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137(136): 유배된 사람의 노래

마리아 아나빔 2013. 3. 24. 15:38

 

 

 

                                    시편137(136): 유배된 사람의 노래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과 바빌론 유배를 생각하는 노래이다. 바빌론 군은 당시 문명국을 파괴하고 약탈하며, 사람들을 잡아다 자기 나라에 데리고 가 노예로 부렸다. 나라들에 대한 상벌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폭력과 부정으로 융성을 바라는 나라는 다른 폭력이나 부정에 의해서 타도된다. 모든 시대의 대제국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을 생각할 때 이 한 구절은 참으로 잔혹한 것처럼 들리지만, 당시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했다.

 

고국에 돌아온 시편작가는 이스라엘인이 바빌론 강가에 앉아, 머나 먼 조국을 회상하며 있었을 때의, 그 포로생활의 슬픈 나날을 떠 올리고 있다. 압제자들은 시온의 유쾌한 노래를 들려 달라고 강요하지만, 자기네는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 놓고 있었다(1-3).

 

남의 나라 땅에서 어떻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우상숭배의 땅에서 주님 앞에 성전에서 읊었던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예루살렘의 회상과 폐허가 된 거룩한 도성에 대한 정성은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지만,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한 이교도의 땅에서 자기네 하느님의 거룩한 노래를 부르라는 것은 범죄로까지 보였던 것이다(4-6).

 

시편작가는 예루살렘을 파괴하라고 교사한 에돔인에 대하여, 또 남김없이 다 파괴한 바빌론에 대하여, 저주의 말로 마무리한다. 여기에는 반좌의 형이 나타나 있다.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 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8) 이 시편은 당시 지은 서정시의 걸작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그 얼마나 강한 표현, 가장 사랑하던 것을 모두 잃은 사람의 눈물, 이렇게도 격심한 고통을 빚어낸 것에 대한 격한 분노, 거기에는 자신의 땅에서 뿌리째 뽑히고 가장 깊은 애정을 단절당한 한 민족의 드라마, 마음이 가장 강하게 고집하고 있는 감정조차도 빼앗긴 백성의 비애가 있다. 시편에는 자기네의 죄 때문에 참고 견디어야 할 이 큰 시련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기술되어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시편에서 암시하고 있는 사건에 대하여, 탈출기의 역사에 대하여 말한 “이것은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악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본조기입니다.(1코린 10,6). 바빌론은 하느님께 대립하여 자라는 이 세상 사회의 상징이며, 사람의 갖가지 이기심과 사욕의 결과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빛에 찬 모습으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혼례를 준비하는 단장한 신부처럼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것은 평화의 초자연적 광영과 빛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며, 거기에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 사는 것이다(요한묵 18, 21장)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죄 때문에 유배된 망명자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노예의 눈물을 영원한 자유의 기쁨으로 바꾼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바빌론과 예루살렘의 뿌리가 강하게 내리고 있다. 그것은 온갖 사욕을 포함한 육체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이다.

 

 

 

Text 안에서

 

