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88(87): 고통 받는 사람의 탄식과 기도(슬픔의 극한)

마리아 아나빔 2012. 5. 13. 09:15

 

 

 

 

                                  시편88(87): 고통 받는 사람의 탄식과 기도(슬픔의 극한)

 

 

이 시편은 슬픔의 극한에 처한 저자의 노래이다. 바꾸어 말하면 슬픔이란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사랑은 ‘자비’적 사랑이다. 슬픔이 수반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제시하고 있다. 슬픔의 극한을 보여주는 탄원과 호소, 두려움과 고통으로 일관되어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조차도 저자는 어두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절박함을 토로한다. 그래서 이 시편은 가톨릭교회의 전례 중, 미사조차 허락되지 않은 성금요일 낮기도에 부르게 되어 있고, 4주간 화요일 낮기도와 금요일 끝기도에 사용된다.

 

이 시편을 어느 성서학자는 나병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지은 것이라 생각한 일이 있다. 어쨌거나 이 시편의 저자의 상태는 비참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람의 상태이며, 용기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이 시편의 표현을 절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 사람이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분 귀로 들어주시리라고 희망하고 있다(2절). 시편작가는 밤이 낮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을 향하여 외친다. 그의 마음은 재앙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생명은 무서운 임종의 연속 같으며, 그는 아직 살아 있으니, 그러나 아무에게도, 하느님께조차 잊어버려진 죽은 사람과 같다. 오히려 시편 작가에게 손길을 펴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를 생각하고 계신 느낌이 있다. 친지들도 모두 그를 피하고 멸시한다((1-8절).

 

시편작가는 하느님의 빠른 도우심을 촉구하기 위하여, 작가는 자신을 이대로 죽게 한다면 하느님의 영광 그 자체에 손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9-12).

 

이 시편의 제2부에서는 구약시대에 유다인이 내세에 대하여 품고 있던 사고방식이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세올의 지하 세계에 내려간다는 것은, 가장 짙은 신비에 싸여 있고(12절), 망각과 빛이 없는, 하느님과의 통교마저도 차단되어 있다고 보는 그 세계에는, 사람은 그림자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10), 하느님의 기적도 보이지 않고(12절),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다(10). 망령과 같은 이 존재에는 지상의 생활에 대하여 회상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시편작가는 지금의 비참한 상태 때문에, 벌써 그 지하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3,4,6절). 실제로 죽음이 임박하고 있다는 악몽 속에 살고 있는 존재는 이미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도 살고 싶어 하는 소망이 나타나 있으며,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젠가 이 세상에 세워지리라고 하는 신앙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나라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소망이 숨어있다.

 

시편작가는 더 깊은 슬픔에 몸부림친다. 죽음을 걸고, 하느님께 향하여 외친다. 자신의 생활은 모두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지나가고 있다. 어둠만이 단하나의 친지다(13-18). 이것은 신뢰와 희망으로 끝나지 않는 단 하나의 시편이다. 슬픔과 비참만을 알고 있는 이 기도에는 가장 짙은 어둠에 폐쇄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비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갑자기 희망이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는다면 인간적인 희망을 모두 잃었을지라도 또한 역시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로마 4:18).

 

그리스도의 전통은 이 시편에서 수난과 죽으실 때의 그리스도의 기도 혹은 그 죽음의 예언이 있다고 보고 있다. 교회는 이 시편을 성 금요일과 성토요일의 전례에 넣음으로써 이 기원을 그리스도의 입에 올린다. 교회의 교부들은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와 같이”라고 하는 어둡고도 살벌한 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없으신 분이시면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기워 갚으셨는데, 그러나 그분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죽음을 쳐 이기신다. “누가 나에게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8).

