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2(91): 안식일에 부르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주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로 시편작가는 아침에 그분의 자비를, 밤에는 그분의 성실을 찬양하고 기리므로써 주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한다.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끊임없는 찬가로써 주님을 찬양하고 기른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임을 말한다. 특히 의인은 주님을 기린다. 시편작가가 감탄하고 찬미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과 이 세상을 이끄시는 주님의 위대한 지혜다. 어리석은 사람은 악인의 표면적인 덧없는 행운에 대하여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을 알 수가 없다. 악인은 멀지 않아 멸망할 터이기 때문이다(5-8절).
시편작가는 죄인이 불쌍히 여겨야 할 운명을 암시하고 나서 풍요로운 이미지의 말로써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기린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힘과 기쁨과 건강, 그리고 적에 대한 승리와 번영을 주신다. 이것은 의인에게 주시는 은혜이며,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증명된다(9-15).
시편의 목적은 악인을 흩어 놓으시고, 의인을 번영케 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있지만, 그러나 주제는 이 세상에서도 벌써 주시는 선인과 악인에 대한 상과 벌이다. 악인의 운명은 시편 1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가지고, 의인의 운명에 대립시키고 있다. 악인은 다소 번영을 보았다 하여도 그것은 풀과 같은 것이다. 풀은 말라 시들기 위해 싹튼다. 이와는 달리, 의인은 들소처럼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종려처럼 힘이 세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번영한다. 그는 하느님의 집 안에서 살기 때문에 항상 젊고, 늙어서는 열매를 맺는다. 유다인의 전통은 이 시편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때 매일 아침 성전에서 노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이 시편을 사용하여 전례에 있어서, 특히 성인의 영광스러운 생활에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업적과 지혜를 찬양하고 기린다.
교회의 특별한 사명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고 회개와 거룩한 생활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여러 나라 백성을 초대하는 것이다. 생활이 하느님의 계명과 조화하고, 사람이 사랑 안에서 일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주님께 대한 찬미의 교향곡이 된다(3). 교회가 특히 기뻐하는(4) 하느님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거룩한 역사에 행하신 업적이다. 이 업적에는 사람의 속량이 있다. 주님의 깊으신 배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계획이 세상의 현자에게는 숨겨 놓으시고, 소박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씀하셧다. 그리고 바울로도 감탄하며 말한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린다. 교회는 자신의 역사를 통하여 이 시편의 말씀을 진실을 경험한다(7-15). 하느님에 대한 박해자, 하느님을 부정한 자는 쓰러져 갔다. 부정과 죄악을 행하는 자는 덧없는 것이며, 그의 승리도 일시적일 것이다. 그 대신 교회는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 축복받는 의인들이 싹트고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에서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을 사용하여, 자신의 성인들의 영광과 초자연적 생명력을 찬양한다. 종려와 같이 무성하고 송백과 같이 힘이 센 성인들은 교회라고 하는 하느님의 동산에 심어지고 자란다. 성 바울로도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토대로 하고, 거기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에페 3, 17). 성 아우구스티노도 우리의 뿌리는 윗 쪽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의 뿌리는 하늘에 오르시는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한다.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잘 자라는 무성한 송백과 종려의 힘, 수명, 결실은 의인의 내부적, 초자연적 생활력과 풍요에 대한 참으로 적절한 상징이다. 그리스도께서 신비체의 신비를 포도나무의 비유로써 나타내셨다. 성인들은 가지가 줄기에 달려 있듯, 그리스도께 붙어 있다. 그렇기에 열매를 맺고 그리고 사람 앞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다. 참으로 시편의 기도는 우리 마음을 오늘 있다가 내일은 사라지는 자연생활에서 영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에로 올라가게 한다.
이 세상 교회의 동산에서 전례는 성인의 축일에 낙원과 광경을 바라보게 한다.
그 낙원에서 성인들은 무성하게 잘 자라는 나무 같이, 영원의 봄에 무성하게 자라고, 하느님과 빛과 온기 안에서 양육되고, 그 동산의 중앙에 있는 것은 생명의 나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옛 그리스도교의 미술이 전례에 따라, 항상 푸르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종려나무를 가지고, 성인들의 신비와 그들의 영원한 영광을 나타낸 것을 보면, 이 시편의 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의 업적에 대한 관상과 우리에게 힘과 건강을 주시고 악에서 구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 주님의 집 안에서 은총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는 생활에서 솟아나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찬미와 감사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기르는 것은 그 기도마저 기른다. 그 기쁨에서 시편 92의 기도가 솟아난다. 그리고 그 기쁨은 이 거룩한 말씀을 되폴이 하는 사람의 마음에 부어진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 앞에 악기처럼 울려 퍼지고(3), 그 사람은 주님의 집 안에서 자라고 열매맺고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2 코린 4, 16) 할 것이다.
