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86(85): 시련을 겪을 때 드리는 기도

마리아 아나빔 2012. 5. 7. 15:30

 

  시편 86(85): 시련을 겪을 때 드리는 기도

 

 

이 시편은 ‘개인 탄원시편’ 유형의 대표, 또는 전형이다. 전체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7절로서 ‘간청(간청+ 처지/자세)’이다. 시편작가는 주님께 자신의 말을 들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청한다. 자신은 가없은 가난한 사람이지만, 깊은 경건과 신뢰에 사는 자이며, 간청하는 사람에게 항상 자비가 깊으신 하느님께 기도할 줄 알고 있다.

 

둘째, 8-13절까지의 하느님께 대한 찬미이다. 시편작가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힘에 대한 찬양으로 예언자적인 음조를 띠고, 만민에게 군림하시는 하느님의 지배를 알린다. 셋째 부분, 14-17절로서 ‘원수’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기원의 모티브가 밧줄과 같이 꼬여 있다. 모두를 하느님의 힘과 자비로 말미암아 설명한다. 시편작가는 깊은 신뢰로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덮치는 적에 대한 승리의 징표를 청한다.

 

따라서 이 시편은 크게 보아 ‘간청1- 찬양 - 간청 2’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고난에 대한 시편작가는 구원을 간청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지와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느님께 신뢰의 마음을 고백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자기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인 원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그러나 단순한 청원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신뢰심을 지닌 청원이다. 신뢰와 종교적 경건이 짙은 이 시편은 경건한 이스라엘인이 날마다 바치는 기도였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이 시편의 기도를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기도로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이 머리인 신비체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리스도는 실체로 하느님의 종이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적이 부끄러워하도록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교회를 위하여,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를 청한다. 아버지의 징표는 부활이다.

 

교회는 이 시편을 가지고 직접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또한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며 사순시기의 단식동안, 도우심과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이 기도를 가지고 교회는 환자방문 때에 위안을 주고 또 사망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기원한다. 이 시편에 있는 보편적 왕권의 예언의 말씀은 메시아 왕국의 도래로써 실현된다. 지금 교회는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고, 그분의 자비깊은 사랑을 체험하셨기 때문에 감사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시편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는 구약시대의 때라기보다 지금 실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길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걸어서 진리 안으로 들어간다.

 

또한 이 시편에 의거한다면 참으로 개인적인 밀접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비참하며 환난에 찼고, 분규도 많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유일하고 영원한 희망의 근원이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적에게 습격을 당하더라도, 우리를 해방하시는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이다. 그분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다. 또한 이 시편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참 자신의 얼굴을 받는다. 우리가 하느님께 여쭐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시고 나를 속량하셨을 때에 생각한 바로 그런 사람이 우리는 된다.

 

Text 안에서

 

간청: 1-7절

 

시편작가는 어떠한 도입 부분도 없이 처음부터 주님을 직접 부르면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청한다(1절). 즉 기도자의 청을 들으셔서 이 간청대로 기도자의 현실을 바꾸어주십사는 것이다. 자기가 가련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자기의 청을 들어주셔야 한다는 시편작가의 말이다. ‘가련한 사람’은 우선 율법에 따르면 자기의 토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있어서 땅의 중요성을 보아야 한다. 땅은 생활의 근거일뿐만 아니라 생존의 근본이다. 곧 ‘땅은 생명’이다. 땅을 갖고 있지 않으면 생존과 생명이 항상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율법에서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푼다(출애 22, 24-25; 레위 19, 9-10; 이사 14, 32). 그러나 이러한 법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불쌍한 이들이 계속 수탈당하고 학대 받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예언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보호자로 나선다(이사 3, 14-15). 이러한 말씀은 구약성경의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 이방인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푸심을 뜻한다. 그래서 이들을 ‘성전에서의 특권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느님의 현존의 자리인 성전은 가련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피난처가 되고, 여기에서 이들이 하느님께 부르짖을 때 하느님께서 즐겨 들어주신다는 것이다(이사 14, 32). “ 그의 백성의 가난한 이들이 그 안에 피신하리라.”이다. 이스라엘 백성 중의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그리고 특권과 함께 성전에 제 몸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2절부터는 시편의 기도자는 구체적인 간청을 드린다. 그 첫째가 자기의 영혼을 지켜주십사는 것이다. ‘지켜주다’라는 동사는 히브리말에서도 우리말서도 같이 여러 방면에 사용된다. ‘법을 지키다. 집을 지키다. 등 . 여기서는 ’보호하다‘뜻을 지닌다. 하느님께서 지켜주실 대상은 “영혼(제목숨)”이다. 이 단어는 시편 86편에서 다섯 번이나 나온다.

