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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아나빔의 콘텐츠

마리아 아나빔 2012. 1. 7. 19:43

 

                  

 말씀의 아나빔(Anawim)의 콘텐츠

                                            - 주님의 말씀에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

                                                                                                     

                                                                                                                      -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면서

 

    하느님 말씀에 ‘맛들인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성령을 통한 하느님께서 당신 친교로의 초대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 측에서 온 몸과 삶을 ‘말씀에 그물을 던지는 투신’이다. 즉 모든 것 위에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제일 우선순위를 두는 일이다. 또한 자신의 많은 시간과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수덕적행위이다. 이에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초대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된다. 우리 공동체에서 작은 그룹으로 2년 넘게 함께 해온 성서그룹 “말씀의 아나빔”하느님의 말씀을 맛들이고 체험하게 하는 장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서 육화되는지에 대한 영적체험들을 함께 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말씀의 아나빔”에서 ‘말씀 나눔 안에 체험된 경험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I. 말씀에 맛들인다는 것

 

1) 말씀의 체험은 지식이 아니라 앎이다.

 

구약성경의 사고 안에서 앎이란 단순히 어떤 지식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체험을 이야기하며, 체험되지 않는 것은 앎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체험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얻어지는 체험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첫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 라는 말씀 안에는 인간의 노고가 담겨있고, 매일의 행위에서 오는 수고로움이 스며있는 체험임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체험한 사람에게는 힘을 준다. 하느님 말씀에 맛들임은 이렇듯 그분의 말씀이란 매개를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말씀을 통한 하느님 체험은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되는 수덕적 행위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함께 작용해서 말씀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 말씀의 진리를 알아듣게 된다. 그렇지만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과 그 분의 힘을 체험하려면 오랜 시간과 인내와 충실성이 요구된다. 우리는 2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꾸준히 말씀을 나누는 것 안에서 이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2) 말씀의 체험은 하느님을 체험한 신비가와 예언자가 되는 길이다.

 

“미래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를 체험한 사람인 신비가이며 예언자이다. 그렇지 않은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영성은 일치되고 분명하며 공적인 확신이나 일반화된 종교적 분위기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과 결단에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K. Rahner)

   예언자란 하느님의 계획 속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빛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삶과 사건들 속에서 그 계획을 밝혀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이것은 바로 성경을 통하여 얻어내는 시각이고 Mind이다. 즉 성서적 Mind 로써 하느님의 시각이고 그분의 정신이다. ‘하느님적 시각’, 이것을 ‘렌즈’라고 표현하고 싶다. 하느님적 렌즈는 우리에게 세상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혜안과 영안이 생겨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식별’일 것이다. 또한 다른 말로 하면 ‘본질 직관’이다. 이것은 훗설이 그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지나가는 모든 것을 현상으로 보고, 괄호를 친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객관적 진리, 본질을 우리는 직관하고 선택하여 산다.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이고 그 말씀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시각과 정신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다양하게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세상의 사람들에게 선포한다. 이것이 예언자이고 하느님을 체험한 신비가 이다.

 

3) 말씀의 체험은 영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영성이란 막연한 환상이나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삶을 의미한다. 즉 신비와 수덕이 언제나 병행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말씀에 대한 체험들은 영성으로 나아가게 한다.목적은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은 다양하다. (ex) 초월성, 내재성, 내면으로 여행, 통합적 영성) 그러기에 그 어떤 방법이든 우리는 각자 하느님을 만나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나는 ‘영성’이라 생각한다.

