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 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들어가면서
1. 사건의 테두리
다시 한번 예고가 있고, 그 예고의 내용은 기대하지 못했던 잉태에 대한 놀라운 예언으로 나타난다. 이 예언은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전해지고 하나 하나 실천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먼저 예고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전혀 다른 종류이다.
첫째, 예고에서 주님은 유다 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번에는 천사의 말이 국경지방, 주민의 반은 이교도인 갈릴래아 지방에 전해졌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산촌 나자렛이다.
첫째 예고는 성전에서 장엄한 제사 때에 전해졌다. 그러나 이곳은 초라한 오두막이며 시간도 명확히 분간 할 수 없는 한낮의 어느 때이다. 그곳에서는 예고를 받은 이는 이스라엘의 사제이였으며, 예고가 전해지고 있는 동안 백성은 밖에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천사의 말을 받은 이는 평범한 소녀이며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 아주 흔한 마리아이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적상황은 무의미하기만 하다. 첫 번에는 모든 것이 장엄하고 엄숙하고 암시적이었으나 여기서는 모든 것이 미소하고 평범하며 단순하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여기에는 위대한 것이 있다. 실상 즈카리아는 성소에 들어가 천사를 만났다. 천사의 말은 인사말도 없이 사제에게 전해졌다. 여기서는 그러지가 않다. 마리아는 자기 자리에 있고, 또한 받아들이는 편에 있다. 만나러 들어오는 편은 천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사는 알현을 하러오는 매우 미소한 존재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천사의 첫말은 “기뻐하여라(Ave)라는 인사말이다. 원전에서 이 말의 뜻은 인사, 기쁨, 은총이란 세 가지 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은총의 뜻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라는 말로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마리아는 언제나 은총이 가득하였으나 지금은 더욱 특별한 방법으로 은총이 가득한 상태에 있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주님께서 언제나 마리아와 함께 계셨지만 이제는 더욱 특별한 방법으로 함께 계실 것이다.
즈카리아의 첫 반응은 혼돈과 놀람이었으며 마리아 역시 같은 반응을 보낸다. 마리아의 놀람은 더욱더 켜서 마음의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고 표현한다.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도 하여 외면적으로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점이 없이 이스라엘 여인의 생활과 똑같은 생활을 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부르심은 갑자기 기대하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적 희망의 투사나 영혼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오로지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즈카리아와 엘리사벳은 평생의 불임증의 고통, 침묵 속에 참아야 할 불행이었다. 즈카리야는 낙담하기보다는 확증을 주는 증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에 더욱 놀라고 어리둥절했다.
2. 대화
첫째소식,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킨다. 은총은 꺼집어 내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찾으면 발견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다. 마리아가 받은 은총은 하느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잉태한다는 것이다. 태어나실 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리는 것이다. 그 이름은 예수(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 불리는데, 위대하신 분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시라는 이 소식은 구원의 소식으로 구원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분의 사명은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이것은 다른 형태의 통치, 다른 형태의 왕국인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시간 안에 들어오시어 이 시간을 끝없이 연장시키신 것이다. 이제 이루어지려 하는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며, 이제 세워지게 될 통치권은 영원한 통치권이다. 이제 시간의 제약을 받은 왕국은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십자가에 위에 가시관을 쓰고 높이 달리게 될 때, 그의 왕국과 주권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왕국과 주권이 진실로 창건되고 시작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대답은 단순하고 놀라운 것이다. 그 대답에 대한 첫인상은 차갑고 실망한 것 같았지만 이 영혼의 도량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마리아의 자세는 정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치는 기쁜 마음의 자세도 아니었고 , 즐거워하며 자신의 동의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었기에, 자기편에서 해야 할 것과 주님께서 어떤 길을 택하셨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이 몸은 처녀라는 말은 이제 자가기 요셉과 결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함을 뜻한다. 마리아는 약속은 했지만 아직 혼인은 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혼인의 행위로,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바라시는지가 문제였다. 마리아는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지만, 다만 질문을 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며 그 뜻을 안 다음 그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마리아에게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 결과 성령이 저에게 내려오시고... 그리하여 이 일은 성삼위모두가 이 일에 참여하신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한 출산으로 인해 하느님 성령의 배우자가 되신다. 사실 출산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연에 들어오시는 위격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태어나실 분은 하느님의 아들로써 거룩함 그 자체이신 분이시다. 이 분이 메시아이시다.
