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6(95): 하느님의 통치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성궤의 이동을 기념하고, 거의 모두 역대 상 16장 23-33절에 나와 있다. 그러나 이 시편이 그 시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다. 아 시편은 성전에서 거행한 전례행사을 위하여 유배의 시대에 지은 것 같으나, 이사야 예언서의 제2부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하느님의 보편적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편은 메시아적, 종말론이기도 하다. 실제로 시편 끝에 하느님의 보편적 오심이 가까움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만민을 향하여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하라고 부른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업적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노래가 새롭다고 하는 것은 특히 하느님의 왕권의 그 보편적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과 관계가 된다. 또한 작가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었던 전례의 예배를 만민이 그 성전에서 함께 바치자고 초대한다. 새로운 왕의 즉위가 이루어지는 날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를 받고 계셨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시편 96편은 이러한 막다른 상황에서 마주하게 된 새로움을 노래한다. 시편 96-99편은 하나의 노래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데, 96편은 그 서두 역할을 한다. 하나의 백성에만 제한되어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 전망에서, 이 세상 만민, 더욱 전 우주에까지 미치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 전망으로 확장된다. 이 새로운 나라의 규모는 참으로 우주적이다. 하느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뽑힌 백성 사이에서, 그의 대표로서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그야말로 지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한 왕이라고 하는데서, 신적인 왕이 주장된다. 이 왕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왕위에 군림하시고, 그분 위엄과 영광은 천상적이다. 이러한 견해는 이스라엘 나라의 지금까지의 경험을 요약하시는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 옛 계시는 한없는 넓이의 지평선에 환히 열리었다.
교회는 전례에서 있어서 이 시편을 말씀의 강생의 예언으로서 또 우상숭배에서 참 신앙으로 만민을 부르신다는 뜻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강생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고, 또 주님 안에 오직 한분이신 참 하느님을 인정하라고 이방인을 부르기 위하여 혹은 생활을 회개하고, 성체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하라는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쓴다.
새로운 노래난 마음의 일치와 애덕의 노래이기도 하다. 곧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맺어 주는 그리스도 나라의 노래인 것이다. 이 새로운 노래로 말미암아 천사들과 함께 동반자가 된다. 천사들도 그리스도의 성성을 인정하고, 그리고 그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위엄을 찬양하고 예배한다. 이 새로운 노래에는 또 창조 세계의 소리도 들려온다. 사실 생명이 없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인류의 소리와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찬미 소리를 올린다고 하는 가능성을 받았다. 물질의 세계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새롭게 되어, 그 나라에 참여한다(묵시 21,1).
시편의 배경은 이 세상을 정의를 가지고 심판하시고, 백성들을 진리를 가지고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결정적 재림을 기다린다. 또한 교회는 전례에서 무염시태의 축일에 동정 마리아를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합친다.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위엄과 아름다움, 그분의 보편적 왕권에 참여하신다. 마리아는 세계의 영광스러운 여왕이며, 당신의 아들 왕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그 관을 받았던 것이다.
끝으로 이 시편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의해 새로워진 인간으로서 우리들의 노래이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왕권과 통치’를 경축하는 내용, 즉‘ 주님께서 다스리신다’ 라는 주제를 선언하고 있는 일종의 ‘군왕시편’이다. 주님의 통치를 통해 무언이 진정한 새로움인지, 그리고 우리가 모색해야 할 바로 쇄신은 무엇이며 그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전해주고 있다. 능력 깊으신 자비의 왕의 종이라고 하는 기쁨을 찬미 안에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행복에서 우러나는 노래이다. 또한 이 시편은 시편 98편과 이어지면서 선교적 의미가 깊은 기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시기를”이라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 소망이 이 시편에 나타나 있다. 이 기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퍼지도록 성령과 협력하고, 또 그 나라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뿌리내리기를 희망한다.
