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122(121): 예루살렘의 평화

마리아 아나빔 2012. 12. 2. 20:24

 

  

 

 

                                시편 122(121): 예루살렘의 평화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예루살렘 문 앞에 이른 순례자들이, 거룩한 도성에 보내는 인사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도성을 떠나려하는 순례자의 이별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첫째, 오랜 나그네 길의 목표인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목표였던 도성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서 감회이며, 둘째는 주님 옆에서 보낸 나날의 회상이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차, 그들은 언제까지나 거룩한 도성에 대한 향수를 다시 외국으로 옮겨 가려하고 있다(1-5).

감탄과 기쁨의 감정을 나타내고나서 거룩한 도성에 대한 소망이기도 한 기도를 바틴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를 외쳐라. ‘네 집안에 평화!’ ‘네 성안에 평화!’ ‘궁궐 안에 평화!’ 내 거례, 내 벗들을 나 사랑하거늘,‘너 에게 평화!’ 외치게 해다오.”(6-9).

 

예루살렘은 약속의 땅의 심장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는 그 곳에 당신의 거처, 곧 성전의 건립을 승낙하였던 것이다. 뽑힌 백성의 도성 예루살렘과 하느님 현존의 거룩한 장소인 성전은, 이스라엘과 그 주님 사이에 성립된 일치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은 백성과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뽑힌 백성이며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가 자신에 대한 부르심, 자신의 통일, 자신의 위대함을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오직 한분 참 하느님께 대한 예배가 이루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또한 오랜 세기에 걸쳐서, 메시아적 희망의 중심이었다. 여기에서 언젠가 하느님과 성조가 주고받은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빌론 유배 때에도 이스라엘 동포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외부적 예배에도 무엇인가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은, 이 도성을 자기네 마음 안에 가지고 있다고 느끼며, 그 도성이 하느님께 돌아간다고 하는 것의 상징이 되고, 자유에 대한 동경, 새로운 계약,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의 상징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신비적으로 점차 자기네의 성조들에게 정신적인 연력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조망은 복음서에 있어서 새로운 백성이라고 하는 것에 구체화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새로운 백성 중에, 성전 안과 같이, 당신 거처를 두시고, 그 새로운 도성은 살아 있는 돌로 세우신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처럼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는 것이다(요한 4, 21-24). 즉 하느님이 영이시기에 진실되게 영적으로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사람과 당신이 만나기 위한 참 성전은 당신의 몸이시라고 선언하고, 새로운 성전을 터전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드셨던 것이다(내가 사흘 안에 이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8-19). 따라서 신약에서는 성전과 예루살렘이 하나의 현실이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이며 교회는 또 하느님의 성전이다.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에서 히브리인의 예루살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그 영광은 교회 안에서 더 늘었고 호화로움을 자랑한다. 새 예루살렘의 평화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이고 새로운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이 우리의 등불이시다(묵시록 21, 10-27).

 

또한 시편 122편은 우리의 영적 나그네길에 초점을 맞추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믿음의 일치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깊은 기식에 이르고, 성숙한 그리스도의 키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에페 4, 12-13). 우리는 이 초점에 가까이 가고 교회에 속한다는 기쁨을 느끼며 형제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평화와 안심이라고 하는 은혜를 느낄 것이다.

 

 

Text 안에서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는 시편이다. 온 세상, 특히 성지 예루살렘과 근동 지방의 현재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 순례자의 기원은 과거의 노래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편은 순례의 노래 그 세 번째이다. 이 시편은 분명하게 “주님의 집”“예루살렘”등을 이야기하고 있고 또 무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이 자신과 함께 있는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한 사람이 다른 순례자들을 향하여 말을 하고 있는듯한 인상을 준다. 어떤 이들은 이 시편에 대해서, 이것은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살롬”하고 인사하는 장면이라고 묘사한다.

 

이 시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1-2절에서는 순례 길을 나서던 때를 회상하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한다. 2절을 보면 순례자가 도성 안까지 이미 들어간 것은 아닌듯한 모습이지만, ‘성문’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의 공동체를 위하여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 장소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것은 이 부분이 예루살렘을 향해 직접 2인칭으로 말을 걸며 끝맺는다는 것이다(“내 성문에”. 3-5절의 단락은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며, 예루살렘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이야기 한다. 마지막으로 6-9절에서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는데. 1절에서와 같은 화자가 다시 1절에서와 같은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 이 세절에서는 먼저 예루살렘의 건축물을 언급하고 그 다음에는 형제와 벗들 등 예루살렘의 공동체를, 마지막으로는 성전 곧 예루살렘의 신학적 차원을 언급하면서 그 모두에 평화를 기원하고 이다.

