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95(94):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주님의 말씀

마리아 아나빔 2012. 7. 9. 10:19

 

 

 

                                           시편95(94):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주님의 말씀

 

들어가면서

 

시편 1부 천지만물의 왕이시며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스라엘 목자이시기도 한 하느님을 예배하라고 초대한다(1-7). 2부는 하느님께서 당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말씀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한 조상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내용이다(7-11).

 

바오로는 사도는 이 시편 2부에 대한 긴 주해를 남긴다. 그러나 바오로가 인용한 시편의 텍스트는 히브리어 텍스트와 좀 다른 70인 역 그리이스어 번역 텍스트이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성경에서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에 날마다 서로 격려해서 아무도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고집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한다. 이 말은 히브리인들은 모세에 의해서 사막에서 들었고 예언자들은 약속의 땅에서 들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통하여 들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살아 있으니 그 기회를 우리 가운데 놓쳐 버리지 않도록 권고한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았기에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안식을 누릴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오늘이라는 날을 다시 정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앞서 인용한 대로 다윗을 시켜‘너희가 오늘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든 완고한 마음을 품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자비인 ‘오늘’은 우리 위에 빛난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휴식은 여호수아가 히브리인을 이끌어간 저 “땅”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영원한 안식이 될 영원한 생명이다. 히브리인들도 이 휴식에 부름을 받았고 약속의 땅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 문을 열어 놓은 약속의 땅(하늘나라)의 전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도야말로 당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시는 착한 목자이다. 이리하여 사막에서 보낸 40년의 역사는 우리 눈에는 하나의 교훈과 타이름이다(1 코린 10, 6, 11).

 

교회는 날마다 성무일도의 계응을 이 시편을 가지고 시작했다. 참으로 이 시편은 교회 기도의 기본적인 이유를 나타내는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 것인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시편 95편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는데 대한 초대이다. 이 찬미의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것, 또 하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세주이시며 목자이시라는 것이다. 전례헌장에서도 “영원한 신약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천상의 궁전에서 영원히 읊어지고 있는 찬미가를 지상 유배지에 가져오셨다. 그분은 이 신적 찬미가를 당신과 함께 노래하도록 온 인류를 당신에게 결합시키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제직 과업을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수행하시니, 성교회는 미사성제를 거행함으로써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특히 성무일도를 바침으로써 하느님께 간단없이 찬미를 드리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한다(83조). 성무일도는 이를테면 성체의 제물의 연장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휴식에 받아들인다. 당신의 생명에 참여시키고 싶다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이집트라고 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나그네 길에서 교회에 있어서는 사막에서 보낸 40년의 신비가 되폴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인이 하느님께로부터 몹시 놓은 사명을 받고서도, 여러 가지 유혹에 빠졌던 것을 보고 배우지 말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시편95편의 초대와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성무일도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실제로 기록한 것이 되고, 마음이 소리에 일치한다면, 그것은 개인적 양식이 되고, 또 경건한 샘이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물이 뿜는 그 바위에서 풍부한 물을 펴낼 수 있음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성무일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이 시편에 의하여 교회는 날마다 자신의 사제들을, 전례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준수에로 부르지만, 이것은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교회가 성무일도로 하느님의 영광을 기리는 것과 같은 정신으로, 이 세상에서 하루를 지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시편은 우리를 찬미, 예배, 충실, 순종로 부른다. 이 세상에서 보내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의 하루다.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야고 4, 14)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잠깐”에는 하느님의 말씀의 영원한 씨앗이 놓여 있다. 그 씨가 자라고, 착하고 진실되며 끈기있는 마음으로 키워간다면 풍부한 열매를 맺는 것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주석에 따른 Text 연구

 

1절: 시편의 제목은 <다윗의 찬미 노래>로 되어있다. “찬미 노래”란 즐거움을 뜻하며 찬미는 또한 신심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면 찬미를 바칠 수 없다. 따라서 마음에 들지 않을 일은 제외된다. 그렇지만 자신 있게 드리는 찬미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만 해당된다. 이 경우 찬미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 있게 할 만한 까닭이 찬미를 받는 분에 대해서 부끄러운 점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쾌하게 기쁘게 찬미하고 노래하자.

