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123): 이스라엘의 구원자
들어가면서
1. 이스라엘은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하고, 다시 한번 주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셨다면, 벌써 피난처가 없었음을 몸소 겪어 알았다(1-5). 하느님의 개입을 인정하고, 작가의 말은 당신의 백성을 적들이 멋대로 하지 못하게 해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의 찬미로 바뀐다. 이리하여 이 시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끝난다. 생생하며 자발성이 풍성한 이미지가 풍요로운 이 시편은 생명이 걸려 있던 위험이 사라진 후의, 안도의 숨소리 같다. 모두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주 하느님이 우리 편이었다는 것이다.
이 시편에 암시되어 있는 위험은 바빌론의 비극적인 유배 때의 일인지도 모르나 히브리 백성은 온 역사에 응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훼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더라면” 그들은 살아 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의 입에서 나온 이 기도는 교부들의 전통에 의하여,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입에 오르고, 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시달린 모든 사람의 말이 되었다. 이미 이 세상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의 지체는 이 시편을 노래하고, 그리고 희망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맺어지고, 조국을 향한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우리도 노래하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주해 124: 2-4)
이 시편은 또 교회 역사의 모든 시기에 응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주께서 우리 편이 되지 않으셨다면, 미친 듯 날뛰는 사탄과 그 수하는 “산 채로 우리를 집어 삼켰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로마8,36). 그러나 벌써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육체에 이 적들의 독을 가진 송곳니의 고통을 느끼셨다. 죽음은 순교자들을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시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3. “우리의 도움심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교회는 그 전례에서 이 시편에 포함되어 있는 신앙과 감사의 모든 마음을 요약하는 이 절을 자주 되풀이 한다. 그러나 구약시대보다도 지금이야말로 “주님이 우리 편이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악마의 그물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의 사욕을 이기게 하시는 분의 도움으로써 우리는 영적인 생활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시편은 우리 안에 이루어 주는 주님의 수난에 주의를 모으고, 또 우리의 영적생활이 끊임없이 감사의 마음으로 열리도록 권한다. 사실 주님이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돌릴 자격을 우리는 가지지 못하였다. 아니, 우리에게 자격을 주신 이는 하느님이시다. 한평생 그 어느 시기에나 참으로 우리의 도우심은 천지를 만드신 주님의 이름에 있다.
Text 안에서
시편 124편은 단순한 구조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원문에서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히브리말 ‘룰레’(만일 ...않았다면)로 시작한다. 다음 세절은 ‘아자이’(그랬다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기도자들은 과거의 위험, 또는 위험들을 상기한다. 둘째 부분은(6-7)은 “주님께서 찬미받으실지어다”로 시작하는 주님께 대한 찬미의 말씀과, 이어서 그 찬미의 근거로서 주님의 구원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셋째 부분(8절)에서는 “우리의 도움은...”으로 시작하는 이른바 신뢰의 고백이 이루어진다. 과거에 나타난 주님의 구원 행위에서 나오는 신뢰를 고백함으로써 공동 감사시편 124편은 끝을 맺는다. 곧 회상(1-5)- 찬미의 이유(6-7절)-신뢰의 고백(8절)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1절 1행(머리글)
시편 본문 첫머리의 괄호 안에 있는 말을 머리글이라 할 수 있다. “입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문적인 강의가 아닌, 일반적인 봉독이나 강의에서는 이 말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시편 124편는 특별한 경우이다. 그리고 시편 124편의 머리글과 똑같은 말이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 15개의 시편에 되풀이 된다. 이글을 직역하면 ‘계단의 노래’정도가 된다. ‘계단’이란 ‘오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올라가는 동작’ 또는 ‘올라가는 자리’, 그래서 계단을 뜻한다. ‘오르다’는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다’를 뜻하는 전문 용어로 쓰인다. 아울러 예루살렘을 올라갈 때 여러 계단 또는 계단 비슷한 지형물을 통과해야 함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머리글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순례의 노래’이다. 사실 순례의 노래는 시편 120편에서 134편 사이에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으로 시작하는 122편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가 하나의 작은 노래 모음으로, 특히 순례 때 불려지던 노래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시편들이 122편을 빼고선 처음부터 순례의 노래로 지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1-5절(회상)
시편 124편은 어떠한 도입 부분도 없이 곧바로, 그야말로 정열적으로 주님의 크신 도우심을 부르짖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이로써 이 시편은 ‘위대하신 하느님’ 또는 ‘위하여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그 첫머리에서부터 노래한다.
