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90(89): 지혜의 시편과 하느님께 바치는 청원

마리아 아나빔 2012. 5. 27. 09:17

 

 

 

                                                                      시편90(89): 지혜의 시편과 하느님께 바치는 청원

 

들어가면서

 

시편 90편은 깊은 사상과 표현 및 이미지의 힘 때문에, 시편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이다. 이 시편의 두 부분, 1-6절과 7-12절은 오히려 교훈적인 지혜의 시편이라고 하는 특징을 띠고 있다. 셋째 부분은 국가적 청원의 기도(공동탄원)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도우심과 보호를 간청하고 있다(12-17절).

시편작가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영원성을 기려 찬양하며, 그것은 대대손손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과 비겨보면 인생의 덧없음, 짧음, 제한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한없는 유인데 비하여 사람은 항상 허무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하느님의 명령이 있다면 사람은 곧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1-5). 이와 같은 덧없음과 비참의 이유는, 하느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우리의 죄에서 찾아야 한다((7-11절). 이러한 관조로부터 청원의 기도가 태어난다. 덧없는 것은 한없는 분께로 피난한다. 죽음 쪽으로 가는 자는 생명의 샘에 의지한다. 비참한 자는 동정과 자비를 청한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기쁨과 위로를 구한다. 노동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을 청한다. 이 청원은 집단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공동탄원시편의 형식을 가진다. 당신의 종인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위로와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시편 90편은 고행할 때 바치는 교회의 기도다. 이 시편은 인생의 덧없음과 죄가 가져다 주는 해로운 결과에 대한 매우 뛰어난 묵상이며,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기도와 속죄에 맞추는 것이다. 사람에게 존재를 주셨으나 영원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허무에 기울고 있는 인생에, 계속적 존재를 줄 수 있겠는가? 죄 깊은 사람을 누가 보호하고 지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고”(II 베드로 3: 8-9). 강생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덧없음을 입으신 하느님의 전능뿐이다.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우리의 피난처(1절)”라고 교회는 기도한다.

교회는 죄를 지은 우리 안에 다시 하느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간청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사를 통하여 오신다. 성사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하느님께 돌아오심으로써 교회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자녀의 특징은 은혜, 자비, 기쁨, 주님의 광채와 온유를 청한다(13-17)>. 이 세상에서 보내는 하루가 시작될 때 교회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의 광채를 나타내시고, 우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 하고 청원한다.

 

하느님의 한없는 위대하심과 그 차고 넘치는 생명에 대한, 우리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확인은,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도, 하느님과 우리의 진실된 관계를 정하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1-6절).

베드로는 이사야 40장 6절 이하를 인용하고 또 이 시편의 말((5-6절)을 암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을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1 베드 1, 24). 우리 시대에 세계에 퍼지는 모순과 부조화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현대 세계가 고민하는 불균형은 인간 마음속에 뿌리박힌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인간은 한편으로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섣 다른 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음 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하지 않은 수도 드물지 않다. 고로 자신 안에 불열을 겪고 있다. 여기서 사회의 많은 불화가 생겨난다. 그렇지만 세계의 발전을 직시하며, 인간은 무엇인가? 위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지상 생활이 끝나면 무엇이 따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의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을 통하여 사람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음을 교회는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천하에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음을 믿는다. 동시에 교회는 인류역사 전체의 열쇠의 중심과 목적이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발견됨을 믿는다. 교회는 또한 이 모든 변천 속에서도 불변의 것이 많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그 불변의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혀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존재하실 것을 믿는다(사목헌장 10).

 

“하느님이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사실은 우리 경험과 일치한다. 과연 인간은 제 마음을 살펴 볼 때, 자신이 악에 기울어져 있고 착하신 창조주로부터 올 수 없는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가끔 하느님을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궁극 목적으로의 당연한 질서마저 파괴하고, 자신과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도 깨뜨렸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없음을 발견하고, 각기 어떤 사슬에 묶인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에게 힘을 주시려고 주께서 친히 오시어 인간을 내적으로 재생시키고 인간의 죄의 노예로 삼고 있던 ‘이 세상 두목’(요한 12, 31)을 밖으로 쫓아내시었다. 그런데 죄는 인간을 작게 만들고, 인간의 완성을 방해한다(사목헌장 13).