Text 연구에서
찬양시편으로 간주되는 96편은 동시에 군왕시편이다. 전형적인 찬양시의 패턴을 드러내 주기 때문인데 일반적으로 찬양시편은 우선 ‘찬양으로의 초대’가 제시되고 ‘찬양이유’가 등장한다. 96편의 경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6절과 7-13절로 나누어지고 다시, 구체적으로 1-3절(찬양으로의 초대)/ 7-9절(찬양으로의 초대)에서는 찬양으로의 초대가, 4-6절(찬양의 이유: 하느님의 영광)/10절-13절(찬양의 이유: 자연의 반응과 이유, 특히 13절)에서는 찬양의 이유가 서술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시편 96편은 전체적으로 찬미를 주로 하는 찬양가이다. 구체적으로는 임금이신 야훼님을 노래하는 하느님의 통치시편이다.
이 시편에는 세 종류의 동사가 있다. 첫 번째, 직접적인 ‘찬양’의 동사인 ‘노래하다’와 ‘드리다’로 각각 “주님께 노래하라”와 “주님께 드려라”가 세 번 되풀이 된다. 그리고 2절 1행에서 부수적으로 뒤따라오는 ‘찬미하다’라는 동사이다. 두 번째, 8절 2행-9절에 나오는 ‘공경’의 동사며, 세 번째, 2절 2행, 3절과 10절에 나타나는 ‘공포’의 동사다. 그 다음 1-3절늬 ‘공경’의 동사가 네 번 나온다.
1-3절: 찬양의 초대
시편 96편은 하느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는 초대로 시작된다. 정확한 동의적 병행법을통해 초대하며, 그 대상을 “온 세상”으로 명시한다. 이 노래의 구체적 내용은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 ‘그분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 ‘그분의 영광과 기적을 찬미하는 것(2-3절)’, 이들은 병행법으로 처리한 것은 그분의 이름, 그분의 영광, 그분의 구원, 그분의 기적이 그다지 크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주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은 7-8절에서도 다시금 반복되어 등장하는데, 민수기 16장 19절, 시편 102편 16절, 이사야 40장 5절, 60장 1-2절에서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현시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이름’의 다른 표현이며 동시에 ‘그분의 구원’자체인 것이다. 결국 ‘새로운 노래’란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을 본질적 내용으로 삼고 있다.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지속적인 그러나 항상 새로운 구원 업적에 대한 인간의 지속적이면서도 동시에 항상 새로운 응답을 말한다. 곧 지속적인 구원 역사 속에 또 하나의 새로운 구원을 베푸심에 대하여 새로운 말과 노래와 새로운 행동으로 감사드리고 찬미함을 뜻한다.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다’라는 표현은 1-2절 연이서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은 세상 전체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로 가득차기를 바라는 시편작가의 원의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2절 1절과 같은 권유로 시작하지만, 세 가지 새로운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째, 주님의 이름이다. 주님의 이름은 하느님 구원 업적의 주체가 된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찬미를 받아야 한다. 아울러 “주님”과 “그 이름”의 차이에 유념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은 이를테면 인간을 향한 주님이다. 주님 자체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은 주님의 이름을 통해서 비로소 그분께 다가갈 수 있다. 둘째, 선포다. 우리는 어떤 기쁜 일을 당했을 때,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이 기쁜 일을 알려 되새기고 나누기 마련이다. 물론 인간사에서는 이런 것도 적당하고 현명하게 예수께서도 명확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명하셨던 것처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직접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내사 설사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은혜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공동찬미를 통해서 내 자신도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또 이를 통해서 구원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 감사송 중 하나에도 “우리의 찬미가 주님께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구원에 유익이 되나이다.”라고 말한다. 셋째, “나날이”라는 표현으로서, 이는 말 그대로 계속되는 찬미의 시간이다. 직역하자면 ‘한탄에서 다른 날에’가 된다. 찬미는 이렇게 계속되면서 결국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찬양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기적을 민족들과 백성들 사이에 선포하는 것이다. ‘기적’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단순히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칙이나 자연과학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기적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구원 해위였다. 곧 하느님이 역사하심을 통하여 그분의 구원을 경험했을 때, 이 구원을 경이로운 일, 곧 기적이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 그 행위의 표징, 하느님의 역사하심 자체가 기적으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3절은 구약성경에서의 복음의 선포를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은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그 구원 기적들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온 세상”이 불림으로써 시편 96편은 찬미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그 시작부터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우주적친 찬미, 모든 자연을 포함한 전 우주가 하느님을 찬양함을 말하고 있다. 찬양하는 공동체는 결국 모든 피조물들을 총괄하는 가장 큰 의미의 공동체다.
