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73(72): 종국의 정의

마리아 아나빔 2012. 4. 2. 20:36

 

 

 

                                                   시편 73(72): 종국의 정의

 

들어가면서

 

시편 73편은 교훈 시편으로 구약성경의 최고봉이라 할 수는 없지만 높은 봉우리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편의 구조를 보면, 시편 1절은 주제도입, 2-12절은 악인들의 행복과 교만으로 악인들의 무사, 건강, 안녕과 행복, 그리고 그 결과로서 그들의 삶의 자세와 세계관이 묘사된다(악인의 성공). 13-17절은 시편작가의 무죄와 불행으로 시편작가의 고난과 고통이 말해진다(신앙의 위기). 구체적으로는 기도자의 신앙과 이에 따른 생활에 맞지 않는 불행이 묘사된다. 18-20절은 악인들의 진정한 운명으로 악인들의 겉으로 보이는 행복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진정한 운명이 말해진다. 21-27절은 시편작가의 진정한 운명으로 시편작가의 겉으로 보이는 불행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진정한 운명이 서술된다(위기의 극복). 그리고 28절은 주제요약으로 종결로 구성된다.

 

시편 73은 지혜문학에서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 변신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 선하시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느님께서는 왜 악인이 번성하게 그대로 두시는가? 이런 엉망이 된 세상을 보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정의를 지지할 수 있겠는가. 착하고 올바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인가? 크나큰 문제에 봉착한다. 이에 시편저자는 지금의 자기 상태에서 자신을 바치고, 그리고 주님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정당하게 하는 해답을 찾고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도입부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는 노래로 시작된다. 시편작가는 악인의 번영을 보고 시샘의 감정을 느끼며,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희미해져간다. 이러한 의문은 그를 괴롭힌다. 이와 같은 생각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찾아 올 수 없다. 마침내 어 느날 이 해결을 하느님께로부터 온 특별한 비추임으로 받게 된다(13-17).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다는 것, 인과응보의 원리가 전통적인 문학의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면 시편 1,6)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흑백의 논리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 시편은 한 기도자가 자신의 믿음과 현실사이의 격차로 말미암아 신앙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의 선하심과 좋으심’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깨달아 간다. 이것은 신앙의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그린다. 구약에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본문들로는 욥기와 코헬렛, 그리고 시편 37 등을 들 수 있다. 코헬렛의 저자는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현세를 즐기라고 하는 반면, 시편 73의 저자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내세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점에(시편 73, 23-26) 이 시편이 코헬렛 보다 후대의 것이라고 알 수 있으며,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교부의 전통과 특히 성 목요일과 수난의 제2주일과의 전례는 이 시편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한 예언, 또 수난 동안 그리스도의 기도의 표현으로 간주하였다. 그분은 수난의 기도 속에는 올바른 모든 사람의 온갖 번민이 담겨있다. 그리고 악인의 울부짖음과 착한 사람의 괴로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초점이 모인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기도로서 읽으면, 그분은 우리에게 참된 정의의 길을 보여 주기위하여, 또 가장 곤혹스러운 경우에서조차 그 해결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정신면, 내면의 시련과 얼마나 연대적으로 되셨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시련에서 영광에로의 징검다리로 쓴 시편의 이 부분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다고 하는 그 나그네길에서, 어린 양을 따르는 모든 올바른 사람의 진실된 기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도를 가지고 우리 내면의 고통을 당신 것으로 삼으시고,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영의 힘을 주신다. 끝으로 이 시편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극복하는 신앙의 순수한 표현인 이 시편의 기도는, 사람의 어떠한 철학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불안과 모순에 대한 대답이어서, 의인에게는 하느님과 함께 살 미래의 한없는 생명이라고 하는 확실성을 준다. 즉 우리에게 오직 하나의 선은 오직 하느님이시다.

 

Text 안에서

 

시편 73편은 절을 따라가며 순서대로 주석을 하지 않고 주제에 따라 설명해보자. 그러나 일절은 특별한 해설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좋으시도다,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선/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시편 전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또는 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1절 외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라는 히브리말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러이스라엘’, 이 말은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러 이스르-엘, 이는 우리말로 ’에게- 올바른 이- 하느님‘을 뜻한다. 이렇게 분리하면 1절의 1행과 2행은 훌륭한 대구법을 이루게 된다.

ex) 1행: 진정 좋으시도다. 올바른 이에게 하느님께선/ 2행: 하느님께선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가 된다. 여기서 “이스라엘에게”와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는 댓구를 이룬다. 여기서 문제는 시편 73의 주인공이 단수 1인칭 ‘나’라는 사실이다. 시편 전체에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또는 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1 절 외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없다.

