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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미학

마리아 아나빔 2011. 12. 7. 16:45

 

 

                                                황혼의 미학

                                    안셀림 그린의 황혼의 미학을 요점정리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면서

 

 

- 발리 섬의 한 외딴 산속 한 마을에, 노인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 안에서...

  통나무의 아래 위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들보를 거꾸로 세우면 집 

  이   무너져 죽을 수도 있었다.... 한 젊은이가

 

- 사회가 고령화되어가는 현상

 

- 모세는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지혜가 노인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칼 융은 노인이 젊은이처럼 행동하고 일에서 젊은이를 능가하는 열성과 성과를 보여야 한다면 이는 문화도착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사회는 지혜가 무엇이고 노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 이 감각을 발전시킬 때 사회가 품고 있는 보화를 발견하고 보존할 수 있다. 노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는 늙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모든 인간은 날마다 늙어간다 예외란 없다. 늙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 신비에 대한 성찰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늙느냐이다. 타고난 명인은 없지만, 여기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잘 늙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이러한 것을 자연 안에서 찾을 수 있다.

 

- 나이 드는 기술과 늙음이라는 예술작품을 향한 길은 결국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나 대신 늙어줄 사람은 없다. 나이 드는 기술에 대한 기본원칙이 몇 가지 있다.

 

- 놓아 버리기

- 자신을 넘어서기

- 노년의 덕을 습득하기

 

예) 생명을 꽃피우는 봄은 유년기와 청소년기

강렬한 햇볕을 비추는 여름은 청년기

노년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대로 아름답다. 햇볕은 부드러워지고, 아름다운 단풍에 할 말을 잃고, 수확의 기쁨과 창조의 은총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다. 인생의 ‘가을’에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는 일이 중요하다. 업적을 쌓는 대신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도 가을에 새 열매를 맺듯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도 노년의 과제다. 직접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예) 뜨깨질, 그림 그리기, 도자기 공예, 공작, 조형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 겨울도 겨울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겨울은 휴식과 고요로 충만하다. 눈 덮인 풍경을 보면 마술에 걸린 듯하다. 나이 드는 기술을 배우면서 가을과 겨울을 흉내 내면 어떨까? 아름답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가을과 사랑의 온기로 가득찬 평온하고 고요한 겨울이 되도록 노년의 삶을 가꾸는 것이다.

 

- 가을과 겨울에는 힘든 일도 겪는다. 가을 폭풍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친근한 것들을 앗아간다. 겨울 혹한은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 같다. 폭설로 세상과 격리될 수도 있다. 가을과 겨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혹독함도 받아들이는 것, 많은 일이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삶이 모든 시간을 변화시키고 따뜻하게 해 줄 사랑을 발견하는 것도 나이 드는 기술이다.

- 한 수사는 포도나무가 노년을 잘 상징한다고 말한다. 가을날의 포도 열매는 특별히 애쓰지 않는다. 수확 때까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포도주가 될 때까지 햇볕을 받으며 익어가기만 하면 된다. 노인은 더 이상 업적을 쌓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공로를 쌓아 남의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이것이 수동적 실존이 아님을 보여준다. 포도나무에는 나무를 살게 하는 내적 생명력이 있다. 따라서 노인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 표현할 수 있을 때 노년은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이 내적 생명력을 글이나 이야기, 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될 수 있다. 자기 영혼의 풍요로움을 표현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예)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파블로 카살스, 세르주 첼리비다케(음악가) 등은 고령에도

- 노인이 앉아 있는 안락의자도 노년을 상징한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저 보고만 있다. 노인의 눈길이 자기주의를 향하고 있더라도 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노인은 안락의자에 앉아 주위 사람들에게 평온과 확신을 선사한다. 안락의자 말고 공원이나 집 앞 벤치도 노년을 상징한다. 벤치는 노년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어도 대화가 이루어진다. 따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다. 겉으로는 분명 고독해 보이지만 노인들은 그 상황의 중심에 앉아 있는 셈이다. 벤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노인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면 노인들은 귀 기울여 듣고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누가 물으면 지난 시절을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렇게 그들은 삶의 일부를 이루며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행동은 젊은이들에게 맡긴다. 노인들은 간섭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의견을 물으면 몇 마디로 자기 생각을 내놓을 따름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축복이다.

 

- 늙음에 대한 성찰은 삶에 대한 성찰이다. 시폐르게스는 늙음과 올바른 삶의 기술에 대한 관계를 묘사한다.

 

늙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와 함께 세월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시간과 함께 가고, 시간 가운데 서며 시간을 거슬러 가기도 한다는 뜻이다. 늙는 것은 걷는 것이며, 사라지는 것이고, 자기 내면의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변화하는 것이다. 그때그때 겪는 작은 체험이 모여 큰 희망 가운데로 늘 새롭게 걷는 것이다. 따라서 늙음에 대해 사색할 때는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현재를 의식하며 주의 깊게 살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I. 노년의 의미

 

-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거부하고 옛것이라면 무조건 찬양하는 태도는 벌써 노년의 의미 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늙는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가 외적으로 부닥쳐야 하는 현상만은 아니다. 그보다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칼 융

 

인생은 태양이 뜨고 지는 것에 비유한다. 오전의 의미는 개인의 성숙과 발전, 외부 세계에 개인이 설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자식을 낳는 일, 후손을 돌보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생의 오후를 그저 오전에 딸린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서는 안 된다. 태양이 자신을 비추기 위해 광선을 끌어 모으듯, 나이 든 사람도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내면의 보화를 발견해야 한다.

 

- 모든 민족에게 노인은 “신비와 율법의 수호자”다. 노인들은 민족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삶을 의식하면 산 사람, 삶의 그릇을 넘치도록 채운 사람만이 훌륭하게 늙을 수 있다. 젊어서 치열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늙어서도 참삶을 살지 못한다. 살아 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채워지지 않는 많은 욕구를 지닌 채 노년이 문턱에 이른다. 이런 불만족스러운 마음은 노인의 눈길을 과거로 이끈다. 이런 사람의 생각과 말은 늘 과거만 맴돈다. 인색하고 과민하며 불평만 일삼고 젊음을 시샘한다. 심지어 영원히 젊음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는 참자아를 깨닫기를 거부하는 보잘것없는 대용물에 불과 하다. 인생의 후반도 전반부에서와 같은 원칙들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이런 잘못된 결과에 부닥친다.