Text 안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석에 따라서)
사랑은 믿음이나 희망보다 위대하다.(시편 92)
하느님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노래말고 다른 노래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하느님을 직접 뵙는 날까지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 안에 날로 견고해지기 위함이다. 지금 눈으로 뵙지 못하지만, 하느님을 믿을 따름인데, 우리가 신앙한 그대로 빛나는 모습이 나타날 때에 그 만큼 기뻐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희망 또한 불면하는 것이어야 하며 하느님 안에 확고해야 하고 흔들리거나 약해져서는 안 된다. 희망이 뿌리를 두는 대상이신 하느님이 동요하지 않으시듯이 우리 희망도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희망이라 부르지만 그 때에는 희망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여하튼 바라는 것을 눈으로 보기까지는 희망이라 불리운다. 지금으로서는 언약하신 바가 이루어지기까지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 장차 올 것에 희망을 걸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 그래야만 눈으로 볼 때에 기쁨이 가득하여 끌어안게 되리라고 충고한다.
믿음과 희망에 세 번째로 덧붙여지는 사랑은 믿음과 희망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믿음이므로 그 사물을 눈으로 보게 될 때에는 믿음은 곧 실상으로 변할 것이다. 희망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사물에 대한 희망이므로 그 사물이 오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손에 넣은 것을 희망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사랑은 갈수록 더욱더 증대될 따름이다(1코린 13, 4-13). 아직 눈으로 뵙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사랑한다면, 정작 눈으로 뵈올 때에는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겠는가? 그리하여 사랑의 열망은 커지기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까닭은 장차 올 생명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이상 아무도 눈앞에 있는 선익에다 마지막 희망을 걸어서는 안된다. 세상의 행복을 자기한테 스스로 약속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현재의 행복을 가능한 만큼 이용한다. 행복이 없으면 하느님의 정의로 여겨 역시 감사들일 일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쓰다듬어주실 때에도, 벌주시겠다고 위협하실 때에도 여일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희망이 주는 평안 속에 누리는 저 기쁨이야말로 우리 안식일
이 시편의 1절의 제목은 안식일 노래의 시편이라 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와서도 안식일에 육신으로 여가를 취한다. 나른하고 취약하고 사치스러운 여가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고 명하시었는데 그들은 하찮은 짓으로 소일한다. 하느님이 금하시는 일을 안식일에 행한다. 우리로서는 악행을 않고 여가를 취한다면 그들은 선행을 않고 여가를 취하는 셈이다. 그들은 안식일에 선행하기를 소홀히 하면서 하찮은 짓들은 쉬지 않는다.
우리의 안식일은 어디 있는가? 내면에 있다. 우리 마음에 안식일이 있다. 많은 이가 지체는 쉬면서 양심은 쉬지 않고 끊인다. 악인은 누구든지 안식일을 얻지 못한다. 양심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어쩔 수 없이 혼란의 와중에 살아야 한다. 양심이 선한 사람은 편안하다. 그 평안 자체가 마음의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기 마음의 안식일을 지내기 위해선 자기 양심의 여가와 편안과 안온 속에 아무런 혼란을 겪지 않고 지낼 것을 권유한다. 그래서 시편은 인간들이 혼란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대의 마음속에 안식일을 누리는 법을 가르친다.