여기서 2행에서는 “마음이 깨끗한 이들”로 복수인데 반해서, 1행에서는 “올바른 이”로 단수라는 점이다. 물론 처음부터 단수 일 수 있다. 시편 73의 출발점은 ‘나’이기 때문에 시편작가는 이 단수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본디 복수였을 수도 있다. 복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스르’에 히브리말 알파벳의 가장 작은 철자인 ‘요드’만 붙이면 된다. 이 철자가 전승 과정에서 떨어져나갔거나, 제거되었을 수도 있다.

 

악인의 행복과 시편작가의 불행: 신앙의 위기

 

시편작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신앙과 그 신앙에 따른 생활자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진정, 나는 헛되이 내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내 두 손을 결백으로 씻었단 말인가!”(13절)

  “정녕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이스라엘에게”와 “진정, ... 헛되이”라는 한탄은 1절의 에 상응하는 말이다. “정녕”은 1절에서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는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내적 갈등과 그 결과까지 미리예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좋으시다는 표현은 시편들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고 거의 전례에서 상용되는 고정된 용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입으로는 그렇게 노래한다 해도 이러한 진리가 실제의 삶에 명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 안에는 시편저자가 겪었던 신앙의 투쟁이 메아리치고 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그가 지금 살아 있는 이런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선하시다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은 폭력을 저질러도 내버려 두시고 오히려 의인만 매일 고통으로 때리신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이스라엘에게”와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의 병행에서 “이스라엘”은 전체를 뜻한다기보다 충실한 이들, ‘참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혈연 상의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5,8). 시편저자는 이러한 체험을 시편을 통하여 고백하게 된다. 즉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결백으로 두 손을 씻은 다음, 그는 마음의 정화를 겪은 다음 “하느님은 좋으시다.”를 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13).

 

‘깨끗하다’는 말은 있어야 할 것만을 지니고 이물질이 끼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예컨 성전에서 쓰이는 기름이 깨끗해야 한다는 규정을 참조할 수 있다(출애 27, 20). 그러나 깨끗하다는 도덕적, 종교적으로도 쓰인다. 이 경우 이 물질은 사기, 죄, 폭력등을 말한다. 그리고 마음은 생각만이 아니라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께 대해서 의롭게 행동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다. 선을 행하고 억압받는 이,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사람 등이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 따라 실제적인 신앙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뜻한다. 13절 전체를 보면 두 기관이 나오는데 의지의 중심으로 마음, 의지에서 나오는 행동을 실현하는 기관인 손이다. 그래서 마음과 손은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뜻한다.

 

시편작가가 자기 신앙에 대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는 하느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행복, 그리고 이에 반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자신의 불행에 있다. 즉 시편 1에서처럼 저자는 의인이 행복을 악인은 불행하다는 신조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 신앙 조항이 이제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들에게는 “인간(에노쉬)”, “사람(아담”이 시편저자에게는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시편에서 “괴로움”은 주로 노동과 연관되는 수고를 뜻한다. 그리고 “고통을 당한다”는 고통은 주로 질병이나 그 밖에 인간이 당하게 되는 불행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은 ‘헛된’ 것이 아닌가?(시편 1: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과일 나무). 이러한 현실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눈까지 아파온다’(16절). 그러나 악인들이 안녕을 누리고 행복 속에 살아가며 번창하는 것만이(4-5) 시편작가가 겪는 시련의 원인 아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악인들의 교만한 폭력: 악인들의 특징(6), 탐욕스럽고 자만에 찬 생각과 환상(7), 악한 이들에 대한 억압(8), 하늘과 땅을 모르는 허풍과 대언장담: 특히 교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되고 폭력은 이웃과의 관계에 적용된다(9), 그리고 이럼으로써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다는(10) 사실이다. 교만과 폭력이 그들의 “목걸이”라는 것은 그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을 내세우며 드러내 놓고 악을 저지른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예언자들이 늘 고발 해왔던 폭력으로 부, 정치권력, 특권 등의 힘을 남용하여 약한 이들의 권리를 짓밟음을 뜻한다. 이러한 악인들의 태도는 11절의 말과 함께 그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그들의 생활방식은 결국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은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저 멀리 뒷짐지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상태, 무-신의 현실이다. 그들의 행복이 죽음의 순간에까지 이른다 해도, 그 이상을 넘어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그들을 치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신다는 뜻이다.