 

위에서 말한 진리를 의식하고 거기에서 바른 결론을 끌어내는 것, 그것이 참된 지혜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오만과 자립성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춤으로써, 우리 존재는 채워지고, 안전하게 된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의 덧없음을 인정하는 것 외에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우리를 하느님께서 받은 선물에 어울리지 않게 하는 죄,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인의 상태를 인정한다는 것이다.(7-11). 이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그분의 길을 평탄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영원히 남을 주님의 말씀은 그 강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덧없는 나약함에 들어오시고, 우리의 생활의 비참함을 영원히 채워 주신다. 우리의 나약함에 불굴의 힘을 주시고,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고, 벌써 시들어가던 풀을 살리고 강화해 주신다(6). 말씀은 죄의 고생과 덧없음을 경험한 우리의 죄 깊은 죽음과의 벌레를 죽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진노의 몸을 내놓으시고, 그리고 그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우리 손이 하는 일이 잘 되게 하시고, 세계 재건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사업에 우리를 당신의 협력자로 삼으신다(13-17).

 

  Text 안에서

 

시편 90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가. 하느님의 이름: 시편 90편의 바탕

나. 영원한 하느님과 무상한 인간(2-6절)

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분노(7-12절)

라. 은총- 새로운 삶의 근거와 의미(13-17절) 위의 내용별로 살펴본다.

 

가. 하느님의 이름: 시편 90편의 바탕

 

시편 90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외형적인 성격에 비추어서 하느님의 호칭은 드물게 모두 네 번에 걸쳐서 나타난다.

시편 90편은 하느님의 호칭이 드물게 나타나지만,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쩨, 하느님이 명칭이 드물기는 하나 이른바 요지에서만 불린다는 사실이다(1절: 아도나이/ 2절: 엘/ 13절: 야훼/ 17절: 아도나이 엘로헤투(엘로헤누=엘로힘+ 우리의). 둘째,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주요 명칭이 거의 모두(아도나이, 엘, 야훼, 엘로힘) 나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도나이”라는 하느님의 명칭이다. 이 명칭은 두 번 나오는데 시편의 시작과 끝에 나온다. ‘아도나이’는 ‘주인’을 뜻하는 ‘아돈’에 ‘나의/저의’를 뜻하는 접미사가 붙어서 이루어진 단어이다. 그래서 ‘나의 주님’ 또는 ‘저의 주인님’으로서 하느님을 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고정된 명칭이 되면서 뜻이 약화되어 일반적으로 그냥 ‘주님’을 뜻하게 된다. 그래서 이 ‘아도나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느님을 직접 부를 때에도 쓰이고(1절) 또 일반 명칭으로도 쓰인다(17절). 시편 90편은 처음과 끝이 하느님을 주인, 주님으로 부른다. 부른다는 것은 고백함을 의미한다. 곧 하느님께서 주인, 주님이시다. 그들 운명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이 하느님의 호칭에 상응하는 인간의 호칭은 ‘종’으로서, 이는 13절에 나온다. 종의 모든 것은 주인에 의해 결정된다. 종의 운명, 삶과 죽음까지도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 주인도 역시 종에 대해서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일방적 섬김이나 수탈의 관계가 아니다. 주종관계는 상호관계이다. 이 관계는 당사자들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짓는다. 이 규정은 반드시 성문화될 필요는 없다. 주종관계에서 주인의 종에 대한 의무는 종의 삶과 생명을 보호함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당신은 저의 주님 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이는 종이 자신의 신분을 고백함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주인 되심을 상기시켜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시편 90의 2-16절까지 하느님께 대해서 무엇이 말해지든 지간에, 이는 바로 주님이라는 하느님의 명칭이 내포하는 의미 안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명칭이 90편의 배경과 바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주종관계에서 주인의 종에 대한 의무는 종의 삶과 생명을 보호함이다. 라고 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의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안식처”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본디 들짐승들의 은신처, 은닉처를 말한다. 그래서 이 말에는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하다, 몸을 안전하게 숨기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잇다. 이런 용어는 본디 사냥, 또는 전쟁에서 따온 은유와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절은 세세대대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사냥꾼에 쫓기는 짐승이 몸을 안전하게 피하는 은신처, 또는 적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하는 은신처와 같은 피신처로 되어 오셨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피신처라 함은 수동적으로 피신할 수 있는 장소일 뿐 아니라 승리에로 나아가는 원동력도 되신다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1절은 하느님께서 대대로 기도자들의 주님, 도 피난처가 되어오셨음을 1절은 고백한다. 이 고백은 13절 이하에 나오는 간청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고백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구실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절은 시편 끝부분에 나오는 간청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나. 영원한 하느님과 무상한 인간(2-6절)