특히 말씀의 체험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는 길로 성령의 이끄심 안에 ‘길이 없는 길’인 영적인 길을 걸어가게 한다. 즉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온전히 성령의 도움과 그분께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길을 가기위한 기본요소이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 한다. 즉 영적인 삶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살아가는 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각자에게 맞는 하나를 선택해서 끝까지 충실히 해내는 것 이 제일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고 독자적으로 고유하게 자기의 영성을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4) 말씀의 체험은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성경을 통하여 드러내신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이러한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성경 안에서 만나는가? 나는 이것을 ‘숲과 나무에 비유’하고 싶다. 예를 들면, 성경통독은 ‘숲’에 비유되고 성경 나눔은 ‘숲속에 있는 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안에서 우리는 마치 숲과 나무를 함께 만나고 보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체적으로, 때론 부분적으로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두 봉우리는 구약과 신약이 된다. 이것은 말씀이라는 산맥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보완적이다.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이 마치 솟아오른 산봉우리라면 모든 산봉우리가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봉우리와 계곡들을 함께 보면서, 말씀의 진리가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II. 말씀에 대한 목마름

 

1. 주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배고픔과 목마름

 

    주님의 말씀에 맛들이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다. 또한 모든 쇄신의 첫 요건이 그러하듯이, 이것은 우리에게 함께 변화될 힘과 에너지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동일하다.

“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약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아모9,11)

 

1) 시대의 징표

   아모스의 시대에 그러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들 사이에 주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배고픔과 새로운 목마름을 일으키십니다.(주님의 말씀 -교황 베네딕도 16세) 현시대는 풍요로움으로 가득하기도 하지만, 목마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 특히 ‘영적 목마름’에 대한 갈증이 크다. 홍수처럼 솟아지는 물질, 지식, 그리고 영성들, 그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진정 우리는 ‘주님’을 그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나는 이 해답을 “하느님의 말씀”에서 찾았다.

  ex) “말씀의 아나빔(Anawim)”/ Comunitas(틈새의 사람들)

 

2) 말씀 안에 있는 ‘영적인 물’에 대한 갈망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영적인 삶을 전문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싶고, 하느님 체험에 대한 갈망이 크다. 착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적인 물’을 마시고 싶어 한다. 이것은 어쯤 이 삶에 모든 것을 투신한 이들에게 삶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물’은 바로 말씀 안에 있다. 그런데 이 영적인 물을 마시고자 하는 목마름 안에 있어야 할 우선적인 것은 ‘가난함’이다. 특히 성경을 마주할 때, 말씀 안에서 나는 ‘성령께 구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 구걸은 반대로 나에게 많은 겸손과 평화를 준다. 또한 그 구걸은 온통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하느님의 전능과 신뢰의 손길에 내어 맡기는 신앙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말씀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는 이들이 ‘말씀의 아나빔’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에게 주님의 말씀은 당신의 영적인 물을 나누어 주신다.

 

3) 교회의 삶과 사명이 핵심인 하느님 말씀

 

교회의 삶과 사명의 두 가지 영역은 성찬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제시 된다. 교회의 사명이란 바로 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사는 것이다. 교황님의 권고 < 주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그 전체가 하느님의 말씀, 교회 안의 말씀, 세상을 위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므로 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세상을 향하여, 온 세상을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라 말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가 24, 32). 엠마오로 향해가는 그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저녁이 되어 두 제자에게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성찬의 빵을 뗄 때에 그들은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다. 부재하신 듯했던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ex) 2005, 세계주교대의원회 - ‘성찬’: 성체성사/ 2008, 세계주교대의원회- ‘말씀’: 주님의 말씀

 

4)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대한 투신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임에는 투신이 요구된다. 충실성과 항구함으로 말씀 안에 마주 앉아야 한다. 그러할 때, 항구함과 충실성이 나에게 길을 보여주기 시작한다.(ex : St. 아우구스티노-진리를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 영적인 체험을 주기 시작한다. 그 안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보이지 않는 길이 보여 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말씀에 투신하기 위해서 마치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사는 일과 같다. ex) “당신의 말씀에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 그물: 내 삶의 생계를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것/ 던짐: 투신(온 생애를 다해, 혼신으로, 죽기로 )

 

 

 III. 말씀에 대한 체험들

 

   말씀에 대한 체험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교부들은 자주 말씀을 우물이나 사다리에(귀고2세)에 비교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는 내가 체험한 것을 나누고 싶다.

 

1. 말씀에 대한 체험은 마치 산과 같다.

