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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재발견

마리아 아나빔 2012. 7. 8. 21:15

 

 

                                                     소명의 재발견

 

                                                                                              - 최시영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1. Mid Life : 삶의 중간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사실 중년기 위기(Mid die Age)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삶의 한 가운데(Mid Life) 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은 삶의 중간 중간, 위기를 만난다.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에 엄청난 두려움을 맛보듯이 매 시기마다 오는 시련과 위기, 도전들이 있다.

우리는 이 시련과 위기, 도전 앞에 어떻게 서 있으며, 극복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 시기를 자신의 고유한 것을 되찾는 은총의 시기로 체험 하였다.

 

 

 

 

           깨진 항아리처럼 우리는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나의 좋은 면만 보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깨진 부분을 아름답게 꾸민다.

내가 보기에도 좋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꾸미고 살아간다.

우리는 어쩜 이렇게 흠 없이 살아가도록 요구 받아왔다.

또한 젊을 때는 이렇게 꾸밀 수 있다. 체력, 기억력 등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없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때 서로에게 부딪쳐 드러난다.

자신의 약함, 못남을 알지 못했는데, 부딪침에서 알게 될 때 놀라게 된다.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 우리의 포장된 아름다움이 지속되지 못한다.

예전에 힘을 주었던 것이 지금은 힘을 주지 못한다.(체력, 능력)

예전 방식대로 살아갈 수 없는 시기가 온다.

그런 시간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꾸며왔던 나도 그대로 나이지만 본질적인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지 않으려 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는 연습

‘달마야 놀자’ : 스님팀과 조직 폭력배팀과의 다툼 →큰스님의 중개→깨진 항아리에 물 붙기 게임 →조직 폭력배의 승리(그들은 깨짐 항아리에 물을 붓다가 그것이 허사라고 생각하고 깨진 항아리를 계곡 물 속에 던졌다. 그러자 깨진 부분을 통하여 하아리에 불이 스며 들어 항아리는 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때 큰 스님이 말씀 하셨다.

→ “나도 깨진 항아리 같은 너희를 내 가슴에 던졌을 뿐이다”

 

이런 깨진 부분, 이빨 빠진 부분으로 하느님과 커뮤니케이션하게 된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정신지체 수용소에서 6개월간 지내며 ‘아담’이라는 정신지체 청년을 도우면서 자신의 존재 밑바닥을 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헨리 나웬 신부는 존재 깊은 곳에 있는 나약함, 수치심 등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부터 복음적인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 아담으로부터 느끼는 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외줄타기 인생을 살아왔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외줄타기에서 고도의 기술들을 배우고 습득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외줄타기처럼 삶의 기술만을 익히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재주를 부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

예) 부자청년 -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이러한 공허감들은 자아의 구조적 측면에서 두 영역의 자아가 통합되어야 한다.

 

이상적 자아 : 의식 수준에 올라와 있음, 이상적자아와 제도적 자아가 있음.

우리는 이상과 현실을 항상 같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중년기에는 알려져 있 지 않은 영역이 올라오게 된다.

수도 생활 초기에 많이 나타난다.

현실적 자아 : 드러난 자아 - 한 부분은 의식, 다른 한 부분은 무의식과 잠재의식

숨겨진 자아 : 무의식과 잠재의식

 

* 중년기에는 이런 무질서한 애착이 무엇인지 선명히 부각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이것의 긍정적 수용이 강하게 도전되는 시기이다.

나가 ‘나’가 되려고 사는 삶이 아니라, 나가 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다. ‘나 중심적인 나’가 되려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최시영 신부님의 예)

 

공동체에서 9년을 살고 안식년을 받았는데, 자신의 꿈은 6개월은 사막에서, 그리고 6개월은 가장 가난한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내 안에 가난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 그것을 직면하고 하느님 앞에서 열어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안식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2개월을 어느 공동체에 가서 리모델링을 할 시간이 주어졌고, 나머지 4개월로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살아야 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 주어졌다.

4개월 동안 나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를 고민하는 중에 아주 신뢰하는 한 분의 사제의 제안을 받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제안은 내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은 제안이었다,

매일 수도원 안의 독방에서 살면서 밥도 혼자 다 해 먹고 설겆이, 빨래, 청소도 다 하면서 기도 하고 묵상하라는 제안이었다. 일주일 동안 내내 갈등이 일어났다. 집에 다시 가야지...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해준 80세의 노 수사를 아주 신뢰하기 때문에 더 견디기로 하였다.