‘영혼’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대 그리스 사람들처럼 육체에 반대되는 개념의 이원론적이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상이나 인간을 단일체로 보았다. 영혼에 해당되는 ‘네페쉬’는 본디 목구멍을 뜻한다. 목구멍으로 우선 생명 유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음식과 공기’이다. ‘목구멍’은 또한 그것이 자리한 ‘목’을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목이 타는 듯한 욕망’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비록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예부터 목과 욕망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네페쉬’는 ‘열망. 욕구’의 뜻만이 아니라 또한 모든 감정의 자리로 이해된다. 이로써 이 단어가 ‘영혼’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감정의 주체로서의 영혼이다. 그런데 목구멍이 막힌다거나, 인간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거나, 또는 인간이 더 이상 감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네페쉬’는 ‘목숨’ ‘생명’도 뜻하게 된다. 이 단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을 지닌 바로 그 사람, 그 개체를 의미하게 되며, 이어서 그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로 쓰이게 된다. 그러므로 ‘네페쉬’는 숨쉬는 인간, 생명을 지닌 인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구멍으로 계속 무엇인가가 지나가야 하는 곤궁한 인간, 무엇인가를 항상 필요로 하는 인간을 뜻한다. 앞으로 시편이나 구약성경에서 ‘영혼’이라는 말을 들을 때,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네페쉬’ 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요한 두 가지 사고는 첫째, 한 부분으로 그 부분이 들어있는 전체를 표현한 것이다. 즉 ‘목구멍’의 뜻을 지닌 단어가 결국은 사람 존재 전체를 뜻한다. 그러나 이 단순한 대체 용어가 아니라 목구멍이 지니는 뉘앙스를 포함하여 전체를 뜻한다. 예들 들면, ‘하느님의 손’하면, 일하는 기관으로의 손, 직접 일하시는 하느님, 손수 인간의 역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뜻하게 된다. 둘째, 전체적, 종합적, 통합적인 면으로 어떤 사물을 부분이나 나누어 분석해서 보지 않고, 한 사물, 한 과정을 하나로, 나뉘지 않은 전체로 본다. 그리스 사람들은 하나의 사물, 하나의 과정을 각 부분들을 나뉘서 생각하고 그것들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많은 경우 ‘네페쉬’처럼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작가는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자기가 하느님께 충실함을 말씀드린다(2절 2행). 여기에 쓰이는 히브리말 ‘하시드’(복수 하시딤)는 주님께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을 뜻하면서, 다음에 나오는 “종”고 통하는 명칭이다.

 

2절 3행의 “당신 종을 구하소서”의 ‘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우리말의 ‘구원’, ‘구언하다’와 같이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동사와 명사로 가장 자주 쓰는 단어이다. 시편작가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으로써 자기가 하느님과 주종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주종관계’라는 말은 항상 일반적인 관계, 주인은 자신만을 위하고, 종은 주인만을 위해야 하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주종관계는 근본적으로 서로를 위하는 관계로, 종은 주인에게 충실해야 하고, 주인은 주인대로 종의 생활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종은 일종의 명예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처럼 어떤 자유인이 다른 사람에게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상대가 누구인가이다. 상대가 높은 사람이면 종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높은 사람 앞에서 마땅한 겸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높은 사람의 종으로서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임금에게 신하들이 자신을 종이라 부르고, 기도자들도 하느님께 자신을 종이라 고백한다.

 

종의 고백은 시편에 자주 나온다. 문맥에 따라서, 특히 탄원시편에서 기도자가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면서 자신을 그분의 종으로 고백하는 것은 고백과 동시에 하느님께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채우시라는 간접적인 간청도 하게 된다(시편 79편/ 시나이 산의 계약도 이런 서로의 의무가 포함된 주종관계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충실해야 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경우는 신앙고백이 됨과 동시에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셔야 하는 의무도 상기시켜드리는 것이 된다.

이러한 공동고백이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에게도 적용되어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으로도 쓰이게 된다. 이러한 고백으로 시편의 기도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소속되어 있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기도자를 보호하셔야 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2절의 마지막 단어인 ‘신뢰하다’라는 동사는 시편의 영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뢰는 종으로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대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 중의 하나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신뢰하는 사람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께서 자기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확신이 있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기본적인 간청들 중의 하나가 불쌍히 여겨주십사는 간청이다(3절 1행). 인간이 자기의 처지를 깨닫고 하느님 앞에 설 때 도대체가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자연히 하느님께 불쌍히 여겨주시라는 청원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시편 51편).

