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9(78): 백성의 슬픈 노래
이 시편은 공동 탄원시편으로 기원 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파괴사건을 연상시킨다. 도성의 파괴로 말미암아 성전은 더럽혀졌고, 시민은 학살되고 여러 가지 재앙이 연거품 일어난다. 모두가 멸망으로 피는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는 거리마다 방치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조소의 과녁이 되었다. 시편작가는 하느님을 향하여 거룩한 도성과 성전을 휩쓴 재앙을, 그리고 이웃 백성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고 있는 시민과,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1-4). 1-4절의 동사들은 전부 과거로 되어 있다. 이는 현재까지 그 결과가 계속되는 과거의 사건들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시편은 하소연을 하고 있다. 이 하소연은 하느님을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곧 하느님께 대한 하소연이다.
간청을 거듭하며, 시편작가는 하느님께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고, 하느님의 적이기도 한, 이 도성의 적을 벌하여 주시기를 청하고, 그리고 이렇게도 비참에 빠진 백성을 위하여 용서와 도우심을 청한다(5-8). 이방인들에게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지 목하도록 주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높으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간청한다(9-10). 두 번째 부분인 5-15절은 주님을 직접 부름으로써 시작한다. 다른 내용의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을 다시 한번 부르는 것이다. 동사는 대부분 ‘... 소서’로서 간청하는 명령형이다.
5-7절: 하느님의 진노- 자신들에게가 아니라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 침입자들에게 그 진노를 쏟으시라는 것, 8-9절: 죄의식 - 선조들의 죄 그리고 자신들의 죄, 10-12절: ‘하느님께서 어디 계신가?’라는 소위 인과응보의 문제, 마지막 부분인 13절에서는, 우선 그전까지는 “당신께서 ...하소서”라고 해왔음에 반하여, “저희는”으로 시작한다. 동사는 “찬송하리이다,”등의 미래로서, 미래의 감사와 찬미를 말한다. 이렇듯 시편 79는 하소연- 간청- 감사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조는 또한 시간의 구조이다. 과거 -현재 - 미래, ‘과거는 이방인들이 침입해서 국난을 초래하여 지금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 하느님, 이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소서- 그러면 장차 당신을 영원토록 찬미하리이다’라는 근본내용과 구조를 시편 79는 지니고 있다.
시편은 끝으로 하느님께 향하여 포로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가해자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입힌 재앙을 몇 갑절로 복수하여 주도록 청하며, 마지막에 감사의 행위를 약속한다(11-13).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와 성전에 저지른 이 독성을, 참 이스라엘인으로 보면 정치적인 한 상황의 끝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당신 온 백성의 버림, 계약의 끝,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여러 가지 약속에 차 있던 신비스러운 역사의 끝을 의미하고 있다. 곧 하느님 자신이 이 멸망에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벌써 오랜 시대에도 자주 자주 그러듯이 이 하느님께서 이 나라의 쇠잔한 몸을 일으켜 주시고, 당신 백성의 선두에 서시어 그 멋지고 놀라운 역사의 걸음을 계속해 주시기를 극히 자연스러운 심정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때로는 신비스러운, 때로는 비참한 온갖 외부적인 사건이 모든 역사적 사변의 핵심에 있는 내부적, 영적 사건으로써 짜여 있다. 이것이 하느님과 그 백성의 관계의 밀접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교부들의 전통에서 이 시편은 박해를 겪을 때에 드리는 교회의 청원으로 본다. 성전의 파괴와 흘린 피,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는 교부들은 이 시편을 주님의 수난과 사망 뒤에 사도들이 한 탄식으로 보고 있다. 이교도로 말미암아 흘린 피는 순교자의 피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들의 피의 소리가 하느님 앞에 올라가서 정의를 얻게 되기를 간청한다. 교회는 시편을 주님께서 받은 영을 가지고 부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와 구원의 피, 생명의 씨앗임을 알고 있다.
교회는 또한 통회하는 마음과 죄 깊은 인류에 대하여, 또 회개하는 자신의 자녀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 이 시편을 자주 쓰고 있다. 교회는 이 시편을 가지고 사람의 영적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 기도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전쟁과 물질적, 정신적인 사람의 고통이 제거되도록 똑같은 열성을 가지고 세계 전체를 위하여, 모두의 평화와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기도한다. 우리가 이 시편으로 청원할 수 있는 것은, 악에 대한 하느님의 복수와 사탄의 나라의 멸망,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고 죄인의 회개이다.