 

- 융에 따르면 노년의 의미는 육체와 정신의 힘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면에 초점을 두는 데 있다. 인간의 풍요로움은 영혼에 있다. 노년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소중한 기억과 내적 보화를 발견하라고 우리를 일깨운다. 이 보화는 많은 상징과 경험으로 표현된다.

 

2) 헤르만 헤세

 

늙는다는 것이 쇠퇴와 소멸만 뜻하지는 않는다. 노년은 인생의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가치와 매력, 지혜와 슬픔이 있다. 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에 사람들은 노인을 존경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젊은이들이 이런 존경을 받겠다고 나선다.

따라서 노년의 가치와 의미를 실생활에 실현하려면, 헤세의 말대로 늙음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긍해야 한다. 수긍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요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늙든 젊든 상관없이 삶이 가치와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삶을 속이게 된다.

 

3) 로마노 과르디니

 

노년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첫째, 노인은 인생의 맥락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노년이 되면, 인생에는 다양한 성향, 업적, 승리와 패배, 기쁨과 고통이 복잡하게 얽혀 ‘인생’이라 부르는 놀라운 짜임새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년에는 삶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 삶 전체에 비추어 자기 인생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워진다. 그러므로 노년의 첫째의 의미이자 첫째 과제는 지혜롭게 되는 일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깊이 볼 줄 안다. EX) 십자가의 예수 “다 이루어 졌다.” /완성을 의미 즉 사랑이 결국 깨지기 쉬운 우리의 실존을 이어 주고 미완의 삶을 완성한다.

 

노년의 둘째 의미는, 노인은 영원과 특별하게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영원에 비추어볼 때, 다시 말해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비추어 볼 때 모든 현세적인 것은 하찮아진다.

“ 당면한 삶의 사물들과 사건들은 그 긴박성을 잃는다. 사고의 폭과 마음의 감각 능력을 빼앗는 난폭함은 사라진다. 중요하게 여기던 일들이 사소해지고, 그전에 사소하게 여기던 일들이 이제 진지해지면서 빛을 더해 간다.” 과르디니가 이해한 영원과 친밀함은 죽음과 친해지는 것 일뿐 아니라 변하지 않고 모든 변화를 견뎌 내는 영원을 향해 삶을 열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런 훌륭하게 늙는 것은 개인적인 일뿐 아니라 사회적인 일이기도 하다. 사회적 역할과 사회적 시각도 중요하다. 노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받는지 여부에 크게 달려 있다.

 

4) 성경

 

성경은 노년과 노년의 지혜가 지닌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루가 복음서는 노년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초반에 네 노인을 소개한다. 이 네 인물에게서 노년의 의미가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을 거룩함과 특별히 가까웠다.

예) 즈가리이와 엘리사벳: 침묵 안에서 자신의 노년에 거두리라 약속하신 열매를 믿는 법을 배운다. 친구들 앞에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심을 증거하고 성령으로 가득 찼다. 시메온과 한나: 구약성경이 말한 지혜로운 노인을 보여준다. “백발에 지혜가 있고 장수에 슬기가 깃든다(욥 12,12). 이 지혜로운 두 노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는다. 이들은 빼어난 성품 네 가지를 지닌 이들이다.

 

첫째, 의로운 사람: 자신과자신의 본질에 맞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롭게 처신하는 사람이었다.

둘째, 독실한 사람: 그들은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의 전 존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며 산 사람들이었다.

셋째,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 구원은 그리스어로 위로를 표현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렸다.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두려움 없이 늙어갈 수 있다.

넷째, 성령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 그들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영으로 가득차 있었다.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아기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신 빛임을 백성을 자유롭게 빛, 구원자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이 빛 안에서 노인들은 깊이 들여다본다.

 

끝으로 이들은 밤낮없이 기도하는 이들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 기도한다. 특히 기도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 무의탁 과부 곧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된 여자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1티모 5,5)

 

 

II. 노년의 지혜로 도달하는 방법

 

1. 자신을 받아들이기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사람만이 자신과 자기 삶의 맛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들이 많다. 그래서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EX) 한 퇴직 교수가 더 이상 강연이나 라디오 TV프로그램에 자신을 초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견디기 힘들었다고 하소연한다. 자신은 아직 세상에 할 이야기와 경험이 많은데, 세상이 자기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한다.

 

- 반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맺고 있던 적대 관계나 실패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 하느님을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저항하지 않고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을 찬양한다.

“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이십니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당신의 저의 보호자시니, 저의 찬양이 언제나 당신께 향합니다(시편 71, 5-6).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약해지고 있음을, 기력이 떨어지고 병들고 노쇠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다시 살릴 것을 굳게 믿는다. 그렇다면 이는 육체적 힘에 묶여 있지 않는 삶이다. 그가 믿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영적 삶이다. 가끔 땅 속 깊은 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울증이라는 어둠, 자기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삶을 꾸려 갈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이 땅 속 깊은 물에서 자신을 끌어 올리실 것이며 우울증의 어두운 나락에서 해방시키시고 약함 가운데 강함을 선사할 것을 믿는다.

성경은 늘고 병든 삶 가운데도 우리 안에 다른 삶이 자라고 있다고 거듭 묘사한다. 우리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태해가더라고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따라서 믿음으로 살 때만 육체적으로 쇠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할 줄 모른다(이사 40, 30-31).” “ 미래가 있는 사람은 젊다. 일흔 살 여든 살, 아흔살이라고 해도 영원을 앞에 둔 사람은 젊다.”

