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6(125)편: 유배 후의 이스라엘 부흥을 위한 기도(순례자의 노래)
들어가면서
1. 시편 제1부는 바빌론의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인의 환희를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때가 온 것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방인들도 하느님께서 그 백성에 대하여 하신 것을 보고 놀라움을 나타낸다(1-3).
그러나 귀환자들은 크나큰 어려움과 여러 가지 환멸에 부딪쳤다. 시편의 제2부를 이루고 있는 청원은 그 쓰라린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손을 대신 이 일을 완성해 주시도록, 그리고 비 온 뒤에 네겝(팔레스티나 남쪽)의 사막에 메말랐던 강에 풍성하게 물이 넘치도록, 모든 포로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또 나라의 부흥을 위하여 고생에 지치고, 눈물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그 고생의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2. 이스라엘의 이 부흥에는 메시아시대의 암시가 있다고 보아도 좋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이때의 완성을 초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배 후에, 마음의 땅을 갈고, 하느님이라고 하는 말씀의 씨를 받기에 합당한 것으로 삼기 위해, 이스라엘의 밭에는 크나큰 일이 남아 있었다. 영적인 이 개간사업은 모두가 속량의 씨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여서, 예언자들과 마음을 다하여 메시아의 길은 마련한 사람들은, 그 일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길은 심한 가시밭 길이어서 그 일에 많은 쓰라린 눈물을 흘린다.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히브, 35-38).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메시아와의 만남을 마련하셨다. 이보다 더 고마운 계획이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하시고(2-3), 참된 해방과 새로운 생활의 기쁨을 주셨다. 정녕 이것은 꿈과 같은 것이었다(사도 2, 17). 비오는 계절에는 물이 늘어 새로운 생활로 되살리는 강과 같이, 백성들은 초자연의 생활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또 구약시대의 오랜 세시에 걸친 파종의 최종 열매가 맺는다는 때가 온 것이다.
3. 성령강림의 날부터 씨뿌리는 일과 거두어들이는 일이 함께 계속된다. 사도들은 씨를 뿌린다. 순교자들도 씨를 뿌린다. 그들의 피는 신자의 씨앗이다. 복음의 선교사도 또 씨를 뿌리고, 동시에 앞서 뿌린 씨의 열매를 영글게 한다. 이런 활동을 통일하는 것은 희망, 인내, 애덕의 협력으로 된 덕이다. 이 덕이 있다면 교회의 창고가 많은 열매로 넘치는 동시에, 씨뿌리는 사람도 거두는 사람도 함께 기뻐할 것이다. 교회의 사람들의 활동을 당신 활동의 하나로 삼으시고, 실제로 씨를 뿌리고 거두는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의 눈물 속에 씨를 뿌리시고, 부활의 기쁨 속에 열매를 맺게 하신다. 교회 안에 사시고, 그리고 영원한 창고에 모아들이는 것은 그 눈물의 열매이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사람의 운명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 씨와 운명을 함께한다. 죽으면 열매를 맺고(요한 12, 4), 슬픔은 기쁨으로 바뀐다(1코린 15,36).
이 시편의 6절의 신비스러운 뜻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와 아울러 사도직에 의한 교회의 그 신비에 대한 참여가 나타나 있다. 어느 날엔가 주님께서는 죄수들을 조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1-4). 그때 하느님께서는...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묵시 21,3-4). 그리고 눈물 속에 씨를 뿌린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거두고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5-6).
4. 이 시편에는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오는 추방자의 기쁨이 숨 쉬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편을 가지고서, 죄지은 후에 회개의 길로 돌아오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하는 기쁨을 나타낼 수가 있다(사도, 13,52). 그러나 이것은 또한 희망의 시편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성실하게 하여도 때로는, 온갖 환멸에 부딪친다. 그런 때에는 이 시편의 말이 깊은 위로가 된다. 이 세상에서 하는 그리스교적 생활은 씨를 뿌리는 때다. 우리는 씨를 뿌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시편을 주해하며, 우리의 씨는 우리의 착한 일, 우리의 자비로운 행실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이 씨를 뿌리자. 그리고 이 경우 중대한 것은 주는 것이 많고 적은 것이 아니라, 줄 때에 지녀야 할 착한 마음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여러 가지 고생과 어려움을 만난다. 농부의 경우도 씨를 뿌릴 경우, 언제나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는 거두는 계절에 열매를 한 톨 거둘 수 없다는 실망을 면하기 위해 너그럽게 희망을 가지고 씨를 뿌린다.
바오로 사도는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갈라 6, 7-10). 하느님께서는 뿌릴 씨를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십니다.“(2코린 9, 6-7,10).
Text 안에서
시편 126편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매몰되어 삶이 황폐해지고 사막처럼 변하게 될 때, 기적은 같은 방법을 알려준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 시편은 제2주간 수요일 저녁기도, 사도 공통 2저녁기도, 낮기도 보충 시편에 사용된다.