4-6절: 찬미의 근거
히브리어 원문 안에서는 4-5절을 살펴보면 히브리어 접속사‘키(ki)’를 두 번이나 사용함으로써 찬양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분이야말로 가장 위대하시고 높으신 분이시며, 모든 신들보다 경외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절). 특별히 5절의 두 번째 ‘키’는 다른 신들에 대한 주 하느님의 압도적인 우월성을 부각시킨다. 즉 그것들은 ‘헛것’에 불과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생명력에 중심에 계시는 창조주라는 것이고(5절), 이러한 이유로 6절은 엄위와 존귀, 권능과 영화가 모두 그분께 있음을 선포한다.
하느님께 우주적 찬양의 노래가 올려지고, 그 영광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하는 당위성은 하느님께 그렇게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으로서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느님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찬미이고,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모든 신들 위에 우대하신 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선 이 표현은 다신론적 현상이 엿보인다. 곧 대부분의 다른 민족들이 여러 신들 또는 많은 신들을 공경했던 현상을 구약성결이 처음부터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어있다. 둘째, 구약성경이 이런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신들 위에 존재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주님께 대응할 수 있는, 비교될 수 있는 신적인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셋째, 신의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특성은 인간 쪽에서 볼 때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가 자기와는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하여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이라 하겠다. 신은 인간에게 전혀 다른, 철저하게 다른 존재 앞에서 불완전한 인간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옛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면 죽는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이사 6장). 바오로도 인간이 완전하게 될 때, 인간은 하느님을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주님께서는 모든 신들 위에 두려우신 분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어떠한 신보다도 신적이라는 말이며, 참다운 신은 주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야훼만이 유일한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을 4절에 이어 5절에 더욱 선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곧 야훼께선 만물의 창조주이심에 반하여 다른 민족들의 신들은 “헛것”이라는 것이다. “신들”은 히브리말로 ‘앨로힘’이고 “헛것”은 ‘엘릴림’이다. 유사한 발음을 지닌 두 단어를 대비시킴으로써, ‘신들이나 헛것이나 둘 다 대동소이, 곧 신들은 다 헛것들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시편 96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지칭할 때 열한 번 다 예외 없이 ‘야훼(주님’을 쓴다는 점에서도 이 표현법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하겠다. 사실상 ‘엘로힘’은 ‘신 - 하느님’을 뜻하는 보통명사로서 야훼 하느님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특히 이른바 ‘엘로힘 - 시편’이라고도 불리우는 시편 42-83까지에서는 본디 ‘야훼’로 되어 있는 것을 체계적으로 ‘엘로힘’으로 바꾸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엘로힘’이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야훼만이 하느님이심을 이렇게 부정적 논리를 통하여 곧 다른 신들은 신이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하늘을 만드셨으니” 표현은 적극적인 근거로서 야훼님의 창조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하늘만을 만드셨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하늘 창조의 함축적인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 하늘은 신의 또는 신들의 영역이다. 영역일 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은 하늘 자체를 하나의 신으로 여겼다. 시편은 이러한 하늘을 창조물로, 피조물의 대표로 선언한다. 가장 신적인 하늘이 주님의 한낱 피조물이라면 다른 피조물들이야 어떠하겠느냐는 식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5절은, 한자식의 표현을 쓰자면 신화한 피조물을 비신화하고, 신들을 격하, 무력화, 그리고 비신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10절에서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로 “누리”(8절과 11절에 나오는 세상과 땅의 동의어)가 언급된다. 5절에서는 다른 신들과의 비교가 문제되어 이 신들이 사는 곳이라고 여겨졌던 ‘하늘’이 나오고, 10절에서는 만민들의 경배가 문제되어 이 만민이 사는 누리 또는 땅이 불리워진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 부분의 첫머리(11절)에서는 종합적으로 하늘과 땅이 함께 등장하고, 우주의 제삼의 요소인 바다가 보태진다. 창조주로서 유일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엄위와 존귀, 그리고 권능과 영화(6절)가 바로 그분의 속성이다. 6절 2행이 말하는 “성소”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생각할 수 있다. 곧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자리,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주시는 장소, 찬미의 장소, 지금도 이 찬미의 시편이 울려퍼지는 성전이다. 그러나 여기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왜 성전이며, 성소인가? 이 장소의 거룩함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문제는 성전의 성성은 거기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계신 자리는 상징적 언어 또는 성서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하늘이다. 곧 하늘이 하느님의 본연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6절의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과 동시에 하늘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출발해서 본연의 성전인 하늘을 향한 것이다.