 

- 프레드릭 헤어는 죽음 앞에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현세를 축복한다. 과거에 있었고 지금 있는 것들에 대해 좋게 말한다. 자신이 축복했던 현세의 것을 손에서 놓으며 하느님의 초월성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

“ 사는 동안 지금 이 세상을 축복한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죽음에 대한 엄청난 공포와 사랑받지 못했던 삶이 갑자기 너무도 무겁고 어두운 압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잘 늙는 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껏 우리가 노래하고 말하고 행한 것이 그 맛을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노년은 자신에게 집중하고 삶을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잘 늙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삶이 맛을 잃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사하며 지난 삶을 돌이켜 보고 우리 삶과 화해한다면 아무리 무력하고 약하다 해도 주위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 삶을 하느님이라는 튼튼한 토대 위에 세울 때만, 노년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과거와 화해하기

 

노인들은 사사건건 트집 잡고 하느님과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볼 때마다 슬퍼진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 자신을 괴롭힌 운명의 시련, 자신이 부닥친 어려운 일만 생각하며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과거를 다른 자세로 대해야 한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과거를 대하는 자세는 바꿀 수 있다. 회한에 가득찬 사람의 아픔을 남이 덜어 주기는 쉽지 않으며 실망한 사람에게 희망과 신뢰를 주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노인이 지난 삶과 화해하지 못한 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과거와 화해하고자 할 때 무엇이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

고통이 다가오는 것을 억누르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늘 고통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를 부당하게 대하고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올라오면 그 역시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래, 정말 많이 아팠어, 하지만 과거가 나를 손에 쥐고 휘두르도록 놔두고 싶지 않아. 어쨌든 상처에도 살아남았잖아, 그 모든 것을 이겨 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결단을 내려야 해.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주었어,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나를 휘두를 힘을 주어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내게 달렸어,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싶은 가는 내 책임이야.

예) 부모와 자식, 부부, 형제관계 등등

우리는 자신을 용서해야 하고 용서해도 된다. 더 이상 실패에만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희망하면서 우리도 자신을 자비롭게 대해야 하며 지금까지 스스로 비난했던 모든 것을 용서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 받아들이기

 

- 자신이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ex) 젊은이처럼 일하기를 원하는 것,(커피)

스포츠에 자신이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함

산을 무리하게 오름

 

이 한계 내에서는 스포츠, 도보 여행을 물론 일에도 많은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종류와 장식이 달라져야한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행동할 때 자신의 한계를 가늠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무릎에 통증이 오면 이를 받아들어야 한다. 어떤 운동을 할 수 있는지 한계를 긋고 쇠약해지고 있다면 사실을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EX) 스포츠 광이 한 사람이 자신이 다리를 잃고, 넋두리와 고립에 아내의 절규에 정신이 들어, 그 후로 아내와 함께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다니고 산골로 여행을 다녔다. 둘은 많은 대화로 수 년 동안 맛보지 못한 감미로움을 맛보았다.

-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사자는 물론 자녀들도 고통을 겪는다.

 

고독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 노년은 고독하기 마련이다. 친구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젊은 사람들이 하는 활동적인 일에 참여할 수도 없다.

   우선 혼자 있음과 고독을 구별하자.

 

. 혼자 있으면 책을 읽거나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  이와 달리 고독은 어떤 느낌이다. 즉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하고 혼자 있으면 지루해서 ‘천장 무너질 것 같다’ 고 느끼는 사람이다. ‘ 외톨이’라는 느낌도 든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단절, 곤경에 처해도 주위에 아무도 없다.

 

- 헤르만 헤세는 고독을 받아들이는 일이 지혜로 가는 길이라 했다. 고독 앞에 서지 않으면 지혜로울 수가 없다. 어릴 때 혼자 노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성장하고도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상상의 날개를 펴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노년의 고독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 평생을 준비해야 한다.

.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일

. 주위의 고요함을 느끼고 내면으로 향하는 일, 자신이 삶과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

. 혼자 있는 걸 잘 견디는 방법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대신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핵심과 만나는 사람만이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다.

- 우리를 지탱해 주시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일이다.

  하느님은 어디서나 우리를 사랑과 치유로 감싸고 계신다. 고독할 때 그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하느님을 발견한다.

- 하느님 안에서 고향을 찾아야 한다. 우리 내면의 공간, 고향에 돌아오도록 해 주는 신비가 살고 있는 우리 내면의 공간에

   고향 을 찾아야 한다.

 

 

III. 놓아 버리기

 

노년은 놓아 버리는 걸 배우라고 요구한다. 우리 인생이 놓아버림의 연속이다. 나이가 들면서 놓아 버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고통스러워진다. (일, 직장, 사람, 마지막 기력마저 놓아야 한다.)

 

- 열정적이든 베드로도 노년에는 자신의 의지를 놓아야 했다. 두 팔을 벌리고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하는 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노년의 궁극적으로 중요한 일은 삶에 대한 관념을 버리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 즉 자신의 죽음에 마음을 여는 일이다. 죽음은 천천히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의지- 능동적 행위- 자아- 끝에 삶)

 

EX) 지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은 우리의 일부분을 하느님께 가져간다. 그리고 저 세상에 우리의 발을 더 가까이 들여놓는다. 점점 더 내념을 향하게 된다.

 

- 외적 가치를 놓아 버리면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인간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우리의 삶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 받아들여야만 놓을 수 있다. 삶을 기꺼이 살았을 때만 삶을 놓을 수 있다.

(융은 중년부터 죽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진정 사는 사람이다.)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늙어서 아무것도 놓을 수 없다.(아쉬움이 많기에)

- 놓아 버리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은 마음이 새롭게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무엇이 되기를 그만두는 일- 이것이 영성의 과제라고 한다.

  움켜쥐지 않고 놓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갈망이다.

- 우리의 재산, 건강 , 관계, 성, 권력, 마지막으로 자아를 놓는다.

 

재산에 집착하지 않기

 

- 재산에 집착하고 인색하며 한 푼도 내어 줄줄 모르는 노인을 보면 씁쓸하다.

죽어 싸늘해진 손이 아니라 온기가 남아 있는 따뜻한 손으로 베풀 줄 알아야 한다.

 

- 재산에 인생이 달려 있다고 보는 사람의 삶에는 냉기가 돈다.

우리는 죽을 때 남김없이 다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죽기 전에 연습해야 한다.(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누구에게 줄까 고민한다. 그는 놓아버리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노인이 재산을 놓으면 다른 이에게 마음이 열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건강에 매달리지 않기

 

- 건강을 재산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오랫동안 건강을 붙잡고 싶어 한다.

