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72(71): 메이사의 보편적 나라

마리아 아나빔 2012. 3. 18. 10:27

 

 

                                   

                                     시편 72(71): 메시아의 보편적인 나라를 노래하다.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군왕시편으로 영광스런 이상적인 한 왕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인의 경우, 명백히 메시아와 그 나라를 암시한다. 시편은 왕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왕이신 메시아를 그리지만, 그 나라의 모습은 왕 자신의 하나의 나타남인 것만 같다. 이끄는 힘으로 자신과 맺어져있는 위성에 생명을 주는 태양과 같이 왕은 자신의 나라의 생명적 중심이다.

 

시편은 하느님께서 왕에게 법률을 주고, 왕의 자손에게 정의를 가지고 그 세력을 행사하도록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 소원은 예언자의 음조를 지닌 소원이다. 왕은 특히 가난한 사람을 정의와 공정을 가지고 다스릴 수 있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그분의 나라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하며 비와 같이 은덕이 풍요하고, 바르고 평화로운 것이리라(5-7).

 

또한 그 나라는 보편적이며 땅의 끝까지 퍼지고 모든 백성을 수용한다(8-11). 그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 시달리는 사람들의 호소를 들어 주고, 도움을 받고 보호를 받을 것이다(12-14). 그것은 재화와 덕과 외부적인 번영마저 가진 나라다. 영광의 나라에서 온 세계의 백성은 그 은덕을 느끼고, 그러므로 기리고 찬양할 것이다(15-17). 18-19절은 이 시편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시편 제2부를 마무리 짓는 짧은 송가이다. 이 시편은 솔로몬 또는 다윗이 지었다고 하지만 분명치 않다. 대예언자의 시대에 살았던 작가는 이 시편을 쓰면서 솔로몬의 영광에 점치던 나라를 회상하였을지 모른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왕들의 축성의 날, 또는 축성 기념일에 노래하였던 것 같다.

 

구약시대의 왕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와 그 왕권의 전표였다. 이스라엘왕의 인물 뒤에는 그 시대의 유다 백성에게 있어서 정의와 보편적 평화의 시대를 시작하는 약속된 메시아의 이상상이 막연하기는 하지만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포로 시대와 그 후를 이은 시대의 대예언자들은 백성에게 말할 때, 언제나 이런 배경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세워진 나라는 하느님께로부터 이 세상의 나라로서가 아니라, 당신이 뽑은 백성 위에 하느님께서 군림하시는 하나의 나타남으로 소망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은 주님께 “기름부은 분”이어서,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당신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뽑게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왕과 왕국에는 성스러운 종교적 자격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정의와 세력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또 왕과 그 왕국에는 예언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시온에 군림하고 만민 위에 당신 나라를 마련하실 분을 알리는 것이다.

 

II. 그리스도와 그분이 그 복음에서 알린 그 교회로 세우신 나라에는 이 시편의 메시아적 왕국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 31-33).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그 왕이시다(마태 22, 41-44). 그러므로 다윗와 솔로몬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아들이시며, 당신 자신 또한 왕이시며, 빌라도 앞에서 그렇게 선언하셨고(요한 18,37), 또 그렇게 인정되고 계시다(1요한 49, 12:13).

 

“주 예수께서는 때는 이미 다 되었고, 천국은 가까이 왔다‘(마르 1,15;마태 4, 17) 하시며 세세로부터 성경에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심으로써 당신 교회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업적과 현존으로써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났다. ...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며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신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물려“(히브 1,2) 받으신 분, 이 세상 왕들의 으뜸, 왕 중의 왕, 군주의 군주(묵시 1,5)이시다. 적의 어떠한 세력도 그리스도의 정복의 행진과 그 보편적인 지배를 막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기름부은 분”이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루카 4,18)를 주기 위해 보냄을 받은 분이시다. 이어 시편은 교회의 특징과 존재양식을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요한 18,36). 그러므로 이 세상의 나라처럼 국경이 한정되고, 지나가 버리는 것,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의 힘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나라는 정의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 정의는 참된 행복에서 말씀하신 복음적 완덕에 있다. 부정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I 고린 6, 9-10).

이 나라에서는 가난한 이들, 불쌍한 이들, 약한 이들,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모든 폭력과 부정에 대하여 해방과 구원을 얻는다. 이 나라는 풍요로와 그리스도의 왕권은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땅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이 세상을 적시고, 엉겅퀴와 덤불빡에 없었던 곳에 정의와 평화를 싹트게 한다(6-7). 그리스도의 나라가온 것은 하느님의 풍성한 생명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3,7), 그리고 축복의 나라로(17), 이 축복은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의 의인에게 주었던 생명의 모든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다.

