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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

마리아 아나빔 2011. 9. 9. 15:40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

 

 

 

                                                                                                          매튜 폭스 지음/ 김순현 옮김

 

들어가면서

 

    엑카르트의 영성을 특징짓는 핵심 범주들을 간략하게라도 개괄하는 것이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독자와 연구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신플라톤주의로 무장한 영성가들이 수세기에 걸쳐 엑카르트와 여타의 창조중심 신학자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를 투사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개관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겠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엑카르트와 여타의 창조중심 신학자들에게 투사하도록 지시한 장본인은, 5세기에 펠라기우스가 단죄된 이래로 서양 기독교 내에서 지중해 북부의 영성, 곧 다양한 켈트 영성을 지배하게 된 지중해 서부의 영성이었다. 엑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깊이 성서에 뿌리내린 영성 신학자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이 타락/구속 중심의 영성 신학이 아니라 창조중심의 영성 신학이라는 뜻이다.

 

    창조중심의 영성 전통 안에는 엑카르트가 이 세계와 인간과 하느님을 보는 방식에 기초가 되는 주제들이 들어 있다. 이 주제들은 타락/구속 전통 안에서는 강조되지 않은 주제들이다. 타락/구속 전통의 주요한 범주는 원죄, 원죄의 정화, 죄(특히 교만과 정욕), 천국, 지옥, 육체와 혼의 대립, 금욕주의(고행), 마음을 하느님에게로 끌어올리는 기도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타락/구속 전통은 여자를 요부(妖婦)로 여기고, 활동과 관상을 대립시키고, 야곱의 사다리 오르기를 영적 관상의 모델로 제시하고, 좀처럼 사적이고 신비적인 하느님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으며, 불의하고 억압적인 정치·경제·종교 체제를 비판하거나 대안을 창출하지 않는다.

 

    오미러 교수는 엑카르트에게 가해졌던 신학의 일방적인 투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리를 심사할 때, 신학적인 표현은 교회의 융통성 없는 역할론과 결부되어 협소하게 해석되는 경향이 있는데, 금세기 초에 엑카르트도 이와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나는 신학 분야 중에서 '영성'이라는 이름의 분야만큼 협소하게 해석된 분야도 없었다고 덧붙이고 싶다. 일부 신학교는 지금도 여전히 '금욕 신학(수덕 신학)'이라는 말을 독점적으로 쓰고 있다. 17세기 이전에는 한 번도 떠올려진 적이 없는 용어를 말이다! 이토록 뒤틀린 용어로 어떻게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다시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오미러 교수는 희망에 차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이루어진 신학의 발전이 그러한 거부의 사슬에서 엑카르트를 해방시켰다.'(Thomas Franklin O'Meara,'Meister Eckhart's Destiny,' Spirituality Today , p. 357. 2부로 되어 있는 이 논문은 여러 시대에 걸쳐 엑카르트가 끼쳤던 영향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다. 오미러 교수는 마이스터 엑카르트에 관한 가장 유용하고 포괄적인 참고 도서 목록을 The Thomist, April 1978, pp. 313-336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엑카르트가 해방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금욕적인 수련법과 기교를 동원하는 수련법을 선호하는 서양에서 너무나 자주 단죄되고,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받고, 잊혀져온 창조중심의 영성 전통이야말로 엑카르트를 풍부하게 살찌웠던 전통이며, 엑카르트가 천재적인 영성 경험과 표현으로 자양분을 공급했던 전통이다. 창조중심의 영성 안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주제가 몇 가지 있는데, 독자들은 그것들을 살펴봄으로써 엑카르트의 저작을 읽어볼 엄두를 내게 될 것이다. 그의 시대 이래로 배출된 대다수의 영성 작가들과 달리, 엑카르트는 성서를 잘 알고, 기독교 신앙의 성서적인 뿌리를 잘 알았던 영성 신학자이다. 그는 얀센의 이원론, 고행,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 남성 우월주의, 정치와 이 세계의 모순을 회피하는 내향적인 여행, 상아탑의 특권,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실로, 그의 영성은 서양에서 감상주의를 거부하는 최후의 영성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요 주제들을 아래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이 주제들은 창조중심 영성 신학의 개요를 말해줄 것이다. 엑카르트의 설교들 구석구석에 몇 번이고 거듭해서 등장하는 주제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하느님 말씀의 신학