Text 안에서
1-4절: 하소연
시편작가는 하느님을 부르고 선 곧바로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와 수도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음을 하소연한다. 1절이 말하는 외적, 곧 “민족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서 파괴된 것들 세 가지를 나열한다. 즉 “당신 유산, 당신이 거룩한 궁전, 예루살렘”이다.
“당신유산”은 ‘토지, 땅’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바는 이 ‘땅’이 도시인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땅’이 아니다. 지금의 농부에게서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땅은 삶의 근거며 뿌리다. 땅이 없음은 곧 뿌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그들의 땅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대 중동의 다른 국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임금이나 파라오의 땅도 아니다. 정부의 땅도 아니다. 바로 하느님의 땅이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하느님으로부터 땅을 나누어 받은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듯,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땅을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나누어주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을 하느님의 ‘유산’ 또는 ‘재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땅은 하느님의 것,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라는 사상에서 여러 가지 법적 규정들이 나온다. 이러한 하느님의 땅에 이민족들이 침입했다. 하느님의 권리가 짓밟힌 것이다.
“당신의 거룩한 궁전”이라고 할 때 ‘궁전’은 임금의 집, 또는 하느님의 집을 말한다. 여기 시편 79의 1절의 경우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궁궐’과 땅에 있는 성전을 뜻할 수 있다. 궁전은 왕권과 왕국의 심장부다. 성전이 짓밟혔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왕권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이민족들에 의해서 더럽혀졌음을 말한다.
‘거룩한 성전이 더럽혀졌다’라는 말은 성전이라는 건물의 파괴나 성전이 지니고 있는 성성의 훼손 이상의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거룩함이다(이사 6장). 그리고 거룩함의 벙반대 성질은 더러움이다. 바로 여기에 성전이 더럽혀졌다는 말의 심각성이 있다. 하느님 왕권의 중심부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 그 자체가 부정되었음을 말한다. 성전을 더럽힘은 하느님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정면으로 훼손시키는 독성인 것이다.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물론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다윗에 의해서 통일된 이스라엘 국가의 수도로 정해지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그나마 종교, 정치적으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해왔던 계약의 궤의 자리가 되고, 그리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짐으로써,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된 데 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 하느님의 거처로 불리우게 된다(시편 122). 이러한 이유로 해서 시편의 기도자들은 기도의 첫머리에서 단순히 자기들의 국난을 당한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리가 짓밟혔음을 그분께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1절에서 이민족들에 의해 파괴된 하느님의 땅, 성전, 도읍에 대하여 하소연한 다음 시편작가는 2절에서 하느님 백성에게 눈을 돌린다. 이들은 “당신 종들”과 “당신께 충실한 이들”로 불리운다. 이 두 명칭은 대구법적 표현으로서 같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근본은 시나이 산에서 맺어진 계약에 있다. 이 계약의 기본 내용은 ‘야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계약이 만들어낸 특별한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곧 야훼님께서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님의 종이 된다. 그렇다고 주종의 관계가 단순히 종의 주인에 대한 일방적 의무만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주인 역시 종에 대해서 의무를 지게 된다. 그 첫째 의무가 종을 보호함, 종의 생존권을 보장함이다.
종의 주인에 대한 첫째 의무는 충실과 성실이다. 그래서 종들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당신의 충실한 이들’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종들의 충실성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칭호로서 ‘당신의 종들’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종들, 곧 하느님 백성이 그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살육되어 들판에 널려서 새들과 땅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광경을 2절은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비참한 모습만이 아니다. 주검이 묻히지 못함은 커다란 치욕을 뜻한다. 더욱 치욕스러운 점은 침략자들이 장례를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주검들을 새와 짐승들의 먹이로 들판에 내던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죽은 다음에도 수치를 당하여,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침략자들의 이러한 만행은 3절에도 계속해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사실 묘사에서 2절과 3절의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3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의 피흘림, 곧 살육전이 벌어진다. 이어서 침략자들의 장례 불허 또는 주검을 묻어줄 사람도 없을 지경이 된다. 그래서 그 결과로서 2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주검들이 동물들의 먹이가 된다. 왜 순서가 바뀌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편작가의 인상이다. 시편은 신문기사가 아니다. 시편작가는 자기가 받은 인상을 그대로 시적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묻히지 못하고 널려 있는 주검들, 이들은 먹고 있는 동물들이 시편작가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2절에 이어 3절에서도 다시 한번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하느님의 이름이 현존하는 자리가 이러한 비극의 무대가 되었다고 시편은 하소연하고 있다. 1-3절까지 침략자들이 동사의 주러올 말해지고, 이스라엘은 3인칭으로 말해짐에 반하여, 이제 하소연의 마지막 절인 4절에서는 “저희”가 떠오른다. ‘저희’는 물론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웃 민족들의 모욕거리, 비웃음거리, 놀림감이 되었다. 고대 동방인들에게는 명예가 중요하였다. 그래서 얼굴을 붉혀야 하는 상태, 남의 조소거리가 되는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겼다. 이렇게 시편 79는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겪어야만 했던 일들을 기도의 첫 부분에서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하느님 앞에 펄쳐놓는다.