악의 원인을 하느님께 돌리는 이는 어리석다
2절은 우리가 만일 무엇을 이룩했다면 하느님을 칭송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느님의 선물이지 우리의 공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안식일을 시작한다. 우리가 정작 받았으면 받지 않은 것처럼, 악을 저질렀을 때는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악행인 까닭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그 탓을 타인에게 돌리고 씌운다. 대단히 불경한 사람이 아니라면 사탄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사탄이 나더러 그렇게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뱀의 꾀는 소리에는 솔깃하고 하느님의 말씀에는 귀를 막는가? 사탄이 악으로 꾀는 일도 그만두지 않지만, 하느님도 선을 하라고 충고하시는 일을 그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동의는 오직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사탄의 꾐에 빠졌다면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용서받을 것이다. 사탄을 탓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탓한다. 때문이라 한다. 얄굿은 자신의 팔자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운명이란 별이다. 따라서 별을 만든 이는 하느님이다. 결국 하느님께로 탓을 돌리는 것이 된다. 하느님이 죄악을 벌하시는 분인데도 자기 죄악을 만드시는 이가 하느님이라고 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짓을 하느님이 벌하시는데 그 까닭은 하느님이 만드시는 것을 구하시기 위함이다. 어떤 이는 다짜고짜 하느님께로 탓을 돌린다. 하느님이 바랐다는 것이다. 그분이 바라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시편은 이렇게 말한다. “좋으니이다. 주님께 고백함이!” 주님께 고백함의 의미는 두 가지를 가지는데 하나는 우리의 죄 중에서도, 우리가 행한 짓이니까 하느님께 고백하며, 둘째 선행에서도, 하느님이 행하신 것이기에 하느님께 고백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광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다면 그분도 우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소홀이 한다면, 하느님도 우리의 이름을 소홀히 할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사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이름이 새겨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선업을 하는 사람은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의 행업은(손으로 타는 것) 우리의 십현금이라 할 수 있다.
순조로울 때에도 역경중도 하느님을 찬미하자
3절에서 “아침에는 당신의 자애를 , 밤새도록 당신의 진리를 알림이” 시편작가는 만사가 잘되어 갈 때에 “아침”이라 하고 환난의 슬픔은 흔히 “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시편작가는 잘 될 때에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잘못될 때에도 하느님의 진리를 찬미하라고 한다. 죄악을 벌하신다고 해서 하느님이 악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침에 하느님의 자애를 알리고 밤새도록 하느님의 진리를 알린다면, 그대는 항상 하느님의 찬송하는 것이고, 항상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이름에 찬미 노래를 부른 것이다(다니 9, 5).
공의로 행동하고 기쁘게 처신하라
시편 4절은 “십현금과 수금에 맞추어, 비파 가락에 맞추어” 줄이 열 개 달린 십현금은 율법의 십계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악기를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이 악기를 써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은 있었는데 갖고 다니기만 하고 그것으로 찬미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여기서 노래를 하는 사람은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긴다 해도 마지못해 하는 사람은 아직 찬미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선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노래 하는데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내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 코린 9,7).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기쁨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진정으로 선으로 하는 것이고 잘하는 것이다. 만일 마지못해 한다면 그 선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며 마치 십현금을 가지고는 다니지만 그것을 켜서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십현금과 수금에 맞추어라는 것은 말과 행동으로 하라는 뜻이다. “가락에 맞추어”라는 것은 말로 하라는 것이고, “수금에 맞추어” 라는 것은 행동으로 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수금을 켜며 노래하고 싶다면, 말도 잘하고 행동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불빛이요 불꽃이시다
시편 5절은 “주님 당신께서 하신 일로 저를 기쁘게 하셨으니 당신 손의 업적에 제가 환호합니다.” 이 말의 뜻은 하느님은 우리가 착하게 살게 만들어 주셨으며, 그렇게 빚으셨기에 우리가 무언가 선한 일을 한다면 당신 손의 업적으로 여기고 우리가 환호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으로 선행을 하도록 창조되었다.(에페 2, 10).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악한 것만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도 자기 근성으로 말하기 때문이다(요한 8, 44). 또한 이 말의 의미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능력을 써서 범죄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며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선물에 힘입어서만 그렇게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래서 하느님 홀로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로마 3, 4; 시편 115, 11 참조). 그렇다고 가서 안심하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참말을 하고 싶다면 진리를 마셔야 한다. 그리고 그 근성으로 진리를 감추지 못하는 이상, 진리를 마시고 참말을 풍겨내는 길밖에 없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빛에서 멀어지면 어둠 속에 머문다. 돌맹이 하나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으로부터 열을 받는다. 열로부터 멀어지면 당장 차갑게 식는다. 따라서 돌맹이가 열을 냈더라도 스스로 열을 낸 것이 아니라 태양이나 불길로부터 받아서 열을 냈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즉각 차가워진다. 그 대신 하느님께 다가가면 곧 뜨거워진다. 그래서 “영으로 불타 주님을 섬기라고”(로마 12, 11) 사도들이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면 그분의 빛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나아가라. 그러면 비추임을 받을 것이다.”(시편 33, 6).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뜨거워지지 않으면 스스로 선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하더라도 우리는 이 시편의 말씀으로 하느님께 고백해야 한다.