그때의 시간들은 나에게 많은 변화의 근원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많은 부분이 창조적으로 되살아난다.

그때 수사님이 나에게 지침으로 준 말씀은 아래와 같다.

 

<단순함의 생활 피정 - 일상 안에서의 피정>

1. 매일 Veni Crator를 묵상 하십시오.(오소서 주여)

2. 매일 관대하게 애덕을 실천 하십시오.

3. 매일 관대하게 기쁘게 포기 하십시오.

 

복음적 삶은 나 때문에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는 혼돈이 지나가야 한다.

위기는 언제든지 있다. 전 여정에 걸쳐서~ 위기는 우리를 가난함으로 초대한다.

영적 측면에서는 가난함에 어떤 힘이 있다. 즉 구원의 힘. 십자가가 가난이고 영적인 힘이 될 수 있다.

항상 자기가 살았던 편안한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본능들이 있다. (출애굽에서 보듯이~, 혹은 현재 -술, 담배) , 싸움으로 이끌리듯이 (미움, 비난)

아론 - 호르산에서 죽음

모세 - 느보산에서 죽음. -사랑했던 백성을 떠나보낸다.

들어가라 가나안으로, 모세는 애착하지 않는다.

모세 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과 떠나보내는 모세의 심정.

우리는 언제든지 복음 안으로 들어가라는 초대를 받는다.(복음삼덕)

위기는 언제든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무능함 약함, 가난함 안으로 자주 들어가게 하시는 하느님, 예수님의 샘솟는 강물은 약함을 통해서 들어온다.

 

나는 항상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며 살아간다.

1. 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가?

2.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

3. 너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우리는 이 시간에 무엇을 얻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을 내려놓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변화의 과정은 반드시 혼돈의 시간을 지나가야 한다. 혼돈의 시간에는 저항감을 만난다.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기로 돌아가려 한다. 그때의 습관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이때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잘 들여다보고 위안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긍정적으로 변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 조건 :“ 원의 (dsire to follow). 이 조건이 충족되면 game에 들어갈 수 있다.

* Game 1부 : 잃어버리기 게임 (Lk 14,25-27,33)

* Game 2부 : 잃어버린 것 대신 다른 무엇을 얻기

 

예수님의 초대에 제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이다. 이것만 충족되면 누구든 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게임 1부는 따르는 원의와 함께 우리가 시작해야 할 부분이다. 즉 그분 때문에,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나의 것을 잃어버리는 게임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다.

Paschal Game을 보여주는 성서의 예들 :

Jn 4,1-42 사마리아 여인 / Mt12,41-44가난한 과부 / Lk7,36-50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 / Mt13,33 누룩을 넣은 여인 / Mt25,1-13 슬기로운 처녀 / Jn20,11-18막달레나 / Lk24,13-35 엠마오 제자들

 

* 광야를 거부하는 다양한 현상들

 

우리는 영성생활의 초기에 이런 혼돈의 경험을 가졌더라도 그 후에 또 이런 광야의 혼돈이 찾아올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정화되어야만 할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면 이런 광야는 선물로서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영성생활 초기에 광야 체험을 하지 못하고 지나 갈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혹은 영성지도자들이 광야나 혼돈에로의 인도를 함께 거부 할 때 이 경험은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이 초대를 계속 거부할 수도 있다. 광야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약함을 거부하는 다양한 현상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적절히 배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광야를 거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1) 자신에게 다가 온 불편한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창세기 아담과 하와)

2) 그래서 이웃을 비난하고 공격한다.(바리사이파 사람들)

3) 위기나 불안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 이런 상황을 외부에서 찾는다. 때로 이성과의 만남으로 혹은 다른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요소들로 피한다. 이때 예수님을 만나면 축복이 된다.

4) 대두되는 약함이나 결점을 부정한다.

그래서 자신은 그런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해서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자격증을, 더 높은 학위를, 더 높은 직책을 얻고자 하거나, 더 큰 일을 성취하려 한다. 이런 다양한 반응은 그 당시 대두되는 불편함을 보지 않고 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일뿐이다. 문제는 자신 안에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냥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자신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자신을 관상하지 못하면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럴 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 자신을 비움으로써 벗어날 수 있다.