7-9절: 찬미의 초대
7-9절의 내용은 1-3절의 등장하는 찬양에 대한 권고를 다시 언급하는데, 이러한 1-3절과 병행적 내용은 명령법이 세 번 연속 등장하는 외형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주님께 드려라”라는 명령이 연속 3번 등장). 이 내용의 배경이 되는 것은 ‘왕의 즉위식’이었다. 고대근동의 통치자들은 종주국의 통치자 앞에 선물을 들고 나아가 자신을 소개하고 충성을 서약하는 관례가 있었다. 96편 7-9절에서는 이와 유사한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 것인데, 모든 이방민족들까지도 주님의 궁정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함으로써 주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셔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8-9절).
시편 1-2절에의 세 번에 걸친 ‘주님께 노래하라’에 상응하여 7-8절에서도 “주님께 드려라”가 세 번 반복된다. 또한 1-2절에 세 번 부린 “주님”에 이어 “그 이름”이 나오는데, 7-8절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온 세상”(1절 9절)이 7절에서는 “뭇 백성의 가문들” 3절 “민족들” 또는 “백성들”과 동의어적 표현으로 파악된다. 서로 다른 점은 3절에서는 민족들 사이에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라 말하고 있는 반면, 7절에서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로 이들 민족들이 찬미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7절 2행에서는 “영광과 권능”이 함께 언급된다. 이 두 단어의 배열은 의도적으로 보인다. “영광”은 3절에서(기적들의 동의어로), “권능”은 6절에서 엄위, 존귀, 영화와 함께 동의로 사용된다. 7-8절 1행에서 세 번 반복되는 ‘드리다’는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물건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게 아니라, 한마디로 하느님의 드러난 신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온 땅에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 그분의 권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이를 고백함이다. 이것이 바로 찬미이다. 찬미는 거짓된 칭송의 말이거나 또는 어떤 형태로든 강제된 치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찬양의 외침이다. 이러한 찬미의 형태가 제사이다. 8절은 하느님께 대한 이 찬미의 제사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안뜰”은 성전의 안뜰을 말하며,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므로 결국 성전을 뜻하게 된다.
9절은 성전에 직접 들어와서 부족하고 하느님께 경배드림을 말한다. 본디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거룩한 옷차림 하고”의 뜻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거룩한 옷차림’의 가능성을 택한 근거는 하느님께 경배를 드릴 때에 이에 합당한 옷차림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다. 제관들과 참석자들 모두 하느님 앞에 나서는데 모자람이 없는 치장을 하고 나타나야 한다. 9절 2행의 “무서워 떨라”라는 표현은 단순한 공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곧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태도를 보이라는 촉구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함,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의 근본이다. 그래서 지혜문학에서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올바른 지혜, 또는 지혜 그 자체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대한 지혜이며, 또 지혜 그 자체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대한 지혜이며, 이 지혜의 근본이 바로 하느님을 경외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만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옷처럼 모든 것을 그르치게 된다.