 

    하느님의 창조적인 말씀(다바르). 여러 가지 면에서 엑카르트의 신학은 하느님의 창조적인 말씀, 곧 복(창조물)을 낳는 말씀의 신학이다. 하느님은 선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창조물-도 선하다. 엑카르트의 신학은 창조물의 선을 이야기하는 신학이며,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무르는'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이다. 이러한 신학은 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단언 신학(cataphatic)을 대표한다.(역주-단언 신학은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용어로서 '알려지지 않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계의 다양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2. 복의 영성

 

    엑카르트의 영성은 히브리 성서의 영성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복의 영성이다. 예컨대,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는다:

 

이제 그들은 시온 언덕에 와서 환성을 올릴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러 밀려들 것이다.

양의 새끼와 송아지까지 받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물댄 동산 같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이다(예레 31:12).

 

    엑카르트는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의 복이며, 거룩한 '존재'(isness)가 만물에 스며들어, 만물을 존재의 수준에서 동등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새롭게 뜻매김한다: 인간은 창조성과 자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도록 운명지어진 복 덩어리이다. 이 지구상에 사는 다른 피조물들도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베푼다. 히브리 성서의 야훼 기자가 그러하듯이, 에크하르트에게도 '삶은 곧 복이고, 복은 곧 삶이다.' 삶의 목적은 대지에서 달아나거나 기쁨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복을 다른 피조물과 다른 세대의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다(참조. 창세 1-4장).

 

3. 만유내재신론의 신학

 

    만유내재신론.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저기 바깥에' 있는 위격으로 생각하거나 하느님을 '저기 바깥에' 있는 전적 타자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엑카르트의 하느님 담화(談話), 에크하르트의 하느님 의식을 구성하는 안의 신학, 만유내재신론의 신학이다. 이러한 신학은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 맑게 비치는 하느님을 강조한다.

 

 

4.우리 한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실현된 종말론. 흔히들 천국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엑카르트는 그러한 생각을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엑카르트는 영생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늘나라가 우리에게서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면, 이것의 주된 이유는 우리가 삶을 이분법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하느님 안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승에서 충만한 시간을 경험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한가운데 있다.

 

 

5. 우주적 영성

 

     만물이 하느님의 복으로 가득한 우주 안에서 벌이는 축제. 모든 피조물이 복이라면,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신적인 기쁨의 바다 한가운데서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되 하느님 안에 머무른다면, 이들이 이미 시작된 충만한 시간을 맛보고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엑카르트의 영성은 내성적인 영성이 아니라 우주적인 영성이다. 에크하르트는 혼을 찾아서 우주 전체로 뛰어든다. 이 우주는 우리가 푹 잠겨 있고, 우리 안에 들어 있고, 우리의 바깥에 있는 우주이다. 이 우주의 열쇠가 되는 말은 기쁨과 축제이다.

 

 

6. 버리고 그대로 두는 영성

 

     버림과 그대로 둠,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거룩한 존재로 내버려두기. 피조물과 함께 기뻐하고, 피조물과 함께 잔치를 벌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움켜쥐려 하고, 통제하려 하고, 지시하려 하고, 소유하려 하고, 집착하려고 하는 우리의 성향이다. 엑카르트가 제시하는 영적인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근본적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방법이다. 그는 이렇게 조언한다: 버리고 그대로 두는 법을 배워라.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참된 경외와 감사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무(無)를 두려워하는 마음까지 버림으로써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가라앉는 복과 은혜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고, 창조주 안으로 가라앉을 수 있으며, 창조주 하느님 너머에 있는 하느님, 곧 신성 안으로 더 깊이 가라앉을 수 있다.

 

 

7. 부정신학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 이름 붙일 수 없는 하느님. 엑카르트는 단언 신학(cataphatic)의 영성뿐만 아니라 부정 신학(apophatic)의 영성도 전개하며(역주-부정 신학은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용어로서 '창조계의 다양성으로부터 부정을 통해 완전한 하느님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긍정의 길(via positiva)뿐만 아니라 부정의 길(via negativa)도 전개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무(無)의 경험은 자기(self)를 억누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self)를 버리고, 문화가 자기(self)에게 씌워놓은 이미지들을 버리고, 문화가 하느님에게 씌워놓은 이미지들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는 바닥을 알 수 없는 대양인 하느님의 심연으로 깊이 가라앉기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 '하느님, 내게서 하느님을 없애주십시오.'