 

시편 90편의 저자의 관심사는 기도자 자신들의 처지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하느님이라는 배경 밑에서 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덧없음을 하느님의 영원함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께선 하느님이시니이다.”(2절 3행)이라는 말은 단순히 존재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하느님으로서 역사하심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의 정점 중 하나가 인간에게 그 끝을 제정하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신께서는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시나이다: 인간의 아들들아 돌아가라”(3절). ‘인간의 종말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 이 말은 인간의 시작 역시 그분의 손에 달려 있음을 뜻한다. 이는 더 나아가서, 시작과 끝, 인가의 전역사가 하느님의 결정권 밑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사람”은 나약함. 덧없음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 곧 ‘아담의 아들“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로서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하는 인간을 말한다(15절/ 시편8).

 

이렇게 2절과 3절에 의해서 시간적으로 영원하신 하느님과 유한한 인간이 대비된다. 이 하느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한시성이 이제 4절과 6절까지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영원한 하느님이시기에 인간에게는 길고도 긴 천년이라는 세월이 그분께는 항상 벌써 지나가버렸다고 생각되는 어제 같고, 잠자는 사람에게 언제 지나가버렸는지도 모르는 한 토막 밤과도 같다는 말이다. 5절 번역에는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내시면” 이라는 본문 자체의 뜻이 분명치 않다. 어쨌든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결정권의 행사를 말한다 할 수 있다. “그들은 아침 잠” 에 해당하는 본문 자체도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인생 일장춘몽’식의 말은 아니다. 정상적인 인생을 한바탕의 꿈으로 비유하는 것은 구약에서 그리 흔치 않다: 예를 들면 시편 73, 20; 욥기 20,8. 또한 두 군데 다 악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도 정상적인 인생의 허무성을 말하는 곳이 여럿 있는데 아마도 그 대표적인 예가 상당히 염세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시편 39:6-7절).

 

시편 90편 5절 3행에서 6절 사이에 시편작가는 인생을 풀에 비유한다.“아침에 돋아났다가 사라져 갑니다.” 아침에 돋아나서 낮 동안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사라져버리는 풀은 팔레스티나 지방과 같이 메마른 토양에서 자라는 풀을 말한다. 이 고장에서 건기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그래도 밤사이에 이슬이 내려 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풀 씨앗들이 이 물기를 받아 아침에 파랗게 돋아나 올 수가 있다. 그러나 낮 동안에 대기가 바짝 마르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쪼이며, 특히 사막 쪽에서 동풍 또는 동남풍이 불어오면, 결국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말라 없어져버리기도 한다.