부당하게 고통 받더라도 흔들리지 말라
우리는 악하게 살면서도 번영을 누리는 사람들을 본다. 안식일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이런 생각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자신은 악을 저지르지도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고 열 손가락으로 십현금(율법과 선업)을 헤아리고 있다. 계명 하나하나에 맞추어 자신을 심문하고 자기가 계명을 하나도 범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해악을 당하고 있음을 한탄하게 된다. 반면 선업을 전혀 행하지 않고 십현금을 만지작 거리는 사람도 있다. 집안에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선업만을 하면서도 온갖 해악을 당하는 가려난 사람은 마음이 심란해진다. 그래서 자신 안에 안식일과 선한 생각을 몰아내고 악행을 저지르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인내로우시고, 당신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아신다. 그때에 가서 모든 것을 셈할 것이다.
악인이 번성하더라도 놀라지 말라
6절은 “주님, 당신의 업적은 얼마나 위대하며 당신의 생각은 얼마나 깊습니까?” 참으로 그 무엇이 하느님 생각보다 깊은 것은 없다. 그분의 생각보다 지고하고 깊은 것은 없는 것이다. 심연의 바다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파선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나무를 꼭 붙들고 있는 사람은 살 수 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온갖 모욕과 고통과 수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보고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환난들을 참아 견디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눈길을 못 박고, 악을 행하면서도 현세에서 번영하는 사람들 때문에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장수한다 한들 하느님의 영원하심 앞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영원성에 결합시켜야 한다. 그러면 그분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선인들이 고생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벌을 받기 때문이며, 악인들이 즐거이 사는 것은 이방인으로 단죄받기 때문이다.
불경한 자가 잠시 성공을 거둔다고 놀라지 말라
7-8절은 “미욱한 사람을 알지 못하고 미련한 자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이 모두 피어날지라도 영영 멸망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풀처럼”이라고 했다. 풀꽃처럼 빨리 지는 것이 있는가? 또한 그보다 예쁘고 싱싱한 것은 없다. 하지만 풀꽃의 싱싱함을 즐기기보다 쉽사리 사라져 감을 안쓰러워해야 한다. 이처럼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지만 미욱하고 미련한 이들이다. 하느님 앞에 올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는 모든 악인들이 일시나마 번창함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멸망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잠시 그들의 번영을 지켜보고서 그들을 본받으며, 악인들처럼 자기들도 일시나마 번영하고자 하다 결국 영원히 멸망하고 만다.
세상에 애착하면 하느님과 등진다
9-10절은 “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영원히 높이계십니다. 부님 정녕 당신의 원수들이, 정녕 당신의 원수들이 사라집니다. 나쁜 짓 하는 자들이 모두 흩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높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을 통해서, 곧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이미 하느님의 영원하심에 일치를 이룩한 분이시다. 하느님은 관대하시고 인내롭기에 악인들이 저지르는 악을 보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참아주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원성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우리 밑에 들어오는 사물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지존하신 분과 일치하고 나면 사멸하는 모든 것이 우리 밑에 있으며, 그때는 뒤따라오는 구절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원수들이 사라지나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지금 꽃피어나는 자들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원수는 누구인가? 물론 그 사람들은 하느님의 원수들이다. 도한 혀끝으로나 비뚤어진 생각으로 하느님께 불측한 욕을 서슴지 않는 지독한 인간들도 원수이다. 즉 하느님께 노골적으로 욕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과 그런 씩으로 원수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 또한 이 세상의 친구는 하느님의 원수이다(야고 4,4,). 우리가 이 세상의 친구라면 하느님의 원수가 될 것이다. 아내가 간통을 하고 남편과 원수가 되듯, 세속 사물에 대한 사랑으로 간통하는 영혼은 하느님과 원수 되는 수밖에 없다.
