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63(62): 하느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마리아 아나빔 2012. 2. 19. 20:44

 

 

 시편63(62): 하느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개인 탄원시편에 속한다. 물기 없는 메마른 땅이 물을 갈망하는 것같이, 시편 작가의 마음은 하느님께 대한 간절한 갈증에 메말라 있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의 성전에서 그분의 세력과 영광을 바라보려고 갈망한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은 생명보다 뛰어나다. “당신의 사랑, 이 목숨보다 소중하기에”(1-3).

 

하느님은 시편작가의 최고의 선이다. 연회에 참석하고 있듯, 작가의 마음은 하느님으로 배가 부르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그 마음은 기뻐 춤춘다. 밤의 고요한 시간에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리고 사랑의 날개에 보호받고 있음을 느낀다. “나를 도와주신 일을 생각하면서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겁습니다”(4-8).

 

시편작가는 자신의 주님께 이와 같은 신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적에 대하여 안심하고 있다. 적은 죽음이란 벌을 받고 “그들은 예리한 칼날에 동강이나서 승냥이의 밥이 되리라.” 곧 그들은 축은 다음에 묻히지 조차 못할 것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모두 기쁨을 알지만, 그러나 누구보다 왕께서는 기쁨을 아실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쟁이들은 말문이 막히기 때문이다(9-11). 이 시편의 제목에서 보면 작가는 다윗이다. 그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유다의 사막에 패했을 때의 노래라고 본다(2사무엘 15, 23-30).

 

2. 이 시편은 모든 주일과 전례력의 대축일의 찬가에 들어 있다. 우리는 이 시편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강생에서 공현, 또는 수난에서 부활과 승천을 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시편을 이렇게 말한다.

 

“ 이 시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와 지체의 기도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죽고 묻히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시고, 그리고 아버지 오른편에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주선해 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 우리의 머리이시다. 그분이 머리라면 우리는 지체이다. 전 세계에 펴져 있는 모든 교회는 그 몸이다. 이 몸에서는 지금 살아있는 신자뿐아니라 우리 앞에 간 사람들, 역사의 끝에까지 존재할 모든 신자가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그 음성은 머리의 음성이며 또 지체의 음성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에 견디고 참은 것은 우리도 견디고 참고, 우리의 고통은 그분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을 성 바울로가 말하지 않는가!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로마 6.6).

 

죄를 지은 후의 인류는 물기 없이 메마른 광야이고 사막이었다. 강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은 그 인류 안에 아버지께 대한 소망과 갈증을 일으켰다. 예수께서는 사막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나그네가 되시고, 하느님의 얼굴을 우러러 보기 위하여 눈을 위로 GI아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께 우리의 중재자로 서시었다.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찾으시고 자신의 생명보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존중하시고(3), 그리고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는 것처럼 손을 들어 올리셨다(4).

 

밤의 때, 특히 게쎄마니와 죽음의 때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자리에서 깊은 신뢰로 자기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시고 힘차게 아버지께 뒷받침을 받으셨던 것이다(6-7). 예수님의 적들은 그분을 없애려고 헛되게 그분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되었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생활의 신비에 비추어 보면, 더 깊은 뜻을 띠게 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구세주의 영혼은 우리를 맞으러 오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굶주림과 갈증이 풀릴 것이다(3-8).

 

3. 주일의 찬가는 특히 부활의 신비를 노래한다.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위에 새벽이 열리는 것이다(1). 이 때에 시편은 교회의 입에서 사랑과 집착과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 대한 열렬한 동경의 표현이 된다. 그리스도 앞에 교회는 항상 영의 살아 있는 물에 목말라하는 땅과 같다. 그 손, 그 입, 그 영혼은 그분만을 알고 있다.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회상 속에 살아간다. 그리스도는 당신 교회의 도우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날개 그늘에 살며 기뻐 춤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고 살아 있는 동안 그분을 찬양하고, 그리고 어느 날엔가 그분의 힘과 영광을 보려고 동경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을 찾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하며, 그분을 기리고 찬양함으로써 양식을 얻고 만족을 느낀다. 그리스도의 날개 그늘에서 기쁨과 보호를 얻고, 그리스도의 오른팔에 안기는 것이다(아가 2; 3,6). 또한 이 시편이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성체에 있어서 실현된다. 그것은 부활이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 적에 대한 승리의 약속을 찾아보기 때문이다(9-10). 이 시편은 또한 망자의 전례에 있어서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망자의 입에 오르는 이 시편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그리움이 되고, 하늘의 성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이 되고, 같은 영광에 참여하고 싶다는 갈망이 된다.