마리아는 즈카리아처럼 어떤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사 스스로 마리아에게 한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그 증거란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이 늘그막에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기적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는 기적에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력이 가득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명령이며 하느님의 뜻이 행사되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 그 말씀은 단순한 청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이다. 그리고 단순한 하나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이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은 위대한 겸손의 자세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참된 여종이기에 여종은 진리를 겸손하게 재인식하고 창조주와 조물의 거리를 깨닫고 있다. 초월적 자유 안에 요구하고 창조하는 결정권이 있는 의지와 결정을 받아들이는 인간 의지와의 차이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란 모든 점에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적용시켜, 모든 것이 주님께 향하도록 밀고 나가는데 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사건은 세계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이란 말은 수동적인 준비완료 태세인 동시에 적극적인 동의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요인들을 인간적인 역사와 사건의 형태 아래 두셨다. 여기에는 열광적인 즐거움도 없고, 겸손한 기도도 아닌 순수하고 솔직한 동의가 있을 뿐이다. 명백하게 알려진 하느님의 뜻에 순수하고 솔직한 동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점은 바로 이 명확한 사실에 있다. 마리아에게는 결정적인 이 사실을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뜻도 아니고 사람들의 뜻이거나 말도 아니며 오직 주님의 말이며 주님의 뜻일 뿐이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즈카리아의 경우 성전을 나간편이 즈카리아이다. 여기서는 천사가 떠나간 것이다. 이제 나자렛의 이 방은 성전으로 바뀌었다. 엘리사벳의 비밀은 동정녀의 태중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가 이루어지는 위대한 침묵의 상징이었다. 비상한 부드러움과 장엄한 위대성이 여기 이 불멸의 이야기 속에 순정한 단순성과 더불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참된 위대성이 하느님의 완전한 배치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에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Text 에 대한 연구
<26절>
“여섯째 달에”, 엘리사벳이 임신한 때부터 셈한 날 수이다.
“가브리엘” 은 강생의 천사라고도 부르는데, 마리아께 예수님의 탄생을, 즈카리야에게 선구자의 탄생을,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을 알렸기 때문이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 갈릴래아는 팔레스티나 본토 북쪽 끝에 자리한, 지브론, 납달리의 옛 종족의 땅을 포함하고 잇다. 나자렛은 갈릴래아 남쪽에 있는 작은 부락이다. 지브론 종족과의 경계에 잇는 티베리아 호수 서부의 풍요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걸어 사흘 걸리는 거리에 있었는데 구약성경에 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과 그곳 주민은 유다인의 멸시를 받았는데, 예수께서는 나자렛 사람이라 부른 것을 받아 들이셨다. 나자렛은 나무의 세순, 봉오리의 뜻인데, 이사야에서도 메시아를, 곧 햇순이라고 불렀고 즈카리야(3.8)도 새싹이라 말하고 있다. 루카는 나자렛을 베들레헴, 카파르나눔, 나인처럼 “고을”이라고 부른다.
<27절>
“다윗 집안의 요셉” 요셉도 마리아도 확실히 다윗 가문에 속해 있었다.