 

또한 이 형용하기 어려운 슬픔에 가득 찬 시편은 죄와 괴로움에 휩쓸려 찌드러져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그리스도께 들어 맞출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깊은 사람의 길을 그 밑바닥까지 걸으셨다.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그리고 가신 저승은 죽음의 허무의 나라다. 이것도 그 저승의 쇠사슬을 깨뜨리기 위해서였으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실제로 우리 인간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아버지께 한없는 사랑을 받고 계신 아들은, 절대의 허무와 만나셨으나, 거기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다. 십자가에 있어서 모든 활동, 모든 움직임, 모든 싸움은 끝났다. 그러나 거기서 그분은 사랑의 전능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그 밑바닥을 만났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저 세상이란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생명에 남김없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벌써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 곧 죄, 이것뿐이다.

 

교회는 이 시편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 비하와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괴로워하시는 그리스도의 기도와 마음을, 제 것으로 쓴다. 거기에는 자신의 구원의 원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기도를 고행의 날에 드린다. 교회는 죄에 굳어서 영적 죽음 속에 누워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다(3-4절). 또한 고통과 소외, 절망과 위험,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 불치병에 고생 중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연옥에서 괴로워하는 모든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한다.

 

하느님을 떠나 죄와 악 속에 완고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괴로움이라는 것이 있을 때, 이 시편은 그러한 파경에 있는 인생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하든 동정을 기울이고,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그들의 속량의 책임을 지고,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주변이 텅 비고 그 공허가 우리 마음 밑바닥에 느껴지고, 그리고 미혹 속에 빠져들고, 인생의 의미가 이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향하여 우리의 고독을 외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크나큰 위로다. 신앙을 가지고 기다리면 하느님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그 고독이 채워지는 것이다.

   

Text 안에서

 

시편 88편은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시작되는 세 구절(2절; 10절 b; 14절)을 중심으로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데, 특별히 이 호칭 뒤에는 ‘부르짖다’ 라는 동사가 각각 동반 된다. 이어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머리글을 제외한 88편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1절(머리글)

 

표제의 ‘아라 마할랏 르안놋’은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특수용어이다. 히브리어 ‘알’은 전치사로서 ‘~에 따라서’라는 의미가 있으며, ‘마할랏’은 ‘질병’에 해당되는 남성명사 ‘마할레’ 혹은 여성명사 ‘마홀라’와 연관된다. ‘르안놋’은 ‘~에 대하여’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 ‘레’에 ‘고통스럽다’ ‘괴롭다’ ‘압박을 당하다’라는 뜻의 동사 ‘아나’의 강조형 부정사 ‘운노트’가 결합된 형태인데, 따라서 ‘마할랏 르안놋’은 ‘고통스러운 질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아무런 설명 없이 이 표현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독자들은 그 의미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잘 알려진 멜로디 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통스러운 질병(이란 노래의 곡조)을 따라서’란 의미로 추정해 볼 수 있느 것이다. ‘마스킬’의 의미도 분명하지 않다. ‘교훈’ ‘가르침’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확실치않아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음역으로만 표기되고 있다. 저자는 ‘제라 사람 헤만’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그는 열왕기의 저자가 솔로몬의 지혜를 설명할 때 비교 대상으로 언급할 만큼 탁월한 지혜를 가졌던 사람이다(1열왕 5, 11).

 

2-19절 ㄱ: 자신의 비참한에 대한 탄원과 고난에 대한 첫 번째 묘사

10ㄴ3절: 고난의 상황을 강조하고 그 긴박성을 드러내는 연속적 질문

14-19절: 하느님의 침묵과 그로 인한 고난에 대한 두 번째 묘사

 

2-10절 ㄱ

 