 

하느님과 인간, 영원한 하느님과 유한한 인간, 천년도 지나간 어제같이 여겨지는 하느님과 하루살이 풀과 같은 인간,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 두 존재가 마치 서로 비교하듯 마주 서 있다. 인간은 본질상 결코 하느님과 비교될 수 없는 하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서야 한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본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근본과 목표를 알기 위해선 결국 자신의 창조주 앞에 서야한다. 이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자신을 앎에서 겸손이 나온다. 자신을 진실되게 하느님 앞에 세울 때 인간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역시 교만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일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 앞에 서기를 원하신다면,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없이 낮아지도록 하시려고, 인간으로 하여금 한없이 비참함을 느끼게 하시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 앞에 서게 하심은 인간을 내리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들어올리시려고, 인간을 당신께로 올리시려는 의도에서다. 하느님께선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로 여기시지 않고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 대화의 상대자로 만드셨다.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계명 중의 하나가 “너희의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레위 11, 44; 20, 7. 26; 21, 8)다. 또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계명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 34)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신성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 내지는 실천하라는 계명들이다. 이로써 인간에게 다짜고짜 신적인 일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편과 연관짓는 다면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인간이 먼저 자신과 자신의 한계를 알고 나서, 그 한계를 밑으로 내림이 아니라 위로, 곧 하느님을 향하여 올리는 것이다. 올리는 힘은 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적인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적인 도움이다. 이로써 하루살이 풀 같은 인간은 덧없이 사라지지 않게 된다. 결국에 가서는 신적인 세계로 끌어올려진다. 이것이 인생 일장춘몽, 또는 인생무상 식의 사상과 다른 점이다. 인간이 자신을 앎, 자기의 한계와 자신이 얼마나 덧없는 존재임을 깨달음이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앎이다. 이를 모를 때 인간은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할 때 인간은 또한 교만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것, 그것은 제일단계일 뿐이다. 거기서 주저 않아서는 안 된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 어디를 향하기 전에 우리 시편은 더욱더 파고들어가서 인생무상의 이유를 규명해낸다.

 

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분노(7-12절)

 

앞부분에서 시편작가가 인간의 현실의 인식에 도달했다면, 그는 이제 7-12절에서는 그의 사고를 끝까지 이끌어가서 이 현실의 원인을 규명한다. 그는 이 작업 역시 계속 하느님과의 관계 밑에서 이루어간다. 앞부분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존재로서의 대립으로 인식이었다. 하느님과 인간이 그 존재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다름을 시편작가는 인식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이 현실의 원인으로서 의지체로서의 하느님과 인간의 대립관계가 인식된다. 이 대립관계는 결국 인간의 죄악과 하느님의 분노의 관계가 된다. 7-12절 사이에 우선 하느님의 분노에 대해서 다섯 번 말해진다.

EX) 7절: 진노-분노/ 9절: 노여움으로/ 11절: 진노의 위력- 노여워하심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서 기도자들의 죄가 두 번 나온다: 저희의 잘못 - 저희의 감취진 죄(8절). 이로써 하나의 삼중 관계가 성립된다: 인간의 죄- 하느님의 분노 - 인생의 현실.

 

인간이 하느님을 바라볼 때 인간은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진정,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와 같고 야경의 한태와도 같나이다”(4절). 그러나 인간은 중립적인 관객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가 없다. 하느님께 대한 문제는 결국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 곧 질문하는 인간,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은 스스로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현존에 접할 때 그는 이제 경탄만이 아니라 경악하게 되는 것이다. 덧 없는 인생을 바라볼 때 그 배후엔 인간의 죄악이 뿌리 깊이 박혀있음을 시편작가는 간과할 수 없다. 제아무리 숨겨진, 열 길 물 속보다도 깊다는 인간의 가슴 깊이 감춰진 죄악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대낮의 광채에로 여지없이 끌려 나옴을 그는 느낀다. 죄는 의지의 산물이다. 이런 죄스런 인간 의지에 반대되는 하느님의 의지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분노의 의지다(누가 당신 진노의 위력을 아오리이까? 11절).