 

   말씀에 대한 체험은 마치 “산” 과 같다. 인간의 시간과 역사 안에 남겨진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큰 산맥을 타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백두대간이 그러하듯이(백두에서 한라까지), 말씀의 산맥은 구약이라는 큰 봉우리와 신약이라는 또 하나의 봉우리를 잇는 대간을 타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산을 타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들이기’에 있다. 따라서 성경은 온통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누구인지를 제시하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역사이다. 아니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사랑의 역사이다.

   그 여정 안에는 말씀의 길벗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산맥을 종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신 성령이 계시다. 말씀의 산은 험준하기도 하고 평단하기도 하다.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며 깊기도 하다. 또는 잡자기 ‘큰 시야’가 펼쳐져 모든 것을 한눈에 보여 주기(인식의 확장)도 한다. 반면 ‘오솔길’ 같이 한적하고 다정한 숲길을 걷게도 한다. 그 안에 하느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골속골속 메시지를 숨겨놓고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온통 ‘인간에 대한 애타는 사랑’이다. 또한 그 안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있다. 희망과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 즉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로 가는 길이고, 그리스도로부터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2. 말씀 안에 하느님의 깊은 현존의 체험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이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에폐 3,18-19)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체험된 하느님의 존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첫째, 사랑 안에 통합된 하느님 존재체험이다. 하느님 사랑을 담고 있는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분리나 경계가 없는 통합된 모습이다. 즉 역할 안에 나누어지지만 사랑 안에 일치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마치 사랑의 속성처럼 둘이면서도 하나임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성령께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준다.

둘째, 하느님 사랑의 깊고 높고 넓음을 알아듣게 된다.(Ex: 아우구스티노-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높이, 더 깊이 하느님이 계시다)가하는 말씀은 그 안에 하느님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이사야- 부성성/ 호세아- 모성성/ 아브라함(우정/친구)을 감추어 놓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차츰 차츰 하느님의 시각을 접하게 되고 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배운다. 때론 아주 깊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게도 한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삶들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온다. 그리하여 차츰 하느님의 마음과 생각과 그분이 즐겨하시는 것을 알아듣게 되고,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게 된다.하느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된다.

 

   끝으로, 이렇듯 말씀은 우리에게 통찰력을 준다. 이러한 통찰력은 인간의 이성으로 담아내지도 알아들을 수 없다. 성령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통찰력은 우리를 통합된 존재로 살아가게 한다. 통합된 인간이란 하느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 존재로서 자기완성을 의미한다. 영성신학에서 말하는 완덕의 인간, 하나된 존재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ex)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사랑: 넓이와 높이와 깊이;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

 

3. 말씀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체험(말씀을 설명해주시는 성령)

 

말씀 안에 만나게 되는 가장 큰 체험 가운데 하나가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둘이나 셋이 모임 그 안에 현존하시며, 그 모임을 풍성하게 하신다. 그리고 각자에게 맞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함을 체험한다. 10명이 나누어도 행복하지만 둘이 말씀 안에 마주 앉아도 똑같이 충만하다.

무엇보다 말씀 안에 우리들의 마음을 열게 한다. 이것은 체험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성령의 비추임 안에 영적인 눈이 열림을, 성령의 건드림을, 다양한 형태로 말씀 안에서 성령을 인식하게 된다. 때론 말씀 안에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지만, 성령께서는 마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우리에게 일으키신다. 특히 말씀 안에 아주 가난하게 다가설 때, 성령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내 입과 지력을 열어주심을 체험한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미리 마련하시어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신다. 이러한 말씀을 통한 성령의 체험은 우리의 영적여정의 한 형태를 일깨우게 한다. 즉 길이 보이지 않지만 성령이 인도하시기에 분명 길이 있는 길을 가는 영적체험이다.

 

4.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

 

1) 역사의식이 생긴다.

 

   말씀은 우리에게 인생을 하느님의 역사 안에 관조하고 읽어낼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우리 삶을 우주적 전망으로 확대 한다. 즉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그래서 서로 하나임을 인식하게 한다. 연대의식을 가지게 하는데 여기서 생태영성이 발생하였다. 더불어 우리의 사고의 세계가 확장되어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의 가족임을 의식하는 보편적 진리와 공동선이 생겨난다.