5-12절: 간청
이미 구조에서 언급한 대로 가운데 부분, 곧 간청하는 부분에서 시편 79는 1절에 이어 다시 한번 하느님을 직접 부르면서,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처사에 대한 질문을 터뜨린다. “주님, 언제까지나 마냥 진노하시렵니가? 언제까지나 당신의 격정을 불처럼 태우시렵니까?”‘하느님의 진노와 격정’은 하나의 의인화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대상, 여기에서는 하느님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이면에는 부정적으로 하느님께서 기계와 같은 존재가 아니시라는 것, 세상을 기계와 같이 다스린다거나, 또는 세상사와 무관하게 계시거나, 또는 칠층 하늘 위에 유유자적 혼자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 의인화적 표현은 긍정적으로 하느님께서 인격체시라는 것, 세상과 역사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역사와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정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진노와 격정’, 곧 하느님께서 화를 내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정열적 개입의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 인간 쪽에서 받은 인상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같이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하나의 인격체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 하느님의 이 개입은 인간에게 두 가지 면을 의미한다. 곧 구원과 파멸이다. 이 파멸을 인간 쪽에서는 하느님의 분노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5절의 말씀은 결국 이방인들이 침략, 살육의 원인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이다. 이 국가적 환난의 원인이 하느님의 분노에 있다는 것, 침략자들은 결국 하느님의 도구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시다.
현재 이스라엘이 고통을 받는, 또는 받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진노와 격정’의 대상은 본디 그분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편 79의 기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진노와 격정을 자기들이 아니라 자기들보다 이들을 더 정당하게 받아야 하는 대상에게 쏟아부으십사고 청한다. 그 대상을 6절은 “당신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에게”와 “당신이름을 받들어 부르지 않는 나라들 위에”라고 지칭한다. 물론 이 두 명칭은 각기 다른 민족이나 나라들을 지칭하지 않고, 댓구법적 표현으로 동일한 민족들과 나라들을 뜻한다. 이들은 바로 1절이 말하는 “민족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우선 ‘당신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이다. 이 명칭은 내용상 꼭 들어맞는 말이다. 구약성서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우리가 흔히 ‘안다’라고 할 때 쓰는 의미, 곧 단순한 앎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안다함은 대상의 본질을 깨달음을 말한다. 그래서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라는 말은 ‘하느님인 당신을 하느님으로 알 모시지 않는’의 뜻으로 ‘모시는’ 행동까지 포함한다. 앎은 우선 하느님께 대하여 말할 때, ‘알아 모시다’로서 ‘알다’라는 지적 인식보다는 오히려 ‘모시다’라는 의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다른 한 가지지 예를 든다면, 구약성경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안다는 것은 서로 한몸을 이루었음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분노를 쏟으셔야 하는 대상은 둘째로 “당신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나라들”이다. 여기서 이름을 부르다는 단순히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름의 주인, 곧 하느님의 본질을 알아보고 이에 상응한 자세로서 종교적, 전례적으로 부름을 말한다. 그래서 6절의 말씀의 뜻은 이렇게 된다: ‘당신 분노의 대상이 있다면 이는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아니라 당신을 알아 모시지 않는 저 민족들, 당신의 권리를 짓밟고 당신의 거룩함을 훼손시킨 저 이방인들입니다.’ 하느님의 분노를 ‘쏟아부으소서’라는 동사는 3절에 나오는 ‘피을 쏟다’의 ‘쏟다’와 같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의 피를 쏟는 것에 상응해서 하느님께서도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아부스시라는 간청이다.
7절에서 시편작가는 왜 하느님께서 이러한 이민족들에게 당신의 심판을 내리셔야 하는지를 말씀드린다.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 야곱을 “집어삼키고 그 사는 곳을 부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흔히 선조의 이름으로 그 선조의 후손들, 또는 그 선조를 기점으로 하여 형성된 민족을 표현한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보았고, 이들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이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된다. 12지파의 조상들의 아버지로서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제치고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게 된다. 물론 신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창세 32, 39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준다. 바로 ‘이스라엘’이 이제 야곱보다 더 자주, 그리고 여러 용도로 쓰인다.