 

이 시편의 역사적 배경은 정확하게 어느 시대에 작성된 것이지를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시편의 경우 특히 예루살렘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 예루살렘의 모습을 기리는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의 여지가 있다. 현재 예루살렘에 다윗 왕조의 임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 시편에 사용된 단어들이나 문장들을 볼 때에 시편의 작성 연대는 실제로 예루살렘에 다윗 후손인 임금이 있는 시대는 아니라고 본다. 어떤 이들을 이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서 5절의 “놓여있네”를 과거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편은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무렵을 배경으로 할 것이다. 저자는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전이 바빌론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가 50년 이상이 지난 다음에 다시 재건된 상황에서 그 도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2절: 순례의 목적지인 예루살렘

 

이런 배경에서 이 노래의 서두에서는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라고 환호한다. 아마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을 순례자는 그가 길을 떠나던 순간을, 공향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나서던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이미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를 기대하며 기뻐했고, 지금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주님의 “집”이라고 일컫는 것에 대해서, 이러한 표현이 그곳에 거처하시는 하느님께서 성전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집”을 제공해 주신다는 개념을 드러낸다고 본다. 우리는 순례의 노래 전체의 주제를 염두에 두면서 주님의 집인 성전과 집을 향한 여정인 순례이다. “집”과 “순례”라는 개념이 잘 표현된 데가 시편 23,5-6이다. 하느님께서 원수들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술잔을 채워 쥐신다는 것, 그리고 다시 성전을 떠나 험한 세상으로 돌아갈 때에 당신의 “호의와 자애”를 함께 보낸 주신다는 것은, 바로 성전에 계신 하느님께 서 마치 손님을 맞는 집주인처럼 당신을 찾아오는 순례자를 맞아 주시고 순례자가 성전을 떠날 때에는 다시 당신의 “호의와 자애”를 동반자로 보내시어 가는 길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전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현존은 이 세상을 걸어가는 순례의 여정 동안에도 “나를 따른다”. 이러한 집은 세상에서 언제나 떠돌이같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마음 붙일 거처를 마련해 주신다는 의미가 되고(“저는 당신 집에 사는 이방인, 제 조상들처럼 거류민일 따름 입니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돌아 오리이다”로 번역하면 지금 나는 편안한 집과 같은 주님의 성전을 떠나 거친 삶 속으로 떠나가지만 나중에 다시 주님의 현존을 누리기 위하여 그분께서 계시는 성전으로 되돌아오겠다는 의미가 된다. 어느 경우이든 하느님 안에서 보호를 받고 평온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인 “주님의 집”,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그만큼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아닌 일상의 살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당신을 찬양하리니,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여기서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한다는 것은 실제로 삶의 현장을 떠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지 못하지만, 영적으로 주님의 집에 돌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그 기쁨을 기억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힘을 얻은 사람들은 “바카 계곡”, 곧 눈물의 계곡을 지나면서도 샘물이 솟게 한다(84,7).

 

이것은 순례시편 전체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구약의 법전들에서 1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하게 했던 것, 우리가 적어도 주일에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순례의 기쁨은 신명기에서는 축제의 기쁨과 연결되는데, 보통 사람은 성전 안에서만 평생을 살 수도 없고 1년 내내 축제를 지내고만 있을 수도 없다. 이처럼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는 그날까지 순례자들이다. 따라서 진정 우리가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곳은 하느님의 성전, 그분께서 계시는 성전이기에 이 시편은 그 성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곳에서 받는 축복을 기억함으로써 삶 안에서 성전의 그 체험을 재현한다.

 

 

3-5절: 예루살렘의 신학적 의미

 