 

 

8. 신앙과 계시만이 말해줄 수 있는 신비

 

     인간의 신화(神化). 엑카르트는 신앙과 계시만이 말해 줄 수 있는 신비 몇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심리학자도, 철학자도, 언어학자도 이 진리들을 말해 줄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네 의식의 돌파, 부활, 제2의 탄생을 요구하고, 보다 깊은 진리에 눈뜰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진리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우리 안에 신적인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전망을 버리고, 이 진리로 하여금 우리를 씻어내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처럼 창조할 수 있을 것이고,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 성장과정인 영성

 

     영성은 성장 과정이다. 엑카르트에게, 영성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인 잠재력의 끊임없는 확장이다. '천 년을 살거나 그 이상의 세월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더 늘어날 것이다.'(DW III, p. 582.) 그는 우리의 성장에는 한계가 없으며, 우리의 신성에도 한계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적인 자에게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성장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경쟁적으로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의 성장이다. 그것은 우주의 끝을 건드리고, 새로워진 우리의 원초적 근원으로 우리를 되돌리는 성장, 끊임없이 팽창하는 성장이다. 팽창과 수축, 안과 밖이야말로 엑카르트가 그리는 영적 여정의 기초 역학을 이룬다. 엑카르트는 위/아래를 그러한 여정에 걸맞은 범주로 여기지 않는다.

 

 

10.창조성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

 

     창조성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이다. 우리가 신적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우리네 신성의 성장에 복종하기만 한다면, 우리야말로 창조자인 것이다.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는 하느님의 발자국을 따른다. 실로, 창조 활동이나 예술 활동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활동이다. 그것은 만족을 주는 유일한 활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처럼 하는 유일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활동 속에서 삼위일체, 곧 존재와 앎과 행함의 삼위일체가 태어난다. 행위 혼자서는 적극적 행동주의에 빠지기 쉽고, 앎 혼자서는 정적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존재에서 태어나 존재로 돌아가는 행위와 앎은 신적인 활동이다. 왜냐하면 신적인 활동은 참된 창조성이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관상과 활동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은 진실로 삼위일체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영성에서 창조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다. 그는 낳음을 통해 중심을 잡는 외향적인 묵상을 추천한다. 방출이야말로 모든 창조적인 사람이 아름다움과 복을 나누기 위해 해야 할 훈련이다. 이러한 낳음 속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고,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는 물론이고 우리의 문화 속에서도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야 한다.

 

 

11. 자비로우신 하느님

 

     자비, 충만한 성숙의 경험. 하느님만이 자비롭다. 따라서 우리의 신적인 뿌리를 건드리는 것은 자비와 접촉하는 길이기도 하다. 엑카르트는 자비가 두 가지 차원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만물이 서로 의지하면서 창조계라는 이름의 신적인 바다에서 함께 헤엄을 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의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자비의 첫 번째 차원은 신비적인 차원이고, 두 번째 차원은 예언자적인 차원이다. 정의를 창출하거나 자비를 창출하는 것은 낳음과 창조성의 궁극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불의는 폭력과 이분법의 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하나됨과 신비스러운 자비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하나됨이야말로 만물의 기초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자비 안에서 태어났고, 거기로 돌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12. 왕다운 사람인 인간

 

     누구나 왕다운 사람이다. 엑카르트는 성서의 왕위 계승 전통에서 이 주제를 끌어낸다. 왕다운 사람은 고귀하고 존귀할 뿐만 아니라 정의와 자비를 창출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엑카르트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 하느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상기시키는 자다. 우리 모두가 왕다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탄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상기시키는 자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되라고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말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는 자신의 신적인 근원 및 자신의 신적인 운명과 접촉한 창조적이고 자비로운 분이다. 그는 자신이 복을 위한 복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귀인이자 왕이다.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만물'도 우리에게서 이러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엑카르트가 말하는 구원을 상기(想起)의 모티프로 활용한다.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로마서 12장 2절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변화된다'는 뜻의 말로 씌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일신'(一新)은 의식의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상태의 회복, 곧 아포카타스타시스(apocatastasis)를 의미한다. 이것은 심리학이 경험에 의거하여 발견한 사실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말하자면 의식의 시야에서 쉽게 사라지거나, 회심에 의해 조명된 의식이 그리스도라는 인물 속에서 그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코 인식되지 않는, 그러나 항상 존재하는 원형이 있다는 것을 심리학은 발견해낸 것이다. 이러한 '상기'(anamnesis)의 결과로 하느님 상(像)과 하나가 되는 원상태가 회복된다.(C. G. Jung,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in The Collected Works of C. G. Jung , Bollingen Series XX, Vol. 9, Part II, p. 40.)