이 시편은 공동 탄원 시편으로 시작하여 찬양시편으로 이어졌다가 저주로 끝난다(궁켈). 기도자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원수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어떤이는 이 노래를 시온의 노래의 한 변형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이 시편에는 ‘시온’ 또는 ‘예루살렘’을 언급하는데, 다른 시온의 노래들에서 예루살렘의 훌륭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7절에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시온을 파괴한 이들에 대한 저주가 나오고 있다. 또한 다른 시온의 노래들에서는 시온의 불가침성, 곧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적들을 물리쳐 주신 것을 노래하는 반면(시편 46, 48) 이 시편에서는 예루살렘의 패배를 기억한다. 이렇게 시온의 노래에 나타나는 주제들과 탄원시편의 형태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기도자가 처해 있는 상황 때문이다. 저주시편을 전례에서 뺄 수는 있지만 성경에서 삭제할 수는 없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라는 구절은 분명 유배를 말한다. 이에 이것을 기억으로도 또는 현재의 상황으로도 이해한다. 이에 많은 저자는 이것이 현재의 상황으로 보는데 그럴경우, 이 시편은 전체가 유배중이 된다. 사실 이 시편은 유배의 체험을 매우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바빌론 유배가 있는 이스라엘인의 나날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한편, 다른 공동 탄원시편이나 애가에서처럼 유배의 원인과 의미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유배가 이스라엘의 죄에 따른 결과라는 개념은 들어 있지 않다. 이점에서 이 시편은 직접 유배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 썼으리라고 생각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1-3절는 역사적 과거에 대한 기억이고 현재 기도자는 유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1-4절과 그 다음 부분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3-4절에서 기도자는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말하는데, 6절에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노래하지 않는다면 혀가 입천장에 붙으리라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 지금 처지가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유배의 상황이라면 이러한 저주는 성립되지 않는다. 1-3절의 “거기”라는 부사는 유배지와 공간적 거리를 나타내고, 동사의 시제도 과거에 대한 진술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등의 지적은 근래 해석의 추세이다.

 

유배 중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막상 그리던 땅으로 돌아와서는 여러 가지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들 속에서 복구가 지연되고 이전의 열성이 오히려 식어가고 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유배후의 예언서들과 느헤미야기 같은 역사서들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제2이사야가 선포했던 귀환의 기쁜소식은 제3이사야에 미루어서는 ‘왜 약속된 구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가?’라는 회의로 바뀌었고, 즈카르야서와 특히 하까이서에서 말하듯이, 어려운 나날의 삶에 지쳐 있던 이들은 아직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에 시편 137편의 저자는 유배지에서 얼마나 예루살렘을 그리워했었는지를 상시키시며 예루살렘을 잊지 않도록 이스라엘을 다시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편의 작성 연대는 유배에서 돌아온 직후, 아직 성전과 성벽이 복구되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본다. 저자에 대해서, ‘비파’ ‘시온의 노래’ 등이 강조되는 점으로 보아 성전에서 음악을 맡고 있던 레위인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시편의 전체적인 구조는 1-4절에서는 유배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회상한다. 이 부분은 ‘바빌론 강 기슭’ ‘남의 나라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화자는 ‘우리’이다. 1-2절에서는 성전 음악을 담당하던 이의 슬픔을, 3절에서는 바빌론인들의 조롱을 묘사하며, 4절에서는 다시 슬픔을 표현한다. 5-6절은 ‘내’가 ‘예루살렘’에게 직접 말을 하고 있어서, 저자 자신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루살렘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한다. 7-9절은 저주로, 7절은 에돔을, 8-9절은 바빌론이 대상이다.

 

1-4절: 유배의 기억

 

이 부분에서는 동일한 전치사를 세 번 사용하면서 과거에 유배가 있던 장소를 계속 강조한다(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거기 버드나무에/ 남의 나라 땅에서). 이것은 1절에서 한번 언급된 “시온”과 대조를 이룬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시온의 노래들이 하느님의 도성 시온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 시온의 신성불가침성을 노래하는 것과는 반대로, 여기에서 시온은 공격을 받아 멸망의 비극을 겪고 있다. 여기에 표현되는 이스라엘인들의 고통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바빌론에 가 있는 이들의 외적상황은 3절에서처럼 포로로 잡혀 가있는 것이다.