1절 2행은 청유형으로 ‘위하시는 주님’의 존재를 선포하라고 명령, 또는 함께 선포하자고 청유하는 말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전례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다. 이들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형식적으로 1-5절은 선창자 또는 인도자가 공동체에 촉구하는 말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계-응으로 노래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에게 하는 촉구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시편 124가 공동 감사시편임이 드러난다.
2절 1행은 앞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을 다시한번 반복함으로써 시편의 기도자들은 자기들을 위한 주님의 존재를 강조한다. 이어 주님의 도우심이 어떠한 구체적 상황에서 베풀어졌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상황을 시편작가는 우선 상당히 개괄적인 말로 표현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거슬러 일어날을 때” 여기서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담’ 곧 ‘인간’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의 단수이다. 이로써 어떤 특정 민족이나 사람들을 부류를 말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기들에게 적대 행위를 한 적들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암시한다. 아무리 힘이 센 인간이라도 나라라도 흙, ‘ 아다마’로 빚어진 존재일 뿐이다. 나약하고 덧없는 흙덩어리, 살덩어리가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나약하면서도 창세기에서처럼 하느님을 거역하는 존재인 인간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거슬러 궐기했을 때, 이스라엘은 거의 통째로 사라질 뻔했다고 시편은 고백한다(3절 1행). 그러나 무엇이 그들을 삼킬 뻔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어떤 괴물을 연상케한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 문화에서는 바다 괴물, 바다용이라는 신화적 존재가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괴물은 하느님을 흔히 거역하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말해진다. 둘째로, 삼키는 존재가 무엇이든지 이스라엘 쪽에서는 그들의 전체적인 존재가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잡아먹었습니다. 모조리 먹고 빈 접시처럼 만들었습니다. 바다의 용처럼 우리를 삼켰습니다. 입맛을 다시며 배가 불룩하게 우리를 먹어 치웠습니다( 예레, 51,34).
“우리를 거슬러 분노가 타올랐을 때” 여기에서 ‘분노’는 어떤 결과론적 반응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에 대해서 이방인들이 화를 내어 침입했다는 말이다. 다만 그들의 침입과 공격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말에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적군’이라는 표현이 있다.
4절과 5절에서 시편작가는 물의 상징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했던 위험을 그리고 있다. 여시서 물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힘, 또는 폭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 앞에 선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가 그려지고 있다. 옛날 사람들에게 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불이 나면 재라도 남지만, 홍수가 지나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를 끼고 길게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해양 민족이 아니다. 바다와 경계선이 접해 있으면서도 바다와는 거리를 둔 농경생활을 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에 대해서 공포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이는 멀리 떨어져서 느끼는 감정이다.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 중에 두려움을 경험하기로는 바닷물보다는 빗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곧 4-5절이 그리는 물은 바닷물보다 빗물일 것이라는 말이다.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세 가지 서로 연결되는 장면을 연상해 볼 수 있다.
4절 1행의 “물상이 우리를 뒤덮고”는 폭우를 뜻한다. 특히 계곡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계곡물이 불어가는 상황이다. “급류가 우리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는 사람이 익사하는 게 반드시 깊은 물에서만 아니다.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기기는 물이 목까지 찼을 때이다. 또 목 이상은 물이 찼을 때 이미 일이 벌어진 후이다. 이것에 두 번에 걸쳐서 말하는 것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뜻한다. 5절 2행의 “거품뿜는 물살이”이란 파도를 뜻한다. 파도는 육지에 가까이 오면서 거품을 더 많이 내면서 점점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여기에도 바다파도가 아닌 시냇물의 파도를 뜻한다. 시편의 이러한 내용들은 이스라엘의 사막에 있는 계곡들의 경험들을 말하고 있다. 사막이라고 해서 편편한 모래사막이 아니라 거의가 돌로 이루어진 산악지방이다. 특히 와디는 일반적으로 좁고 양족이 거의 수직의 암석들로 되어 있다.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고 보통 때는 길로도 이용된다. 그런데 위쪽에서 갑자기 폭우가 내리면 사막이어서 나무도 없고 땅바닥도 단단한 흙이거나 암반인 데다가. 빗물이 어디에 흡수되지도 않고 거칠 것도 없어 그대로 그 좁은 와디를 그야말로 미친듯이 내려온다. 하나의 엄청난 파도로서 덮치는 것이다. 이 순간 그 와디 안에 누가 있다면 그는 영락없이 휩쓸려 내려가고 만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6-7절: 찬미와 이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구해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은 찬미다. 자기로써는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커다란 위험에서 기적적으로 도움을 베푸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소리가 퍼지는 것이다. 여기서 찬미는 하느님의 본질을 인정함, 하느님의 그 모든 권능과 존귀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회상’ 부분에서 말했던 바를 다른 말로 반복하는 것이다. 4-5절에서는 ‘물’의 상징을 썼음에 반해서 6절에서는 ‘짐승. 야수’의 상징을 쓰고 있다. 야수의 위험 역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상적인 경험이었다. 