약함: 예수님은 자신이 약해졌을 때 쉬면서 기도하기 위해 제자들과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이러한 시간이 있을 때 찾아오는 군중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측은함은 장기가 움직일 때 나타나는 동사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의 느낌은 무능함, 약함이다. 나에게 요청되는 엄청난 초대, 그리고 초대 앞에 무능함, 살펴보니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 제자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고 예수님께 맡겨 드린 결과 5천명을 먹일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종합

1. 깨진 항아리 (광야를 거부하는 다양한 현상들)

2. 한적한 곳(거룩한 곳)

수중에 든 것이라고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뿐 이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가난함을 예수님 손에 맡겨 드렸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

중년기는 자신의 가난함과 초라함 혹은 무능함을 만나게 되는 장소이다.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인류학적으로 또한 신학적-영적 차원에서도 그러한 곳임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가난함을 사랑하게 되는 곳이며 더욱 단순해지는 곳이고 자신의 현실이나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드리게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신의 가난함과 초라함과 무능함이 그분 손에 맡겨지게 되며 그 때 그분은 우리 가난함과 초라함과 무능함을 축복하시어 거룩하게 하여 주신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손 위에 되돌려 주신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 비우심으로 (Kenosis,가난함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랑하시듯, 그래서 중년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게 되는 권능을 얻게 되는 거룩한 장소이다.

 

그래서 중년기는 지금까지 걸어온 여행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여행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중년기 이전의 여행을 첫 번째 여행이라고 한다면 이 여행은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의 힘으로 걸어온 여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년기와 함께 시작되는 두 번째 여행은 어떤 면에서 자신이 계획하지 않고 또 자신의 힘으로 걸어가지 않고 자신을 가난함으로 초대하는 어떤 분의 계획과 그분의 힘으로 걸어가게 되는 여행을 의미한다.

 

자신의 계획과 힘으로 걸어온 첫 번 째 여행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 우리 힘이 사라지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여행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가난함과 초라함 그리고 무능함을 통해서 가게 되는 두 번째 여행은 좀먹거나 도둑이 들어와 훔쳐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철저하게 무능하게 되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갈 수 있는 그런 여행이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라고 말씀하신 여행은 바로 이 두 번째 여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년기를 통해서 우리가 초대받은 여행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파스카의 여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가난함과 초라함 그리고 우리의 무능함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한다면 두 번째 여행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건너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집트 노예생활처럼 더 부자유스러워 질 수 있고, 무질서한 애착 또한 더 깊어질 수도 있고 때로 자기 자신이나 이웃을 아프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난, 초라함, 무능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삶을 통해서 여러 가지 다른 많은 부조화가 파생된다.

 

 

2. 수도생활의 신비적, 예언적 차원의 통합을 향하여

 

나는 행복한가? 행복과 함께 평화로운가?

주님과의 합일은 고통 속에 빠져도 평화와 행복에 잠기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은 기쁨과 평화 속에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머무르십시오:” 이것은 사심 없이 살아 갈 때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성령 안에 사는 것과 같다. 또 그것은 깨달음을 얻고 생활하는 것이다.

처음엔 자력적인 것으로 노력 하지만 마지막은 타력적인 것으로 주님에 의해서 나의 의지가 움직인다.

그럼으로 행동하는 이들의 첫째 준칙 : - 하느님을 믿으라, 마치 내가 하는 행동이 하느님이 하시는 것처럼~ 하지만 최선을 다해 일하라. 마치 하느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듯이....

저의 힘이 오로지 하느님의 힘에 달려 있듯이...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삶 - 기도하시는 예수님이시다.

기도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힘인 병을 치유하는 힘, 풍랑을 가라 안치는 힘을 얻으신다.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 예수님께는 풍랑이 없다. 제자들은 풍랑을 느낀다.

예수님 안에 살수록 물 위를 걷게 된다.

성령 안에 붙들리고 사로잡히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3. 또 하나의 위기

 

삶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전환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때 자신을 제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수도생활에서 중요한 것 다섯가지

 

첫째, 기도(Prayer)- (마더 데레사)

둘째, 믿음(Fait) - 이것은 기도의 열매이다. 기도를 통해서 생기는 열매.

셋째, 사랑(Love) - 사랑으로 성숙한다.

넷째, 봉사(Sevice) 사도직- 열정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

다섯째, 평화(Peace) - 내 방에서만 우울하게 있었으면 저녁에 당연히 평화가 없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침묵’하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