 

또 그것은 보편적인 나라이다(8-11).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국가가 아니므로(요한 18,36)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인도해 들여도, 어느 민족들의 재능과 재화와 관습을, 좋은 것이라면 촉진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화하고 강화하여 높여준다. 사실 교회는, 이방인들을 유산으로 받으시고(시편 2, 8) 이방인들이 선물을 가져오는 그 나라의(시편 72, 10; 이사야 60, 4-7; 묵시 21, 24) 왕과 함께 거둘 줄을 알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 지니고 있는 이 보편성은 영구히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성령의 일치 안에 하나로 모이게 하는 주님의 선물이다.

 

이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각 부분은 그 고유한 은혜를 다른 부분들과 온 교회에 제공하며(10), 전체와 각 부분이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일치의 완성을 함께 지향하면서 자라게 된다(교회헌장 13). 이 나라에 결집되어 있는 도성은 하나의 건물로서, 그것은 재화와 광채에 차고 넘친다(10-11; 묵시 21장).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2베드 1,11참조).

 

III. 교회의 교부들은 이 시편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왕권과 그 나라의 웅장 화려함을 설명하였다. 교부들은 이 시편을 악마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 뒤의, 신앙에 대한 모든 백성의 부르심에 대한 명백한 예언으로 보고, 그리고 이 시편을 “교회의 기도”로서 채택하였다.

 

참으로 이 시편에는 세계에서 실현되는 그리스도 나라의 도래와 그 재림에 대한 갈망이 표현되어 있다. 교회는 초대시대부터 이 시편을 왕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가장 아름다운 찬미가의 하나, 그분의 힘, 그분의 자비, 그분의 영광에 대한 찬미로서, 또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골로1,13) 아버지께 대한 감사의 노래로 불러왔다.

 

전례에서 사용된 이 시편에도 이 시편의 메시아적, 예언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교회는 대림절에 이 시편을 가지고 자신의 평화의 왕을 맞이하고, 그 강생 때에 그분을 맞고 또 공현 축일에는 이 시편을 가지고, 세계에 대한 그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린다.

교회는 자신을 이 왕적인 품위 는 민족에 속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동쪽에서 그리스도께 오는 왕들은 교회 안에서 오랜 세기에 걸쳐 믿음의 빛을 보고, 모든 백성과 민족과 말의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인 이방 백성의 첫 이삭이 되기 때문이다(묵시 7,9).

 

모든 성인 축일이 다가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 축일을 축하하고 그리스도 나라의 보편성을 바라본다. 이리하여 왕과 그 나라를 전례에서는 하나로 하고, 교회는 여기에 성령이 구약시대에 하신 약속의 실현을 보는 것이다. 같은 축일의 미사 첫 노래에서 전례는 이 시편에 있는 말을 써서, 그리스도 나라의 특징을 벌려 놓는 다. 그 나라는 진리, 생명, 성성, 은총, 정의 , 사랑, 평화의 나라다.

 

이 시편은 또 성 목요일 밤의 기도에서 되폴이 되고, 그리고 왕이신 메시아의 수난의 어둠 속에 초자연적인 빛을 보내고, 그것은 고통스러운 비극 속에서 부활의 기쁨의 소리를 느끼게 한다. 괴로움의 그 사람은 영광의 왕이시다. 그분은 죄와 죽음을 없애시고 이 세상에 평화와 자유와 생명의 나라를 세우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구걸하는 가난한 이들과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자를 구하시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위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마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 시키실 때까지 군림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는 죽음 입니다”(1고린 15, 24-26). 시의 전말은 영원을 향해 열려 있다. 거기에 예언의 전표와 상징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IV. 이 시편에 씌어 있는 것은 볼 수 있는 교회에 외부적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내부적으로 실현된다.

 

교회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맏아들이고 그것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부정을 억누르고, 육체의 본능을 억제하고, 모든 사욕을 물리치며, 하느님과의 화평을 구하고, 그리하여 자기 몸에다 사랑과 평화의 왕을 본뜨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자리 잡는 것은 그 마음으로부터 악마가 추방되고(루가 11,20), 하느님의 권리와 진리가 인정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때이다. 그 완성은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당할 때”(1고린 15, 28)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굴복은 반역과 불순종이 시작된 곳, 곧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TEXT 안에서

 

- 1절은 하느님께서 임금 또는 임금의 아들에게 당신의 공정과 정의를 베푸십사고 청하는 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는 임금을 위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공정”과 “정의”는 근본적으로 내용을 같이하며, 임금과 임금의 아들은 동일한 인물이다. 임금의 아들, 곧 왕자는 계승권을 지닌 사람이다. 여기서 왕자는, 하느님의 기름 부름 받은 이로서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진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등극하는 유다 왕국의 새로운 임금을 말한다. 이 기도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새 임금에게 주어지길 기원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스라엘 임금은 원 임금이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 분의 백성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대리자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은 하느님의 통치의 바탕인 공정과 정의를 필요로 한다.