시편에서 ‘가장 슬픈 시’ ‘단 한줄기의 위로도 희망의 빛도 없는 시’로 이해되는 88편은 ‘주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국 자신의 절망에 본질적 원인을 제공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결초 포기할 수 없는 분도 그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특별히 2절은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고통도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지만 그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역시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명시한다. 이어 탄원자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하느님께 간청하는데, 이는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속한 개입에 대한 요청이다. 3절에서는 ‘기도’와 ‘울부짖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 노래의 속성이 ‘탄원’임을 정확히 드러내 준다. 이후 탄원자가 처한 고통의 상황은 매우 솔직하게 묘사된다. 그의 삶은 ‘불행’으로 가득차 있고 이러한 사정은 ‘죽음’에 근접한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4절). 오죽하면 5-9절에서는 타인들이 자신을 죽은 사람처럼 여기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때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존재’로 치부되는 굴욕이었다. ‘그분의 손길에서 떨어져 나간 듯하고’ 그분의 진노의 대상‘으로 전락한 듯한 고통이 결국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그들의 혐오거리‘가 되게 한다. 이러한 소외는 그를 꼼짝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데, 저자는 이를 “저는 갇힌 몸, 나갈 수도 없습니다.”(9절)라고 표현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와 주변친구(사람)들로부터의 외면이 튼 구속으로 다가왔음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10-13절

 

시편저자의 탄원은 다시 시작된다. 2절에서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종일 탄원하는데(10 절), 이제 저자는 하느님께 질문을 던지고(11-13), 이러한 질문들은 하느님의 개입을 간청하는 기능을 한다. 죽은 듯한 상황에 있는 그를 구해내실 수 있는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이 사랑이 자신에게도 주어질지를 질문하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질문은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서는 가장 도전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후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종결된다고 믿었던 구약시대에,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살려내실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은 매우 파격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4-19절

 

다시 주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단락에서도 기도자의 고난은 여전히 절실하게 묘사된다. 특별히 15절에서는 ‘버리다’ ‘감추다’등의 동사를 통해 침묵하고 부재하시는 하느님을 솔질하게 토로한다. 주님으로부터 소외되고 거절당한 듯한 상황 때문에 저자는 ‘왜?’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못한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십니까“(15절) 마지막 절은 탄원자가 느끼는 소외를 매우 절절하게 드러낸다.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어둠만이 저의 벗이 되었습니다“(19절).

 

 

나오면서

 

시편 88편은 결국, 하느님의 침묵으로, 어둠과 고통으로 마무리된다. 병으로 인한 것이든 다른 종류의 고통 때문이든 탄원자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존재로 소개하면서 구원을 호소한다.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이고, 이를 통한 주변의 외면은 마치 자신을 죽음의 감옥에 가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 고통의 상황을 풀어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하지만 그분의 침묵은 또 다른 소외가 되어 탄원자를 고독하게 한다.

 

우리말에 ‘머금다’라는 말이 있다. ‘삼키지 않은 상태로 입속에 넣고 있다’라는 의미를 갖고, 그래서 ‘표정이나 태도로 드러나다.’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한다. 마치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머금어서 눈물을 들키고, 누군가를 외면하지 못하고 마음에 머금어서 그 마음을 들키게 되는 것... 그래서 너무도 슬프지만 어쩔 수없는 상태... 사랑의 본질이다. 시편 88의 저자는 하느님과 그런 사랑의 관계 안에 이미 들어서 있는 존재이다. 외면하시는 듯한 하느님을 마음에서 잘라내지 못한 채 그분을 머금어서 슬퍼하는 안타까운 상태가 그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은 그러한 먹먹함이야말로 곧 신앙의 실체임을 가르쳐 준다. 하느님이 명확하게 잘 보여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아서 슬픔을 머금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희미한 채로 그 마음을 접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의 여정임을 , 그리고 이러한 믿음(신앙)을 보여 준 존재에게만 하느님은 그 다음 단계로서의 능동적 행위를 드러내심을 알려 준다. 믿음의 행위를 한결 같이 보여 준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신앙은 먹먹함과 슬픔의 극한을 통해 단단해지고, 그러한 시험과 시련을 통과하는 과정 중에 생성된 투명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확실하게 새길 수 있게 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슬픔은 투명한 마음과 정신이 되기 위한 여정이며 필수 조건이다.

 

 

 

※ 참고문헌: 김혜윤, 생활성서(2012/3), pp.62-6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17-218.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 517-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