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나눔(루카)

루가 1, 47-56: 마리아의 노래(마니핏캇)

마리아 아나빔 2012. 9. 2. 15:39

 

 

 

                  루가 1, 47-56: 마리아의 노래(마니핏캇)

 

 

즈카리야로 통한 예고는 침묵 속에 잠겨있고, 즈카리야 자신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온전히 고요함 속에 말없이 시간을 보냈고, 세례자 요한은 사막에서 자랄 것이다. 이에 비해 마리아를 통한 예고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의 탄성과 행복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기뻐 용약하는 즐거움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이러한 정신의 샘이 흘러 넘쳐 이토록 조용하고 관상적인 여인이 기쁨의 찬가, 기쁨의 노래, 기쁨의 송시를 넘칠 듯 노래한 것이다.

 

마니피캇은 진정 하느님의 어머니의 말씀으로 합당하고, 사람의 입에서 흘러 나온 가장 숭고하고 뛰어난 환희의 찬가이다. 그곳에는 시편, 예언서, 안나의 찬가를 생각게 하는 인용이 적지 않으나, 그것은 성경에 대한 성모의 지식을 증명하는 것이며 시편 혹은 찬미가를 초월하는 성모님만의 독특한 노래이다.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지금까지 엘리사벳이 말해 왔으니, 바뀐 이는 마리아이다. 또 가장 하느님의 은혜를 가득히 받은 이가 엘리사벳의 말 뒤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찬미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성경 주석가들은 이 마니피캇을 형태상으로 구분하는데 있어 모두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용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마리아의 노래는 분명히 세 그룹의 생각, 즉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은, 마리아 자신에 대한 것이다. 물론 마리아는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의 시선은 자기가 나누어 받고 있는 위대함의 장본인인 유일하고 참된 위대성의 소유자인 하느님께 향하고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모든 찬사는 하느님께 대한 것이다. 여종은 자기 주님을 찬탄한다. 여인은 이 찬사에 정당한 표현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 대한 찬사, 이것이 첫째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볍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위로이며 휴식이며 어두운 골짜기, 서글픈 움 저 너머에 무한한 하느님의 찬란한 설야를 바라다봄이다. 전례에서는 ‘나’라는 대명사 보다 ‘우리’라는 대명사를 더 즐겨 쓰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마리아의 위치는 매우 특수하다. 즉 천사가 마리아께 축복의 말을 전하는 것이므로 마리아는 자신의 영혼이 특수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찬양을 보내는 것이다. 선택받은 자가 자기를 선택하신 분의 은총에 찬양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내 영혼"이란 '이 마음'과 같은 의미로 진심으로 마음속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영혼과 마음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다. 마음의 설레임을 말씀이 가져다주신 기쁜 소식에 대한 방향이다. 하느님은 구원이시고, 지금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의 이름도 예수, 즉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구원의 소식이 마리아께 예고되자 마리아는 구원의 하느님께 용약하며 화답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동정 태중에 구원을 가져오시는 그분을 잉태하고 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인 이 사실에 기뻐 용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자기를 굽어보셨으며, 그 굽어보심은 마리아 자신이 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특히 사랑하고 총애하시는 관대한 시선으로 돌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빛, 하느님이 시선 아래에서 인간은 자신의 미천함과 부존함을 고통스럽도록 명백하게 알게 된다. 주님의 눈앞에서 이 조물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여종에 불과함을 충분히 인식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여기서 자신의 노예와 같은 처지를 주님께 고백한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이신 그분께서 이 여종을 영광스러운 한 아씨의 지위에 올려놓으셨기 때문이다. 미비천함이란 겸속한 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낮은 생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마리아의 감사와 환희의 이유가 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이제부터’라는 말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주시되지 않은 채 서민으로 생활을 해 온 마리아의 생애에 하나의 전환점이 도래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부터 마리아는 자기를 감싸 주시는 하느님의 밝은 빛 안에서 생활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감탄 어린 시선을 받을 것이고, 또한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제부터의 ‘이제’는 또한 구세사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제 멸망과 공허는 끝을 맺었다. 구세주, 곧 성화자가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분을 통하여 동정이신 어머니가 여기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가 이 여인을 복되다 일컬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마리아의 이 예언적인 관측은 마리아 당신 자신이 앞으로 공경을 받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감을 부어 넣으신 마리아 당신 자신의 말이 인간을 위한 변호가 될 것임을 나타낸다. 엘리사벳의 찬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라는 말은 전주곡에 지나지 않으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야 말로 참된 찬미가이다. 마리아가 노래하신 이 찬미는 대대로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시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불릴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어떠한 겸손을 가장하지도 않았으며, 또 하느님의 선물을 갑자기 거절하는 법도 없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값진 보물로 생각하거나 신데렐라인 것처럼 생각하는 법도 없고, 부끄러워 숨어버지리도 않았다. 자기가 지닌 위대함이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배은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느님의 위대함을 사람은 이는 또는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전능하신 분은 당신의 은총의 힘으로 동정녀의 태중에 강생의 기적을 이루셨다. 그리고 당신의 힘으로는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이 바로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고 전능하신 분에 의해 극복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마리아 안에서 세상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란 강생은 하느님의 능력이 이루시는 가장 큰 기적이다. 또 그것은 하느님의 한없는 성덕을 거스르는 죄를 깨뜨려 버린다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큰 일이란" 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께서 한 시골 처녀를 메시아의 어머니로 삼으신 놀라운 일을 가리킨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하느님의 능력에는 또한 거룩함도 있으며, 이 거룩함이 이제 강생하시는 아들 안에서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려고 한다. 거룩하신 분이 이 혼탁한 세상에 들어오심으로써 그분을 통해 독성을 당하신 하느님의 이름은 다시 거룩하게 되고, 그분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뵙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 가까워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갖는 수단을 다하여 통과할 수 없는 당신 자신의 거룩한 성소의문을 열러 놓으셨다. 불경스런 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을 받고 이 성소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세상이 거룩한 성전으로 바뀌자 불의는 설 딸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첫 번째 단락에서는 하느님과 나의 대립이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 나타나고, 그 안에서 나는 소멸되고 만다.