잠깐 살펴보면, 1) 야곱의 이름(별명), 2) 야곱에서 유래된 민족의 이름, 3) 위의 민족이 사는 땅(본디 여러 민족으로 불리었던 사람들이 살았던 땅으로 ‘가나안’이라는 땅으로 불리었다. 기원후 132-135년의 유다 독립운동 이후 로마인들은 유다인들이 살던 유다 땅을 그리스의 항해자들과 상인들의 관습에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바꿔 부른다. 이 명칭이 오늘날에도 이 지방과 여기에 살고 있는 아랍계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인다. 4) 다윗이 이룩한 왕국의 이름, 5)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분열된 뒤에는 북부 왕국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6)남부 왕국은 유다 지파가 중심이 되었으므로 ‘유다왕국’으로 불리운다. 북부왕국이 사라진 뒤에 유다 왕국의 사람들은 유다인- 유대인- 유태인 등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이는 왕국의 분열과 관계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전체, 또 선택된 민족으로서 지니는 모든 신학적 배경과 근거를 포함한 함축적 칭호로 쓰는 것이다. 7) 제2차 세계대전 후 팔레스티나 땅에 이스라엘 국가가 다시 건설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현대국가와 그 국민을(주로 유다계)나타내며, 현재 거의 동일한 지방을 때로는 팔레스티나로 때로는 이스라엘로 부른다. 이스라엘 국가의 신민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은(외국에 흩어져 사는 이들)계속해서 유다인(유대인, 유태인)으로 불리운다.
7절에서 시편작가가 이스라엘을 침입한 이민족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분노를 사야 할 일차적인 대상이라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아무런 잘못도 없고, 국난을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시 자기가 당한 환난에 대해서 적어도 이차적인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8절을 고백한다.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를 더 직역하면 ‘저희를 거슬러 선조들의 죄악들을 거역하지 마소서.’가 된다. 이 말 뒤에는 우리 현대인들이 지닌 것보다 더 깊은 조상과 후손의 일체감이 있다. 이스라엘들은 조상들이 단순히 죽어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후손들 속에 계속 존속한다고 믿었다. 물론 본격적인 존재는 아니다. 죽은 사람들은 저승(셔올)으로 내려가서 그림자와 같이 존재한다. 어쨌든 이러한 일체감에 의해 조상들의 죄도 필연적으로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상과 후손 사이의 독립은 유배 이후 개인주의가 어느 정도 성립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특히 에제키엘에서 상당히 진척된다. 그는 “조상이 신포도를 먹었는데 후손이 이가 시린다.”는 빈정대는 속담을 직접 인용하면서 ‘아비는 아비, 자식은 자식’, 곧 아비의 죄는 아비가, 자식의 죄는 자식이 책임을 진다고 선포한다(에제 18).
구약성경에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함을 뜻하지 않는다. 과거의 사건을 현재에 재현시킴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죄를 기억하신다 함은 그 죄의 결과인 벌 또한 현재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의미의 ‘기억’이 신약성경에서, 특히 거룩한 변화의 말씀에 적용된다(1고린 11,24 루가 22, 19).
8절은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라는 소극적인 간청에 이어,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들에게 빨리 다다르게 해주십사고 청한다. ‘자비가 미치다’는 일종의 의인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비라는 힘이 고난에 처해 있는 당신의 백성을 감싸게 해주십사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로 시편작가는 자기들이 처해있는 불쌍한 처지를 내세운다. 이는 일차적으로 하느님께서 특히 불쌍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이는 둘째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환난이 이미 오래 동안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이어 절에서는 세 가지 청이 드려진다: “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시고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 여기에서 시편 7편의 공동체,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를 간접적으로 고백한다. 아울러 자기들의 죄가 재앙의 원인임을, 그 죄에 대한 하느님의 정당한 벌임을 고백한다. 죄의 용서는 단순히 용서만을 뜻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의미에서 구원까지 포함한다. 시편작가는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이름과 그 이름의 영예에 호소한다. 이름은 그 이름 주인의 본질을 말한다. 하느님의 본질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더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당신의 종인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장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절의 앞부분에서는 하느님을 “저희 구원의 하느님”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음은,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죄에 있다하더라도 결국은 하느님의 명예와 관계되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고난 속에 있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을 보호하셔야 하는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현상태는 하느님의 이름과 그분의 명예가 훼손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심은 결국 당신의 이름, 곧 당신의 명예를 위함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명예에 대한 말씀을 10절은 계속한다.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민족들이 이렇게 말해서야 어찌되겠습니까?” 고대 사회에서 민족 사이의 전쟁만이 아니라 오히려 해당 백성들의 신들 사이의 전쟁이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국난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참패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은 침략자들이 직접 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이 바로 조롱을 뜻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제 행동하셔야 한다. 당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행동을 10저 4행 “복수” 라 부른다. 이 명예의 훼손이 공공연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복수’ 또한 공공연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저희 눈앞에서 민족들에게 드러나게 하소서” 이 말은 4절과 관련이 있다. 4절의 “이웃들”과 “주위 사람들”은 10절이 말하는 이웃 “민족들”을 뜻한다. 이들이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명예가 실추되었다. 이제 다시 그 명예가 회복되도록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라는 청이다. 그리고 개입과 결과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저희 눈앞에서”(10절 3행).
