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찬가
2012년 2월9일-16일 이연학(요나 ) 신부님 연피정 강의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친아들이며 딸이다. 그 진리 때문에 아까워하지 않고, 생색내지 않고,
독점하려 하지 않고 , 예수님이 걸으신 여정을 걷는다.
그러나 내 노력으로는 안되고, 하느님께 온 팍 받았다는 실존적 체험을 했을 때만 가능하다
.(EK-stasis)내 마음의 자리가( 불판이) 바뀌고 (그릇이) 바로 놓이게 된다.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고 받았던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주님께 향 할 수 있다.
나에게서 중심이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 온 마음과 몸이 상대방에 순수하게 꽃 친 상태가 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자신)를 고집하지 않으시고, 너 라는 존재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아버지 안이 비워져서 아들이 있는 것,
아버지 사랑으로 꽉 찬 아들도 너무 좋고 고마워서 사랑 때문에 비워드리고 싶은 것이다.
아들의 중심축이 나로부터 아버지께 건너가 있는 상태의 순환이다.
비워져 있는 공간에 아버지가 들어가 있는 순환, 상대방이 내 안에 들어와서 투명하게 되는 상태,
아버지의 영광(빛)이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한 의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스위스 꼼지르타 신학자(Hans U Balthasa)는
십자가에서 성자가 죽으신 것만 아니라,
한 처음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있도록 (타자가 발생 하도록 )허락 해 주신 것이
성부 하느님의 죽음이다 라고 했다.
요한1서 3장 참조 관계시작은 내려놓음에서 출발한다.
태초부터 성자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알고 계시기에 아버지께 향해 계시다.
하느님 아버지께 충만하게 받음을 실존적으로 체험할 때 사랑으로 내 존재, 삶을 껴안을 수 있다.
이때 (지독하게 다른 타인들을) 새로운 인간관계로 형성 할 수 있다.
1. 선사의 흐름
받음(음미)→ 감사(충만한 체험) → 봉헌(내려놓고 받침) ≠
2. 선망의 흐름(세상의 흐름)은 죽음의 문화이다.
: 소유 노획물의 논리, 내 꺼라는 것이 원래부터 있다는 논리.
안받음(원망,박탈, 서운함)→ 시기심『원죄:하느님께 대한시기심』, 경쟁이 생김
→ 폭력(존재제거, 탈취, 존재파괴)
『하느님께 대한시기심』 이란
:나는 하느님이 되면 안되나?
:왜 너만 주인공이냐 나도 주인공이 되면 안되나?
뱀(처음부터 거짓말 하는 자이다.) 의 유혹이다.
- 아담과 하와의 잘못된 인식
뱀은 하느님의 생각과 이미지를 속였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사람을 만든 사실을 속였다.
하느님은 인색하고 째째 하고 자기 것을 애착하는 하느님으로 속였다.
신성을 아끼고 거머쥐는 하느님으로 적수이며 경쟁자로 인식하게 속였다.
아담과 하와는 지들의 꼴대로 하느님을 만들었다. 이 것이 우상숭배다.
창세기 하느님의 금령의 의미는 『구분』이다.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은 좋은 것이다. 지 켜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 것은 인식의 한 계인데, 한계인식은 초라하게 하지 않고, 충분하다는 것을 제시 해 준다.
삼위일체에서 위격에 해당하는 말
persona〓 위격 : 그것이 그 자신이게 하는 고유성에 구분됨이다. ≠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만들어 주셨고,하느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즉 우리가 받은 생명은 하느님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르네지라르는 말한다.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상대방이 누리고 있는걸 보니까 갖고 싶어진다. 욕망의 삼각관계 나→시계→시계 갖은 자→나
선망의 인간관계에서는 죽음의문화가 나온다.
1. 흡수통일: 통일의 기준이 나이다. 나에게 맞춰라!
2. 분단고착: 보이지 않은 금을 만든다. 세상전쟁의 씨앗은 내 안에 있다.
3. 투명인간 테크릭 : 말의 길이 막히고, 기가 막힌 단절의 상태이다.
:내가 없는 존재로 있는 상태
:상대를 없는 존재로 만든 상태(무시)
7세기 은수자 Maximus confessor 은 창조자 하느님의 진면목을 말씀하셨다.