 

- 2-11절은 임금을 위한 구체적인 간청으로 들어가 새 임금을 위하여 여러 가지의 것들이 기원된다. 그 첫째가 1절에서 언급된 공정과 정의가 다시 한번 되풀이 된다. 대신 역순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이 두 개념이 시편 72편의 근간을 이룸을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정의와 공정으로 이루어질 통치의 대상은 ‘당신의 백성’, 곧 하느님의 백성과 그분의 ‘가련한 이들’이다. 임금은 자기의 신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백성을 이끄는 사람이다.

임금은 자신의 힘으로 왕좌에 오르지도 않으며, 특히 이집트에서와 같이 신적인 존재로서 자기의 백성을 다스리지도 않는다. 이로써 이스라엘 특유한 하느님 - 임금 - 백성의 삼각관계가 제시된다. 임금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하느님의 중재자이며, 그 주인이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대리인이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이기 이전에 종교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자기마음대로 통치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하시듯이 책임감을 갖고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결국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 그분의 백성,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하느님의 대리자이다.

 

여기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은 가난하고, 멸시받고, 학대받고, 억압당하는 이들을 일컫는 명칭으로서, 이들은 바로 임금이 가장 큰 관심을 두고 보살펴야 하는 백성의 무리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중동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임금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이 사상이 특히 종교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이다.

 

임금의 통치는 백성만이 아니라 백성의 이 삶의 터전인 자연까지도 포함된다. 3절은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서 자연까지도 복을 받음으로써, 백성이 그 결실을 누리게 됨을 기원하고 있다. 산과 언덕들은 이스라엘 땅 전체를 지칭한다(시편 85, 11-12; 이사 45, 8 등). 이들은 날라올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 안녕, 충족, 충만 등을 뜻한다. 그래서 평화와 정의는 구원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4절의 내용은 2절과 같으나 이에 덧붙여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고 있다. “폭행하는 자들”, 곧 백성 중에서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는 자들을 제거하는 활동을 말한다(2-3행). 이 부정적인 면은 가련한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긍정적인 면(1행)과 함께 임금의 통치 행위를 말한다. 이 두 면은 결국 동일한 사항을 나타내는 두 개의 양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조”에서 언급했듯이, 임금이 등극할 때는 “...왕 만세!” 가 장엄하고 열렬하게 기원된다. 이 기원은 임금이 말 그래도 만세를 살기를 원함은 아니다. 곧 만세가 가능하다는 말은 아다. 5절은 고대인들의 우주관에 따라 인간이 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해와 달과 같이, 임금 또한 그렇게 오래오래 살기를 발라고 있다.

 

5절의 임금의 장수에 이어서 6-7절은 다시한번 임금의 의로운 통치를 기원한다. “풀밭”과 “땅”은 나라 전체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히 건기가 길고 강우량이 적어 일년 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메마른 상태가 계속되는 팔레스티나의 땅을 연상해야 한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뿌리가 깊은 나무를 제외하고서는 푸른색을 거의 볼 수가 없다. 자연이 죽은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비는 곧 푸르름과 생명을 뜻한다. 비가 땅의 구석구석까지 생명을 불러일으키듯 임금의 의로운 통치가 나라 구석구석까지 예외 없이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다. 7절에서는 임금의 선정에 대한 기원에, 이미 5절에서 언급된 시간적 개념이 더해진다. 곧 지금 왕위에 오르는 임금의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달이 스러질 때 까지 융성하기를 기원한다.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는 ‘ 이 세상이 없어질 때까지’, 곧 영원하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5절과 비교해 볼 때 7절에서 시간의 의미가 더 강하게 표현됨을 볼 수 있다.

5절 “해와 달과 더불어” 는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계속해서이고 7절에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는 이 세상이 없어질 때까지의 의미이다. 또한 6-7절에서는 ‘임금의 의로운 통치’를 노래하는데, 이는 결국 한 임금의 선정은 ‘정의와 평화’라는 두 글자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볼 보여준다.

