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37(36): 의인과 악인의 종말

마리아 아나빔 2011. 12. 7. 17:01

 

 

 

                                   시편 37(36): 의인과 악인의 종말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교훈 시편에 속한다. 즉 시편 작가는 크나큰 문제에 번민하고 있다. 악인들은 악을 행하고 정의와 이웃을 짓밝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복하고 안락하게 살며, 그와는 달리 하느님께 기대하고 정의를 구하고 있는 착한 사람은 혹심한 처지에서 살고 있다. 시편 안에서 악인이나 저주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다.

 

    내세는 비밀에 닫혀 있는 것이므로 착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일이, 걸림돌과 근심의 권원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고통을 벌로 보고 지상의 행운은 종교심과 방정한 품행의 보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하느님께서 왜 이러한 상태를 보고만 계시는가? 의인의 고통에는 어떤 의의가 있는가? 시편 작가는 의인들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자손의 번영을 보증하여(3,9,11,18,22,26,29,34-40) 앞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였고, 그에 대하여 악의 번영은 짧고(2), 그 행복은 중단되고 언젠가 망한다고 한다(9,10,15,20,22,28,36,38).

 

    곧 여기서 상벌에 대한 초보적인 해결이 주어졌던 것이다. 후에 이스라엘에서는 특히 예언자들에 의하여, 고통은 하느님의 손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신자를 교육하고 단련하는 길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발견하고, 그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기대하며, 하느님의 손에 남김없이 자신을 맡긴다는 위탁을 배운다. 또 고통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구원의 계획에 의인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에게는 위대한 행방자 그리스도께 대한 소망과 기대를 완성하게 한다. 고통은 사람을 하느님께 가까이하기 위한 정화의 수단이며, 하느님 자신께서 당신의 백성, 당신의 의인들의 보상이 되리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참다운 행복을 물질적인 번영이나 유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난 뒤에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간다고 하는 것, 또 영원한 행복 안에서 하느님과의 생활의 일치에 있다고 하는 계시에 이른다.

 

    이리하여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구원을 바라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과 그 그리스도께 이끌어야 할 길고 괴로운 나그네길의 한 저류를 나타내고 있다.

   이 시편의 구조는 알파벳 순으로 되어 있으므로 훈계이며, 또 의인에 대한 행복의 약속과 악인에 대한 저주와 위협의 집성이다.

 

Text 안에서

 

<간단한 주석>

 

- “불의를 일삼는 자들로 흥분하지 마라”(1절)은 이말은 ... 자들을 질투하지마라(창세 30,1.37,11참조)

- “땅 위에서 네가 걱정없이 먹고 살리아”(3절)에서 땅은 팔레스티나를 의미하며 에수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이 말을 되폴이하셨다(마태 5,3).

- “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5절) 의 뜻은 “주님께 굴리고” 와 같다.

-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11절)에서 이것도 마태오 복음에서 일반적, 영적인 의미로 되폴이 하고 있다.

- “그의 날이 오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다”(13절)에서 “그의 날”이란 하느님께서 심판하는 날, 또는 악인이 멸망하시는 날을 의미한다(1사무 26,10; 에제 21,30 참조).

- “악인들의 많은 재산보다 많다”(16절)은 칠십인역 페쉬타, 에로니모에 따른 번역으로 “수 많은 악인들의 재산..”으로 되어 있다.

-“목장을 덮었던 풀처럼 시들고”(20절)은 옛 히브리인은 제삿날에 쓰는 어린 양의 지방이란 뜻으로 보았다. 다른 번역은 “그러나 악인은 시들고 야훼의 원수는 불타는 구덩이의 풀처럼 사라지고” 사실 팔레스티나의 구덩이 땅은 봄비가 내린 뒤 풀이 자라나 여름 건조기가 되면, 햇빛에 타 버린다.

연기 속에”은 많은 히브리 수사본들은 “연기처럼”으로 읽는다.

- “그 자손은 복을 받는도다”(26절)은“그 자손은 복이 되도다” 이다.

-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지만”(28절)은 칠십인역에는 이어서 “불의한 자들은 멸망하리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삽입할 경우 히브리 본문에는 없은 아인-연이 재생된다.

- “푸른 백향목처럼 펴져감을 보았도다”(35절)은 칠십인역에서는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솓아오름을...” 본문에는 “백향목” 대신 “토착목”으로 되어 있다. 히브리 본문을 의역하면 이식되지 않고 원래의 자리에서 자라는 나무와 같이 푸르게 뻗어감을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의 신비의 빛에 비추어

 

    이 시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비의 빛에 비추어보면 보다 더 정확한 뜻을 띠게 된다. 죄가 없으신 분, 의인 그 자체이셨던 예수님은 우리들 사이에, 가난한 자, 겸손한 자 악인에게 시달리는 자로서, 하느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괴로움의 사람으로서 나타나셨다. 그분 위에 우리들 모두의 고통이 덮쳤던 것이다.(시편 22;마태 27, 46) 그러나 예수님이 생활을 통하여 의인의 고통은 구원의 신비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악인의 사악은 그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면의 번영은 덧없는 것으로서가 아니고,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은 표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아로 걸으신 길은 하늘 나라에 있어서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통하고, 그리고 십자가는 생명의 나무가 되었다. 이리하여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앞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복음의 빛을 받아 인생은 글자 그대로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마음이 가나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복음 5, 3-12). 이렇게 생각하면 시편 37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주신 훈계로 들린다. 그 중의 많은 것이 복음의 행복을 앞서서 맛보게 해 주듯 들린다(3, 9, 22, 29, 34).

 

    이렇듯 시편에 등장하는 의인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 아들, 그분의 자손이다. 그리스도의 생활에 일어난 것을 보고 생각하였다면, 어떻게 지금 다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인가?(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기대하는 사람들의 구원이시며(39-40), 악인의 심판자이시다(13). 그분께서 악인에 대해 인내하시고 벌을 늦추시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누구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2베드 3,9). 의인들의 인내와 끈기는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인내에 협력해야 한다.

 

2. 교회의 빛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는 이 시의 훈계를 계속 신자들에게 말한다. “덕스러운 사람들을 보아라, 정직한 사람을 눈여겨 보아라”(37) 교회는 우리에게 말로 들려준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올바르신 분, 완전한 분이시다. 성인들도 끊임없이 그분을 눈여겨보고 이 시의 가르침을 생활에 실천하였다. 주님께서는 성인들에게 이 시에서 의인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3.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주해에서

 

    이 시편으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 시련을 겪을 때의 인내, 선을 행할 때의 끈기, 미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을 배운다. 그리고 하루만 계속되고 그것으로 끝나는 악인의 위험한 행운을 보고 착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남을 보고서 우리는 악한 길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사는 사람은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고린 7,29-31).

 

    시편의 가르침에 호응하여 사도 요한은 또 이렇게 권한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사엥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1요한 2, 15-17).

 

    예수님 자신이 지상생활의 종말에 대하여 미리 충고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은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2).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백배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가난한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는 이 시편에 대한 유력한 해석이며 확인이다.

 

 

 

※ 참고문헌: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C. 보르고뇨/ 성염, 바오로 딸, 1995, p.29-7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104-107.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261-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