 

 

14. 영원히 새롭고 젊음이신 하느님

 

     웃음, 새로움, 기쁨. 엑카르트에게, 하느님은 영원히 새롭고, 영원히 젊은 분이다.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파송된 하느님의 영을 받는 것은 곧 새로움과 젊음이라는 선물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다. 버림은 기쁨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을 의미한다. 신적인 기쁨은 우주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우주를 기쁨이 넘치고 늘 새로운 근원, 곧 참된 안식이 자리한 곳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자비 역시 우리의 으뜸가는 근원이다. 만물은 자비 안에서 태어났고, 자비에서 비롯되었다. 즐거움은 영적인 경험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즐거움을 피할 것이 아니라, 즐거움 속으로 뛰어들어 거기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려고 애써야 한다. 웃음 역시 버림과 그대로 둠의 궁극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웃음은 신적인 우주의 음악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핵에서는 웃음과 낳음이 하루 종일 계속되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경고한다: 소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그 사람이 말하는 영성의 중심에 기쁨이 자리하고 있지 않다면, 그런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나오면서

 

     이와 같이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제들을 간략히 살펴보건대, 우리는 창조라는 주제가 그의 사상 전체에서 얼마나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의 신성의 뿌리는 낳음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우리도 낳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고 하여도, 내가 그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엑카르트는 자기의 신학을 창조라는 주제로 시작하여 창조라는 주제로 끝마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말씀에서 태어났고, 새로운 피조물, 곧 하느님의 자비를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영적 여정을 일컬어 창조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피조물에서 끝을 맺는 여정이라고 부른다. 그는 창조중심 영성의 두 전통, 곧 켈트족의 유산과 성서적인 유산에 충실하다. 성서 신학자 끌로드 뜨레스몽땅은 성서적인 유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브리 사람들은 낳음의 과정, 성숙의 과정에 열정적인 주의를 기울였다.'(Claude Tresmontant, A Study of Hebrew Thought , p. 26.) 엑카르트도 그랬다. 엑카르트가 낳음의 동의어로 떠올린 용어 가운데 하나가 '돌파'(Durchbruch)다. 엑카르트의 영성은 새로운 탄생 내지 '돌파'를 대변한다. '돌파'는 본서의 제목으로도 손색이 없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엑카르트의 영성은 우리들에게 돌파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목록으로 제시한 열 네 개의 주제는 엑카르트 영성의 개요인 동시에, 창조 영성 일반의 개요이기도 하다. 엑카르트는 지난 여러 세기에 걸쳐 서양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사로잡았던 타락/구속의 영성을 돌파하고, 그 영성에서 탈출하고, 그 영성을 넘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엑카르트는 우리가 보다 성서적이고, 보다 더 창조를 지향하고, 보다 더 복되고 기쁨이 넘치며, 보다 더 정의를 지향하는 영적 비전속으로 뚫고 들어가도록 도움을 준다. 하지만 엑카르트가 경고한 대로, 돌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버림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에게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원론과 모든 이분법적인 영성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의 신비 공동체의 목을 휘감았던 타락/구속 영성의 패권을 돌파하고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엑카르트가 단죄된 순간, 서양의 영성에서 무언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끊어졌다.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신비주의와 손을 잡은 예언자 정신이었다. 그것은 자비를 지향하는 영성, 사회 정의와 의식의 성장을 담은 영성이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술가, 우리 한가운데 있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것은 영성의 핵심 요소인 웃음과 기쁨이었다. 그것은 기교를 동원하는 영적인 방법이 아니라 단순성이었다. 그것은 직업적인 종교인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신비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요컨대, 사라지고 대가 끊어진 것은 창조중심 영성이었다.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이처럼 풍부하고 건강하며 통전적인 전통으로 되돌아가자고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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