 

2) 일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

 

   말씀은 우리의 삶의 시각과 태도를 바꾸게 한다. 그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적 가치와 요소들을 식별하게 하고 선택하게 한다. 즉 생명, 사랑, 평화, 정의와 같은 진리적 가치를 선택하고 살아가게 한다.

 

3) 진리 안에 영적 자유로움을 준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인 진리와 가치관을 만나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로움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 22)고 말씀하셨다. 이 자유로움은 우리를 통합된 세계관에서 일어 난다. 즉 모든 것을 아울러는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함께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 어둠과 빛, 선과 악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성처럼 하나 안에 구별되면서 통합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통합된 사고는 우리를 죽음이나 악,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영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역설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 통합된 세계를 경험한다. 특히 구약성서 안에서, 그들에게 죽음은 조상들이 묻힌 세계로 내려가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세계관을 우리는 시편저자들의 신앙체험 안에서 보게 된다(시편 31). 시편의 사고 안에서 인간의 생노병사나 희노애락을 실제적으로 주관하는 것은 원수, 악마, 주변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오직 하느님이 고통과 죽음, 인간의 희비를 주관하는 절대적 행동의 주체이시고 중심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오직 하느님의 존재만이 그들을 살리고 죽이는 유일하신 분이된다.(용기: 주께서 주셨으니,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그래서 그들은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해야 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통합된 세계관은 깊은 신앙에 기초한 것이 된다.

 

4) 영혼이 순화된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순화 시킨다. 특히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말씀을 온전히 만나게 되면 변화가 생긴다. 즉 부정적 자아가 점점 긍정적인 자아로 바뀐다. 그래서 영혼이 점차적으로 순화됨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신앙의 치유와 활력을 얻고, 시시비비에서 자유롭게 된다. 즉 말씀 안에서 온전히 치유 받고 새사람이 되어 성경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관조하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불편심의 상태, 중용의 덕에 설 수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수술하여 건강을 회복시키는 쌍날칼 이다.

 

IV. 말씀 안에 열린 공동체 체험

 

1.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는 자리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특히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 절정이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사귀고자(1요한 1,1-3),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조건에 맞추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지금도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교회는 그 만남의 첫 자리를 전례에 둔다. 그 안에서 ‘말씀’은 현재 살아있는 말씀으로 선포된다. 그 다음은 각자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교회 공동체이다. 그 곳에 ‘친교’가 있다. 이 친교는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태어나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일치시킨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나누는 자리는 ‘공동체’이다. 즉 물리적 공동체가 아닌, 둘이나 셋 이상이 모인 공동체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는 자리이다. 말씀은 혼자 통독하거나 묵상하는 것과 여러 씩 함께 모여 나누는 것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혼자 말씀을 읽고 묵상해왔다. 하지만 큰 영적진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함께 나누는 말씀의 가치는 교회의 초대 공동체와 현대 한국 교회 내 본당들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소공동체, 그리고 말씀의 아나빔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ex) 성경 나눔과 영적 담화 비교

- 말씀 안에는 불협화음이 없다.(선입견이 배제)

-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확신할 수 있다.(성령께서 우리를 말씀 안에 일치시킴)

- 말씀 안에 열린 공동체 (진솔한 대화가 가능하고, 그 자체가 영적 나눔의 장이다.)

- 나눔 안에서 오는 풍요로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체험

서로 다양한 체험을 나눔으로 그 체험이 몇 배가 된다.

-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다양하게 얻게 된다.

- 그 자체로 서로 간에 친교를 느낀다. 선배 동생, 동료 자매수녀들인 한 자리에 앉아 말씀 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자신의 신앙과 삶을 나눈다. 그것이 기적이다. 말씀이 열린 공동체 의 매개체가 된다.

 

2. 생기 넘치는 삶의 자리

- 사도직 안에서 행복할 수 있고 존재감과 뚜렷한 정체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의 힘이다.

- 삶의 활력과 생기와 무한한 에너지를 준다.