 

“와서 주님께 환호하세” 기쁨의 큰 잔치에 초대하는 말인데 세상에다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환호하라고 초대한다. 이것은 세상에 사악한 환희와 선량한 환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에다 환호함은 사악한 환희이다. 주님께 환호함을 선량한 환호가 된다. 세상의 기쁨을 당당히 경멸하고 싶으면 그대는 경건하게 주님께 환호하여야 한다.

 

“와서” 환호 하여라 한 것은 주님께 환호하고 싶어지는 사람들, 그래서 오라고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면서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마주 오며, 마주오 면서 환호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비록 죄인이지만 구원의 희망을 잃지 않고 자기 죄를 아파하며 뉘우치며 하느님께 가까이 오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로 아니면 우리가 피해갈 곳이 없다(시편 138,8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아무도 하느님께로부터 달아나지 못한다는 것이 절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경에 다음 말씀이 나올리 없다. “ 이 백성이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이사 29, 13). 그러므로 시편에서 말하는 의미는 공간상의 이유로 하느님께 멀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닮지 않은 상이점에서 멀어진다. 만약 선량한 행동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악한 행실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간다. 똑같은 한 사람이 육신으로 동일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거나 악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의인이고 하나는 악인이라면, 비록 같은 사슬로 한 몸처럼 묶어놓았다고 하더라고 상당히 거리가 멀다. 따라서 유사함으로 인해서 하느님께로 멀어진다고 할 경우 이 유사함은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받은 그 유사함,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 안에 손상되는 그 유사함, 죄사함을 받을 때에 다시 받는 그 유사함, 우리 내면에서 정신적으로 쇄신되는 그 유사함, 동시에 동전에 모상이 다시 새겨지듯이 우리 영혼에 새로워지는 우리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다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보화에 가까이 가게 된다.

우리 주 그리스도 역시 바로 이 모상을 지니라고 우리를 초재하시며 원수까지 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그 본보기로 하느님을 세우신다. “그분이 완전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으로 그분과 비슷해지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창조 받으신 분에게 환호 하자! “와서 주님께 환호하세”가 된다.

 

“우리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 ‘환성을 올린다’ 는 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 내심에서 파악한 바를 소리로 지를 수는 있는데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그러한 기쁨, 이것이 바로 ’환성을 올리는” 것이다. 환성을 올리는 것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때로는 내지르는 소리로 마음의 느낌을 피력하는 것도 있고, 마음이 파악한 바를 표현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있다. 즉 사람들이 지상의 기쁨을 두고 저마다 각기 환성을 올린다면, 우리로서는 천상의 기쁨을 두고, 말로 형언할 길 없는 이 기쁨을 두고 마땅히 환성을 올려야 한다.

 

2절: “주님은 위대하신 하느님” 이 말은 고백을 드리며 그분 면전으로 마중 나가자는 의미이다. 고백이란 의미는 성경에 두 가지로 나온다. 즉 찬미하는 자의 고백과 통회하는 자의 고백이다. 찬미하는 자의 고백은 찬미 받으시는 분의 영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통회하는 자의 고백은 자백하는 사람의 참회에 해당한다. 하느님을 찬미해도 고백하는 것이요, 자기 죄를 규탄해도 고백하는 것이다. 인간의 혀로써 하는 것은 이보다 숭고한 일은 없다. 어느 시편에서 “서원”이라는 것도 다른 아닌 이것이다. “당신께 저의 서원을 채우리이다. 제 입술이 분별했던 바를.”(시편 65. 13-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고백의 찬미를 드린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계시하셨으니 아버지께 고백 하나이다”(루가 10, 21). 이 시편도 환호하는 자리인 만큼 여기서 말하는 고백은 아마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고백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다윗의 찬미의 노래>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여기서 참회하는 자들의 고백이 아니요 찬미하는 사람들의 고백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백을 드리며 그분 면전으로 나아가세란 의미는 그분이 오시리라, 하지만 먼저 “고백을 드리며 그분 면전으로 마중 나가세” 그분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기왕에 행한 것을 고백하여 스스로 성찰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는 것 이것 역시 더할 나위없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행위이다. 그러니 그대의 죄를 고백하라. 고백하는 사람의 죄들이 티무니 없이 크면 클수록 용서하는 이에게 돌아가는 찬미가 크다. 왜냐하면 우리 죄를 인정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칭송하는 까닭이다.