 

1절에서 “앉아”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거주하다’‘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바빌론의 수로 주변에서 일하며 살고 잇는 처지를 표현한 것이 될 수 있다. 성경에서 “강”은 ‘수로’이다. 바빌론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같은 큰 강들과 그 지류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많은 인공 수로가 있었고 그것이 도시의 형성과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엘제키엘서에 나오는 “크바르 강”도 그 수로 가운데 하나인데, 바빌론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을 포함하여 포로로 끌고 온 여러 민족에게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와의 전쟁으로 파괴된 수로들을 복구하는 일을 시켰다. 유배지에서 수로를 복고하던 이스라엘인들의 처지는, 모세 시대에 이집트에서 피톰과 라메세스 같은 도시를 세우기 위해 강제 노역을 하던 상황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1절에서나 7절에서나 “생각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기억하다’를 뜻하는데, 유배의 상황에서 시온을 기억할 때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라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서 살고 있던 이들이 예루살렘 함락을 애도하며 단식하고 기도했듯이 유배지에 있던 이들도 시온을 애도하여 울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대에는 멸망한 도시를 마치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듯이 애도하는 문학양식이 있었다. 구약성경의 책들 가운데에서도 애가는 책 전체가 예루살렘을 애도하는 조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시편에서 저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억’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온이 멸망하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서 지상에서 머무시려고 택하신 장소인 시온은 무너질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시리아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시로-에프라임 전쟁), 이사야는 아하즈 임금에게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다(시편 46,8). 예루살렘의 불가침성에 대한 믿음이 더욱더 강해진 것은 이사 37장에서 전하는 사건 때문이기도 하다. 히즈키야 임금 때(기원 701) 아시리아의 산헤림이 유다를 침공했는데, 역사적 사실로 말하자면 수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온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은 기적적으로 멸망을 면했던 것이었다(이사 37, 35-36). 시온(성전)에 대한 이런 신학적 이해를 지니고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이 바빌론의 손에 함락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실제로 일어난 후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시편저자가 예루살렘에서 전례 음악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게 제기 될 수 있다. 그는 시온에서의 전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시온 신학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파괴한 이들의 땅에서 성전 전례에 사용되던 비파를 걸었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처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3절의 상황은 유배 중의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을 절절히 드러내 보인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 “우리의 압제자들”이 그들의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곧 시온이 하느님께서 택하신 곳이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이며 그래서 신성불가침하다는 찬양의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자신은 성전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부를 수 없는 상황을 슬퍼하며 비파를 버드나무에 걸어 두었는데 , 압제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흉을 돋우기 위하여 그 노래들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다.

 

4절의 말은 3절의 상황에서 바빌론인들에게 했던 직접적인 대답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바빌론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시온의 노래’가 “주님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배 중의 이스라엘인들을 하나로 집결시켜 주는 믿음의 표현이다. 이 노래들은 유배가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던 이들의 영적저항이었다. 이 노래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그들이 종교적으로 바빌론에 동화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고, 그들을 하나로 뭉쳐 주었으며, 그들이 충실성과 희망을 간직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시온의 노래’가 바빌론인들의 것이 될 수 없다. 고대의 사고에서 주님의 도성이 바빌론에 함락되었다는 뜻은 바빌론인들의 신 마르둑이 이스라엘의 주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인이 마르둑을 섬기는 바빌론인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곧 주님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님이 바빌론에게, 마르둑에게 굴복하는 것을 뜻했다. “주님의 노래가 이교도를 환영하는 수단으로 격하될 때는 하느님의 거룩성을 침해받기 때문이다.”(바이저) 시온의 노래는 압제자들에게 굴복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슬픔 속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5-6절: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

 