- 그 에너지는 공동체와 만나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고 그 자체가 선교가 된다.

- 말씀나누기에 오는 것과 말씀나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 마음에는 큰 위로와 기쁨

있다.

- 일주일을 살 수 있는 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 중년기를 보낼 수 있는 힘, 아름다 운 황혼을 준비할 수 있는 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준다.

 

 

V. 성경으로 해석하는 성 빈센트 영성

 

1. 제2의 그리스도로 초대받음

 

   우리는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인격과 사랑을 배우다. 그리고 그분처럼 살아가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도록 초대 받는다. 또한 봉헌된 우리들의 삶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더 철저히 따름’ 에 있다. 여기서 ‘더’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인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이다. 이러한 복음적 권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원천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추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의 초대이고 소명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화 되는 것, 이것은 성덕의 완성이고 거룩함으로 초대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사명을 받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정신이 스며있는 성경을 모르고는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2. 성 빈센트 영성의 원천인 성경

 

   성 빈센트는 그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가 만난 그리스도를 오늘날 우리가 못 만나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성 빈센트에게 그의 삶의 소명과 행동원리는 모두 그리스도이며 그분의 모범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범은 당연히 성경에 귀결된다. 그렇기에 빈센트는 그의 사람들이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즉 복음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성장하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성 빈센트의 영성의 원천은 성경의 말씀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데 있다.

“ 성빈센트는 매일 무릎을 끊고 복음을 읽었다. 성서 봉독과 묵상과 성서 담화로 하느님 말씀과 친숙하여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이해함에 도움이 된다.... 먼저 기도와 봉독과 고독 중에 자기 영혼의 모든 빛과 힘을 모은 다음...”(규범 304)

 

3. 성경을 통해 새롭게 읽어내는 성 빈센트의 영성

 

   성 빈센트의 영성을 답습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말씀 안에 새롭게 재해석된 빈센트의 영성을 살아가는 것은 더 의미 있다. 이것은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특징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를 위하여 언제나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것은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하는 수도회 쇄신의 정신이다. 쇄신과 적응을 위해서는 봉헌된 삶은 항상 원천에서 다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천이란 바로 성경과 전승 그리고 창립자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이 시대의 징표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ex) 해석학

 

 

 

ex) 시편 8과 오버랩 되는 성 빈센트의 영성 ---------(http://blog.daum.net 말씀의 아나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 5-6)

 

    이 구절은 시편 8의 절정이다. 시편저자는 자연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창조주 하느님에게, 다시 그 하느님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따라서 이 시편은 먼지와 같이 사라져갈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미이다. 또한 그 하느님이 소중이 여기는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감탄이다. 더 나아가 또 한번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고 품위를 되찾아주시는 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사람이 되어 오신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하고 이 시편에 오브랩 되는 또 하나의 인물, 성 빈센트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인간이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된 질문이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지속될 물음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 본질상 묻는 존재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이 시편에서 이 질문은 ‘하느님’ 로부터 주어진 인간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시편작가의 신비의 감탄이 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라하면 영과 육을 지닌 통합된 존재이다.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이성’의 가치를 부여 하며, 신학적 인간학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성’을 부여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다양한 인간의 구조를 분석하여 자아, 자아의 이상적 상인 페르소나, 무의식, 아니마와 아니무스, 더 나아가 자기실현을 최종목적으로 이야기 한다.

구약성서에서 ‘인간(에누쉬)’는 나약하고 덧없는 죽어야하는 유한한 인간이다.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은 세상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인간이지만 흙으로 빚어진 나약한 존재로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덧없는 인간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기억해주시고 생각해 주신다는 것이다. 히브리말에서 ‘생각해 준다는 것’은 단순히 사고해달라는 청이 아니다. 청하는 사람을 위한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돌보아줄 대상에게 몸을 굽히고 다가와서 그 대상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뜻을 지닌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덧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인 인간을 생각해주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의미이다. 무한히 크신 존재께서 무한히 작은 존재를 생각해 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위대함이 있다. 이 위대함으로 인해 인간 역시 위대해지는 것이 시편 8의 작가가 느꼈던 인간에 대한 묵상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생각해주심’으로써 다른 피조물차이를 지닌다. 그런데 시편 8은 모든 인간을 왕적신분, 더 나아가 신적 지위로 들어 올린다. 왜냐하면 “영광과 존귀”는 임금에게 해당되고, 사실 하느님의 것이다. 이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마치 임금에게 왕관을 씌워주시듯, 인간에게 당신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신다.