 

8-11절에서는 새로운 주제가 도입된다. 즉 임금의 세계 지배이다. 8절이 말하는 두 바다, 강 그리고 세상 끝이 실제로 어디를 지칭하는가라고 묻기보다는, 이들이 당시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전세계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라는 사실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같은 표현이 즈가 9,10에서는 메시아에게 적용된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임금 앞에 이제 그의 적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 9절의 “먼지를 핥다”는 극적인 표현으로서, 굴복을 뜻한다.

 

10절의 “다르싯”은 지중해 어디엔가 있는 나라, 아마도 스페인(지중해 끝의 나라= 가장 먼 나라)로 추측되며, “섬나라” 역시 가장 서쪽에 있는 지중해의 섬들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세바”는 아라비아의 남쪽 왕국(1열왕 10), “스바”는 아프리카의 동북부(현재의 에디오피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이 나라들이 당시에 알려진 가장 먼 데 있는 땅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세상 끝에서 그러하면, 거기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임금의 세계적 지배를 11절은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모든 민족과 백성들이 새 임금을 섬기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7절까지는 어는 정도 유다 왕국의 내적인 사항들을 기원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견지에서 큰 무리 없이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8-11절이 말하는 유다 임금의 세계적 지배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국가, 그리고 그 역사를 생각해 볼 때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시편 72가 노래하는 임금이 유다 왕국의 평범한 임금이라면, 곧 고대 중동의 조그마한 한 나라의 임금이라면, 그를 어떻게 세계 지배자로서 마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아무리 기원이라고 하지만, 기원의 대상이 가능성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지배의 기원은 유다 왕국의 임금이 지닌 기능성을 훨씬 뛰어넘는다.

 

12-17절은 임금을 위한 기원으로 다시 한번 임금의 의로운 통치가 가장 먼저 기원된다. 이 12-14절은 2절과 4절에서 말해진 주제를 다시 언급하고 있지만, 임금을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가까운 지배자로, 그리고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구원자로 그리고 있다.

 

15절에서는 5절의 임금의 장수와 10절의 조공에 관한 내용이 함께 다루어진다. 더불어 임금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백성은 임금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는 관계에 대하여 말해진다. 임금 쪽에서의 선정, 그리고 백성 쪽에서의 기도, 이 둘이 임금과 백성을 긴밀히 이어주는 끈으로서 묘사된다.

 

16절 3절에 이어 자연의 풍요를 노래한다. 레바논 산과 산맥, 그리고 이와 평행하여 북남으로 뻗어 있는 안티레바논 산맥은 그 울창한 숲과 풍부한 물로 해서 풍요를 상징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안티레바논의 남쪽 끝에 자리한 헤르몬 산도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이 산 밑에 있는 네 개의 샘에서 요르단 강이 시작한다. 또한 팔레스티나 산들은 별로 높지는 않지만 돌투성이로 황량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산봉우리들 위에까지”라는 표현을 통해 이들까지도 곡식들로 풍성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17절의 1-2행은 5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름”은 주인의 본질을 나타내어, 주인을 대표하고 운명을 같이 하며, 또한 주인을 넘어서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17절은 5절에서와 같이 임금 자신의 장수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그 후손들을 통해서 길이 남기를 기원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임금의 선정도 기원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곧 세계적 통치의 선정으로써 임금의 이름이 영예롭게 모든 이름 위에 영원히 서있게 됨을 바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임금을 통하여 복을 기원한다는 17절의 3행은 창세기 12, 에 나오는 아브라함에 대한 강복을 연상하게 한다. 창세기 12, 3의 정확한 번역에 대해선 아직도 토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너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로 번역하면 별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이와 비슷하게 시편 72, 17의 3행은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기원하며”로 되어 있다. 창세기의 ‘복을 받다’와 시편의 ‘복을 기원하다’는 같은 동사의 두 변화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임금에 대한 기원으로 가득 찬 시편 72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 끝을 맺는다. 이로써 하느님- 임금- 백성의 삼각관계를 오해의 여지 없이 확실히 하면서, 하느님의 역할과 임금의 위상을 명시한다. “그분 홀로 기적들을 행하시니”(18절 2행)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임금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떠한 것들이 기원되었든지 간에 기적, 곧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로써 다시 한번 임금과 왕권의 제한성이 뚜렷해진다. 임금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대리자일 뿐인 것이다.