 

이어서 시편작가는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 이유의 하나로 자기의 기도자세를 말씀드린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고 있사오니”(3절 2행). “온종일”은 동시에 ‘나날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기도자는 하느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3절의 첫 부분이 간청의 정점이다.

 

4절에 와서 구원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베푸시라는 탄원이 이루어진다. ‘기쁨’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의 기쁨이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 곧 주인이신 하느님의 보호와 구원을 체험한 종의 기쁨과 행복을 말한다. 4절 2행의 기도자는 “제 영혼을 들어 올리니”하고 말한다. 2절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위에서 욕구와 기타 모든 감정의 자리라고 하였다. 구원을 목말라하는, 구원을 목마르게 갈망하는 시편의 기도자가 그 갈망의 자리, 그 갈망의 주체인 자신의 영혼 자체를 그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인 하느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5절은 처음부터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면서 간청의 근거로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어지심을 든다. 여기에서 2절 4-5행의 “당신께서는 저의 하느님, 당신께 신뢰하나이다”에 이어 절 전체에서 본격적인 신뢰의 고백이 이루어진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간청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하느님께 신뢰가 가능함은 그분이 어지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지시고”는 ‘좋다’로 옮길 수 있다. 성경에서 좋다는 것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창세기 1장에서 물건이나 사람이 좋다는 것으로 하느님께선 가장 좋으신 분, 가장 최고선, 선 그 자체이시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선하심은 인간의 잘못에 대한 용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선하심과 용서는 그분의 자애와 통한다. 사랑으로 번역되는데 “자애”(hesed)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 하나로서 ‘계약에 충실함’이라 할 수 있다. 계약은 물론 시나이 계약이다. 하느님께서 계약에 충실하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을 위한 존재로서 충실하심을 뜻한다. 곧 보호를 베푸시는, 또는 베푸셔야 하는 하느님과 주인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심이다. 그리고 마지막 간청 6절은 첫 부분 간청과 연결된다. 하느님에 대한 호칭도 같다(주님). “영혼을 지켜주소서 - 구하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기쁘게 하소서.” 호칭은 야훼(6절)-당신은 저의 하느님 - 아도나이 -아도나이- 아도나이 - 야훼(6절)로써 '아도나이‘는 본디 ’저의 주인님‘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님‘이라 부른다. 시편 작가가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고백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부분의 마지막 간청인 “귀여겨들으소서”는 단순히 듣는 동작만을 뜻하지 않는다. 들어서 알아듣고, 그 알아듣은 결과로서의 직접적인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곤경의 날”(7절 1행)은 기도자가 압박받는 날, 사방에서 그에게 밀려들어 오는 날, 그래서 이제 결정나는 날, 결판나는 날이다. 하느님께서도 지금 손을 쓰지 않으시면 늦어버리는 그러한 결정적인 날이다. 위기의 때이지만, 기도자는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에 차 있다. 바로 이 흔들림 없는 신뢰가 청원기도의 바탕이다.

 

찬양: 8-13절

 

8-13절에서는 이미 말한 대로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노래한다. 찬미의 근본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받아들이고 이를 선포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시편 86의 첫 찬미는 주님께서 신들 중에 유일하시다는 선포다(8절 1행). 오직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유일하시다는 사상에는 두 가지가 잇다. 실천적 유일신론과 이론적 유일신론이다. 후자는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 하느님께선 유일하실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석적, 철학적이었던 그리스도적 사고방식의 의해서 얻어진 신론이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천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실천적으로 생각한다. 즉 성경의 하느님은 인간의 생각을 통해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에게 실천적으로 다가오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천적 유일신론에서 출발한다.

 

실천적 유일신론이란 다른 신들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서 그 위대함으로 인하여 신들 중에 유일무이하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규명하지 않는다. 실천적 신이다.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 “당신의 업적과 같은 것이 없나이다.”다(8절 2행) 여기선 하느님이 이루신 업적이 어떤 것인지 말하지는 않지만 우선 이집트로부터 탈출과 해방을 가리킨다. 이집트 탈출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치적 사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근저에는 이스라엘인들의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의 신들을 이겼다는 신학적 사건이 깔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이집트 탈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원초의 사업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하느님이신 야훼님께 견줄 신들이 없고, 그분의 업적에 비길 공적이 없다고 노래한다. 지금까지 시편 기도자의 관심사는 개인적인 일이다. 그래서 다른 백성이나 민족들을 등장시키지 않는다(9절).