사는데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바로 맹수들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6절의 야수의 상징에 이어서 7절에서는 다시 새로운 상징을 쓰고 있다. 사냥, 특히 새 사냥의 상징이다. 여기에서 사냥은 올무나 올가미로 하는게 아니라 그물로 하는 사냥이다. 그물이 찢어져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물의 나무틀이 깨져서 그 속에 있던 새들, 곧 자기들이 도망쳐 나와 자유롭게 되었음을 7절은 그리고 있다. 이 역시 일촉즉발의 위험이다. 그러나 그들이 재수가 좋아서 우연히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이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물은 망그러지고” 했을 때 이는 문법적으로 수동태다. 수동태는 능동태를 전제한다. 곧 그물이 망그러졌다면 그 그물을 망그러뜨린 장본인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수동태가 나오는 많은 경우 바로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지칭한다. 그래서 전문 용어로 신학적 수동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특기할 사실은 이 사냥의 상징을 사냥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새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8절: 신뢰의 고백
마지막 절에 시편은 지금까지 노래한 바를 종합한다. “우리의 도움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그러면서 자기들에게 도움을 베풀어주신 분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고백한다. 즉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이 하느님이 이름이 이스라엘의 보호며, 바로 이 이름을 이스라엘은 신뢰할 수 있다. 이름은 그 주인의 본질을 드러내는 주인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음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해도 좋다는 허락을 뜻한다. 또 더 나아가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어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볼 때 하느님의 이름은 구원의 보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허락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느님께선 창조주시다. 그러나 창조로서 끝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시다. 그리고 당신 백성에게는 구원자시다. 그러한 분이시기에 타민족들에게서도 어떠한 어려움 없이 당신 백성을 보호하실 수 있다. 우리는 시편은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며 시작하고 또 주님을 바라보면서 끝을 맺는다. 소수민족과 약소국가로서 자기들이 무기력을,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 자기들의 무기력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거기에서 창조주로서 어떠한 폭력보다도 큰 힘을 지니신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오면서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큰 민족들과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서 그야말로 생명을 부지했던 민족이다. 서쪽에는 메소포타미아라는 거대한 문명, 남서쪽에는 이집트라는 또 다른 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세계적인 문명 속에 거대한 제국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었다. 이스라엘이 자리잡고 있었던 시리아-팔레스티나는 이 두 문명을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이 다리를 장악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스라엘을 둘러싼 삼면의 사막에서는 유목 민족들이 끊임없이 먹거리를 찾아 농경지를 침략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 탄생 전 천 수 백년 동안의 역사 속에 그 반면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간에만 독립된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시편 129). 어쨌든 시편 124는 이스라엘의 그 고통에 찬 역사를 세 가지 상징을 그려내고 있다. 물, 동물, 사냥, 셋 다 인간의 원초적인 위험과 공포를 나타낸다.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무기력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위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위기는 근본적인 위기면서 동시에 촌음을 다투는 긴박한 위기다. 어떤 기적적인 개입이 없이는 살아남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징으로 우리 시편이 최근에 있었던 어떤 한 사건을 말할 수도 있고 또 다른 큰 가능성으로서 과거에 있었던 여러 위험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곧 이스라엘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그러한 절대절명의 위기들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벗어났음을 절감하고 이를 노래한다. 비록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수많은 고난을 받아 왔지만 유일하신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각이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은 기둥이 되어준다. 이러한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리 강대한 나라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결국 2절2행이 명확히 하는 바와 같이 흙으로 빚어진 인간일 따름이다.
이 공동체가 과거를 되새기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면, 이는 그냥 과거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니다. 뒤를 돌아다봄은 결국 앞을 보기 위함이다. 회상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현존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 그들은 이제 다시 한번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미지의 미래를 향할 수 있게 된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 737-739.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302.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p.165-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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