 

또한 시편저자는 악인들이 제멋대로 살았던 것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며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자들을 “시새웠다(질투했다)”고 말한다. 이어 10-12절에서는 악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시편 15절은 악인들의 행복을 보며 거의 유혹에 빠질 뻔했던 순간을 전해준다. 그는 마치 하느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악인들의 생각을 따라 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혹에서 지켜 준은 것은 “당신 아들의 모임을 배신하는 것” 고드 그는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과의 연대성 때문에, 신앙 공동체와의 유대 때문에 악인들의 길을 따라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16절에서 그는 먼저 이성의 힘으로 이 문제를 풀어 보려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악의 문제는 인간의 머리로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을 때” 이루어진다. 시편에서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의 장소이고 또한 신앙 공동체가 함께 있는 자리이다. 또한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접어 두고 하느님의 뜻, 그분의 생각과 계획,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나나낸다는 것이다. 결국 시편저자는 이성으로 풀수 없는 문제를 인간의 종말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18-20절에서 묘사될 이 “끝”에 비추어 볼 때, 악인들의 성공은 이전과 달리 이해될 것이다.

 

시편작가의 통찰: 신앙 진실의 증명(위기의 극복- 18-26절)

 

이 부분은 하느님의 향한 기도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의 두 부분과 다르다. 앞에서 그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하느님을 문제 삼고 있었는데, 이제 악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자기 자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서 말하고 있다. 이제 기도자는 먼저 18-20절에서 악인들의 운명을 묘사하고, 21-22절에서는 악인들의 행복 때문에 겪었던 과거의 위기를 회상하며, 23-26절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 한다. 하느님께서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신 다음, 이제 그는 악인들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하느님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가 갖고 있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의 협소한 틀 안에 구겨 넣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바이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할 때 악인들의 성공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러한 전환은 일반적인 인간적 사고방식으로부터 그 고리를 끊고 나와서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가장 격렬한 영적 감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야뽁 건널목에서 밤새 하느님과 싸운 야곱처럼의 엉덩이뼈의 상처처럼, 신앙의 투쟁은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갈등과 고통의 현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전환이 이루어진다. 시편작가는 17절에 이를 서술하고 있는데(그러나 마침내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이 과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어쨌든, 성소는 하느님의 현존의 자리며,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계시의 장소이다. 그런데 새로운 인식에의 도달은 기도자가 어떤 철학적, 신학적 또는 이지적 규명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자기의 지적 노력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바로 앞 16절에서 고백한 바 있다. 새로운 인식은 결국 하느님 계시에 의한 통찰이다. 이 통찰의 대상은 우선 악인들의 종말이다. ‘종말’은 히브리말로 ‘다음에 오는 것’이다. 이다음에 올 것을 시편작가는 이제 18-20절에서 서술한다.

 

악인들의 안녕과 행복은 일장춘몽과 같이 일순간에 끝난다. 꿈에서 깨어날 때, 그 꿈의 내용이 깨끗이 사라져버리듯 그렇게 허황하게 없어진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지금 악인들이 누리는 현실을 꿈과 같이 의미와 내용이 없고 허황된 것으로 밝혀 내리시라는 것이다. 악인들의 이러한 참 운명에 상응하여 그들의 종말과 함께 시인의 종말도 계시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진정한 운명이다. “당신 의향에 따라 저를 이끄시다가/ 훗날, 영광에로 저를 받아들이시리이다.”이는 장차 언젠가 갑자기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23절(늘 당신과 함께 있어)과 25절(당신과 함께라면) 이 분명히 하는 바와같이 시편작가가 항상 하느님과 함께 한 결과이다. 어떠한 갈등이나 고통, 위기 속에서도 시편작가는 항상 하느님께 매달려 왔다. 또한 이 함께 있음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게 보이는 순간에라도 언제나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어 오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미래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는 것은, 그것 때문에 지상의 모든 행복이 그에게는 갈망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나타난다. 이 구원 행위에 대하여 23절(나의 오른손을 붙들어주다)과 24절(나를 이끄시다. 시편에서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라는 표현은 선택과 보호, 도움을 뜻하는 것이며, 고대 근동에서는 이 말로 신들이 선택한 임금을 지키고 인도해 준다는 것을 표현했다. 나를 받아들이시다)이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의 받아들인다는 어떤 전의적, 또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의 손을 붙들고 자기에게로 받아들이는 행동을 뜻한다. 결국 시편작가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하느님과의 관계다. 이 관계에 대한 묘사가 25절을 거쳐 26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시옵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 “몫”은 본디 에집트 탈출에 이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영토를 배분할 때 각자가 배당받은 몫, 곧 땅이다. 여기에서는 농민들에게 있어서의 땅을 연상할 필요가 있다. 땅은 생명이다. 다른 가능성은 전무하다. 땅 곧 몫이 있으면 살고, 땅 곧 자기 몫이 없으면 그 생명은 없는 것,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생존의 몫, 생명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께서 시편작가의 이러한 몫이다.