 

민족들의 찬미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이다(9절 3행).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의 분신 또는 대표이다. 결국 그 사람 자신이다. 이스라엘 인들에게 이름은 그 주인의 본질을 말한다. 하느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 만백성들에게 알려지고, 이들은 이 이름에 상응하는 존경을 하느님께 바치게 된다(9절 3행). 이는 하느님 자신을 공경함을 뜻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 자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8절과 10절 사이에 9절에서 하느님의 본질에 상응하는 민족들의 경배에 대하여 말해진다. 이러한 구조는 8-10절이 하나의 작은 단일체로서 이 세 절을 하나로 이해해야 함을 뜻한다. 그렇다고 10절이 단순히 8절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8절에 비해 10절은 확장으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니이다”(10절 2행). 유일신론이면서 이론적으로 정립된 신론으로 나아간다. 업적들을 놓고 볼 때 다른 민족들의 신들은 생긴 그대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각품들이다. 이 말은 그런 신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오직 한분 분이시다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이시다. 이러한 신론은 특히 제2이사야서로 불리우는 이사 40-55장에서도 강조된다.

 

8-13절은 본디 간청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하느님을 바라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바람으로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십사고 탄원하게 된다(11절). 동양에서처럼 히브리 사상에서도 하느님의 길과 진리 또는 진실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11절 2행). ‘진실’또는 ‘진리’로 번역되는 히브리 개념은 어떤 철학적인 진리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의 근본바탕은 행동이나 삶이 변하지 않고 지속한다는 것, 나쁜 것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의지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됨이다. 이러한 삶은 올바른 길로 계속 나아간다. 또한 진실과 진리는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적인 것도 아니다. 본디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특성이다.

시편저자는 이러한 하느님의 속성 안에 걸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 간청이다. 곧 하느님의 이 속성에 따라 자기의 생애, 삶의 자세와 구체적인 생활을 꾸려나가겠다는 원의이다. 11절 3행의 “모아주소서”라는 동사는 히브리말레서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 뜻은 ‘하느님 이름을 경외하는 데로 자기를 묶어달라, 집중 시켜달라’는 청이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또는 두려워함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 대해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이는 일차적으로 인간이 신체험에 근거한다(이사 6장 5절 참조). 비천한 인간이 자기와 전혀 다른 신을 접했을 때 자연히 느끼게 되는 공포다. 거룹들이 외치는 ‘거룩하시다’는 단순히 하느님의 성성을 뜻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인간의 세계에서 떨어진 인간과는 철저하게 다른 하느님,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속성을 말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속성을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행동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경외함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라 가르친다.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란 하느님께 성실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간 쪽에서 건널 수 없는 그 다름의 벽을 깨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다. 이러한 경외심은 신뢰하는 두려움, 사랑이 깃든 경외심을 나타낸다.

 

8-10절은 하느님께 대한 찬기가 하느님께로부터 출발한다. 하느님께서 이러하시고 저러하시므로 거기에 따른 모든 민족들의 찬미가 드려진다. 그런데 12절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 그리고 감사가 시편 기도자 자신에게서 출발한다. 더욱더 개인적인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12절은 9절과 비슷한데, 12절은 민족들이, 9절은 기도자가 찬미의 주체이다. 12절에는 “제 마음을 다하여”와 “영원토록”, “마음”이 첨부되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따른 생각과 생각의 연속으로서 행동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찬미한다 함은 의지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실존의 모든 면을 통틀어 하느님을 찬양함을 뜻한다.

 

13절에는 찬미의 개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제게 대한 당신의 자애가 크시옵기에.../ 제 영혼을 깊은 저승에서 건져주셨기에.” ‘자애’는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속성에서 흘러나오는 구체적인 행동과 업적까지를 말한다. 시편에서 ‘저승(셔올)’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당-연옥- 지옥이 아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이러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정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저승은 죽음의 세계이다. 죽은 사람이 ‘내려가서’ 축소된 삶, 그림자와 같은 삶을 영위하는 그러한 그림자의 세계, 망각의 세계다.

기도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이러한 저승으로부터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의 죽음에까지 다다랐는데 하느님께서 건저 주셨음을 뜻한다. 13절에서 일어난 사건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1) 기도자의 과거의 사건에 대한 감사 2) 기도가 올려지고 있을 때 베풀어진 것 3)장차 일어날 일이다. 즉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신뢰심에서 일어날 구원을 확신한다. 이러한 마음은 하느님의 구원을, 또 하느님 자신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 된다. 감사와 찬미는 하느님 앞에서 충만한 삶을 누리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고백이 된다.