 

4. 이 시편에서 하느님 자신이 사람의 마음에 당신께로 돌아오려고 하는 소망을 다시 한번 일으키고자 당신의 말씀으로 하늘에 대한 향수를 기르려고 하셨다.

 

하느님을 찾아 구하는 것, 하느님께 굶주림을 느끼는 것은, 벌써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러 오시고, 탕자인 우리 마음에, 자기네의 가난에 대한 의식과 생명의 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소망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하느님께 굶주렸다는 것 이것 또한 하느님의 은혜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시고, 그리고 동시에 회답을 넌지시 가르쳐 주신다.

 

사막에서 갈증의 고통을 받고 물을 간청한 히브리인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목말라서 하느님께 간청할 때 절벽 같은 바위틈에서 물이 나왔고 그 단단한 바위에서 나온 물로 갈증을 풀었다”(지혜 11, 4).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살아 있는 물을 주셨다. 이 시편의 숭고한 사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탐색의 마음으로부터 일치의 기쁨으로 이끄시고, 그리고 그 사랑은 목숨보다 소중하고, 그분은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받쳐주신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 시편은 주일 아침에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영성체의 준비를 위해 가장 어울리는 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편에는 순수한 기도의 영적인 도정이 있다. 그것은 기도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탐구와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Text 안에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에 따른 해석(412년 사순절 히포에서 행한 강론)

 

- 저자인 다윗에 대하여

다윗은 유대인의 왕이었고 유일하게 참 하느님을 섬겼다. 그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로마 1, 3참조) 그리스도를 낳은 동정녀 마리아는 실제로 다윗의 가문이었다. 저 까마득한 옛날에 시편들이 지어졌고, 그 중에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그리스도라는 분이 오리라고 예언하는 시편도 있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의해서 또한 예고된 것임을 보고서 즐거워하고 있다. 성도들은 자기네 당대에 그것이 이루어짐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성령의 비추임을 받아 이를 예견하였던 것이다. 지금와서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그대로 예언들이 온 세상에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목격한다. 그러니 이 일을 두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 역사상 그리스도와 신비적 그리스도

 

이 시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지체들을 직접 다루고 있다. 유일무이한 이 인물은 우리의 머리이시다. 그분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죽으시고 묵히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셔서 성부 오른편에 않으셨으며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계신다. 그분은 머리시고 우리는 지체들이다. 또한 사방에 흩어져 잇는 그분의 교회 전체가 그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상 우리도 그분 안에서 고난을 받았고, 이미 하늘에 오르셔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다음에도 이 세상의 환난중에, 유혹과 역경과 곤핍중에 당신의 교회가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 또한 고난을 받으신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였음은 사도가 하는 다음 말로 확증된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왜 세상을 따라 사는 것처럼 합니까”(골로 2,20). 또 다른 말이 있다. “우리의 묵은 인간은 십자가에 이미 그분과 함께 처형되어 죄의 몸이 무너져버렸습니다.”(로마 6,6). 그분 안에 죽었다면 그분 안에 부활도 하였다.

 

- 현세 생활은 광야의 여정

 

시편 서두에서

 

이 시편은 제목이 <다윗. 그가 유다 광야에 있을 때> 라고 되어 있다. 이 광야는 이두메아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이두메아족은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우상을 섬기던 민족이었다. 그래서 이두메아라고 하면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 이 이두메아(광야)는 이승의 삶, 우리가 온갖 수고를 겪는 삶, 우리가 온갖 궁핍에 시달리는 삶을 이두메아라는 이름으로 표현한다고 알아들으면 된다. 그리고 이곳은 광야이며 기갈이 심하다. 주님은 이 광야에서 우리가 탈진 하지 않도록 당신의 말씀으로 이슬을 뿌려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갈증을 느끼게 만드심은 이를 해갈시켜주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해갈시켜주시려고 이슬비처럼 당신의 은총을 내려주신다. 하지만 목마름은 여전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영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이두메아 광야라는 것이 어떠한지 말하고 있다. 목말라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손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은 열망에 탄다. 그 열망이 영혼의 목마름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욕망이 있는지 헤아려 보라. 많은 사람들이 속세에 목말라하고 있지 하느님을 목말라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두메아 광야에 살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사람들의 영혼이 하느님을 목말라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는 제 영혼이 하느님을 목말라한다고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주시는 화합으로 모두 한 영혼이 되었다. 이두메아 광야에서 함께 목말라하는 영혼이다.

