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 39-46: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들어가면서
이 두 어머니의 만남은 사실 이들이 잉태한 아기들의 만남이고, 어머니들은 아기들이 수행하게 될 사명의 협조자이다. 세례자 요한은 15절에서 예고된 대로 모태에서부터 성령을 받는다. 그리고 마리아의 배 속에 감추어진 메시아 앞에서 기뻐 뒤는 것으로 자기의 예언자적 사명 수행을 개시한다. 엘리사벳은 바로 이러한 요한의 대변인이 된다.
1. 상황
성경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관련되어 있지만 이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 만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엘리사벳은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상징적 인물로 나타나 있다. 나이가 많고 본래 불임증이며 사제가분 출신인 그녀는 선구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기적적으로 불임을 면하고 아기를 잉태했다. 마리아는 교회를 상징한다. 젊고 동정이며 메시아를 탄생시키기 위해 기적적으로 아기를 잉태한다. 이 두 여인의 모성은 세계사에 매우 큰 중대성을 부여한다. 이 두 여인이 하느님의 은혜를 찬미하며 서로 만나고 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러 간 이유는 이 위대한 사건을 전하고자 하는 자연적인 욕구에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주신 증표를 확인하고 엘리사벳을 도움으로써 위대한 계획에 참여하려는 뜻에서이기도 했다. 마리아는 스스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주고권을 발휘하였다. 천사의 가르침과 엘리사벳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마리아를 이끌어간 것이다. 마리아는 이해를 했고 행동을 한다. 복음은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갔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하느님의 음성에 따르는 것은 게으르게 해서도 안 되고 마지못해 해서도 안 된다. 기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이는 어려운 길도 기쁜 마음으로, 또 관대한 심정으로 걸어간다. 마리아의 이 여행은 보통 여행이 아니었다. 14,15세 밖에 안된 소녀가 혼자서 3일간의 여행을 한다는 것이나 집을 나가 몇 달을 먼 곳에서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구설수에 오르내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준행하는데 있어 사람들의 의견에 좌우되지 않았다.
2. 말
마리아는 즈가리야의 집에 도착하자 엘리사벳에게 인사한다. 우리는 마리아의 이 인사가 단순한 안부를 묻는 말인지 기적에 대한 천사의 소식을 말한 것인지는 모르고 있다. 어쨌든 마리아의 말은 엘리사벳과 태중의 어린 생명이 자연적으로 또 성령이 자극하는 이유로 기뻐 뛰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제 엘리사벳은 깊이 감동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성모송의 첫 부분은 하느님의 천사가 말한 것이지만 둘째 부분은 엘리사벳이 즉 엘리사벳을 통해 인류 전체가 놀라 경탄한 말이다. 그리고 셋째 부분은 죄인인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교회가 만든 것이다. 성모송은 이렇게 성경에 기원을 두었고, 거기에 교회가 기도를 첨가하여 만든 것이다. 엘리사벳(구약) 이 마리아(신약)과 연결되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기도가 곧 성모송이다. 신약과 구약은 이 성모송 안에서 교회의 말과 함께 하나를 이루고 있다.
동정녀 태중에 있는 아기는 복을 내리시는 분이다. 이 여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복되므로 이 여인 역시 모든 여인들 중에서 은총을 받고 있다. 마리아의 모성은 곧 성모가 위대하다는 신비, 결과적으로 마리아께 대한 공경의 신비이다. 성경이 정신을 따라 생각하고 믿는 이에게는 성모의 모성이 이러한 뜻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지만 자기가 마리아에 비해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가를 알고 겸손하게 대한다. 그리고 이 나이 어린 아가씨의 위대함을 경탄과 행복감에 싸여 칭송한다. 그래서 어린 소녀를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엘리사벳은 소녀의 태중에 어떤 아기가 계신지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 아기가 자신의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다. 이 아기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므로, 따라서 엘리사벳의 주님이시다. 또한 자기 태중에 있는 선구자의 왕이시며 주님이시므로 역시 자기 주님이신 것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참된, 그리고 공적인 위대성을 갖고 계시지만 하느님의 말씀의 힘과 능력을 믿으셨다는 이유로 마리아는 개인적으로도 위대하다. 사람들의 불신에 마리아의 믿음은 뚜렷이 빛을 발한다. 이렇게 성모님께서 천사의 인사를 받은 사건의 시작부터 신앙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 즉 용기를 북돋아 주며 부유하게 해주는 이 말은 부르고 축복하며, 생산하며, 창조하는 이 말씀에 마음으로부터의 동의가 필요했다.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행위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동의를 하고 여기에 자신을 기여토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행위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행동은 인간의 행동을 요구한다. 이 협력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전인적으로 동의하는 생동하는 신앙이어야 한다.
