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기(창세기)

창세기 4-11장의 의의

마리아 아나빔 2010. 6. 17. 20:15

 

 

도입기도: 시편

 

새로운 text로 들어가기 전에 앞으로 다루게 될 창세기 4-11장이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창세기 4-11장의 의의

 

   모세오경을 최종으로 편집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의식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이라는 좁다란 경계를 벗어난 경지였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전인류에 해당되는 ‘세계사’에 비추어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었다. 세계사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아브라함의 역사와 성조들의 역사를 논할 수가 없었다. 분명이 역사도‘하느님과 인류와의 관계’라는 유일한 관점에 입각해서 서술된 것이다.

 

   그러면 성서 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개별적인 역사와 세계사를 어떻게 연결해서 그 역사관을 수립하였는가? 그들의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대홍수에 관한 고대의 전승들, 바벨탑과 같이 위대한 민족들이 쇠망한 유적들, 같은 집안이나 부족 가운데서 매일같이 자행되는 살인과 전쟁, 무서운 피의 복수, 언어의 장벽으로 철저하게 분열된 민족들의 상쟁을 확인하면서 그들은 이처럼 푹 넓은 역사관에 도달하였다.

 

이 모든 현상에서 성서 저자들은 죄의 엄연한 현실을 보았다.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 최초의 악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많아지고 심해졌음을 실감하였다. 성서 저자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그 이름이 전해져 오는 조상들의 명단을 부자간의 관계로 연결시켜 족보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생물학적 관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넓은 의미의 친족관계, 가족과 부족 간 인종상의 혈연관계, 지리적인 이웃, 그리고 정치, 경제, 산업 등을 매개로 한 여러 가지 형태의 인척관계를 뜻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야기들은 악이 펴져 나감을 드러내고 있고, 족보는 하느님의 원초 계획에 따라 인류가 성장해 감나타내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을 지켜보는 성서 저자들의 안목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안목이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최초의 타락 이후 인류의 종교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내리시는 선고는 결코 처벌이나 인류의 멸망이 아니고, 인간의 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이다.

   성서 저자들은 사람의 이름과 족보들을 모아서 일종의 ‘몽타주’를 만들었다. 그 기본취지는 단일한 역사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류는 항상 한 핏줄이요 따라서 죄와 구원의 역사를 함께 한다는 연대의식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성서는 시종일관 간간의 차별과 민족주의에 대해 극구 반대하는 노선을 취한다.

 

이 고대사에는 중요한 문학적 흐름이 있다. 성서 저자는 우리가 선발이라 부를 수 있는 기준을 채택하고 있다. 인류가 원조에서 노아까지, 노아 다음, 셈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를 지어 내려간다는 노선이다. 즉 구원계획이 그 노선에서 실현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 집안에서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이 이스마엘이 아닌 이사악에게 계승되며 다음에는 에사오가 아니라 야곱에게 계승된다. 성서 저자는 그 줄거리에서 벗어난 족보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흐름은 성서 저자가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을 부각시키고자 사용한 방법이다.

 

1) 이브라함과 야곱에 이르는 족보에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다른 민족들이나 족보는 점차적으로 삭제했다. 이것은 한 사람(아브라함)과 한 민족(히브리)이 ‘선택’ 되는 사상과 사실을 주지시키고, 그 선택이 순전한 은혜임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2) 성서 저자는 전 인류와 아브라함을 결부시킴으로써 ‘선택의 의의’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된 것은 온 인류를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맡겨져 계승되는 축복과 계시는 온 인류에게 돌아갈 재산이다.(창세 12,3) 아브라함에게 내리는 언약의 축복은 낙원에서 내렸던 구원의 약속(창세 3,15)을 실현하는 첫 걸음이다.

 

 

- 죄의 또 다른 모습들(창세 4, 1-6, 4)-

 

   창세기 성서 저자가 4장 1절-6장 4절에서 죄의 좀 더 깊은 모습들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 지 볼 수 있다.

저자는 죄의 결과들을 예증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도입한다. 그는 일단 하느님이 불신되고, 죄가 굴레를 벗어나자, 즉 부조화가 세상에 들어오자,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간다는 논지를 확대한다.

 

창세 4,1-26: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4장에 대한 개관)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바로 이어서 창세 4장에 수록되어 있는 카인과 아벨의 일화는 비극으로 끝나는 평범한 한 형체간의 투쟁을 훨씬 뛰어넘어 보편적인 의의를 띠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잃고 타락한 인류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받은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 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미움과 질투가 마침내 살인까지 빚는다. 이렇게 하여 미움의 결과인 죽음이 지상에 최초로 나타났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인의 양심에서 울려온 하느님의 말씀이다.(4,6-7)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많은 은총을 잃었지만 지성과 자유의지라는 제일 중요한 능력은 잃지 않았다. 따라서 자유로이 또 알면서 행한 모든 행동은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창세 4, 1-8: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1. 구성

 

창세기 4장 전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전승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방황하는 이야기는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전승이라 함은 성서가 씌어지기 전에 성서 저자들의 손에 입수된 자료들을 말하는데 구전되어 오던 것도 있고 문서로 전해져 오던 것도 있다.