 

육신의 부활, 사후의 인간구조

 

인간의 육신이 목말라할 때는 물을 마시고 싶어서 목말라한다. 그러나 영혼이 목말라 할 때에는 지혜의 샘을, 우리 영혼이 기갈을 풀 만한 샘을 목말라하는 것이다. 다른 시편에 “그들의 당신 집의 기름기로 취하고, 당신께선 그들에게 당신 환희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나이다(시편 35,)라는 말 그대로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지혜와 정의를 목말라해야 마땅하다. 이 생이 다한 다음 하느님이 언약하신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도 결코 해소 되지 않을 기갈이요. 이 열망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천사들과 똑같아지리라고 약속하셨다(루가 20, 36). 현재로서 우리의 영혼은 목마르다. 그러나 우리의 본향에서는 주님의 샘에서, 진리와 영원의 샘에서 언젠가 우리도 천사들과 함께 목을 축이게 될 것이다.

“이 몸이 애타게” 혹은 “갖가지로 당신을 그리나이다.”라고 하였는데 갖가지로 목말라한다는 말은 우리의 육신도 부활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목말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 행복이 약속되었듯이 육신에도 부활이 약속되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이 “애타게” 혹은 “갖가지로” 하느님을 목말라 한다. 저 이두메아에서, 저 광야에서 참으로 갖가지로 고생하고 갖가지로 목말라한다. 결코 고생을 않는, 부패하지 않는 처지를 참으로 애타게 그리게 된다.

 

하느님 친히 영혼의 양식이 되신다.

 

선량하고 충직한 그리스도인의 몸은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을 목말라한다. 육신에 빵이 필요하다면, 물이, 빵이, 술이, 돈이 필요하다면, 하느님께 청해야지 악마에게 우상에게 세상의 여하한 세력에게도 청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 목마른 사람들은 어디서나 하느님을 목말라해야 하고 영으로나 육신으로나 목말라해야 한다. 영혼에는 하느님이 당신의 빵, 곧 진리의 말씀을 베풀어주시는 까닭이요 육신에는 요긴한 것들을 주시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영혼도 육신도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육아 하느님을 목말라 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갖가지로 고생을 한 끝에 순전하게 배부를 날이 올 것이다.

 

현세 생활의 광야

 

사막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다. 길도 물도 없다. 힘을 북돋아줄 사람하나라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사막에다 길을 한 가닥 열어주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길이다(요한 14,6). 광야에서도 우리를 위로해주셨으며 당신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들을 보내셨다. 거기서 우리한테 물을 주셨고 당신의 설교자들을 성령으로 가득 채워주셨다. 그 사람들 안에 샘을 만들어지고 “그 물을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 것이다”요한 4, 14). 그러므로 여기 우리는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서기 전에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이렇듯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전번에는 광야에서, 길도 없고 물도 없는 땅에서 내 영혼이 목말라 하였다면, 이제는 “이렇게 제가 성소에 당신 앞에 대령했나이다. 당신의 영광과 권능을 보기 위하여.” 사람이 먼저 광야에서 갈증으로 고생을 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만나는 악을 당하지 않으면, 하느님이라는 선에 결코 당도하지 못한다. 시편작가는 “이렇게 제가 성소에 당신 앞에 대령했나이다.”라고 한다. 성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된다.

당신 앞에 대령했나이다는 의미는 나를 당신께 보여 드림으로써, 당신이 나를 보심으로 나도 당신을 뵙고저 하나이다. 나를 보시라고 당신 앞에 대령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알아 주셨습니다(갈라 4, 9). 여러분이 먼저 하느님 앞에 나타난 것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에 사람이 광야에서 구원의 방도를 찾는다면 그는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하여 몸을 일으켜 세운다면 그는 속마음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게 된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향하여 몸을 일으켜 세운다면 적잖은 위로를 받으리라.