 

3-5절: 이 구절은 주님을 찬양할 만한 이유들이다.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노래와 함께 환성을 올린다는 것은 주님께서 위대하신 하느님, 모든 신들 위에 위대하신 임금이시기에 바로 이래서 하느님께 노래로 환성 올린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시기에(현대 번역에는 이 구절이 없음)”에 그분께 환성을 올린다. 땅 깊은 곳들도 그분의 손안에, 산봉우리도 그분 것이기에 이 모든 일을 두고 하느님께 환성을 올린다. “바다도 그분 것, 몸소 만드시었네, 마른 땅도, 그분 손이 빚으시었네” 그러니 그분께 환성을 올린다.

 

“모든 신들 위에 위대하신 분” 이것은 참 하느님과 사람들이 꾸며낸 잡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설혹 다른 신들이 있다고 손치더라도 우리에게도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오로도 “실상, 하늘에든 땅 위에든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있다 치면, 과연 신도 여럿이고 주님도 여럿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의 하느님이 계실 뿐이고 곧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며 우리도 그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분의 주님이 계실 뿐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1코린 8, 5-6). 다른 시편에서도 “백성들의 신들은 마귀들이어도, 주님께서 하늘을 만드셨으니.”(시편 95, 5) 성령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그대의 주 하느님이 모든 마귀들보다 더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하늘을 마드셨고 마귀들은 하늘에 거처하지 못한다. 마귀들은 하늘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하늘은 마귀들보다 까마득하게 높고, 그대의 하느님은 까마득하게 높으시니 하늘을 만드신 연고이다. 하늘보다 높으신 하느님이요, 천사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마귀가 되었으니 하느님은 백성들의 신들인 마귀들보다 얼마나 더 드높으신 분이 아닐 수 없다.

 

한때 백성들은 마귀 밑에 있었다. 마귀를 위하여 신전을 짓고 제단을 쌓았고 제사를 올렸다. 마귀에게 씌어 예언자 노릇도 하였다. 반면 하느님은 당신 성전을 두시고 사제를 두고 계시다. 백성들은 마귀에게 희생제사를 바쳤는데 하느님은 당신의 희생제사가 있으시다. 거짓신이 자신에게 바치라는 경배는 실상 하느님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 성전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 17)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우리의 영혼은 제단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선업이 희생제사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찬미할 때에 제단에 희생제사를 바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찬미로 제사를 드리는 이가 나를 공경하는 이로서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줄 길을 그는 취하리라.”(시편 49, 23). 우리에게 사제는 하늘에 계시다. 그러나 지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고 계신다.

 

“모든 신들 위에” 이것을 “모든 인간들 위에”로 바꾸어 보라. 왜냐하면 주님은 마귀위에 계시는 임금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성경이 증언이 있다. “하느님께서 신들의 모임에서 일어서시어 신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는도다/”(시편 81, 1) (인간들을) 신들이라고 하셨는데 본성으로 신이 아니라(신성에) 참여하여 신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은총으로(인간들을)신으로 만들기 바라셨다. (인간들은) 신으로 만드시니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 그 대신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들은 또 얼마나 (하찮은가)! (인간들을) 신으로 만드시는 하느님이 그만큼 위대하시다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저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참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디는 권능을 주셨으므로(요한 1, 12참조) 그들을 신들로 만드신다. 하느님은 창조되지 않으셨으므로 참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만들어졌으므로 참 신들은 아니지만 사람이 만든 것들보다는 더 좋은 존재들이다. 그 이유는 저들의 우상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까닭이다(시편 113, 4-5 참조). 그에 비해 우리 하느님은 우리 눈이 보게 만들어주셨다. 우리 눈이 보게 만들어주셨다고 해서 우리를 신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다. 짐승들한테도 그렇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 내면이 눈을 비추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신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노래로 환호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위대하시고 모든 신들 위에 위대하신 임금이시기에.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물리치시기 않으시기에”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시편이 가리키는 백성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글이 있다(로마 11,1 참조). 이 백성은 유대백성을 가리키는데, 예언자들이 나온 백성, 성조들이 나온 백성, 성전과 도유와 사제들이 있던 백성,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백성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백성을 올리브 나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성조들에게서 비롯하였다. 하지만 오만하게 너무 높이 자라다 보니 가지들이 말랐다고 한다. 그래서 열매맺지 못해 배어내고 말았다고, 그 자리에 겸손한 점을 보아서 야생 올리브나무를 접붙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야생 올리브가 오만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나와 근본과 반대로, 가꾸어진 좋은 올리브나무에 접목되었다면, 하물며 본래부터 거기에 붙어 있던 그들이야 얼마나 더 잘 제 올리브나무에 접목되겠는가?(로마 11, 24). 바로 이것이 히브리 백성에 대한 사도의 생각이다. 이 백성은 한때 수천 명이 회개하였고, 자기 재산을 팔았고, 재산을 판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을 정도였다(사도 4, 4. 34-35참조). 또한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의 상처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에 더욱 열성으로 의사를 찾았던 것이다. 저 모든 사람들이 이 백성에서 나왔고, 시편은 이 사람들을 두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바오로 사도만 해서 바로 이 백성이다(로마 11, 1-2). 만약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저버리셨다면 바오로가 사도가 될 수도 없었고, 그가 나온 백성에서 다른 사도도 나올 수 없었다. 단지 고집을 부린 유대인은 쭉정이가 되어 버렸다(마태 3, 12).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쭉정이이지만 거기서 이미 알곡이 빠져나왔고 지금은 곳간에 모아져 있다. 우리로서는 두 사물을 다 보고 또한 두 사물을 구별할 줄 알아야한다.