시편 126편의 문제는 각 동사의 시제에 있다. 한국어 번역본에 의하면 1-3절의 동사들은 과거형, 4-6절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1-3절이 과거형과 미래형, 부정사형의 혼합으로, 5-6절은 미래형으로 등장한다. 더구나 4절에는 다른 문장들에서 발견되지 않는 명령형이 등장한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한데, 적어도 분명한 것은 1-3절과 4절, 5-6절이 내용상으로도 분명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1-3절은 하느님이 개입으로 운명적 전환을 일으켰던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는 반면, 4절은 구원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5-6절에서는 구원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는데 모두 미래적 관점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시편 85편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되어 있다. 역사적 회고가 전반부에 등장하고(1-3절), 백성들의 탄원과 간청이 이어지며(4-7절), 구원에 대한 약속이 주어진다(8-13절).
시편 126편에서 우선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1-3절에서 언급하는 사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귀환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데, 귀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그들을 웃음과 환성 속에 있게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시편 126편의 제작 시기는 귀환사건(기원전 538년) 이후임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어지는 4절이다. 지금까지의 환희와 기쁨을 뒤로하고, 다시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탄원하는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4절은 귀환 이후 공동체의 사회적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 이사야서 59장 9-11절은 그때의 혼란을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공정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고 정의는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슬피 울면서 공정을 바라건만 오지 않고 구원을 바라건만 우리는 귀환과 귀환 이후의 곤란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1-3절
126편은 ‘순례자의 노래’ 그룹에 속한다. 노래는 하느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려 놓으셨다는 선포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언급된 시온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한다. 그곳의 성전에서 이스라엘이 모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집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1절에서 흥미로운 것은 운명을 되돌린다는 표현이다. ‘돌려놓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와 ‘운명’이라는 표현은 원래 같은 어원 ‘슈브’에서 파생된 말인데, 이는 결국 히브리인들의 의식 안에서 운명이란 가장 본래적인 상태, 모든 것에서 돌아오고 다시 돌아와 가장 처음 삶이 시작되던 바로 그 자리 그 상태를 말함을 짐작하게 한다.
시편 본문은 이러한 현실이 그들에게 너무도 큰 기쁨이어서 마치 ‘꿈만 같았다.’고 묘사한다. 2절에서는 이러한 행복을 ‘웃음’과 ‘환성’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하는데, 이는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시편 79, 10; 115, 2)고 수군대던 이민족들의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민족들의 증언은 하느님의 개입과 그로인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단서가 된다. 3절의 언급은 2절에 대한 일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업적과 그로 인한 기쁨을 다시금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4절
그러나 이제 탄원과 간청이 등장한다. 그들의 운명을 되돌려 달라는 내용이 다시 언급되는데 이를 명시하기 위해 “네겝 땅의 시냇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남쪽 지역 사막 근처에 위치한 네겝은 그야말로 건기에는 모든 것이 말라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기로 접어들어 비가 오기 시작하면 물이 가득 차 모든 것이 생명줄이 되며, 그 시냇물은 인간 거주지까지 풍부한 물을 공급해 준다. 결국 기도자가 네겝의 시냇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한때는 강력한 물줄기로서 생명이 넘치던 이스라엘이 이제 그 어디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전락하였음을, 그리하여 그 원래적 생명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5-6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4절의 간청에 대한 일종의 미래적 응답과 위로가 제시된다. 특별히 6절은 5절의 내용을 보다 장엄하게 선포하는데, 이는 하나의 문학적 기교를 통해 제시된다. 서두에 속하는 2-3절의 경우, 2절의 내용을 3절이 요약하고 있었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5절의 내용을 6절이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씨를 가지고 가던 이들이 곡신단을 들고 돌아온다는 표현은 귀환 공동체의 자의식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암시한다. 유배와 귀환의 혼란은 하느님의 주도권 안에 이미 계획된 수확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시련을 통한 본질적 수확이 유배의 목적이었던 것이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그 결과물을 얻고 돌아오게 된다.
끝으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위한 하느님의 과거 해적을 묵상한다. 그것은 하나의 실현된 꿈이었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을 회고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여전히 그들의 곤경 속에 다시 개입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결국 본래적 힘을 되찾게 해달라는 간청이 이루어지고 그 응답도 주어진다.
네겝의 시냇물처럼 생기발랄했던 자신이 어느덧 바싹 말라버린 고랑이 되었음을 인식할 때, 그 냉혹하고 황폐한 가난함은 진정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한 조건이다. 또한 하느님을 통해 다시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을 돌려놓는 일임을 안내한다. 그렇게 진실하고 간절하게 삶을 열망하게 될 때 평화롭고 고요한, 모든 것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지혜가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삶이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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