 

1절의 끝에 반복되는 “아멘”은 말해진 바가 옳다. 진실되다 -유효하다 아멘으로 응답한 사람에게 유효하다‘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말해진 또는 선포된 바를 자기도 동참하여 인정하고, 자신도 이를 의무 또는 사명으로서 받아들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아멘, 아멘”하도 되풀이되는 표현은 기쁨 속에서 진지하게 지금까지 노래한 바에 동참하고 함께 기도함을 강조하는 구실도 한다. 18-1절은 시편 72를 끝맺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편집의 제 2권을 맺는 찬양이 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시편 72는 전통적으로 다른 군왕시편들과 함께 메시아적으로 이해되어왔다. 이 시편들은 장차 나타날 구세주를 노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유다 왕국의 임금들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시편 72는 새 임금의 대관식 또는 매년이나 몇 년에 한 번씩 거행되는 임금의 축일에 그를 위해서 올리는 기도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로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시편 72에서는 의로운 통치, 장수, 자연의 풍요로움, 세계 지배 등 임금을 위해서 여러 가지가 기원되고 있다. 세계 지배는 이 구절에서 일반적으로 약속 또는 기원으로 말해진다. 약속 내지 기원은 지금 없는 것을 약속하고 기원한다. 그런데 가능한 바를 약속하고 기원해야 한다. 물론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그러나 약속 내지 기원의 대상, 여기서는 임금이 수용 불가능한 바를 약속하고 기원한다면 우스운 일일뿐더러, 그 대상을 조롱하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유다 왕국은 역사적으로 대국들 사이에 까여서 그야말로 숨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한 조그마한 나라였다. 국제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이름 없는 소국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위의 군왕시편들의 구절들은 그야말로 초대국, 예컨대 전성시대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 또는 징기스칸의 대국에나 상대적으로 해당할 수 있는 말들이다.

 

군왕시편들은 임금을 노래한다. 그런데 아무개 임금이 아니라, 그냥 임금이고 왕자다. 왕자라 함은 정당하게 왕위 계승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임금 개인이 아니라 왕위 왕권 왕국이 결국 군왕시편들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들은 다윗에게서 유래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서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다윗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메시아로서 영원한 왕국을 약속받는다. 그런데 이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분이신가? 우주의 창조주로서 우주의 절대적 임금이고 주인이시다. 구약성서는 기름부음 받은 이, 곧 ‘마쉬아흐’와 하느님의 밀접한 관계를 항상 강조한다. 레위에게서는 ‘기름부음 받은 이’가 네 번 나온다. 네 번 다 사제를 말한다. 그 어투도 일정하다(다니 9, 25. 25). 구약성서의 그 밖의 용도에서는 항상 ‘... 기름 부음 받은 이’이다. 그래서 ‘나의, 그분의, 당신의 기름 부음 받은이’이다. 야훼님과 임금의 뗄수 없는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들이다. 이 특수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기름 부음받은 이의 불가해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해치지 않은 아야기 안에서도 볼 수 있다(1사무 24, 7; 26, 9; 2사무 1, 14).

 

결국 임금이라 함은 이러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기름부음을 받고 약속을 받은 다윗의 후손이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이다. 하느님의 이 세상에서의 대리인이다. 이 대리자 일대가 다윗이다. 이 다윗은 비교적 커다란 왕국을 건설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임금이 탄생될 때마다 어느 정도 역사적 기초를 닦아놓은 다윗과 그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여 임금에 대한 이상들이 기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바람은 아니다. 결국은 하느님 자신의 왕위. 왕국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바로 다음 순간에라도 하느님께서 실현시키실 수 있는 것들이다.

 

임금 - (왕위/ 왕권‘ 왕국) ---- 다윗 (선택된 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약속을 받은 자) - --- 하느님(우주의 창조주로서 우주의 절대적 임금이요, 주인)

 

왕정제도, 그리고 이에 따른 이러한 사상과 신학은 이스라엘에서 다른 종교적 전통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후에야 비로소 탄생하였다.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새로운 표현 방법들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이미 왕정제도를 확고하게 다진 주변 나라들에서 이를 빌려왔다. 그러나 이 빌림은 단순히 도용이라든가, 과정이라든가, 아니면 임금에게 아부하기위해서가 아니다. 신학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 이방 표현방법들을 자기들의 신학에 따라 정제한 다음 사용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언어와 표현 양식의 도움을 받으며, 새로운 임금이 등장할 때마다 그가 하느님 법의 보호자와 관리인으로서, 하느님의 진정한 기름부음받은 이로서, 정의와 평화를 풍성히 가져오기를 기원했다. 비단 좁은 유다의 땅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그렇게 다스리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시편 72를 위시한 군왕시편들은 점점 메시아적으로 이해되고 불려졌다. 하느님의 진정한 메시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제2의 다윗, 곧 구원자가 올 것을 기대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유다 왕국이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후에도, 이 시편들이 보전되고 시편집에 받아들여지고 불려진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이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였다.

 

 

※ 참고문헌: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187-202.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159-160.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441-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