 

위로를 베푸시면서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신다.

 

우리의 육신이 사멸할 존재인 이상, 연약한 존재인 이상, 종국의 부활을 맞기 전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섭취할 것은 빵과 물 등의 음료이다. 아무튼 우리의 몸은 아무런 궁핍도 당하지 않고 아무런 부족도 겪지 않을 저 건강함과 온전함을 얻기까지는 이 식량으로 생존하다. 또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한 가운데 있고 아직은 허약한 만큼, 그 나름의 식량, 곧 말씀의 자양분, 기도의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훗날 우리 몸이 부활하고 나면 저런 식략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멸의 상태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영혼도 고유한 음식이 있을 것인데, 하느님의 말씀,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생겨난 그분의 음식으로 삼으리라(요한 1, 3참조).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우리를 이 광야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육신에 필요한 것도 주시고 영혼에 필요한 것도 주시는 연고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단련시키기 위해 때론 우리한테서 빼앗아 가시는데, 이것은 당신이 우리를 쓰다듬어 주실 때만이 아니고 매질할 때만 아니라 매질할 때에도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려는 생각에서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일

 

하느님의 거룩한 집에 대령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열망을 갖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면 하느님 아드님의 권능과 영광이 우리한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 하느님이 드러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도 성소에 들어가서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나타나시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드리기 전에 우리는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며 하느님과 동등하신 그분을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아마도 그들은 아직도 성소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분의 영광과 권능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죄인에게 벌을 주시고자 한들 부당한 것이 없다. 죄인이 벌 받는 일이 정의롭다면 죄인을 벌하시지 않으신 다거나, 오히려 의화 시키거나,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거나 불경한 자를 경건한 자로 만드시는 일은 자애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다고 말한다. 여기서 생명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생명을 말한다. 인간의 삶이 다양하지만 “당신의 자애가 우리의 생명보다 낫나이다.”(4절) 탁락한 사람들이 스스로 택한 생명보다 교정 받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 훨씬 낫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 생명을 주시는데 그 생명은 우리의 모든 생명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삶을 택하든 그분의 자애가 우리의 생명보다 낫기에, 우리의 입술이 하느님을 찬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기도와 선업

 

“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저의 두 손 들어 올리오리다.”(5절) 즉 당신이 내게 주신 그 생명으로 한평생을, 많은 삶 가운데, 딴 사람들과 더불어 내 스스로 택한 삶이 아니옵고 당신을 찬미하라고 오로지 당신 자애로 내게 주신 그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렇듯’이란 내가 당신을 찬미하는 이 생명을 나의 공적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오직 당신 자비에 돌리나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우리는 손을 들어 올려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손을 넓게 들어 올리셨다. 십자가상에 당신의 자비를 우리한데 쏟아주셨기에 우리도 선업을 하며 두 손을 넓게 벌리자. 선업에 익숙한 손이라면 하느님께 들어 올렸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들어 올린 손이 하느님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선업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두메아, 광야에서 올리는 기도이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길이 되신다. 그 길은 땅에서 생겨난 길이 아니라 하늘에서 생겨난 길이다.

 

기도하며 무엇을 청할 것인가

 

당신 이름으로 제 두 손을 들어 올리고서 우리는 우리 영혼에 유익한 영적인 것을 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에게도 기름진 음식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들은 지혜가 없으면 쇠하고 만다. 어느 선업을 하더라도 기진할 만큼 쇠약해진다. 그리고 지금, 이광야에서도 그토록 배부르다면 장차 올 세상, 하느님이 우리를 직접 먹여주시는 곳에서는 얼마나 배부를 것인가? 그러기에 갈증이 사라지면 기도도 없어진다. 그리고 찬양이 따라오리라.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

 

“제가 잠자리에서 당신을 생각하고 야경 때에도 당신을 두고 묵상합니다. 정녕 당신께서 제게 도움이 되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 아래서 제가 환호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잠자리는 그의 안식을 가리킨다. 안식에 들면 하느님을 기억한다. 안식에 들었다고 해서 마음이 풀리고 하느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안식에 들어 하느님을 기억한다면 자기 행적에서 하느님께 대해 묵상하게 된다. “ 새벽”이라는 것은 자기 행적을 가리켰다. 사람은 새벽에 무엇인가 시작하는 연고이다. 나의 잠자리에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새벽에도 그분을 묵상하지 않을 것이다. 한가할 때에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 활동에 몰두해 있을 때 하느님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 하느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활동에 몰두할 때에도 하느님에 대해 묵상할 것인데, 활동에 지키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가할 때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사람은 모든 활동 중에도 그분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자가 되고 싶거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머물라