 

그러면서도 시편작가는 자신 역시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분노의 깊은 관계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 이면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거의 깨닫지 못하고 이에 대해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는 인간 현실이 있다. 사실 시편작가는 이러한 사회 현실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무상, 인간의 죄, 하느님의 심판의 최종적 관계를 궁극적으로, 감명 깊게 밝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의 깊은 관계를 시편작가와 같이 어느 정도 깨달을 때 인간은 인생에 대해서 결국 비관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10절: 저희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중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가나이다.).

 

여기서 우선 재미있는 사실은, 2천 수백 년 전이나 의학이 고도로 발달되었다는 21세기의 문턱에서나, 여전히 “저희 햇수는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이라는 사실이다. 어쨌든 10절의 말로써 시편작가는 인간현실과 그 현실의 원인에 대한 인식의 가장 밑바탕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여기에서 정지한다면, 우리 시편은 참담한 비관론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비관론은 하느님 앞에서 죄악이다. 비관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위를 보지 않고 자신에게만 희망을 둠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바라지 않고 인간에게서 구원을 바람이다. 여기에서 교만이 나올 수 있으며, 교만은 결국에 가선 비관론과 관계 있는 절망과 통한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아마도 교만과 절망일 것이다.

 

시편 90편의 작가는 10절의 말과 함께 주저앉지 않고 이제 위를 향하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10절의 말은 비관론의 표현도, 절망의 토로도 아니다. 결국은 철저한 자기 부정이다. 여기에서 부정은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하느님 앞에 드러내놓는 것이다. 볼품없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에 의한 삶을 부정하고, 희망의 근거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이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신을,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이 손에 내맡기는 신뢰다. 이처럼 위로 향하는 믿음의 방향 전환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아는 새로운 인식이다. 이 인식은 인간이 스스로 도달하는 지적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셔야 하는 슬기다. 곧 삶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새로운 의미로 나아가기 위해선 하느님으로부터 지혜가 주어져야 한다. 자신의 끝과 한계를 앎, 이를 얻을 때 자신이 시작과 끝을 향한 과정도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자신의 끝과 한계를 안다는 것, 우리는 인간 공동의 역사 속에서, 또 개인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끝과 한계를 옳게 깨닫지 못함으로써 자신과 남에게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을 자주 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앎이 과연 어려운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결국 철저한 회개, 자신을 철저히 비움,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희의 날수 셀 줄 알기를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이 하느님의 지혜와 함께 이제 우리 시편은 새로운 삶에로 향한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하느님의 분노 또는 진노다. 하느님께서 분노 하신다는 것이 소위 의인법적 표현 양식이라는 것은 대개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곧 하느님께서 후회하시고, 화를 내시고 등등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기 쉽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이의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일 수 없다. 구약성경이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서 칠층 하늘에 좌정하시어 세상을 좌시하고만 계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신다. 그러나 초월 속에 이들과는 무관하게 계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시간의 주인으로서, 세상과 역사의 주인으로서 시간 안으로, 역사 안으로 작용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의지를 지니신 분으로서 역사 속으로 역사하시는 하느님이신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인간 편에서 가장 강하게 느끼는 방식 중의 하나가 바로 하느님의 분노 또는 진노이다.

 

라. 은총- 새로운 삶의 근거와 의미(13-17절)

 

시편 90편의 외형적 특성은 간청이 마지막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허부의 나락에서 올라와 허무의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하느님의 도우심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결국 새로운 삶의 근거요 그 의미가 되는 것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13절)라는 간청은 하느님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앞에서 말해진 모든 상황들이, 인생의 덧없음이 하느님의 부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분노, 하느님의 심판까지도 결국 하느님의 부재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느끼는 부재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현존하신다. 하느님께서 돌아오신다는 사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는 데에 있다. 곧 하느님께선 구원하시는 분,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기쁨을 가져다 준다14-15절). 그래서 인간을 위하는 것이, 인간에게 구원과 기쁨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본디 행위라 할 수 있다(16절). 당신 종들에게 구원을 베풂이 원래 하는미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이를 당신의 영광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행위를 드러내시라는 간청이다.