이들은 심기증이나 병에 대한 공포증에 걸린다. 일상이 모든 생각과 행동이 자기 건강에만 쏠린다. 자나 깨나 건강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의 삶은 기쁘지 않다. 건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노력이 되고 이 노력은 기쁨이 아니라 불안으로 그를 가득 채우고 만다.

건강을 최고의 재산, 건강이 종교를 대신하기 까지 한다.

 

- 노년에는 인간 실존의 더 깊은 차원에 가 닿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느님이 내 삶의 근원이고 최종 목표 일 때만 나는 노년을 느긋하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건강만 숭배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불안에 싸여 결국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

 

관계에 느긋해지기

 

- 노년에는 인간관계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절친했던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는다. 자식들은 기대했던 만큼 돌봐주지 않는다. 늙으면 배우자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까 불안하다. 오랜 세월을 같이 살며 사랑하던 사람을 잃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다.

혼자서 잘 사는 사람이 배우자를 선물로 여기고 아낄 수 있다.

 

- 부부는 동시에 죽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 사람이 먼저 가고 한 사람은 남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은 사람은 이 새로운 상황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EX) 죽은 사람을 숭배하기. 배우자와 이별하기 - 거부(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음) - 안정을 찾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

사람을 놓아 주어야만 하는 마음속에서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면 죽은 사람에게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내 안에 잠재된 능력과 재주, 활발히 활동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과 내가 만나게 된다.

 

성에서 자유로워지기

 

- 노년에도 성과 성애가 정열과 행복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노년에는 성이 사라진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늙어서도 깊은 애정으로 서로를 대하는 부부를 보면 흐뭇하다. 새롭게 애정을 느낀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는 노인도 있다. 그러나 노년에도 성과 성애는 삶에 기쁨이 되는 중요한 원천이다. 노인들인 자신이 성을 체험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성에 몹시 집착하는데도 성이 그전과 똑같은 쾌락의 원천이 아님을 느끼는 노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생식기 발육 이전의 욕구 충족단계”로 퇴화한다. 즉 모든 관심을 먹는 것에 집중한다. 또 하나의 잘못된 것은 음탕하게 “성적 행위를 관찰하거나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예) 목욕하는 수산나

 

- 성의 본질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노년에는 중요하다. 그러면 사랑은 젊었을 대만큼은 황홀하지는 않더라도 더욱 다정스러워진다. 자신이 인생의 단계와 성을 잘 융합시키는 노인도 많다. 자신이 육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몸을 건강하게 가꾸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제 성은 자신과 아무관계가 없다고 치부하고 자신의 몸을 가꾸지 않는 노인들도 많다.

- 노년에는 성을 억압하기보다 성의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성적 능력이 젊을 때 같지 않다고 약에 의존하고 성적 능력을 있음을 과신하는 성적 환상으로 달아난다.

 

- 노년에 성에 대해 성숙한 자세를 가지려면 충동을 조금 더 억제하고 성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괘락 기쁨뿐 아니라 다정함, 친근함, 아늑함으로 가득찬 사랑과 만나야 한다. 이런 자세를 갖추는 데 성공하면 성행위에서 서로에게 만족을 선사할 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서로 다정하게 대하는 새로운 깊이에 이르게 한다.

 

권력 내려놓기

 

노인들은 자신이 권력이나 영향력을 놓기 힘들어한다. 권력을 놓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감퇴하는 걸 더 많은 노력으로 채우고자 한다. 자신이 아직 모든 면에서 뛰어남을 젊은이들에게 증명하고자 한다.

- 권력에 집착할수록 적은 늘어간다. 진심으로 물러날 수 있게 되었으며, 권력을 내어 줌으로써 선물로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자아 버리기

 

- 최종적으로 노년에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자아 보다 더 큰 것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하려면 자아가 먼저 죽어야한다.” 예수님도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버린 다는 것은 저항하다 거리를 두다는 뜻이다. 재산, 권력, 건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궁극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자아를 버리는 일이다. 재산 권력은 자아를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 자아를 버리는 자신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일은 영적 도전이다.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지배해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다스리게 되면 온전한 자기가 된다. 이는 구원과 해방, 치유와 온전히 됨을 뜻한다.

- 살아가면서 명상, 사랑, 기도를 통해 ‘자아 버리기’를 연습할 수 있다. 자아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고 놓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환상을 깨고 하느님이 역사하시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그 무엇일 때, 지식으로 뽑낼 수 있을 때, 무엇을 소유하고, 관계로 자신을 규정할 때, 그 모든 것에 집착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놓을 때 하느님 안에 진정 자유롭다.

 

 

IV. 풍성한 열매

 

받아들이고 놓아버리는 데 성공한 사람은 노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는 의로움이고

2 다른 하나는 주님의 집에 심겨지는 일이다.

 

-의로움이란 사람은 자신의 실존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의롭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현실을 옳게 대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또한 사람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은 의롭다. 노년에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이들의 요구에 합당하게 처신하여 올바른 일을 행하는 사람만이 노년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주님의 집에 심겨지는 것이란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그래야만 육신은 쇠해도 나무는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늘 날 이러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노인들이 많다. 65세-75세까지 젊은 노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직 많은 일을 성취할 능력이 있다.

 

- 노년의 삶은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노인이 삶은 물처럼 흘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삶이 흐를 때 열매를 맺는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돕는 것이다.(톨스토이) 이들은 봉사하면서 그들의 새로운 능력을 키워간다. 병석이 누워있는 사람들이나 혼자 사는 사람들을 돕는다. 그들의 걱정거리와 힘든 을 들어준다.