5-6절의 해석이 엇갈리지만, 유배 중의 저자가 바빌론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른 다면 그것은 시온을 잊는 셈이 되리라고 생각하며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본다(궁켈). 반면 2절과 5절사이에서 화자가 변하고(우리에서 나로) 또한 “시온”이라는 3인칭으로 이야기하다가 “예루살렘”이라고 2인칭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유배에 대한 회상은 4절에서 끝나고 여기서부터는 현재 시점의 진술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예루살렘은 의인화되며, 기도자는 그 예루살렘에 대하여 흔들림 없는 충실한 사랑을 맹세한다. “내 기쁨의 절정 위로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그는 이제 예루살렘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상황을 생각한다면, 유배는 끝났고 이스라엘은 고국땅에 돌아왔으나 복구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페허가 된 도시는 아직도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도 예루살렘을 그리워했건만, 지금 여기에 와서는 어느새 그 열성이 식었단 말인가“ 시편저자는 스스로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에게 일깨운다. 예루살렘의 재건을 ”내 기쁨의 절정“보다도 더 들어 높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까이 예언자가 주장하듯이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두절에서 ‘잊다’와 ‘생각하지 않다’ ‘기억하지 않다’는 동의어이며, ‘오른손이 마른다는 것’과 ‘혀가 입천장에 붙는다는 것’은 무엇을 행하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대한 저주는 맹세를 지키지 않을 때에 받게 될 벌을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엄숙하게 맹세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그의 손은 비파를 타야하고, 그의 혀는 시온의 노래를, 주님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의 손과 그의 혀는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예루살렘을, 주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7-9절: 저주

 

7절에서는, 주님을 향하여 “생각하소서(기억하소서)”라고 말한다. 1절에서 시편저자가 유배지에서 예루살렘을 기억했고 6절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말을 하면서 그가 예루살렘을 기억할 것을 맹세했던 반면, 7절에서는 ‘주님’께서 기억의 주체가 되신다.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개입하시어 상황을 역전하시는 계기가 된다. 이스라엘이 곤경에 빠져 잇을 때, 그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하느님께 되돌아올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그들의 하느님이심을 기억하시어 이스라엘을 다시 당신 백성으로 품어 아껴주시는 것이다. 지금 7절에서도 기도자는 하느님께 ‘기억’하시기를, 곧 당신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시기를 청한다.

 

7절에서 에돔을 저주하는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함락 때 했던 일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는 야곱과 에사우의 관계, 곧 형제이면서 원수인 관계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이고, 에돔은 에사우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에돔 땅에는 풍부한 광산이 있었고 또 중요한 교통로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그 땅을 탐내었고, 다윗은 잔인하게 그 땅을 점열하기도 했다. 후에 에돔은 독립을 되찾았으나 과거의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에는 바빌론과 손을 잡고 유다를 멸망시키는 데에 한 몫을 했고 그 기회에 헤브론 땅을 점령하여 거기에 자신들의 수도를 세우기까지 했다. 7절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의 그날”은 바로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던 날, 에돔이 원수에게 협력하던 그날이다. 이후로 유다 편에서는, 에돔이 이렇게 옛 원한을 보복한 것에 대한 깊은 미움을 성경 여러 곳에서 드러낸다.

 

그러나 핵심적인 원수는 8-9절에서 언급된 바빌론이다. 여기서 “바발론아”는 “바빌론의 딸”인데, 이것은 “바빌론 도시와 주민. 또는 바빌론 제국 자체를 의미한다.” 이어서 나오는 “파괴자야”는 히브리말로 “파괴될 자여”로 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원전 539년에 있었던 키루스에 의한 바빌론 점령이 그와 같은 전적인 파괴는 아니어다는 점을 고려할 때, ‘파괴된 자’보다는 ‘파괴 될 자’로 번역이 더 문맥에 합당하다. 7절에 에돔이 예루살렘을 멸망시켜려 했듯이 바빌론도 그와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9절의 표현은 더 강한다. “잔혹했던 고대의 전쟁 중에 도시를 함락한 뒤 빈번하게 일어났던 강탈과 파괴의 장면을 가리킨다. 전례기도 때에 심리적인 어려움을 느낄 정도의 강한 표현들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과 연관하여 우리가 처음에 제기했던 저주시편의 문제이다. 저주시편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때 보이는 흔한 반응 가운데 하나는 구약성경의 윤리가 신약성경의 윤리, 그리스도교의 윤리보다 못하다고 판단을 내려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 137 역시 분명히 우리의 성경에 속하는 본문이다. 이 시편과 다른 저주시편들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 관점, 곧 복수의 주체, 복수의 목적, 그리고 저주를 기원하는 시편 저자의 상황을 헤아려야 한다.