3-5절에서는 예루살렘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것은, 도성이라는 것은 들판에 있는 마을과는 달리 그 안에 방어 시설인 성벽과 탑이 있어서 주민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곳인 동시에, 경신례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 위에 특별히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어떤 도성들과도 구분되는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하여 순례자는 첫째로, “예루살렘은 도성으로 세워져 견고하게 짜여졌네.”라고, 다른 시온의 노래들에서처럼(시편 48참조)튼튼하게 세워진 예루살렘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한번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성전 재건(520-515년) 성벽재건(기원전 445년)은 단순히 외형적 복구가 아니라 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의 침략으로 허물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시편 137편; 애가 2,1 참조). 이렇게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 이스라엘은 그 예루살렘이 복구되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당신의 호의로 시온에 선을 베푸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시편 51, 20)라고 기도하고, 주님께서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당신 영광 속에 나타나실 때”라고 보며(시편 102편 17), 성벽이 재건된 후에는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들을 모으신다.”라고 그분을 찬양한다(시편 147, 2). 무너진 성전과 성벽의 재건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신학적 재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야훼의 백성인 이스라엘 지파들의 종교적 중심지임을 이야기 한다.(“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는구나, 주님의 지파들이”) 히즈키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거쳐 경신례의 중앙 집중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시대 이래로 한 국가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다음에는 이전보다 더 강하게 경신례의 중심이 되었으며, 요시야 이후로는 신명기계 법전에 따라(시편 122,4:“이스라엘을 위한 법”) 유일한 성소로서 정치적, 종교적 통일의 중심이 되었다. 모든 지파가 법률 규정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신명 16,16:무교절과 주간절 그리고 초막절). 이 절에 사용된 “주님의 지파들”(“야”의 지파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특별하다.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인 여러 지파가 단지 혈연으로 서로 결합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 주님과 계약을 맺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는데, 여기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그 일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5절에서는 “재판하는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를 이야기 한다. 4절에서 “지파”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었다면 이 번 절에서는 “왕좌”가 반복된다. 예루살렘은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윗 왕조는 단순한 정치 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하여 뽑아 세우신 임금으로서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대로 이스라엘의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고,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에서의 정치권력은 어디까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당신 백성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끌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시편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다윗 집안”이라는 표현과 “주님의 집” “주 우리 하느님의 집”(1,9절)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것은 의미가 깊다. 2사무 7장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이 자신이 궁전을 지은 다음, 자신은 궁궐에서 사는데 주님의 궤는 아직도 천막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성전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성전을, 주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할 때, 나탄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다윗 임금에게 전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집안을, 왕조를 일으켜 주겠다고하시는 것이다. 이 약속 때문에 다윗 왕실은 단지 정권을 쥔 한 가문이 아니라 하느님께 선택하신, 그분의 약속으로 보증을 받은 왕조가 된다. 이런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처음부터 다윗 왕실에 반대하여 갈라져 나가 새로 만들어진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정권 교체가 계속해서 있었지만 남 왕국 유다에서는 정통 다윗 왕조가 바빌론 유배 때까지 이어진다. 다윗의 후손이 아니고서는 왕조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편 122가 다윗 가무누의 왕좌가 있던 곳이었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뜻에 맞는 정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해 가는 중심지였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6-9절: 예루살렘을 위한 기원

 

시편저자는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세 가지 측면에서 지적했다. 그런 다음 6-9절에서는 그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기원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3-5절에서와 같이 과거에 지녔던 역할을 미래에도 온전히 행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라고 말한다. 어느 집에 들어갈 때, 또 어떤 도시에 들어 갈 때 평화를 기원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예루살렘(히브리어로 여루살라임)이라는 ‘이르- 샬롬(평화의 도시)’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은,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 자신의 이름대로 살 수 있기를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해서도 평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샬롬’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즉 단순히 소극적 의미로 평온함 내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온전하다’ ‘가득하다’ ‘채우다’라는 동사이고, 거기에서 파생된 명사 ‘샬롬’은 가득함, 온전함, 건강함, 풍요로움, 만족스러움, 부유함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더 바랄 것 없이 가득 채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인사를 할 때 ‘샬롬!’하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전쟁이나 큰 불화가 없기를 기원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에게 충만한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 된다. 이 시편이 예루살렘에게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그만큼 평화가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재건된 후에도 역사적으로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태평성대는 길게 잡아서 솔로몬 시대까지이고 그 이후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예루살렘의 역사는 언제나 강대국들에게 치이고 밀리는 역사이다.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 집안의 왕좌”를 이야기하며 예루살렘의 전역사를 기억하지만, 이 시편이 작성된 시대의 예루살렘은 파괴를 겪었고 귀향 이후의 여러 가지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재건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시편 저자는 재건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새 역사를 기원한다. 그 새 역사는 힘으로 서로 정복하는 폭력의 역사가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장막을 치신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의 역사이다.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시편 51편이나 시편 147편에서 예루살렘이란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며, 예루살렘의 평화에 대한 희망은 제 3이사야서(60;62), 예레미야서(31;33)등에서 종말론적 전망으로 열리게 된다(이사 62, 1-3). 이러한 표상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묵시 21-22(어린양이 등불이 되어 주는 해와 달이 없는 도성)에 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들이며, 그 완성의 날을 기다린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며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은 그날이 이르지 않았음을 알기에 우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기원한다. 기다림에는 긴장이 있듯이, 우리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올” 그날까지 우리는 평화를 빌며, 아니, 평화를 심으며 살아간다. 평화에 대한 갈망이 큰 만큼, 우리도 예수님처럼 많이 울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손으로 닦아 주실 눈물이다(묵시 21,4).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5,9)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727-731.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 300.

               시편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생활성서,안소근,

               2011, pp. 229-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