 

- 취미는 노년이 다양함을 경험하게 해 주는 또 다른 방법이다. 취미를 즐기는 사람은 내적으로 만족하며 산다.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체념과 회한을 방지할 수 있다. 취미에 전념하는 사람은 창조력과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인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여행, 운동, 노래, 정원 가꾸기, 친교 즐기기, 자전거 여행 등등)

 

- 어떤 활동에 열정적으로 임할 때, 심혈을 기울일 대, 사랑이 거기로 흘러들러 갈 때만 성취감을 느낀다. 노년의 중요한 과제는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했다.(칼 라너) 또한 다채롭게 보낼 가능성들이 오늘날 많다. 여러 가지 문화와 교육의 기회들이 있다. 노인들이야 말고 모든 공동체, 가정 , 도시 나라전체의 축복이다.

 

 

 

V. 함께 늙어가기

 

소외감을 느끼는 사회에 격리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기에 친교가 우선적이다. 함께 일하고 이야기 나누고 커피를 마실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해묵은 마음의 상처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치유가 된다. 함께 늙어가는 것은 부부의 과제이다. 늙어서도 부부사이가 원만하려면 배우자의 몸과 영혼의 건강이 어떠하든 그를 동행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근본적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퇴직 후 부부사이에 위기가 올 수 도 있다. 남편이 아침에 나갔을 때 아내는 낮 시간을 마음대로 썼다. 그런데 하루 종일 이제 두 사람이 다 집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내를 답답하게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원할하게 하려면 함께 보내는 시간과 거리를 두는 시간을 새롭게 조절해야 한다. 남편은 소일거리를 만들어, 아내만 쳐다보면서 사사건건 참견하지 않아야 한다. 배우자 각자가 자신을 위해 잘 살 수 있어야 부부사이도 바람직하게 유지되는 법이다. 이들은 자식만 아니라 자신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노년은 배우자에게는 물론 자녀들에게도 축복이 된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능력을 키워야 한다.

 

- 노년에는 병석에서도 의미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병든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 부담만 주는 처지가 되었다고 느낀다. 이때 기도는 병든 사람에게 자신이 공동체, 가족, 자식, 손자, 손녀들을 위해 중요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준다.

-노인들과 함께 살면서 늙어가는 그들을 동행하고자 할 때 먼저 늙어가는 ‘나’와 만나야 한다. 노인을 친절하게 대하는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도 늙는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만 노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노인이 자신을 무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낄지라도 가족은 노인의 덕을 많이 입고 산다는 사실을 안다. 노인과 젊은이는 각자 삶을 살도록 서로 허락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며 살아야 한다.

 

 

VI. 노년의 덕

 

잘 늙으려면 몇 가지 덕이 필요하다. ‘덕’이란 쓸모 있다는 동사에서 나왔다. 저절로 쓸모있게 늙는 것이 아니라 노년에도 자신을 지탱해주는 몇 가지 태도를 연습해야 한다.

 

- 판단력

- 건전한 의견

- 지혜와 지성

- 주님을 경외함

 

- 분명한 판단력과 유익한 충고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늙어서 자아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분명하게 판단하고 유익하게 충고해 줄 능력이 있다.

- 성경은 지혜, 신중, 통찰을 보았다. 세상과 인간 삶의 더 깊은 통찰을 얻으려면 주님의 영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기서 몇 가지 덕을 보자. 덕이 우리가 늙어가는 데 도움을 준다면 덕을 얻으려는 노력은 또한 은총의 선물이다.

 

평정

 

성숙함의 덕이다. 이것은 놓아버리기와 관련이 있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놓아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일은 평화를 준다.

평정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다. 그래서 평정은 관용과 관련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바꿀 필요는 없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 자기 삶을 의연하게 바라보면서 체념하지 않고 신뢰에 가득찬 마음으로 노년을 맞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대로 놓아둘 줄 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평정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타인과 의 만남에 마음이 열릴 시간이 필요하다. 짦은 시간 안에 해결하려는 강박관념에서 헤어날 수 있다. 하느님과 자신의 시간 안에 자유롭다. 자기 중심에 머무르는 사람이 평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중심에서 벗어나 사소한 일에 몹시 흥분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좌우된다. 평정해지면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와 요구에서 자유로워진다. 최고의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기대에서 자유롭다.

 

인내

 

인내는 평정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평정한 사람은 인내심도 많다. 인내는 밑에 남다. 무엇을 짊어지다. 견디다. 참다. 물러서지 않다는 뜻이다. 인내는 삶을 받쳐주는 기둥이다. 또한 인내는 고통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 인내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결점 모두를 견뎌 냄을 뜻한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이는 고통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그 사람 곁에 있으며 그를 소중히 여긴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인내는 무엇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노년을 평화로운 관계에서 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예의를 지키지 않고, 육체는 말을 듣지 않고... 성급함이 앞서고, 예민해진다.) 그럴 때 인내의 덕을 의식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인내에는 유머도 필요하다. 자시의 약점을 깨닫고 이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주위 사람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대할 수 있다.

인내의 본질은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인내심 많은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견딘다. 자신의 심신 상태와 결함을 허락한다.

 

온유

 

에바그리우스는 진정으로 신앙 깊은 사람의 특징은 바로 온유라고 했다. 온유는 노인을 완성한다. 늙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온유하게 대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온유는 모든 것을 끌어당길 수 있는 용기가 온유이다. 예수님의 찬지의 비유 안에서 온유를 만날 수 있다. 노인은 자기 기억 속에서 전 생애를 모아 예수님이 식탁으로 가져간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삶의 모든 부유함을 내면에 모아들였다. 그의 삶은 풍요롭고 너그럽다. 그는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며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져 있다. 온유한 사람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내면에서 체험한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내면에서 모았기 때문이다.

 

자유

 

자유고 나이 들면서 훈련해야 할 덕이다. 자유는 삶을 여유롭게 바라보게 하며, 덜 공격적이면서 자발적으로 대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경직되고 완고해지기 쉽다. 노년의 고집이라는 말도 있다. 노년의 고집은 점점 더 심해지기 마련이다. 노년에 고집스러워지지 않으려면 자유를 향해 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기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내적 독립과 만족, 행복으로 가는 길로써 자유를 경험한다.

