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9(38): 인간의 허무함(중환자의 기도)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개인 탄원시편에 속한다. 시편작가는 중병의 고통에 압도되어 있다. 그리고 종교를 비난하고 하는 구실을 주지 않도록, 신앙이 없는 불경한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고통을 입에 담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어낸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느님께 향하여 탄성을 올린다(1-3).
이 세상에 대하여 너무 환상을 품지 않도록 자기 존재의 덧없음을 더 이해 시켜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참으로 인간의 삶은 짧고 덧없고 “입김”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골똘하게 재산을 모으지만 그 재산이 누구의 손에 넘어갈지조차 모르는 것이다(4-6).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주님 외에 작가는 누구에게 신뢰할 수 있는가? 이리하여 재앙에서 해방되고, 그리고 미욱한 자가 자기를 비웃을 수 없도록 하느님께 간청한다(7-8).
시편작가는 주님의 뜻을 승낙하고 있지만 벌은 죄인에게 있어서 강력한 타이름이며,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착각을 지워 주는 것이라 하여도, 자신에게 주님 손의 무게를 너무나 심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시편작가는 기도하고 외치며 운다. 자신은 하느님 앞에 온전히 그 뜻에 따라야 할 나그네임을 알고 있지만, 또한 지금 잠시 살아가도록 여유를 주시옵소서 하고 청한다(9-13).
Text 안에서
1. 성서 주석 안에서
- “여두둔” 앞에는 라메드- 전치사가 붙어 있다. 그리고 “여두둔(여디둔)은 역대기에 의하면(1역대 16,41;25,1.3, 6) 성전음악 책임 또는 성전문 감독을 맡은 레위인들의 무리이다.
- “나는 말하였네, 재 혀로 죄짓지 않도록 나는 내 길을 지키리라”(1절)에서 시편작가는 악인이 누리는 복을 보고 인생의 허무함을 생각하며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한다.
- “보소서, 당신께서는 제가 살 날들을 몇 뼘(한뼘) 길이로 정하시어”(6절)을 정확히 번역하면, “ 네 세월을 두뼘으로 줄이셨으니” 인생은 모두가 그림자일 뿐 인생은 한 찰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바닥의 길이를 “한 뼘”으로 하는 계산법,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이 고찰은 성서에 자주 나온다(시편 90,3; 102,12; 욥기 7,6‘16,4; 야고 4,14).
“제 수명은 당신 앞에 없는 것과 같나이다.”에서 “수명”과 “덧 없는지” 사이에 일종의 두운 현상이 있다.
-“인간은 한낱 그림자로 지나가는데”(7절)은 “그림자”는 히브리어로 “허무, 텅 빈 것” “알
멩이가 없는 모습”이란 뜻이다.
“모든 인간은 한낱 입김으로 서 있을 뿐”에서 이것을 직역하면 “한낱 입김(같이 허무한 것을 위하여)...” 그래서 “그가 피우는 소란, 한낱 입김일 따름” 등으로 옮길 수도 있다.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며 쌓아 둡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번역에 따랐다. 히브리 원전은, “웅성거리기는 해도”이다.
-“ 제 모든 죄악에서 저를 구하여 주소서”(9절)은 미욱한 자들은 의인의 괴로움을 보고 그것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한다(시편 22, 6-8).
- “당신 손이 내리치시어”(11절)은 본디 ‘싸움’을 뜻하는 말로 구약성서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칠십인역에서는 “당신 손의 압박으로”로 읽는다.
- “그의 보배를 좀벌레처럼 사그라뜨리시니,”에서 ‘보물’ 또는 ‘생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 울음에 잠자코 계시지 마소서”(13절) 기도, 울부짖음, 눈물, 하나의 선물이다. 라삐는 “기도는 침묵 속에, 호소하는 소리는 크게, 하지만 눈물은 그 모두를 초월한다. 눈물이 지나갈 수 없는 문은 없다”고 했다.
2. 신약성서 안에서
신약성서에는 사람의 생명의 덧없음에 대하여 이 시편과 매우 유사한 표현을 많이 볼 수 있다. 성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야고보 4, 14). 그리고 성 베드로는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마 주님이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다.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1베드 1, 24)고 말하고 있다.
그분 하느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시고,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에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계시를 완성하시고 오래 전부터 모든 역사의 초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셨다. 이리하여 의인들을 받쳐 주고 있던 희망의 한 줄기가 확인되고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시고(12), 우리의 덧없음을 통하여 그 모든 한계, 고통과 눈물(히브 5,7)을 아신 다음 새로운 전망을 여셨다. 그분의 부활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덧없음을 영원한 견고함으로 바꾸시고, 그분의 승천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의 희망이 되셨던 것이다(골로 1,27).
우리는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면서 나그네길을 가는 교회, 또 환난을 만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시편이 말씀을 새로운 마음으로 읊을 수 있다.
그 말씀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고뇌를 나타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계시에 비추어서 벌써 그 고뇌를 이 길수 있는 희망에 지탱되고 있다. 우리는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1고린 15, 50)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1고린 15, 53, 58).
우리는 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란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로마 8, 28) 확실히 믿고 있다.
3. 인간 안에서
인간적인 모든 참된 진보와 내부적인 모든 완성의 튼튼한 토대인 겸손이 정신을 얻기 위해서는, 이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현세의 덧없음, 우리의 나날의 비참, 하느님 앞에서 있는 우리의 왜소함에 대한 묵상이 크게 유익이 된다. 실제로 사람은 여러 가지로 환멸을 느껴도,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쓰러져도 이 가르침을 좀처럼 마음에 새기려 들지 않는다.
우리 존재의 참 의미를 가르치고 있는 이 시편의 기도는 우리의 신뢰와 희망을 더욱 더 하느님의 편에 솟게 하고, 시련을 겪을 때 반역의 감정을 피하게 하고(1-9), 그리고 마음의 기쁨을 하느님의 뜻에 두도록 돕는다. 시편은 말한다.“잘못을 들어 당신께서 사람을 벌하실 때면 아름답던 몸이 좀먹은 옷처럼 삭아 떨어집니다.”라고.
성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 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까지 피를 흘린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자녀들에게 하시듯이 여러분에게 격려하신 말씀을 잊었습니까?
‘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 말며, 꾸짖으실 때에 낙심하지도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 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는 누구나 다 아버지의 견책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런 견책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서자이지 참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이니겠습니까? ... 그러므로 여러분은 힘없이 늘어진 손을 쳐들고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그리고 바른 길을 걸어 가십시오. 그러면 절름거리는 다리도 뒤틀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될 것입니다(히브 12, 2-23)
※ 참고문헌: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110-111.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273-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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