 

“땅 깊은 곳들도 그분 손안에” 이 시편의 의미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으심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누가 모퉁이 돌인지 알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이다. 두벽을 한데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모퉁이가 되지 못한다. 두 벽이 다른 쪽에서 구석으로 모인다. 그렇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한편은 할례받은 자들이 오고 다른 편에서는 할례받지 않는 자들이 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백성이 화해하였고 그분은 저 돌, “집 짓는 이들이 물리친 그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7, 22) 라고 기록된 대로 그 돌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돌이 되시었다면, 우리는 머리서 오는 사람들의 차이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상합하는 유사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거기서 문제가 풀리고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시지 않으신다. 한 쪽 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왔고, 다른 쪽 벽에서는 다른 벽에서는 ”땅의 경계들도 그분 손안에“ 다른 모든 백성들로 이루어진 벽이다. 모든 백성들이 모퉁잇을 향하여 모여든다. 거기서는 평화의 입맞춤이 이루어진다. 돌을 하나로 만드신 그분에게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느님 안에 화해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분께 환호성을 올리자는 것이다. ”땅의 경계도 그분 손안에, 산봉우리도 그분 것이기“ 때문이다.

 

5절: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유혹을 허락하신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혹시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유혹 때문에 고전하다 보면, 하느님의 저 엄청난 언약을 은총으로 받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악표들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그것들도 주님께로부터 일정한 분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다도 그분의 것” 이 세상은 하나의 바다이다. 그렇지만 바다도 하느님이 만드셨다. 바다의 파도도 하느님이 경계로 설정하신 해변을 넘어서까지 날뛰지는 못한다. 따라서 하느님이 정하신 분수를 넘는 그런 시련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은 쇄신 혹은 수리를 받는 중이다. 수리를 받는 중이라면 그대는 장인의 손에 놓여 있는 셈이다. 장인은 그대에게서 뭔가를 떼어내고 뭔가를 바로잡고 뭔가 깎아내고 뭔가 닦아 낸다. 당신이 고유한 연장을 써서 하신다. 그 연장이 이 속세의 악표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장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느 시련도 우리에게 힘에 부칠 정도로 닥치는 일은 없다. 하느님은 그대에게 이로우라고 이 시련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혼자 힘으로 쇄신도 수리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느님 손에 맡겨야 한다.

 

6절: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 어느 하나도 경멸하지 않으신다. 사리가 이러하다면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할 갖가지 명분을 지금까지 제시했다면 시편 첫머리로 생각을 돌리자. “들어와 경배 드리며 몸을 굽히세.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울음을 터뜨리세” 하느님이 이것저것을 다 창조하셨으니 환성을 올리자! 시편작가는 여러 가지를 상기시킨 다음 앞의 권유를 되폴이 한다. 이것은 하느님을 찬미할 명분을 일일이 상기시켰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삶이나 행동거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당신의 모상대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창조주이신 우리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한다.