 

감사

 

감사의 덕을 배워야만 훌륭하게 나이들 들 수 있다. 늘 불만에 가득차 손해만 보고 살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을 결코 즐기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지난날에 대한 기억을 감하하는 마음으로 즐길 수 없다. 우리는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감사가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경험해야 한다. 감사는 심장을 따뜻하게 하고 좋은 느낌을 향해 마음을 열어 준다. 감사는 마음의 기억력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한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도둑질 보다 나쁘다.(탈무드) 감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이라 한다. 감사가 없으면 인간성이 위협받는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우정을 나눌 수 있으며 친교를 이루며 살 수 있다. 감사는 모든 덕의 어머니이다. (키케로) 감사를 모르는 것은 모든 과오와 범죄의 뿌리이다. 오늘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사랑

 

노년에 배워야 할 덕은 사랑이다.새롭게 사랑하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노년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과 자신의 행복만 생각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새롭게 사랑할 능력과 기회도 있다.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랑할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나르시시즘, 자기애, 아집을 버림으로써 이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얼굴을 보면 사랑이 발산되는 노인이 있다. 그들의 얼굴은 늙고 주름투성이어도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편안하다. 그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 준다. 이 사랑은 안온함을 선사하고 이해받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내가 나여도 된다는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

 

 

VI. 불안과 우울 다루기

 

세상에는 사랑이 넘치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노년에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노인들도 많다. 심리학적으로 ‘노인성 우울증’이라고 부르는데, 평생 한번도 우울증에 걸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고생한다. 이런 이들에 대해 이러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새롭고 어려운 상황을 훌륭하게 대처하는 자세다. 불안과 우울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

 

-노인성 우울증은 자기 일과 능력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 특히 남자는 정년퇴직 후 우울증으로 고생한다. 자신의 실존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울은 삶을 위한 새로운 기초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통로와 같다. 새로운 기초를 발견하면 그 전에 통용되던 가치들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열린다. 많은 일을 성취하기보다 실존자체가 중요해진다.

예) 평생 많은 업적을 이룬 부인에게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그냥 두라고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은 새로운 전환점이다. 배우자를 잃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온통 자신을 그에게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정년퇴직, 이사, 재산의 상실 등으로 인해 익숙했던 삶의 테두리에서 끌려나온다. 이 상실을 상쇄하기에 노인의 심리적 힘은 너무 약하다.

 

이때 역시 자신의 여생을 새로운 기초 위에 세우고 하느님에게서 새로운 의지처를 찾기 위해 거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이다. 자식들은 배우자를 잃은 고독과 우울한 부모를 이해하고 동행해야 한다.

- 노인의 삶에는 우울한 단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병도 있다. 우울증은 외적 상황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노인은 정년퇴직, 이사, 재산의 상실 등으로 인해 익숙했던 삶의 테두리에서 끌려나온다. 이 상실을 상쇄하기에 노인의 심리적 힘은 너무 약하다. 나이가 들면 마음의 짐이 되는 상황을 견뎌 내는 데 필요한 심리적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다. 이때 당사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의사에게 터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 하는 노인은 많지 않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우울증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 계속 무기력하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하찮은 일에 매달려 그 일만 생각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다음은 우울증의 증세이다.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제는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도 내 탓이다.”

- 우울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는 많다. 혼자 사는게 슬퍼서, 아끼던 사람을 잃어서 그러려니 생각한다. “독일에서는 매일 최소한 노인 열명이 절망, 우울, 불안에 때문에 자살한다.” 노인의 자살률은 젊은 사람보다 높다. 노인 세 명중 한명이 의사가 필요한 우울증이다. 평생우울증을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 노인성 우울은 지금까지의 삶을 결정짓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리라고 요구한다. 신앙, 건강, 낙천성, 능력, 자유, 창조력등 우울증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을 허락하는 일의 영적도전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늙어서도 갖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 슬퍼하지 않을 수없다.

- 이때 우리는 우울증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울증은 삶의 새로운 원천으로, 새로운 자아상과 변화된 하느님 상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 심리요법이 도움이 된다. 좋은 대화는 노인이 자기 삶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해 줄 뿐 아니라 신경생리학이 보여 주듯 두뇌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도 한다.

 

- 우울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 겸허해야 한다.

. 내면 깊은 곳으로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라는 초대이다.(거기는 우울증이 설 자리가 없다.)

 

- 알츠하이머병

 

방향감각이 무뎌지고 :사고의 결핍, 생각의 반복, 집중력 저하, 이해력 부족, 판단력 상실, 정서 불안, 감정 통제 불능“에 시달린다.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보장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년기의 지적 능력은 지각이 질에 달려있다. 따라서 노년에는 모든 지각을 동원해서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냄새를 맡게 하여 옛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환자는 삶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측면과 접하게 된다. 그렇다고 병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한다.

 

- 노인들의 불안

. 정신을 잃게 될 것 같은 불안.

. 삶에 대한 일반적인 불안

. 생존에 대한 불안

. 의지할 곳이 없음에 대한 불안

. 병에 대한 불안

.자기 통제를 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불안

. 삶의 변화에 따라 자기에게 주어질 새로운 발전과 과제에 대한 불안

. 죽음에 대한 불안

 

늙어서 생기는 불안은 다양하고 저마다 다르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죽을 때 자신의 진실성과 대면하게 될 것이며 그 때문에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 두려움이 연습할 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불안을 바라보는 일이다. 누가 나를 떠나 버릴까 봐 두렵다면 이 두려움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초로 하여 내 삶의 집을 지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내 곁에 머무르실 것이다. 늘 나를 지탱하던 그분의 천사가 나를 죽음의 문턱을 넘어 데리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한순간도(죽음의 순간에도) 완전히 홀로 있지 않을 것이다.

 

 

VIII. 침묵의 길

 

잘 늙어가려면 고요해질 수 있어야 한다. 고요는 과거와 현재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 조용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 관조적인 고요 안에서 그는 소중한 영상, 인간의 모습, 인간의 얼굴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기고 바라본다. 이러한 응시, 관조, 관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습관이 되고 훈련이 된다. 조급하게 안달하며 긴장과 기대에 가득 찬 마음으로, 성공과 실패에 흥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자기 삶의 그림책을 훑어보면서, 젊은 날의 그 분망한 쫓김에서 벗어나 ‘관조적 삶’에 다다른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깨달으며 놀라워한다.

