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35(34): 박해받는 의인의 기도(개인 탄원시편)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개인 탄원시편에 속한 것으로 다윗이 사울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지은 것이다(1사울 24, 12). 시편작가는 주님께서 큰 방패와 작은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자신의 적을 판가름하고 자기의 생명을 지켜 달라고 기도한다(1-3절). 이 첫 구절에서 시편작가는 성지 점령을 위하여, 또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 옆에서 싸운 군인으로서 하느님을 말한다. 여기서 욥의 말이 연상된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의 생애는 품꾼의 나날 같지 않은가?”(욥기 7,1)
시편작가는 기원의 기도에 흔히 나타나는 상징을 써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달림을 서술한다. 적은 별 까닭도 없이 그물을 치고 구덩이를 팠다. 그들은, 받은 선과 은혜대신 악으로써 갚고 자신에 대하여 위증을 한다(7-12). 사실 그들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시편작가는 그들과 함께 괴로움을 겪고 단식하며 벗 혹은 육친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놀려대며 조소로써 대답한다(13-16). 여기서 시편작가의 괴로운 마음에서 불타는 기원이 위로 오른다. “주님 언제까지 보고만 계시렵니까?”(17)하고. 끝으로 시편작가는 자신이 이 악인들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청하고, 그리고 정의가 실현되어서 모두가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공적인 감사의 의식을 약속한다(18-28절까지).
Text 안에서
1. 시편 주석
“주님 저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저와 싸우는 자와 싸워주소서.”(1절) 의 의미는 말과 행동, 재판소 또는 그 밖의 장소에 서, 혹은 싸움터에서 다른 사람과 싸운 경우, 재판에 역점을 둔 어떤 역자는 “주님 나를 고소하는 자를 판가름하시고” 라고 번역했다.
“창을 빼드시고 (길)을 막으소서.”(3절)에서 막으소서 라는 말은 도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창과 도끼를 빼드소서.
“그들은 까닭없이 내게 그물을 몰래치고, 까닭없이 내게 구렁을 파놓은 탓이로다.”(7절)에서 본문에서는 “제게 구렁을, 그들의 그물을...”로 되어 있으나 순서가 뒤바꿘 것 같다.
“그가 파멸에 떨어질지어다.”(8절)은 원수들의 시편작가에 대한 말로 이해하기도 한다(21절 참조). 그러나 여기의 “그”를 여러 원수들을 하나로(또는 원수들 각 개인)표현하는 집합적 단수로 이해하여 8저을 4-7절의 계속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내모든 지체가 아뢸지어다.”(10절)에서 “내 모든 지체”는 “내 모든 뼈들이”가 된다.
“ 사악한 증인들이 일어나”(11절)에서 말하는 “사악한 증인들”이란 “위증자들”이나 “폭행의 증인들”(어떤 사건이 폭행이라고 증언하는 사람들)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저는 외로운 홀몸”(12절)을 직역하면 “저는 무자식”- 외로움과 상통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이 분명하지 않아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나이다.”로 수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아팠을 때 자루옷을 제 의복으로 삼고 단식으로 고행하였으며 기도로 제 가슴을 채웠습니다.”(13절)에서 자루옷은 슬픔과 속죄의 표시로 허리와 그 밑부분을 덮는 거친 천을 말한다.(시편 30,12: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제 슬픔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땅에 엎드려 무픞을 끊고 머리를 숙여서 하는데, 곧 그러한 기도의 자세를 표현하는 것인지 혹은 기도해 준 당사자가 그 기도 성취를 받기에 합당치 않아 기도가 기도한 사람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뜻인지도 모른다(마태 10, 13).
“저의 기도는 제 품으로 돌아왔나이다.”(13절)의 의미를 뜻을 잘 알 수 없는 문장이다.“음흉한 제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까닭 없이 저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19절) 은 멸시의 눈짓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평화를 말하지 않을뿐더러 이 땅의 온순한 이들을 거슬러 간계를 꾸밉니다.”(20절)은 성서에서 이 대목에만 나오는 말로 시중의 허풍장이와 대조적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저를 거슬러 한껏 입을 벌려 ”옳거니, 우리 눈으로 보았지! 합니다.“(21절)는 거짓말을 하여 시편작가에게 무엇인가 책임을 물으려고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은 나와 또 나의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이리하여 그들의 율법서에 ‘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이루어졌다.”(요한 15,24-25)고 말씀하셨을 때 당신을 시편에서 기도하며 시달리고 있는 의인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전례에서 이 시는 수난 때의 그리스도의 탄식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적은 악의 세력이다. 그 수난을 겪는 날에 히브리인의 지도자와 유다가 그 공범자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그분의 죽음을 구하고(4절), 예수께 구렁을 파고 그물을 쳐서(7절) 그분께 대해 위증을 하고(11절), 그리고 받은 선의 댓가에 악으로써 갚았다(12절). 공생활 동안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받은 사람들조차(13-14) 그분께 소리를 지르고, 그분의 죽음의 판결에 찬성하고(15, 20), 예수를 비웃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조소했던 것이다(16,21).
죽으실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 그렇다면 위에서 두 그리스도의 말씀이, 적에 대한 이 시의 저주와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까? 단지 여기서 써 두고 싶은 것은 죄를 파괴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달게 받으신 주께서는 똑같이, 죄인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고 계시다는 것뿐이다.(시편 109주해)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사탄은 자기가 친 그물에 걸리고, 주님을 빠뜨리려고 판 웅덩이에 빠지고(8),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파괴되고,(로마 6,6) 예수께서는 죽음에도 이기시고(디모테오 1,10) 무덤에서 부활하셨다(9,10,17).
주님을 십자가에 단 사람들은 그 죄 깊은 계획에 배신되고(25-26), 그 대신 주님을 믿고 정의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당신을 섬기는 이들의 평화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고, 기쁨의 환성을 올릴 수 있다(27). 또한 성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인의 대집회 때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친다(18).
욥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보내는 그리스도의 생활은 참된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 긴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한 싸움, 그리고 구약시대의 의인들의 싸움도, 어둠의 힘에 대한 그리스도의 싸움의 시작이며 전표였다.
예수님 자신이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사람이 빈틈없이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는 한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 그를 무찌르면 그가 의지했던 무지는 모조리 빼앗기고 재산은 악탈당 하여 남의 것이 될 것이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루가 11, 20-23)
예수님께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서 악마 추방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질서가 없는 감정으로 괴로워하시고, 싸우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을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 34-36. 38).
3. 교회의 기도 안에서
이 시편에도 암시되어 있는 괴로운 수난의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종은 그 주인보다 더 나을 수가 없다고 한 내 말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교회는, 전례의 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고, 이 시편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한다. 이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시달리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자신의 기도로써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받쳐준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당신 교회 안에서 기도하신다.
4. 개인의 기도 안에서
개인의기도로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생각하고 부정과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원한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박해자에 대한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죄악과 부정에 대하여 노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살해자를 위해 기도하신(루가 23:34)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간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는 것을 연 상하고 육신과 그사욕을 십자가에 달고서(갈라 5,24), 주저하지 말고 자신의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한다. 승리의 하느님께 기도하고(1-3) 먼저 자기 안에서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에페 6,10-11)
※ 참고문헌: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C. 보르고뇨/ 성염, 바오로 딸, 1995, p.29-7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98-101.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25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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