경배의 주체는 “온 세상”이 불림으로써 시편 96의 찬미의 무대가 단순히 좁은 성전만이 아님이 강조된다. 세상 전체가 성전 마당에 부복할 수는 없다. 곧 세상 전체가 성전을 향하여, 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해서 말한 모든 것들을 10절은 “주님께서는 임금님이시로다”라는 말로써 총괄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를 만방에 선포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임금님이시로다.”라는 이 선포를 우리 시편의 정점이며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선포 속에는 유일하신 하느님, 유일한 임금님으로 만방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다른 신이나 다른 임금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유일한 임금님이시라고 말하는 선포의 근거는 10절 2행에서 말하고 있듯이 창조에 있다. “누리가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라는 표현에서 “세워져”는 수동태이다. 따라서 행동의 주체는 하느님이다. 이처럼 간접적으로 행동의 주체인 하느님을 지칭하는 수동태를 ‘신학적 수동태’라고 일컫는다.
하느님의 임금님되심과 그분 통치의 중심은 올바른 심판, 또는 재판에 있다. 히브리말에서 ‘재판하다’는 ‘통치하다, 다스리다’의 뜻을 지닌다. 여기에서 재판은 우선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곧 각자에게 자기의 권리를 되찾게 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시편에서도 나오는 ‘주님, 저를 재판하소서’라는 말은 ‘주님, 저의 권리를 되찾아 주소서’라는 청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0절은 2절 2행과 3절에 나왔던 선택된 백성의 ‘복음선포’를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복음의 내용은 야훼님께서 우주의 임금님, 창조주 그리고 심판자시라는 것이다.
10-13절: 자연의 반응과 이유
이제 10절에서는 “주님은 임금이시다!”라는 외침이 온 세상에 선포되고 11-13절에서는 하늘과 땅, 바다와 들, 숲과 나무들도 모두 환호와 찬양에 동참하라는 권고가 주어진다. 주님의 통치를 10절은 다음 세 가지 특징으로 설명한다. 첫째, 주권(주님께서 직접 신적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것: 주님은 임금이시다, 둘째, 안정성(창조된 세상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 누리는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올바름(공정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또한 13절에서는 하느님 통치와 심판의 기준이 ‘의로움’과 ‘성실’로 제시된다.(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성실하게 다스리시리라). “의로움”은 오류와 왜곡, 선입견이 전혀 없는 공정의 상태를 의미하고 ‘성실’은 거짓과 속임, 숨김이 전혀 없는 진실의 상태를 말한다.
4-5절에서 주님의 임금님이심을 일면인 존엄하심을 노래했다면, 이제 11-13절에서는 주님의 임금이심에 대한 그 신하들의, 곧 피조물들의 반응을 노래하고 있다. 11절과 12절에서 시편은 피조물 전체를, 당신의 통치권을 완전히 실현시키러 오시는 주님 앞에서 기뻐 춤추라고 부른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그를 채운 것들”(11절)에서 하늘- 땅- 바다는 우주 전체를 지칭한다(시편 146참조). 그래서 이 셋만을 열거해도 무방하지만, 1행에 둘, 2행에 둘의 짝을 맞추기 위하여 2행에서는 “그를 채운 것들”하고 바다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반응, 창조주시와 의로운 임금님 앞에서의 인간의 반응은 기쁨이다. 이 기쁨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도 함께 나눈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을 포함한 전피조물이 창조주시오 임금이신 하느님 앞에서 환호하는 것이다. 11절에 이어 12절에도 계속해서 자연의 기쁨, 창조주에 대한 자연의 환호를 노래하고 있다.
13절의 첫 마디인 “주님 앞에서”는 12절의 “기뻐 뛸지어다”와 “환호할지어다”에 계속되는 말이다. 곧 주님 앞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또한 ‘통치하다’에 계속되는 말이다. 곧 주님 앞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또한 ‘통치하다’는 ‘재판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찬미 받으시는 주님은 바로 오시는 주님이시다. 이미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하느님,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그럼으로써 당신의 엄위와 존귀, 권능과 영화를 이 세상에 떨치시는 분, 유일하신 창조주요 임금으로서 온 세상과 온 우주에 군림하시는 분이신 동시에 앞을 이 세상에 완전한 통치를 이루시기 위하여 오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하느님께 마주 나아가면 인간은 자연과 함께 기쁨 속에서 웅장한 찬미가를, 항상 새로운 찬미가를 부른다. 이로써 시편 96은 과거나 현재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미래를 향한 무한히 그 전망을 펼치는 것이다.