 

여기에서, 11절까지 서술한 현실과 13절부터 간청된 현실을 비교할 때 커다란 괴리가 있음을 본다. 11절까지는 그야말로 인생무상을 말하는데, 13절부터는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상호연관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건널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괴리의 극복을 새로운 삶의 근거인 하느님의 은총이 이루어낸다. 인간은 또한 이 인간을 위하시는 존재인 하느님의 도우심을 나날이 필요로 한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배불리소서, 저희의 모든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이다.”(14절)

 

예수의 성탄과 부활이 밤에 이루어진 것은 구세사적으로 예외적인 사건이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침이 은총의 때로 여겨진다. 그것은 어둠이 물러가고 빛과 태양이 올라오고, 여기에 맞추어 성전에서 아침기도와 제사가 올려지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은총의 시간이 새로운 시작이며 새로운 아침이다.

 

15절의 “저희를 내리누르신 그 날수만큼, 저희가 불행을 겪었던 그 햇수만큼 저희를 기쁘게 하소서.”는 시편작가,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느님께 대해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정확하게 삼 년하고도 열흘 동안 불행했기 때문에, 이제 하느님께서 앞으로 정확하게 삼 년하고 열흘 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십사는 요구가 아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인간에게 도대체 있지도 않지만, 또한 이런 식의 수학적인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현실 안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의 대립관계에 있었다: 분노하시는 하느님과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 이러한 현실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하나의 적으로까지 느낄 수도 있다(욥기 참조)> 그러나 이제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도 불구한 하느님의 은총의 현실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더 이상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은총 속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룬다. 이 일치는 인간에게 생명과 기쁨을 부여한다. 이 일치는 덧없는 것에 지속성을, 비참함에 영광을, 무의미함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일치는 생명의 일치다. 생명의 표징은 기쁨이다. 그래서 이 일치는 결국 기쁨의 일치가 되는 것이다(17절).

 

하느님의 어지심과 은총 아래서 인간이 하는 일 역시 헛되지 않고 지속성과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것, 바로 이를 기원하면서 시편은 하느님께 마지막 청을 드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와같은 내용을 담은 다른 시편, 곧 시편 127을 기억하게 된다.(주님께서 지을 지어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 헛되이 수고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ㅕ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 헛되이 망을 보리라. 너희에게 헛되도다. 일찍 일어남도, 늦게 자리에 듦도, 고난의 빵을 먹음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에게는 잘 때에도 그 만큼을 주시는도다(1-2절).

 

이로써 시편 90의 기도자들은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간청을 끝맺는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의 간청을 들어주실 것인지? 아니면 허무와 고통의 나락 속에서 하루살이 풀 같은 생존을 계속할 것인지는 할 수 없으나 그들은 어쨌든 신뢰 속에서 기도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 신뢰의 근거는 하느님 자신이 보여주신 담보와 보증에 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1절의 말씀이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뢰와 함께 기도드린다. 신뢰심이 있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 가능하다. 이 신뢰는 기도자 자신이 자기 속에서 만들어낸 확신이 아니다. 아니면 어떤 이론적인, 예컨대 철학적 사고 끝에 규명해낸 하느님의 신성에 대한 신뢰도 아니다. 이 신뢰는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 것에 대한 신뢰이다. 역사 속에서 역사해 오심으로써 당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믿어도 되는 분으로, 신뢰 할 수 있는 부능로 계시해오셨다. 과거에도 늘 그러하셨기 때문에, 영원하시고 인간과는 달리 변함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러하시리라는 확신이 나온다. 그래서 시편 90은 이를 기도의 대전제와 같이 맨 앞에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 참고문헌: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 136-154.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24-225.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 532--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