 

- 시골에 가면 집 앞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그저 바라보는 노인들을 만난다. 그들의 눈길은 자기 내면을 향해 있다. 관조적 삶이란 과거의 신비를 보는 것이다. 그런 노인들은 몇 시간이고 창가에 앉아 자연을 바라본다. 봄에 피어나고 가을에는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나무와 꽃의 아름다움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과거가 늘 살아 있다. 이 과거가 이제 현재다.

 

- 늙어 침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는 평화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늙은 얼굴에 선량함을 가득 담고 침묵하는 사람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부드러운 ‘황혼 빛’을 비춰 준다. 늙어 가면서 중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러워지는 일이다.

‘부드러운’은 ‘곡식을 갈다’에서 왔다. 인생의 방앗간에서 갈렸을 때, 껍질과 모든 딱딱한 것이 갈렸을 때 우리는 부드러워진다. 그렇게 부드러운 노인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이 된다.

 

- 늙어서 침묵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고독하다고 푸념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 가운데서 자기가 경험한 모든 것, 자기가 만난 사람들, 이제는 하느님의 영원한 품에 안겨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하나임을 느낀다. 따라서 침묵은 그를 하느님 세계로 훌쩍 옮겨 놓는다. 고요한 노인은 말없이 자기 삶의 ‘그림책’을 훑어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되돌아본다.

 

- 회상은 과거 속에서만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회상은 내가 살아낸 것좋은 방법으로 고요를 살아 내려면 회상의 힘이 필요하다.을 지금 이 순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회상은 쫓겨나지 않는 유일한 낙원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회상하느냐가 중요하다.

늙어가면서 옛 상처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아물도록 회상하는 일이다. 노인들이 회한이나 타인에 대한 비난 없이 옛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이미 정화하고 치유하는 효력이 있다. 그렇게 하면 자기만의 인생사에서 터져 나온 상처들의 외침이 잦아든다. 회상은 과거를 만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현재를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노인들이 과거를 회상한다고 해서 현재를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침묵을 죽음의 준비를 의미한다. 죽음 앞에 서 있을 때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은 말이 없다. 남에게 전하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다. 그래서 지혜로운 노인들은 침묵한다. 이제는 말을 충분히 했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정말 본질적인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EX) 헤르만 헤세의 집 대문에 있는 맹자의 말

 

늙어할 일을 다 했다면 고요 속에서 죽음을 친구 삼을 권리가 있다. 그에게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사람들을 이미 잘 알고 있고 사는 동안 충분히 보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고요이다.

 

노인의 몇 마디는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춰 주는 등불과 같고 저세상에서 오는 섬광과도 같다. 어느 정신질환을 앓은 젊은이가 노인 수사를 찾아왔다. 몇 시간 동안 아무 말없이 그냥 옆에서 일하게 했다. 이 침묵은 불안한 젊은이들에게 큰 신뢰를 주었다. 이 젊은이는 그 수사에게 영혼의 고뇌를 털어 놓곤 했다. 그들에게 침묵은 안온함과 신뢰의 공간,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침묵의 절정은 하느님 앞에 고요해지는 것,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사랑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침묵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그들은 신비로운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말과 개념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감지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만 남게 되며 그 앞에서는 오직 침묵할 뿐이다.

 

- 영적 전통은 고요와 침묵을 구별한다. 침묵은 인간의 행위다. 인간은 말하기를 멈춘다. 침묵한다. 과묵은 덕이다. 고요는 상태다. 침묵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고요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고요는 인간이 무엇을 하기 전에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다. 노인은 침묵할 뿐 아니라 고요해지기도 한다. 그에게서 고요가 흘러나온다. 노인이 하느님 앞에서 고요해지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고요의 장소가 된다.

 

 

IX. 자신을 넘어서기

 

심리학자 프리츠 리만은 자신을 초월하는 것, 자기 경계를 초자아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 노인에게 주어진 본질적 과제라고 본다. 이것이 종교적 형태로 일어나느냐, 깨달음, 신비체험, 명상, 크나큰 사랑을 통해 일어나느냐에 상관없이 초월의 경험은 노년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가치 가운데 하나다. 초월과정에서 나는 자아에 대한 병적 집착을 버리고 나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마음을 열게 된다. 망아를 통한 의식확장 이것은 우주적 느낌이 될 수 있다. 우주와 내가 하나임을 안다. 즉 우리가 우주의 한 부분이라 느낀다. 그러면 고독하지 않다. 호흡은 이 우주와 결합을 느끼는 한 방법이다. 숨을 들이쉬면 우주가 내 안으로 숨을 내쉬고, 내가 숨을 내쉬면 우주가 나를 들이쉰다.

 

- 어리석게도 젊었을 때를 흉내 내느라 옛 시절에 하던 잡다한 일들로 시간을 채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한다. 노인들은 이 시간을 사색으로 채워야 한다. 유머는 자기 초월의 중요한 특징이다. 유머는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존재임을 드러내는 특징이다. 유머는 인간이 자신 뒤로 물러설 줄 알며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대신 미소 지스며 한번쯤은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월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를 잊고 무한하신 창조주를 향해 자신을 열며, 그분에 의해, 그분 안에서 지탱되고 있음을 느낀다. 나이 든다는 것은 결국 영적 여정이다. 또한 신앙은 저절로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노인이라 해서 신앙이 깊은 것은 아니다. 노년에도 신앙은 변한다. 늙어가면서 신앙에 대해서도 새롭게 사색해야한다. 노년에 신앙의 위기를 맞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자식과 배우자를 모두 잃고, 때론 어린 시절에 배운 교리들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하느님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신앙을 돌리고, 하느님 앞에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한다. 신앙을 토대로 살아온 삶에 신앙을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인들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내면의 영상을 보아야 한다. (TV을 보기보다)

노년에는 여성이 단순해지며 하느님의 초월성이 중요해진다.

 

- 노인들의 영성에서 나는 두 가지 형태를 본다. 첫째는 지금까지 자신의 영성을 지탱해 주던 외적 의식을 노년에 잃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기도할 수 없고 미사에도 갈 수 없다. 겉으로 보면 이제까지 실행한 모든 경건한 의식을 빼앗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아와 영적 의식을 놓아 버린다.