“약혼한” 유다의 법에 따르면, 약혼은 혼인과 동일한 법적효혁을 지닌다(신명 20, 7, 22. 23-27참조). 다만 약혼녀는 일 년 가량 계속 진정에 머무르다 신랑 집에 가서 혼인식을 올리고 함께 생활한다. 약혼 기간에도 이미 약혼녀와 그의 소유물을 약혼자에게 속하고, 약혼녀의 부정은 간음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정결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예수님은 처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시고, 그리고 어머니에게 오명을 쓰지 않도록 약혼자를 갖게 하시고, 요셉을 보호자, 양아버지로 삼는다는 방편을 택하셨다. 약혼이란 말은 약혼자나 기혼자를 의미한다. 유다사회에서 약혼이란 벌써 장래의 남편과 맺어진 자란 뜻으로 썼고 그렇기 때문에 약혼하고 과실을 범하면 유부녀로서 간통한 여자로 보았다(신명 22, 23). 약혼녀가 남편의 집에 들어가는 예식이 결혼의 완성이 되었다.(마태 25, 1-12). 거의 모든 성서학자는 임신의 알림을 받았을 때의 마리아는 단지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는 이미 결혼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셉을 명백히 “마리아의 남편”(마태 1,19)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히브리말의 미리암. 아마도 마담이란 뜻이겠지만, 아름답다란 뜻이 있다. 바르덴 헤벨에 의하면 이 이름에는 약 60가지의 어원이 있다고 한다. 히브리말인 미리암이 아랍말의 마리암이 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미리암은 아론의 자매였는데 이집트말인 미리암은 야훼께 사랑 받는 이란 뜻이 있다. 또한 왕비라고도 한다. 어쨌든 성모님은 우리에게 왕비이시다. 유다법에 따르면 결혼연령은 여자 12살, 남자 18살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28절>
“들어가” 구석 방에서 묵상에 잠겨 있을 때 천사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들어 가 말한 것으로 보아, 천사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인사드린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은총과 하늘의 은혜에 충만한 분이란 뜻이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이전에 벌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앞당겨 입으시고 은총에 충만한 분으로 지극히 놓은 성덕에 이르러 계셨다. 이 말을 해석하여 고부들은 성모님의 성덕을 찬양한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시다.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마리아는 은총에 충만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기뻐 하여라”그리스말인 ‘기뻐하여라’란 천사의 말이 명백하지만, 신학적 교리를 포함하고 있고, 기쁨을 청하는 그리이스인의 인사다. 소아시아 사람은 살렘, 히브리말로는 살롬이라고 하여 평화를 청했고 라틴 사람은 건강을 묻는 인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것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확인이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 속에 어떠한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완전히 깃드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셨다. ‘축복을 받으셨다’라는 말은 히브리말에서는 최상급의 표현법으로 마리아가 누구보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더할 나위없는 찬양을 받으셨던 것이다. 이 말은 바티칸 시나이 사본에는 없지만, 알렉산드리아 사본, 라틴말 , 시리아말, 이디오피아말, 그 밖의 많은 교부들의 책에 실려 있다.
<29절>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이 때 겸손하신 마리아가 천사를 보고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천사가 자신에게 해 준 인사말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천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려고 애를 썼다.
<30절>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히브리말의 이 말투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즐겨 받아 주셨다는 그런 뜻이 강하다. 천사는 여기서 당황하는 마리아에게 위로를 그 두려움을 제거해 주려한다.
<31절>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다” 이 말은 명백히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를 암시한다. 쌍방이 모두 처녀인 어머니를 뜻하고, 그리고 그 아기의 이름이 나왔다. 아기는 예수, 곧 히브리말의 여호수아(야훼께서 구원이시다) 이다. 이사야는 아기를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불렀는데, 이 관념은 이미 천사의 인사에 포함되어 있다.
<32절>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어” 요한과 같이 하느님 앞에서 위대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위대한 분이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같으실 뿐아니라, 지극히 놓으신 하느님 그분으로 인정될 것이다. 앞서는 처녀이신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한 이 예수가, 지금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 데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 두 가지 본성과 한 위격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조상 다윗의 왕좌를” 예언자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 같이 예수님은 다윗의 후계자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나라, 이스라엘 국민에게 군림할 다윗의 후계가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영적 나라를 미리 알려 주는 정조로 한 말이다.
<33절>
“ 야곱 집안” 메시아가 다스릴 대상은 야곱의 피를 받은 자손 뿐아니라, 히브리인, 이방인을 불문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맺어진 교회, 나가서 온 인류를 말한다.
“영원히” 이 땅에 사람이 세운 나라는 영고성쇠를 면할 길이 없다. 생겼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요컨대 천사가 한 이 말은 메시아 나라에 관한 모든 예언을 집약한 것이다.