 

시편 8의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와 현실적 인간

 

   우리는 여기서 냉철한 눈으로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과 현실의 인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실상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상은 현실적 인간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시편 8은 하느님께서 본래 원하신 ‘원초적 인간’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가 되어야 할 인간의 존재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부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참인간이신 당신의 아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시편이 노래하는 인간상에 도달할 수 있다.어떠한 구별이나 차별이 없이 인간이라는 근본 연대성으로 모두 시편 8이 노래하는 그 인간상에 참여하게 된다. 그 연대성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동지로 만든다. 모든 인간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충분히 자각할 때, 우리는 형편없는 거지에게서도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한 인간을 볼 수 있다. 나약한 어린아이에게서, 병들어 쓰러진 환자에게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이미 볼 수 있고 그 씨앗을 볼 수 있다. 더럽고 죄스럽게 보이는 나에게서, 너에게서,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목숨까지 바치셨다는 신비를 조금은 느낄 수 있고, 남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 빈센트가 발견한 인간

 

    성 빈센트는 그의 영적 여정 안에서 여러 내적체험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던 것은 ‘하느님이신 분이 왜 비천한 인간으로 오셨는가?’ (Cur Deus homo?) 이다. 이 질문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었고,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한 시발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빈센트에게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을 손수 드려내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 빈센트에게 드러낸 모습은 가난한 이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육화 사건’과 ‘파스카 신비’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된다. 즉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하느님은 인간을 지극히 생각하고 기억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즉 시편 8이 노래하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 5-6)

   성 빈센트에게 하느님이신분이 자신을 비우시어 여느 사람처럼(필립 2, 6-7) 되셨다는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 불운한 사람들, 죄인들에게 강력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그분은 이들을 위하여 철저하게 가난하고,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신 분이다. 따라서 성 빈센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존재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으로 흠숭하며, 덕(德)으로서만 현존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존재는 현실세계 안에 육화되어 함께 계시는 존재, 즉 현실적인 인간, 가난한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 더 나아가 그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는 분이고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분이다. 성 빈센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로 자신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 인간

 

   성 빈센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견한 인간은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인간이다. 즉 왜소하고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 모상으로서 품위를 지닌 인간이다.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참된 품위를 다시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이 신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지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존재이다. 그래서 빈센트는 참 인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지닌 예수의 마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영원으로부터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 받은 가장 구체적인 인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을 지니고 있는 각 인간, 가장 현실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고 그들 안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성 빈센트는 불우한 사람들을 이웃으로만 보지 않고 그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 빈센트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단순한 사회적 동정심이나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연민 어린 사랑’에서 비롯된다.

특히 그리스도는 유별나게도 가난한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죄인들에게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는 분이다. 성 빈센트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았다. 시편 8의 작가가 내면 깊이 체험했던, ‘인간을 그토록 생각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그 하느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성 빈센트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당신 시대의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었다. 그의 이 일은 오늘도 우리 안에 계속되고 있다.

 

 

나오면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다시 한번 하느님을, 우리가 생명을 넘치도록 얻게 하시고자(요한10,10 참조)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 그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은 이 하느님을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시 만나게 하는 것의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인다는 것은 성경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는 일이다. 또한 그 말씀에 비추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그 말씀의 잣대대로 살아가는 일이다. 이것은 성서적 시각, 성서적 mind, 성서적 vision으로 매순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법을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매순간 성령의 이끄심 안에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법으로 충만 되어 있고, 그 법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살아간다. 즉 세상의 법이 아닌 하느님의 법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다. 그리고 성 빈센트가 말한 ‘복음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