별도 없는 모든 그리고 각 인간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시편이 2천 수백 년 전에, 현재 20세기에도 이상적 실현과 요원하게 보이는 놀라운 만민평등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말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는 원시적 생활을 벗어나면서부터 인간 사회에는 사회 계층이 있어왔다. 그런데 시편 8은 모든 사람을 왕적인, 더 나아가 신적 지위로 들어 올린다. 즉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광과 존귀”는 임금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이것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사실 “영광과 존귀”는 하느님의 것이다. 이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마치 임금에게 왕관을 씌워주시듯, 당신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신다. 관을 씌워주셨다 함은 지배권을 부여하셨다는 말과 같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물의 지배자로 등극시키신 것이다.

 

 

시편 8의 인간과 현실적 인간

 

     우리는 여기서 냉철한 눈으로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과 현실의 인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상이 과연 너라는 인간 현실, 우리로 표상되는 인간상과 부합하는지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과연 신들에 비해서 조금만 못하게 만들어졌는지? 더러운 누더기로 몸을 감싸고 구걸하는 사람에게서, 술에 취해 고성 방가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찾아 볼 수 있는지? 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서, 자신의 조그만 이익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서 쩔쩔매고 있는 자신을, 과연 저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과 차원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솔직히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편 8은 과연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 허황된 꿈속에서 불려진 노래인가? 그러나 시편 8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창조 섭리, 그분께서 본디 원하신 바를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시편 8이 노래한 인간은 ‘원초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시편 8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부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참인간이신 당신의 아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다. 그래서 우리를 비롯한 다른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시편이 노래하는 인간상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원조며 우두머리시다. 이로써 여타의 모든 인간들도 어떠한 구별이나 차별이 없이 인간이라는 근본 연대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연관관계가 성립된다. 바로 이 연대성으로 인간이라면 모두 시편 8이 노래하는 그 인간상에 참여하게 된다.

 

     그 연대성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지금 설사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동지로 만든다. 모든 인간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충분히 자각할 때, 우리는 형편없는 거지에게서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한 인간을 볼 수 있다. 나약한 어린아이에게서, 병들어 쓰러진 환자에게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이미 볼 수 있고 그 씨앗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더럽고 죄악스럽게 보이는 나에게서, 너에게서,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께서 바로 이런 나와 너를, 우리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목숨까지 바치셨다는 신비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이 형제임을 충분히 자각할 때 우리는 남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 빈센트가 발견한 인간

 

     성 빈센트는 그의 영적 여정 안에서 여러 내적 체험들이 일어난다. 그 가운데 가장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던 것은 ‘하느님이신 분이 왜 비천한 인간으로 오셨는가?’ (Cur Deus homo?) 이다. 이 질문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또한 이 질문은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는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빈센트에게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을 손수 드려 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 빈센트에게 드러낸 모습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이 되셨다는 ‘육화 사건’은 이것의 정점이다. 또한 이 사건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낸 것이 된다. 이 하느님은 인간을 지극히 생각하고 기억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성 빈센트에게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시어 여느 사람처럼(필립 2, 6-7) 되셨다는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 불운한 사람들, 죄인들에게 강력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것이 된다. 또한 그분은 이들을 위하여 철저하게 가난하고,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성 빈센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존재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으로 흠숭하며, 덕(德)으로서만 현존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존재는 현실세계 안에 육화되어 함께 계시는 존재, 즉 현실적인 인간, 가난한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 더 나아가 그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는 분이고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분이다.

 

     성 빈센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로 자신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의 인격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 신앙의 여정에는 여러 차례의 회심과 신앙체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영혼 깊이 하느님 섭리의 여정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주님의 소명을 알아들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 인간

 

     성 빈센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견한 인간은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인간이다. 즉 왜소하고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 모상으로서 품위를 지닌 인간이다. 그리고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참된 품위를 다시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이 신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지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성 빈센트는 인간의 신비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그 마음은 바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병자들을 고쳐주시고(마태 14,14),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는(루가 15,20) 아버지의 마음, 바로 그리스도가 인간에 대해 가진 ‘연민’과 ‘측은지심의 마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영원으로부터 원하시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인간,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 받고 예정된 가장 구체적인 인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을 지니고 있는 각 인간, 가장 현실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고 그들 안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낸다.

 

 

    이러한 연유에서 성 빈센트는 불우한 사람들을 이웃으로만 보지 않고 그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 빈센트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단순한 사회적 동정심이나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연민 어린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비참하고 소외되고, 영적 육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자신이 불림을 받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위해 무엇보다도 연민, 온유, 진심어린 사랑과 존경과 헌신이 요구된다고 했다.

 

     특히 그리스도는 유별나게도 가난한 사람들,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 창조계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눈먼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혹은 불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에게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매료된 성 빈센트 역시 철저하게 인간을 위해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았고, 또한 그분의 사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이해하고 그 일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마치 시편 8의 작가 내면 깊이 체험했던, 인간을 그토록 생각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그 하느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성 빈센트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당신 시대의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었다. 또한 그의 이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참고문헌: 이웃사랑의 사도 바울로의 빈첸시오, 마르셀 오끌레르,(안응렬 옮김), 분도출판사, 1982.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딸, 200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로로출판사,199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성빈센트 드뽈의 관점에서, 안미경, 학위논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