 

둘째 단락에서는 마리아가 이제 인류 전체에 시선을 돌린다. 마리아는 자기가 아들을 잉태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이것이 둘째 단락의 제목이다. 이것은 이제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 앞에 종으로 처신하는 조건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내려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두려워하고, 숭고하신 그분 앞에서 외경스러운 마음을 갖고 행동하도록 하자, 은총의 율법은 이렇게 실현되는 것이다. 마리아 안에 나타난 이 율법은 보편적인 효력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은총을 필요로 할 때 그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신다는 것을 율법은 잘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궁핍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풍부한 부의 창고로부터 은총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은총은 세 가지 종류의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은총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이를 따라가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피하고 약한 사람들을 따르며, 배부른 사람들을 멀리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끌리기 때문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란 사실 하느님을 존경하고 하느님 뜻에 따르려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자만하는 인간은 하느님의 적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사실 자기를 저하시키는 것이다. '높은 자' 는 '낮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팔은 구속 사업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교만에서 생긴 무신론적 조직보다도 훨씬 강하다.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거슬러 힘을 모으는 사람들을 멸망하게 하시며 그들을 혼미하게 하신다.

당신 팔의 권능인 전능하신 팔은 하느님께서 뽑은 백성에게 대항하는 적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타날 기적을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악마와 이 세상의 악한 권세를 이겨 가실 예수님의 승리를 내다본다.

 

"통치자들을 완자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주님의 종인 마리아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고 헤로데와 빌라도와 티베리오 등의 통치자들을 격파하실 것이다. 권세와 돈과 영광과 번영의 왕위를 따라가고자 하는 이들은, 왕좌에 올라 최고의 권세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무능이란 비참함 속에 거꾸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죽음의 어두운 시각이 오면 죽음은 그 가차 없은 팔로 위대한 것으로 믿던 환상들을 절단시켜 버릴 것이다. 교만한 자들의 몹쓸 계획을 하느님께서 무로 돌리신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목말라 하고 하느님을 배고파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갈증과 배고픔은 빈 마음의 소유자들 안에서 생기며, 그리고 이 빈 마음이 어떠한 피조물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안에서 격렬해진다. 그릇이 비어 있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이 그릇을 채워 주신다. 자기 자신이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높은 곳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데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자신의 기호와 부유함을 갖고 주제넘게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허무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비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은 하느님이 그 빈 곳을 채워 주신다. 마음의 태도 여하가 하느님의 행동을 결정짓는 요인이다. 그리고 겸손하게 구하는 이에게는 항상 너그러우시고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우쭐대는 자의 교만한 기도에는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신다.

 

셋째 단락에서는 마리아가 하느님과 인류에게 돌렸던 시선을 이제 이스라엘로 돌린다. 마리아를 통해 온 것,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된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며, 교회의 새로운 구성원인 영적 이스라엘로 높임을 받았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이스라엘은 야훼의 종이다. 그러나 이 주종관계는 마리아 안에 있는 아들을 통해 부자 관계로 바뀌었다. 종이 아들을 통해 아들이 된 것이다. 선택을 받은 백성이 이제 새로운 의미에서 다시 한번 선택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확실히 선택을 받은 것이며 편애를 받아 하느님 자신의 가족이 된 것이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셨다. 즉,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신 것이다. 하느님의 본성은 성실과 은총이다. 선택은 사람이 잘난 덕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 자비의 덕택이다. 사람이 어떠하다는 '이유'로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행위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앞서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약속을 하셨고 또 그 약속을 지키신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뜨려도 하느님께서는 충실히 계약을 지키신다. 이스라엘이 거짓 맹세를 해도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신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곧 약속이며 또 틀림없는 약속인 것이다. 주님께서 조상들에게 한 약속이 지금 후손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신자들의 시조이다. 모든 신자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이들의 후손인 것이다. 자손이 없던 아브라함이 지금은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후손은 영원히 남아 있을 유일하고 단일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약속은 만민에게 미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만민의 빛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통한 다른 국민에게도 메시아의 구원을 주실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노래는 메시아가 이끄실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구약의 완성이며, 모든 약속의 완성이다. 이것은 마리아의 위대함이자 인류의 위대함이며 참된 이스라엘의 위대함인 것이다. 이 위대함으로 인해 마리아는 기뻐하며 찬미를 드린다.

 

 

 

참고문헌: 주석성경,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 235.

           신약성경 주해집(루카 복음서), 도서출판 크리스챤,1991, pp. 67-71.

           루카복음해설, 리처드 굿츠빌러/ 김택준역, 성 바오로출판사, 1991, pp. 55-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