의로운 사람은 늙을 줄 모른다
11절에서 “당신께서는 저의 뿔을 들소의 뿔처럼 치켜들어 주시고 신선한 향유를 저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원수들이 사라질 때에, 나쁜 짓 하는 자들이 모두 흩어질 때에, 지금 고생을 하는 이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외뿔 짐승의 뿔처럼 나의 힘이 솟아날 것이다.” 외뿔 짐승은 때론 오만을 상징하고 때로는 일치단결의 기쁨을 상징한다. 일치는 드높아질 것이고 모든 이단들은 하느님의 원수와 더불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닥칠 대 나의 노년에 자비의 향유를 부어주실 것이다. “나의 노년”은 바로 나의 종말을 가리킨다. 우리 연령에서 마지막은 노년이듯이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그 노년, 즉 마지막 연령은 기쁨 중에 보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받은 지금의 모든 것, 고난, 곤경, 깨어 지킴, 굶주림, 목마름, 악표, 불의와 억압 중에 당하는 모든 것은 그 마지막에 기쁨 중에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노년을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사람은 육신이 늙어 가면 죽게 된다. 그런데 교회의 노년은 올바로 행한 업적들로 인해 새 하얗게 빛날 것이고, 죽음으로 사멸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선업은 노인의 하얀 머리가 될 것이다. 그 때 우리의 노년은 젊음이 넘치고 싱싱한 노년이요, 언제까지나 싱싱할 것이다. 죄인들은 풀처럼 마를 것이다. 나의 노년에 하느님은 자비의 신선한 향유를 부으실 것이다.
적을 친구와 구분하는 법
12절은 “제 눈은 적들을 내려다보고 제 귀는 저를 대적하던 악한들의 소식을 즐거이 듣습니다.” 적들은 나쁜 짓 하는 모든 이들이다. 우리에게 아첨하는 이들 안에도 적이 있고, 적들을 구분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단지 자극해 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영원한 불 속으로 갈 것이다(마태 25, 41). 반면에 의인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마음은 주님을 굳게 신뢰한다(시편 111, 6-7).
그리스도인의 멋은 최후에 가서야 나타나리라
13절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돋아나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리라.” 악인의 번영은 풀처럼 사라지지만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돋아난다는 것이다. 야자수는 시편 작가에게 높이를 상징한다. 또한 가장 늦게 나오는 가지들이 아름답다는 것도 의미 있다. 야자수는 땅에서 시작하지만 맨 꼭대기의 끝에 가서 온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못난 뿌리가 드러나 보이지만 나무 끝은 공중에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러므로 의인의 아름다움도 끝에 가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뿌리를 단단히 박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뿌리는 위로 향해서 뻗는 그런 뿌리이다. 낮추어지면 높아질 것이다. 해가 솟는다고 야자수가 시들지 않는다. 백향나무가 시들지 않는다. 해가 쨍쨍 내리쬐면 풀이 시든다. 때가 오면 심판이 닥치고 의인은 시들고 의인은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자랄 것이다.
주님의 길은 올바르고 그분의 심판은 의롭다
14-16절은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는 하느님의 앞뜰에서 돋아나리라. 늙어서도 열매 맺으며 수액이 많고 싱싱하리니 주님께서 올곧으심을 알리기 위함이라네, 나의 반석이신 그분께는 불의가 없다.” 이 시편의 서두에서 권유한 안식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태평하게 알릴 것이다. 왜냐하면 악인들의 풀이 그들을 흔들어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향목은 태풍에도 휘지 않는다. 주님의 집에 심겨진 이들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줄 것이다. 노래와 비파로, 즉 말과 행실로 하느님께 고백하는 이들이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악인들의 행복에 속지 말라고, 풀꽃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잠시 행복하다가 영원히 불행할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알려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참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에 희망을 걸고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님은 불의가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뜰에 심겨 야자수처럼, 백향목처럼 돋아나고 싶다면, 주님의 올바르심을 알려야하고 그분께는 불의가 없음을 알려야 한다.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알려야 한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임을 자비의 향유를 부어주시는 분임을 알려야 한다. 또한 하느님은 당장에는 악인들을 살려두시면서 그들이 회개하게 이끄신다. 그러므로 악인이 번영하고 선인이 고생한다고 해서 심란해 하지 말라. 안심하라. 안식일을 지내고 “주님께서 올바르시고 그분께는 불의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참고문헌: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 C. 보르고뇨/ 성염 옮김, pp. 106-128.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28-229.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 544-546.
'시편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96(95): 하느님의 통치 (0) | 2012.07.16 |
---|---|
시편95(94):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주님의 말씀 (0) | 2012.07.09 |
시편90(89): 지혜의 시편과 하느님께 바치는 청원 (0) | 2012.05.27 |
시편88(87): 고통 받는 사람의 탄식과 기도(슬픔의 극한) (0) | 2012.05.13 |
시편 86(85): 시련을 겪을 때 드리는 기도 (0) | 2012.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