<34절>
“어떻게 ”처녀 마리아의 이 의문은 즈카리야의 경우처럼, 그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어떤 징조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어떻게 실현될까를 의문스러워한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이 히브리식 말투는 결혼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말에는 명백히 그녀가 세운 한 평생 독신으로 살며 정결을 지키겠다는 그녀의 허원이 나타나 있고, 그리고 결혼을 하고나서도 또한 지키겠다는 결심을 나타낸다. 자기가 아직 완전히 순결한 처녀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언제까지나 이러한 상태로 계속 살고 싶으며 따라서 어머니가 될 수 없고 또 그것이 자기의 소원이라고 하는 결심이 엿보인다. 사실 만일 그녀가 결혼의 권리를 사용할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아기가 태어나리란 말을 들어도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처녀로 한평생 살겠다는 결심과 함께, 또 하느님의 뜻에 순명종하겠다고 바라고 있었으므로, 이 처녀와 어머니로서 구실을 양립시킬 수 있는가를 겸손하게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녀성에 대하여 이렇게 강한 결심을 한 그녀가 왜 요셉의 약혼녀가 되기를 허락했든가 혹은 관습을 거스러지 않으려고 했다든가, 혹은 요셉과 같은 사람과 맺어져 있다면 다른 사람의 청혼을 피할 수 있고 그리고 안심하고 자기 결심을 지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당시 옛 유다인에게 있어서 처녀로 한 평생을 보낸다는 것은 그들의 이상을 멀리 벗어난 일이었고, 많은 자녀는 하느님의 은혜의 징조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벌써 이스라엘에 새로운 이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 예를 들면 에세네파 사람은 동정을 지키고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 이 절에서 볼 수 있는 마리아의 동정도 다음절에서 확인된다.
<35절>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인용이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의 궤를 덮는 구름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탈출 13, 21). 이 절의 경우에서도 보면 성령께서 마리아를 감싸 주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가 하느님의 전능의 일이심을 증명한다. 성령은 하느님의 창조적 영으로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위업을 이룬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거룩한 분, 거룩함 그 자체로 부른다. 하느님께서 밖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일은 삼위일체에 공통된 것이지만, 특히 사랑의 일은 성령의 활동으로 여긴다. 그래서 마리아의 초자연적 임신을, 천사는 특히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돌렸다.
<36절>
“ 제 친척” 마리아와 엘리사벳과의 친척관계를 뚜렷히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제와 레위인은 어떤 종족의 여자와도 결혼할 수 가 있었던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다윗계 후손 마리아와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 사이에 친척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두 여인의 어머니가 자매였다고 주장한 학자도 있다.
“ 엘리사벳” 천사는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의 징조를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면 그녀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성실히 약속을 지켜 주시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아이를 낳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처녀에게도 아이를 낳게 해 주실 수 있으시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 이런 여자를 석녀 또는 돌계집이라고 한다. 사실 엘리사벳은 석녀로 유명하다.
<37절>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나이 많은 석녀 엘리사벳의 임신이나 또 동정을 지킨 처녀의 임신은 모두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더욱 이해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 자연을 초월하는 놀라운 일이 하나의 현실이 된다. 이런 믿음에서 우리는 처녀의 임신을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38절>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처녀성에 대하여 안심하게 된 마리아는, 비할 바 없는 겸손과 순종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긴다고 말한다. 이 종은 그리스어 곧 노예란 뜻이다.
“말씀대로 ...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마리아의 몸에 말씀이 강생하시고, 그녀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하느님은 이 강생을 마리아의 승낙을 조건으로 삼으심으로써, 자신의 어머니로 삼으시고, 그녀를 온 인류의 구속사업 협력자로 삼으셨다. 마리아는 그 겸손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와의 불신과 반역 행위를 지우셨다.
참고문헌: 주석성경,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p. 232-234.
신약성경 주해집(루카 복음서), 도서출판 크리스챤,1991, pp. 58-65.
루카복음해설, 리처드 굿츠빌러/ 김택준역, 성 바오로출판사, 1991, pp. 44-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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