충만한 하느님의 기쁨의 행복에 참여하게 하고 싶어서 창조하셨다.
동방교회
Deification
Theosis
神化: 사람이 하느님이 되다. 신화된 신앙인은 성모님이다.
아타나시오 교부은 하느님이 왜 사람이 되셨는가?
사람이 하느님(神化)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필리비 찬가는 하느님을 만남과 신화된 길을 보여준다.
神化는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이 내 맘속에 깊이 들어올수 있게 즉 주님께서 내 안의
주도권을 행사하시게 되는 상황이다.
예수님 모습은 사람을 돕는 자을 넘어 그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
예) 신영복 옥중서간 중
머리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은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은 발 좋은 것만 못하다.
작가의 글속에서 강생교리을 느끼게 한다.
관찰→ 애정→ 실천→ 입장의 동일화
진리, 진실 앞에 쪽팔리지 않는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나를 부끄럽게도 하지만 그들로 해서 희망을 본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본질인 삼위일체론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안에 계셨기 때문에
☞Pl 복수다.≠ 이스라엘,이슬람은 유일신이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다를 게 없다면 하느님인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신앙심을 키워가야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관념이 필요 없다.
아리우스 이단의 케치 플레이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비슷하다.』
옛이야기가 아니라 현재형 일수 있다. 내가 만든 주님은 어떠한가? 예수우상
솔직한 표현일수 있다.
장점은 합리적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초월성이나 pl복수문제점이 사라진다.
당시 완덕 수행자들인 사막의 수도자들에게
아리우스의 이야기는 솔깃하게 끌리고 희망과 목표을 줬다. ≠
아타나시우스 교부은 교회의 내적 영향력을 주던 사막 수도자들의 쏠림이 걱정이 되어
맞대응으로 『안토니오의 생애』을 지필 한다. 서방신앙의 기둥인 책이다. 즉 책을 통해
본인노력 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더 크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신약성경이 공유하는 메시지
삼위일체 하느님 즉 십자가에 주님을 죽인 죄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관계의 관점으로 접근하라.
복음에서 섬기는 자는 자유로운 사람 일 때 섬길 수 있다.
사람을 돕는다, 위한다 하면서 돕는다는 것이 나에게 남아 있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교부들의 깨달음
『놀라운 교환』 이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하느님의 자리가 바꿔지기 됐다
대속교리의 깊은 뜻은 상대방에 고통에 내가 그 자리에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다.
본헤퍼는 말한다.
하느님은 현명한 아버지 같아서 자기 자식이 어른이 되길 바라시는 분이시다.
아버지 없이도 독립적으로 해 나갈 수 있게 되길 바라신다.
에카르트도 말한다.
하느님 저를 당신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것으로 구원하지 않고, 당신이 격으신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passion
사흘 동안의 무력함으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그 상태로, 사랑이 지닌 깊은 형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은 같아질 때만 구원된다
예) 마태25장 최후심판
내 형제 한사람 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가난한 이는 늘 가까이 있다.내 공동체, 내 곁에 있다.
예)바오로 6세 교황님이 남미 방문에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안에 계신 하느님께 흠숭과 경배 드립니다. 가난한 이는 하느님이다. 는
그 감각을 위해 성체조배 하는 것인데, 이 감각이 없다면 사람들을 절망시킨다.
예) -간디의 말씀처럼 예수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용산에 가서 미사 하는 것은 사회참여의식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간다.
가난한 이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감실 이기 때문이다.
◁생생한 현존
1. 고통 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
2. 전례기도 〓 미사
교회: 부르심 받아서 모여진 사람들
전례기도 자체도 하느님 현존이다.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은 불편하지만 주님을 알아 뵙는 감각이 무디지 않기 위해
일부러라도 가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면 나의 이기적이고 째째하고, 초라함,
내 안에 사랑이 없는지 직면하게 되고,
위선적이고 비겁한 나를 직면하게 된다.→그 곳에서 복음을 읽어낸다.
교회가 기관과 야합 할 때 망하는 길이며 이것이 간음이다.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 받을 때 잘 알아서 받아야 한다. 먹은 만큼 게워내야 하므로.