 

간청2: 14-17

 

시편 86편의 마지막 부분인 14-17절은 시편작가의 ‘원수’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는 이들을 ‘오만한 자들’ 과 ‘포악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오만한 자는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느님을 부인할 때 나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을 부인할 때 인간은 오만해질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오만할 때 또한 악이 나온다.

 

오만한 사람들과 포악한 사람들은 동일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을 부정함으로써 오만한 자가되고, 오만에서 악이 나와 기도자의 목숨을 노리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혜문학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알지 못함이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것이다.

 

15절에서 시편작가는 다시한번 하느님께 대해 말하는데, 원수들과 다르신 분으로 서술한다. 그래서 “그러나 주님, 당신께선.”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너그러우시다는 말은 비록 인간의 죄에 대해서 정당하게 ‘화’내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으신다는 말이 된다. 즉 자애와 진실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또한 이 특성은 하느님의 대상인 인간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특성이 된다(철학적 규명). 하느님께서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시기에” 기도자는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뢰심과 함께 간청드린다. “저를 돌보아 보시어(15절 1행)로 직역하면 ‘당신 얼굴을 저에게 돌리소서’이다. 하느님께서 오지 않으시면, 그래서 돌보지 않으시면 인간에게는 불행과 고난이라는 것이다. 곧 하느님과 마주 할 때, 인간에게 구원이 있음을 뜻한다. 탄원시편에 자주 제기되는 ‘왜 당신 얼굴을 감추시나이까?’라는 질문도 같은 맥락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도자에게 자기의 생존을 이끌어갈 힘의 원천이 오로지 자기의 주인이신 하느님뿐임을 고백한다.

 

시편 86편의 기도자는 마지막 간청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당신 어지심의 징표로 만드시라는 것이다. ‘제가 하나의 징표가 되어 당신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리게 하소서’ 이 말은 기도자의 구원여부는 개인의 일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오는 것은 구원에 상응한 원수들의 망신이다. “이에 저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하리니”(17절).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은 특히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상처다. 명예를 생명보다도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붉혀야 하는 수치를 당함은 죽음보다도 가혹하게 여겨진다. 이래서 시편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사는 간청, 기도자 자신이 아니라 원수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하게 해달라는 간청이 자주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편 86는 다시한번 하느님을 직접 부르면서, 그분의 도우심과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끝을 맺는다.

 

나오면서

 

거의 모든 탄원시편은 삼각구조를 가지는데, 그 출발점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자다. 그리고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인 원수이고 이 삼각관계에서 결정적인 것은 시편작가와 하느님을 잇는 축이다. 시편작가는 하느님의 종이고 그분의 생도다. 그는 하느님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가련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다. 이에 반해 하느님께선 시편작가의 주인이고 그의 하느님이시다. 또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그분의 특성들이 말해진다. 자애, 진실, 선하심, 자비하심등. 이러한 하느님의 속성은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역사를 통하여 당신께서 선택한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 업적에서 드러난다. 시편의 기도자는 이 특성들에 호소한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해오셨던 것처럼 자기에게도 성실하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리라고 확신한다.

 

결국 모든 결정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 설사 기도자가 처한 고난의 직접적인 원인이 원수들에게 있다 해도, 이들이 기도자를 거술러 이렁나 그의 목숨을 노리더라도, 기도자의 고난에 대한 해결, 그의 구원의 열쇠는 하느님의 손에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의 얼굴을 기도자에게 비추어주시느냐, 아니면 얼굴을 계속 돌리고 계시느냐에 따라서 기도자의 고난과 구원이 결정된다. 곧 기도자에게 하느님이 얼굴을 마주하면 구원과 행복이 오고, 얼굴을 돌리며 고난과 불행이 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정반대 일수 도 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 2)에서는 계시지 않는 하느님, 떠나버리신 하느님께 통절하게 부르짖는 그 순간에도 그분께서는 바로 옆에 계실 수가 있는 것이다.

 

시편 86편의 기도의 바탕은 하느님께서 세계, 그리고 인간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인 밑에서의 삶은, 비록 지금은 고난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기쁨(4절)과 생명과 찬미의 생활(12절)이다. 찬미는 하느님 앞에서의 충만한 기쁨과 생명의 노래이다. 그래서 시편의 기도자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이미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시작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 43-70.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14-215.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 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