나오면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요청하며 시작된 96편은, 노래를 불러야 할 대상을 ‘온 세상’으로, 노래의 내용을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구원업적’으로 제시한다(1-3절). 이어 찬양의 이유를 언급하는데 주님이이야말로 생명의 중심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엄위와 존귀, 영화와 권능은 그분께 속한 것이 된다(4-6절). 이러한 맥락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은 하느님을 경배해야 한다(7-9절). “주님은 임금이시다”라고 선포하고 이러한 주님의 통치가 흔들리지 않은 안정성과 올바름을 본질적 특성으로 삼음을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의로움과 성실하심이 그분 통치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10-13절).
96편에서 유난히 강조된 개념은 ‘새로운 노래’이다. 성경에서 ‘새로움’이란 ‘거룩함’과 연결되어 있다. ‘새것’이란 하느님께 모든 것을 처음 만드신 바로 그 본래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 상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본래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던 모든 것은, 인간의 탐욕과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헌 것’(죄의 상태)으로 전략했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있던 본래의 우리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이룩해야 할 ‘새로운 나’이며, 그렇게 쇄신된 나는 하느님의 ‘새로운 노래’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시편 96편이 노래하는 주님은 우주적 차원의 하느님이시다. 우주의 창조주로서 주님은 온 세상의 임금님이시다. 또한 여느 임금들, 여느 임금들 사이의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임금님이시다. 이 영광스러운 임금님이 오신다. 당신의 통치권을 완전히 행사하기 위함이다. 절대적 통치권의 행사는 시편이 노래하듯이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성실히 다스리기’위함이다.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하느님께 대한 반응은 역시 우주적일 수밖에 없다. 곧 하늘-땅- 바다,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포괄한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어떠한 제한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시편 96에서는 이스라엘, 또는 예루살렘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단 성전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의 시온 성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경계와 한계는 이러한 하느님의 존재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택된 백성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난다. 찬미의 중심을 이루며 하느님의 구원, 하느님의 임금님이심을 선포하는 사명이다. 이들은 온 세상에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세상은 10절에서 노해하듯 흔들림이 없는 세상이다. 또한 창조주 하느님께 기뻐 환호하는 세상이다.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함, 이것이 이 세상에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지금도 베푸시는 하느님, 그리고 장차 완전하게 베푸시러 오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과 자연의 응답이다. 9절에 나오는 “무서워 떨리”는 말이 나오는데 하느님 앞에서의 기쁨과 무서움은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동일한 자세의 다른 두 양상이다.
시편 96에서는 장소적 제한만이 제거된 것이 아니다. 시간적으로도 미래를 향해 무한한 전망으로 펼치고 있다. 이 전망의 끝은 하느님의 오심이다. 이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라도 가능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주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며, 이를 완전히 실현시키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께서 오고 계시는 것이며,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이를 향해 기쁨과 더불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군왕시편을 다루고 있는 72편과 96편은 둘 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데, 시편 72편이 현세적인 임금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을 기대한다며, 시편 96편은 직접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하느님을 통한 구원을 고대한다. 구약성경을 이끌어온 원동력의 하나가 바로 이 구원을 향한 희망이다. 그리고 구약성경 안에서 이 기본적인 희망은 다양한 줄기를 이루면서 그 전망을 끝을 향해 흘러왔다. 이 전망은 신약성경에 와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절정에 달한다. 이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최종적인 오메가 점, 하느님의 통치권, 그 구언이 완전히 실현되는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 참고문헌: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226-241.
시편, 그 특별한 노래, 김혜윤, 생활성서(2012/4), pp. 62-67.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 C. 보르고뇨/ 성염 옮김, pp. 152-173.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35.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56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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