시편작가는 11절에서 다시한번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한다. 그 중에서도 포로들의 상태를 호소한다. 포로들은 다른 말로 하면 ‘죽기로 작정된 몸들’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죽음의 아들들’로서 죽어가는, 언제라도 죽어야 하는, 언제라도 처형되어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12절이 명확히 하는 바와 같이 국난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뼈아픈 사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을 모르는 민족들에게 당하는 수모다. 이는 바로 하느님께서 직접 당하시는 수모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인들을 모독함으로써 침입자들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당신께 대한 이 모독을 이제 그 모독자들에게 되돌리라는 간청이 마지막으로 나온다. “일곱 배”로 갚는다는 것은 철저하게(창세 4, 15. 24)갚음을 뜻하다. ‘일곱’은 충족. 충만을 상징하는 숫자다.
13절: 감사서원
시편 7의 마지막 부분인 13절은 “그러나”로 시작한다. 이 접속사는 형식상 12절에 언급된 이웃 민족들과 13절의 이스라엘 백성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내용상으로는 지금까지 말해진 환난과 앞으로 이 기도의 결과로서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상태를 대립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13절 1행)이고, 하느님의 “목장의 양떼”(2행)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목자와 이스라엘 양떼, 이는 구약성경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쳐오는 상징이다(시편 23참조). 13절은 1-4절의 마지막 부분인 4절과 통한다. 4절은 “저희는...되었나이다” 는 지금까지 서술된 환난의 결과로서의 ‘저희’를 말한다. 13절은 “그러나 저희는”는 지금까지 서술된 간청의 결과로서의 ‘저희’를 말한다. 이로써 13절은 5-12절만을 매듭짓지 않고 시편 전체를 미래로 향하게 한 채 끝을 맺는다. 미래를 향한 끝맺음은 찬미의 노래로 이루어진다. “저희는 끝없이 당신을 칭송하고 대대로 당신에 대한 찬양을 전하오리다.” 하느님의 찬양을 전한다. 함은 먼저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전제한다. 이 구원 업적은 인간 쪽에서의 감사와 찬미와 대상이 된다. 감사와 찬미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널리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13절 3-4행의 뜻은 이러하다.: ‘저희 찬미의 대상이 될 당신의 구원 업적을 영원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포 하리이다.’
나오면서
시편 79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시편은 구체적인 사건으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 중에서 어떠한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함락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제한시키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시편, 특히 공동 탄원시편 또는 감사시편을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 연관 짓는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점점 더 많이 알아가고 있지만 전부 알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다. 둘째, 시편들은 개별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일반적인 어투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한 시편을 여러 비슷한 상황에서 기도문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역사를 통해서 갖은 고난을 겪어왔다. 시편 79는 이 국난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하느님께 구원을 청한다. 국제 정치적 점에서 볼 국난은 단순히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민족들의 침입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땅, 하느님의 현존의 자리, 곧 성전을 침입하고 파괴하고 유린한 사건이다. 단순히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살상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아 모시지 않는 이방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종들을 짓밟은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 이스라엘 사람들의 명예가 실추, 유린되고, 결국에 가서는 하느님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유린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일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자신의 일이다. 하느님께는 당신의 명예를 걸고 이 현실을 뒤집으셔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미래의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10절에서 침입자들에 대한 ‘복수’가 말해짐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 고찰에서 나온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 고통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셔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은, 마치 동전의 다른 면과 같이 동시에 침입자들에 대한 응분의 벌을 뜻한다. 이것이 10절이 말하는 복수다. 이 구원을 향한 염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하느님의 양떼로서의 온전한 삶을 향한 바람은 현재의 죽음의 그림자 속에 이미 생명의 표시인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노래하도록 한다.
※ 참고문헌: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119-135.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04- 206.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479-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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