스스로 알아서 기는 실존이 된다. 그때 세상의 세태가 복음을 검열하게 된다.
교회도 돈만 되면 예수님을 팔아먹는다.
◁그러면 삼위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낮추는 것이다.
Tapeinosis/phrosyne
작고별볼일 없는/취급당 할 수 있는 상태
약자의 처지, 소수자의 처지 상태이며 스스로 선택하고 싶지 않는 상태이다.
〓 바오로 서간의 Hypo/mone
아래/머무름
◁실천>
1. 말하는 것 보다 들어주는 것이며, 눈치 있는 것은 깊은 눈매로 보는 것이다.
2.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이 것은 사람을 귀하게 하는 덕목이고, 그리스도인
만이 보여 줄수 있는 모습니다.
- 용서 청 할 일이 생기면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성찰하고, 기도 안에서
진정성을 갖고 쿨 하게 때가 너무 지나지 않게 한다.
-나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상대 앞에서 절벽 앞에 선 느낌처럼
나도 모르고 있는 잘못들이 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복음에서 끝까지 잔을 마신다는 의미는 상대방을 내 마음의 방에 그대로 내려놓는 것이며
내버려 두는 것이다. 사람은 대체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아하는 마음을 허용하는 것이다.진정한 혁명은 예수님처럼 나부터 시작이다.
-상대방 앞에 나를 낮추면 상대방도 낮춰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순명(〓 복종
체념이 지극히 소극적이라면, 순명은 지극히 적극적인 선택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먼저 복종하신 걸 체험했기에 아버지의 뜻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이 것이 예수님의 일용할 양식이다.
순명의 훈련은 고통이며, 사람들이 끝까지 짓 밝는 것을 겪는 것이며 이것이 수난이다.
수도여정은 하느님 앞에 죽을 때 까지 순명 해야 하는 과정이며, 자기 뜻을
꺽는 것 이며 , 중심인 나를 제거하는 복종의 여정이다.
순명은 하느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고, 장상이나 형제는 복음을 향한 통과하는 지점이다.
-하느님 말씀 아닌 세상의 죽음문화에 불복종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예전 에는 총,칼,전체주의가 우상 이였다면, 지금은 돈,경제성장, 발전, 국익이 우상이다.
◁예수님의 구원 범위>
이스라엘는 만민을 위한 통로 였는데, 선민의식으로 고착되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들이 외인 이방인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 이였다.
이웃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 하셨다.
◁새로운 복음화>
새로운 복음화란 신자수 보다 복음을 사는 것이다.
종교,수도회를 넘어 연대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 그들 안에 그들 입장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 캄보디아에서 엔지오 활동하는 수녀님들께 성소자는 있습니까?
여기서 하는 일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소자 생각은 문제가 아닙니다.라는
대답에 부끄러웠지만 훈훈했다
예) 『신과 인간』이라는 영화로 재현된 알제리 트라피스트 수사님들 이야기
완전 이슬람화 된 마을 안에 이웃으로 공존하며, 철수 계획 중이던 수사님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언제 떠나세요? 묻는다.나뭇가지의 새들은 언젠가는 떠나지요. 수사님들은 새가 아니라,
가지인걸요.라는 대답 앞에 식별하는 과정이 영화내용이다. 수사님들은 머무르기로 결정한다.
렉시오디비나는 불편한 진리이다. 양떼를 버리고 떠나는 목자는 참 목자가 아니다.
◁끼알라루비의 주해-버림받으신 예수님
십자기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은 처음으로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부르신다. 신의 부재, 이순간 예수님이 하느님을 잃어버린 순간 하느님이 하느님을 여위신다.(비우신 것 ) 그래서 그 자리가 하느님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 이신거다.
사랑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없는 그 만큼 상대방이 있다.
하느님은 없기 때문에 있다.
◁삼위일체존재방식
내가 없어져야 그 만큼 상대방이 있는 것이고,그 것이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상처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에 평화가 생긴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대신 십자군을 조직한다.
수도자는 하느님께 사람들에게 받쳐진 인생이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엄청 Radicalism 하다.
예수님은 권고가 아닌 명령으로 너희가 내 제자라면 내가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이해 관계없는 사람이 건 내는 말은 하느님의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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