엘리사벳의 입을 통한 하느님께 대한 찬사는 곧 이스라엘을 통한 교회의 하느님께 대한 찬사이며, 구약 편에서 신약을 인식함이며, 하느님의 옛 백성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존경함이다. 이 장면 전체에는 마리아께 공경을 드려야 하는 이유가 잘 나탄 있다. 성경의 말들, 성경의 이야기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가 포함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마리아의 사명과 개인적인 위대성에서 나오는 마리아의 위대성 때문이다. 또한 한 가지는 마리아의 모성과 마리아의 위대한 신앙심 때문이다.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나온 찬탄은 천사의 찬탄을 총괄한다. 이 두 가지 찬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교회의 음성을 통하여, 성경과 교회의 말씀과 정신을 알아듣고, 예수님의 모친에 대한 찬탄을 반복하는 모든 이들의 음성을 통하여 영원히 메아리쳐 나간다.
Text 안에서
<39절>
“서둘러” 이 말에도 마리아의 겸손과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있다. 그녀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데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그녀가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 축하의 말씀을 하려고 하셨다.
“유다 산악 지방에” 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높은 지대이다.
“유다”는 6세기까지 되올라 간 것으로 보이는 어느 오래 된 전승에 따르면 이 유다는 예루살렘의 남쪽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아인 카린>이다. 혹은 사제의 동네라고도 부른 헤브론을 생각한 이도 있었다. 헤브론은 남방 약 20여리의 땅에 있는 유다였다고 하고, 또 그 동네를 유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40-41절>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마리아의 문안은 강생하신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거룩하게 하려고 쓰신 말씀이었다. 그 때 벌써 요한은 약속 받았던 것처럼 성령을 가득히 받고, 곧 구세주를 알아보고 커다란 기쁨을 느낀다.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지식을 얻고, 예수님과 마리아의 높으심을 이해한다.
<42절>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천사가 한 말의 일절을 사용하여 그녀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들의 지존함을 찬미한다.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예수님은 무한, 또 완전 절대적으로 축복받으실 분이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것처럼 그분을 통하여 만민은 큰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43절>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참으로 인류를 구원해 주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자기와 같이 비천한 자를 찾아 주시다니 그 얼마나 큰 놀라움이며 감사한 일일까! 엘리사벳은 성령을 받아 마리아가 메시아의 어머니이심을 알았다. 그래서 그 앞에 몸을 굽혀 방문을 감사한다. “ 그 때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에게서 나자렛의 신비의 막을 거두시고, 완전히 메시아적 신적 인 신비를 열어 보여 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된 일입니까?” 뜻 밖에 친척이 찾아 와 놀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어머님이 찾아 오셨기 때문에 놀랬던 것이다.
<44-45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예수께 관한 천사의 약속, 그녀가 처녀로서 어머니가 되리라고 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 말씀은 마리아가 왜 복되신 분인가를 말할 뿐 아니라, 마리아가 믿은 그 대상을 가리킨다.
“행복하십니다” 어느 라틴말과 그리스말 사본에 따르면, 예언을 믿는 이는 복되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엘리사벳이 찬양하는 것은 천사의 알림을 믿은 마리아의 위대한 믿음이었다. 이 행복 선언은 마리아를 대상으로 하는데, 마리아는 즈카리야와 달리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참고문헌: 주석성경,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p. 234-235.
신약성경 주해집(루카 복음서), 도서출판 크리스챤,1991, pp. 65-67.
루카복음해설, 리처드 굿츠빌러/ 김택준역, 성 바오로출판사, 1991, pp. 51-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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