 

 

둘째, 어떤 노인들은 TV미사 안에서 화면을 보며 미사를 드린다. 그리고 어릴 적 외운 기도문이나 노래를 찾아 한다. 이때 어릴 때 쓰던 기도와 노래가 그들을 지탱하고 계신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현한다. 나이가 들면 우리 영성의 풍요로움을 포기하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영성을 간단한 기도와 침묵으로 제한한다. 마음이 가난한 가운데 우리의 공허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하느님에게 우리를 온전히 맡긴다.

 

 

X. 죽는 연습

 

노인이 해야 할 마지막 영적 도전은 죽는 연습이다. 죽음은 노인이 비단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대면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늘 삶 속에 있다. 칼 라너는 “행하는 모든 것에 내재한 죽음” 대해 이야기 한다. 이는 인간사에서 시간이 갈수록 죽음의 요소가 점점 쌓여가는 구체적 과정을 뜻한다. 또한 행하는 모든 것에 내재한 죽음이란 결함, 질병, 실망의 체험에서 한 조각 죽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한 조각죽음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삶의 재화의 침몰이다. 분할되어 일어나는 이 작은 죽음 안에서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선다. 그는 질병의 경험은 죽음의 현존으로 보았다.

 

- 노인에게 요구되는 죽는 연습이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실현된다고 본다. 노년의 영성에서 핵심은 “마지막으로 요구되는 십자가 사랑을 연습하는 일이다. 삶은 죽음의 나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 사랑을 연습해야 한다. 노쇠 현상과 삶에 죽음이 현존한다는 사실에 맞서기를 쓰고 저할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죽는 연습을 할 수 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나는 내가 늙어 간다는 사실, 점점 커지는 고독, 또래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칼 라너는 나에게 요구되는 죽음을 연습하고 죽음을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랑이 바로 열쇠라고 본다.

 

-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은 체념하여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사랑의 행위로 변화 시키는 것이다. 죽음을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헌신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죽음의 사랑의 완성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죽음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다. 죽음은 어떤 저의 때문에 흐려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 헌신의 행위이다.

 

- 영성에서뿐 아니라 심리학에서도 죽음의 준비는 노년이 안고 있는 과제이다. 죽음을 자기 인생을 완성시키며 하느님의 영원 가운데서 새롭게 피어나게 해 주는 의미심장한 목표로 여기는 사람만이 노년을 평정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노년에도 활기차게 산다. 목표를 염두 해 두고 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선사된 불사에 대한 믿음은 실제로 심리학에서도 영혼의 치료제다. 영혼은 죽음을 준비하고,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목표로 대할 때 건강하다. 제대로 산 사람이 잘 죽을 수 있다. 성경 안에서도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린 노인으로,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갔다.” 창세기의 이들에는 죽음은 나보다 먼저 살았던 모든 사람과의 연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죽음에 반항하지 않는다. 감사하며 삶을 되돌아본다. 죽음으로 선조들과 하나 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 중세는 나름의 ‘죽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기술의 핵심은 좋은 임종을 위한 준비다. 늘 좋은 임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 준비는 가끔 불안을 일으킨다. 그러나 거듭 죽음을 상기하고 마지막 발걸음을 잘 내딛게 해 달라고 청하는 의미가 있다. 좋은 임종을 위한 기도의 핵심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고 그 단계에서 의미를 찾는 데 있다. 우리는 좋은 방법으로 죽음이라는 목표에 다가가 그곳에 도착 했을 때 ‘승자가 받을 상’ 즉 영생과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따라서 중세에 발전된 ‘죽는 기술’의 핵심은 좋은 임종을 위한 연습,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는 죽음이 되기 위한 연습, 다른 사람들이 우리 죽음에 힘입어 살기 위한 연습이다.

 

- 잘 죽을 수 있는 몇 가지 연습

.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가 모든 인간과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죽으면서 우리는 인류 가족과 하나가 된다. 죽음이 어떤 것보다 우리를 강하게 다른 사람들과 연대감으로 이끌고 합일 시킨다. 죽음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대신 새로운 형태의 기쁨을 열어 준다. 삶의 최후로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약속이 된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죽으면 다 땅으로 돌아가지요.

 

-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우리와 친숙한 사람들과의 일치 가운데서 죽는 일이며 그들을 위해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복음서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신앙 가운데 견뎌내면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잘 죽는 길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 죽을 때 열린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으로 들어감을 주저하지 않으면 우리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게 된다.

 

죽음에 있어서 가장 좋은 연습은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 살면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의 죽음은 죽음과의 고독한 싸움이 아니라 헌신이 된다. 죽으면서 사랑을 완성한다면 죽음이 구원되며,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무엇인가가 해결된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들은 우리와 하느님과 새롭게 결속됨을 느낀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노년은 다름대로 영적 도전이 있다. 받아들이고 놓아 버리기에 대해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으로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과제를 놓아 버려야 할 상황이 되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를 내면의 길로 안내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영혼의 고요한 세계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굳게 믿는다.

 

노인들은 현세의 삶에 대한 용기와 영생에 대한 희망 사이의 기이하고 유일무이한 긴장 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살아 있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이곳의 삶의 빛은 확실히 점점 더 흐려지고 낮아지며 불안하게 떨리곤 한다. 삶의 기력이 감퇴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담담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살고 있다. 그러니 여생을 정말로 살고 또 가득 채우고 싶어 해야 한다. (Rahner)

 

늙어서 지혜로워지고 자신과 평화롭게 살며 주위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선사하는 노인을 보면, 우리는 그가 가족과 다른 사람들, 이 세상을 위한 축복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 약속은 우리 모두에게도 하신 약속이다. 이 약속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 고독과 노쇠, 늙고 죽는 일을 긍정하는데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가 죽을 때 사람들이 “그분은 우리를 위한 축복이었고 또 여전히 축복이다”라고 말할 것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

 

 

 

 

                                 -  황혼의 미학, 안셀름 그린 지음 / 윤선아 옮김, 분도 출판사,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