 

7절: 우리가 주님의 양떼이며 주님의 백성임을 상기시킨다. “그분께서는 우리 주 하느님” 그러기에 안심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고 그분 앞에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길의 양떼이다. 시편작가가 낱말의 순서를 얼마나 멋지게 바꾸어놓았는지 보라. 양떼0이면서도 하느님의 백성임을 알아듣게 만들어 놓았다. “그분의 목장의 양떼, 그분 손길의 백성”이라고 하지 않았다. 양떼를 목장에 결부시키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만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분 목장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백성은 곧 양떼가 된다. 그 백성 자체가 곧 양떼이다. 하지만 양떼라면 우리가 만들지 않고 사들인 양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는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몸을 굽히세”라고 했고 여기서는 “그분 손길의 양떼”라고 한다. 사람이라면 아무도 양들을 만들지 못하며 다만 살 수 있고 선사할 수 있고 찾아낼 수 있고 양떼로 모아들일 수 있고 심지어 훔칠 수 있다. 그렇지만 양들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만드셨고 그래서 시편작가는 “우리는 그분의 목장의 백성, 그분 손길의 양떼”라고 한다. 주님이 당신 은총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었으므로 우리는 그렇게 되었다.

양떼에 관해서 <아가>에서도 칭찬하는 데 양떼를 완전한 무리로, 그 약혼녀의 새하얀 이로, 즉 당신 교회의 새하얀 이로 형용하기도 한다. 교회의 “이”(치아)라면 교회가 그들을 통해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한 양떼가 털을 깎는 이유는 세속의 짐을 벗어버리기 위함이다. 또한 목욕탕으로 올라온다는 의미는 정화된 그곳으로부터 올라온다는 뜻이다. 이것은 두 쌍둥이 즉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기도 하다.

 

8절: “아 오늘 너희가 그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말을 건네신다. 왜냐하면 당신이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셨기에 말을 건네신다. 그분은 모퉁이서 두 벽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언젠가 모세의 입으로 그분 목소리를 들었지만 마음을 모질게 먹고 듣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모질게 먹었을 때 주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9절: 탈출기의 행적은 우리에게 내리는 교훈이다. 어째서 “너희의 마음을 완고히 하지 말라” 하신 이유는 하느님 백성이 한 일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시험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징벌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있으며, 능숙한 말을 다루듯이 그분이 율법의 재갈과 계명의 재갈을 물려서 광야에 끌고 나가셨음을 우리가 기억한다. 이러한 조상을 우리가 본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 백성은 내 업적을 보고도 나를 시험하고 사십년을 두고도 나를 시험하였고 나를 화나게 했다. 모세의 손으로 그들 앞에서 기적을 행해 보였건만 가면 갈수록 마음을 완고히 하였다(탈출 16, 13-35 참조).

 

10절: 40이란 숫자의 의미는 “언제나”라고 할 만한 세월이고 시간을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세대를 통째로 사십이라 할 때 이것은 완결된 숫자이다. 주님도 사십일 광야에서 단식하셨고, 부활하신 후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시련 후 교회에 보여주신 위로이다. 그러니 그분의 몸도, 즉 교회도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11절: 하느님의 새 백성에 대한 이야기다. 하느님의 자비가 못마땅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버티던 사람들은 배척을 당하였다. “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로다. 그들은 나의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내 분노증에 맹세했노라. 이들은 내 안식처에 들지 못하리라” 하느님의 분노의 맹세는 대단하다. 맹세는 다짐을 뜻한다. 언약하신바가 참이듯이 위협하시는 바도 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명을 우리가 준수한다면, 안식, 행복, 영원, 불사불멸이 확실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대신 그분의 계명을 멸시한다면, 멸망, 영원한 불의 형벌, 악마와 더불어 단죄 받으리라는 점도 확실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신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불충실 때문에 잘려나갔지만, 우리는 믿음 때문에 그리고 겸손함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로마 11, 19-20참조). 그러니 주님의 안식처에 들어가자. 벌써 들어간 사람들, 선택된 사람들, 완고한 마음으로 버티지도 않았던 사람들은 이들은 바로 주님이 당신 백성을 배척하지 않으시리라 라는 말씀이 참이었기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 참고문헌: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 강론.해설, C.보르고뇨, 성염옮김,

                  바오로딸, 1995. pp.129-151.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 234.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p.559-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