 

여기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같은 절의 앞부분이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이 말은 ‘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더라도’를 뜻한다. 결국 하느님과 시인의 관계, 곧 이 몫의 관계는 현세적 생활과 생명을 초월한다. 악인들의 행복과 자신의 고통까지도 초월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편작가가 겪었던 가장 근본적인 위기인 신앙의 위기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13-14): “정녕 나는 헛되이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결백으로 내 두 손을 씻었단 말인가? 날마다 고통이나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이나 받으려고?”

 

하느님과의 이러한 몫의 관계, 생명의 관계는 일시적이거나 미래의 언젠가에 이루어질 희망사항이 아니다. 지금부터, 아니 이미 고통 중에도 상존해왔고 그리고 영원히 이어질 관계다:“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 이십니다”(26절). 이로써 시편작가는 자기 존재와 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기 존재와 이 세상의 것들, 현세적인 모든 것들이 상대화된다. 시편작가는 자기의 존재, 자기의 믿음, 그리고 자기의 신앙적 삶이 헛되다고 13절에서 한탄한다. 헛되다 함은 알맹이 없는 과일, 속이 빈 실존을 말한다. 이 공허가 하느님으로 충만된다. 이 충만이 현세의 모든 행복, 악인들이 누리고 있고 기도자 자신이 부러워했던 현세적 선을 한없이 능가한다. 이 하느님으로 충만됨이 그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서, 절대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시편작가는 현실의 단순한 전복을 바라지 않는다. 물론 애초에는 현실이 지금 여기에서 전환되어야 한다고 몸부림치며 고대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관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27절이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께로부터 멀다는 것은 멸망과 죽음을 의미하고, 하느님께 가깝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 아니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생명과 행복을 가져다줌을 깨우치게 된다. 이 대전환은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미래의 사건만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현실 속에 안 계시는 것같이 보이면서도(11절) 실제로는 활동하고 계시듯, 그 전환은 이미 현실 속에서 언제라도 이루어지기 위하여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계시는 시편 작가의 신앙위기를 극복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존과 현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대미문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앙 조목이다. 이는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좋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이 신앙 조목을 시편작가는 자신의 몸으로 위기와 고통을 통해서 직접 확인했다. 이 확인한 바를 그는 자기의 시편 첫머리에 부르짖는다. “정녕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올바른 이에게!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마음이 깨끗한 이에게!”

 

앞의 1절과 28절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8절의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에서 하느님 곁으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시편작가이다. 이 가까이 감은 물론 단순히 몸을 하느님께 가까이 움직인다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성전에서 거행되는 전례를 통해서 물리적으로 지성소에 다가감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하느님을 자기 생명, 자기 생활의 목표로, 그래서 구체적 행동들의 목적으로 여겨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느님과의 생명 공동체이다. 이 생명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구원을 가져온다: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27절). “좋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이성적, 물질적, 정신적, 영성적으로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선이다. 그리고 이 구원의 결합은 미래에 완전히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당신의 뜻에 따라 저를 이끄시다가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이다.” (24절).

 

결론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절대적이지 않다. 또한 현재가 영원하지 않다. 현재와 현실은 항상 꿈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혹은 그림자와 같은 성질을 가졌다고 할 수도 있다. 인류 최대의 철학자라 할 플라톤은 현재의 것들이 그림자일 뿐이라고 설파했다. 물론 우리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진리의 요소가 들어 있기도 하다.

 

신앙의 눈은 현실의 껍질 뒤에 있는 진정하고, 영원한, 곧 절대적인 실재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의 진리는 자기의 전존재로, 자신의 생활로 확인해 나아가야 한다. 시편 73편의 작가 역시 하느님께서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과 위기를 통해서, 그러나 자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운 비추심으로 이 신앙 조목을 자기의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좋으시다고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내용은 이제 풍만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결정적인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구원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다. 은혜가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분, 하느님께서 자기의 몫이라는 몫의 관계, 곧 생명 공동체다. 이것만이 인간의 공허를 완전히 채울 수 있다. 이것만이 절대적이다. 이 밖의 모든 것, 즉 악인들이 행복과 번영, 자기의 불행과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상대적이고 흘러가는 것이다. 이렇게 시편 73의 신학은 구약성경의 최고봉이라 할 수는 없지만 높은 봉우리들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 참고문헌 :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211-225.

                 성경펼쳐읽기 시편, 안소근, 생활성서, p. 172-204.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184-185.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447-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