 

2. 문학 비평

 

   하나의 통일체로 독립되어 떠돌아다니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솔로몬왕 시절에 왕국 서기관들인 야훼스트에 의해서 원조들의 이야기에 끼워 넣어졌다. 이 이야기 안에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왜 하느님은 편파적으로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시면서 카인의 제물은 거설하셨는가? 하와가 낳은 아들이 카인과 아벨뿐이었고 아벨을 죽은 후 이 세상엔 세 사람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카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나중에 카인이 놋에 정착하여 결혼할 여자를 찾을수 있게 되었는가?

창세기 저자는 독립된 전승의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진행시켜 간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폭력이라는 보다 큰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폭력의 과정과 결과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이 폭력을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하시는가? 이런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3. text 내용

 

   이야기의 서두에 아담이 생명의 어머니 하와를 알자 하와가 ‘주님과 함께’ 곧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카인을 낳았다고 말한다. 첫 인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카인의 출생을 통하여 또다시 인간에게 생명에로의 길을 열어 놓으신다. 인간은 일차적인 부부공동체에서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지는 가정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카인에 이어 동생 아벨이 태어나고 둘은 목자와 농부라는 다른 직업을 갖게 된다. 여기서 ‘카인’이란 말은 고대 아람어에서도 나타나는 인명으로 ‘얻다’라는 동사와 발음이 같아서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신 아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한편 아벨은 ‘숨’ 또는 ‘허무’ 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은데 짧았던 그의 생애를 암시하는 것 같다. 사실 창세기에서 아벨은 태어났다가 즉시 살해당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있다.

 

야휘스트는 창세기 1장을 기록한 사제들과는 달리 제사에 관심이 없기에 첫 희생제사에 대해 자세한 보고 없이 부수적으로만 언급한다. 즉 카인의 봉헌물은 곡식을, 아벨은 가축의 첫배 기름기를 바치는데 공동으로 바친 것이 아니고 따로따로 바친다. 한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호의를 더 많이 차지하겠다는 불안스러운 경쟁의식엿보인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은 거절하시자 이 경쟁의식은 카인을 질투와 분노의 화신으로 만든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이 왜 동생 아벨의 제물은 기꺼이 받으시고 형 카인의 제물은 거절하셨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러나 이 아야기 뒤엔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고 보여 진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가나안 농경민들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목축업을 하던 자기네 조상 히브리인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생으로서 형에게 당연히 돌아갈 왕권을 차지하게 된 솔로몬의 왕위계승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역사적 배경은 다른 성조들의 이야기에도 드러난다. 야곱이 에사오를 앞질러 이사악과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내는 이야기는 그 전형적인 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보편적 진리는 느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결정은 인간적인 서열이나 재능의 정도, 재산의 유무나 혈통과 가문, 또는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당신의 온전한 자유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같은 사상이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없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없이 여긴다.”(출애 33, 19) 의 말씀에서 명백이 드러나고 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거절하신 것을 알고 몹시 화를 낸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제물의 거절이 곧 카인의 배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이 하나를 선택했다 해서 다른 하나를 버리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서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필요에 의해서 한쪽을 선택하는 경우 다른 쪽에 대해서도 충분히 선의를 보여 주신다. 하느님은 화가 나있는 카인을 진정시키시기 위해서 차근차근 그가 화를 내는 경위를 물으시고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는 말씀으로 카인의 착한 마음에 호소하신다. 그리고 카인에게 폭력이라는 궁극적인 악에로 빠지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야 한다고 경고하신다.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않아 너를 노릴 것이니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죄를 사나운 짐승으로 보고 그것에 물리지 않도록 길들여야 한다고 충고이다. 아담의 범죄 설화에 나오는 뱀도 인격화되어 아담과 하와에게 말을 걸면서 유혹한다. 창세기의 저자에게 있어서 악은 이처럼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존재로 인간에게 도전해 온다. 여기서 창세기 저자는 악의 속성은 가만두면 자기 스스로 번창해 간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악은 그 시초부터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으면 나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을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질투심과 분노에 사로잡힌 카인은 하느님의 호소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일을 저지르고 만다. 카인은 자기 아우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고 한다. 그를 살해하기에 앞서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호젓한 장소를 택한 것이다.

 

 

4. 교훈과 묵상

 

   우리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불필요한 종교적 경쟁의식이 질투와 분노를 낳고 무절제한 질투와 분노가 살인도 불사할 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전쟁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발생되었던가? 중세의 십자군 전쟁 때 그리스도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회교도들을 살해했다.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끔찍한 종교 전쟁들, 오늘날 중동과 팔레스티나에서 회교도들과 그리스도 교도들과 유다교도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크고 작은 분쟁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의 회교도들과 힌두 교도들 사이의 갈등, 북부 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가톨릭교도들과 성공회 신자들

사이의 폭력사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교 분쟁들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고 하느님의 모상인 인류를 학살하는 현장이 되어 왔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하느님께서 민족과 문화와 시대에 맞춰 인류에게 주신 커다란 선물이며, 인류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자산이다. 타종교 안에서도 절대 진리와 절대자에게로 나아가려는 노력과 탐구와 흔적을 발견하고 이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도록 격려하는 넓은 아량을 지녀야 할 줄로 믿는다.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다양한 민족들이 다양한 제물을 한데 모아 바치는 날 이 지구상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 것이다. 폭력의 근원인 종교인들 사이의 불필요한 경쟁의식과 무절제한 분노와 질투에 굴레를 씌우도록 하자.

 

 

* 참고문헌: 구약성서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성염, 바오로딸, 2001, p.164-166.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3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