 

“ 당신 날개 그늘 아래서 제가 환호합니다.” 선업을 두고 기뻐하오니 당신 날개 그늘이 내 위에 드리워져 있나이다. 주님께서 나를 가려주지 않으시면, 저는 병아리라서 솔개가 채갑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식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 37). 우리는 어린 자식들이라 하느님이 당신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셔야만 한다. 하느님의 그늘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고, 그 밑에서는 우리가 항상 병아리 처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라면 자랄수록 하느님은 더욱 커지시는 까닭이다. 하느님의 보호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언제까지나 하느님의 보호 아래에 있자는 것이다.

 

악인들에게서 오는 박해와 하느님의 보호

 

“제 영혼이 당신께 매달리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라! 하느님께 얼마나 애착해 있는가보라! 우리에게도 저런 심경이 생겨나면 좋겠다. 혹시라도 저런 심경이 있다면 정성껏 물주고 키워야 한다. 그리고 전심으로 “ 제 영혼이 당신께 매달리나이다.”라고 말씀 들릴 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풀이 하느님께 달라붙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풀이다.

 

유다인들과 로마인의 침략

 

“ 그러나 내 목숨을 노리는 저들은 멸망으로, 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이 말은 교회를 박해해왔고 지금도 박해하려는 자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유다인 들에게 잘 들어맞으니,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멸망시키려 찾았다. 유다인들은 땅을 잃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죽인 이유로 그들은 땅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땅속 깊은 곳이란 지상적인 탐욕이다. 탐욕으로 지상 깊은 곳에 들어가느니보다 육신으로 땅 위를 걸어 다니는 편이 차라리 낫다. 영혼의 구원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지상 사물을 탐하는 사람들 모두 땅속에 들어가는 셈이다. 땅을 자기보다 앞세웠고 땅을 자기 위에 모셨고 자신을 땅 밑에 낮추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곳은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대신 유다인은 한명도 없다. 그리스도의 원수는 없어졌고 그리스도의 찬미자들은 가득찼다.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터전을 잃었다. 터전을 로마인들에게 잃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죽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칼날에 내맡겨져 여우들의 몫이 되리라” 유다인들은 말 그대로 그들에게 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짓쳐 들어오는 적군들에게 패망하였다. “여우들의 몫이 되리라.” 시편작가는 유대 땅이 멸망하고 나서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이방의 임금들을 여우라고 부른 듯하다.

주님께서 헤로데를 여우라고 부르셨다. “가서 여우에게 전하여라”(루가 13, 32)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했기 때문에 여우들의 먹이가 되었다. “여러분의 왕을 내가 십자가에 처하란 말이요? 우리에게는 황제 외에 왕이 없습니다.”(요한 19, 15)그들은 어린양을 배척하고 여우를 택하였다. 그러니 여우들의 몫은 당연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임금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이 나온 것은 그들의 여우를 택한 대신에 참 임금은 배척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임금은, 참 임금은 수난당할 때, 붙여 놓았던 칭호였다. 빌라도는 그분의 머리 위에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명을 적어놓게 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임금의 영광을 눈으로 읽고, 참 인금을 배척하고 그 대신 여우 카이사르를 선택했던 유대인들의 수치를 눈으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기라” 유대인들은 여우의 먹이가 되었다. 그러나 임금은 하느님으로 기뻐하리라.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모든 이가 자랑스러워 하리라.“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여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께 속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세상을 이기신 분, 그것도 무장한 군사로 아기신 것이 아니라 조롱받는 십자가로 이기신 분이다. 그분에게 맹세하고 그분에게 자기를 서원하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이 그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유다인들은 거짓말을 많이 했다.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많은 사람들도 거짓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그리스도를 두려워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159-160.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382-384.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 강론.해설, C.보르고뇨, 성염옮김,

      바오로딸, 1995. p.78-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