 

복수의 주체는 137, 8-9절에서는 복수를 하는 주체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이 두절은 행복선언으로 되어 있는데, 성경에서 행복 선언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한 번도 하느님께 적용되는 일이 없다. 그렇다면 바빌론에서 보복을 하는 이는 어떤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서 에돔에 대한 보복과 바빌론의 멸망이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지든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복수는 주님께 속하고, 그 하느님의 복수는 무너진 정의를 다시 세우는 올바른 심판으로 간주된다. 자신이 당한 불의에 대하여 별다르게 보상을 받을 길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으려 했다. 그러나 인간의 복수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고, 받은 피해에 비해 더 큰 앙갚음을 하기가 쉬웠기에, 이런 식으로는 정의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눈에는 눈” 이라는 동태 복수이다.

 

동태 복수의 본 의도는 ‘받은 피해만큼 되갚아도 된다’라는 것이라기보다는 복수를 최소한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선으로 제한하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오게 되는 것이 복수 금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에게 복수가 금지되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정의를 세워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도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를 해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저주시편에서 하느님께 복수를 청하는 것은 그래도 최소한 하느님을 향한 기도이고, 스스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시편 94편에서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 보복하시는 하느님, 나타나소서. 세상의 심판자시여, 일어나소서, 거만한 자들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편 137편에서 말하는 이것은 깊은 금욕과 무력함 속에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복수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올바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복수의 목적은 즉 하느님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세상과 그 역사가 하느님의 손에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위협받고 있기에 시편 저자는 하느님께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시기를 청하고 있다. 사실 이 세상의 현실은 믿음과 모순되어 보인다. 시편 137의 저자가 처해 있는 상황 역시 그러하다. 이때에 하느님께 정의로운 심판을 요구하는 시편 저자가 가진 믿음은 이세상의 불의는 하느님의 통치권을 모독하는 것이고 다른 인간들을 거스른 죄는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이기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심판하셔야 한다는 것, 온통 불의하게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 언젠가 당신 정의를 드러내시리라는 확신이다. 하느님께서 끝까지 침묵하신다면 불의를 묵인하시는 셈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심판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심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다.

 

시편 137편은 정치적 측면에서 당시의 강대국이 주변의 약소국에 행한 잔인한 침략에 저항하는 것이다. 다른 시편들의 경우 상황은 다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겪는 불의에 대한 호소일 수도 있고, 사회 내부의 갈등일 수도 잇다. 어떤 경우이든, 탄원의 원인이 되는 이러한 불의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으면서 저주시편의 강한 표현들만 그리스도교 윤리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흔히는 위선적이다. 불의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저주시편을 보면서 오히려 그 억압받는 이들을 비난한다. 실상 저주시편은 저자가 삶의 상황들에 대해 보여준 반응들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불의 하게 고통당한 이들에 대한 연대성을 가질 때 이해가 가능하다. 특히 교회의 기도인 시간 전례가 온 세상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라면, 저주시편을 통해 어쩌면 우리는 이 기도에 포함되어 있는 이 가운데 가장 억눌리고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오직 하느님의 정의에 매달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 목소리 하느님께 올려 드리는 것일 것이다.

 

폭력은 은폐하게 되면 그 폭력에 걸려들 수 있다. 폭력의 특징은 변장하는 것, 숨어 잇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식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탄원, 저주시편은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든 불의에 저항하는 부르짖음이다. 저항을 침묵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격상의 장애를, 지신하지 못한 태도를 가져온다. 이를 표현하는 것은 필수적요소이다. 하느님께서도 욥의 친구들이 아닌 욥이 옳았다고 말씀하신다. 사회적 차원에서 평화주의적 태도는 현재의 사회적 관계를 이상화하고 강한 자들의 편을 들어 주며 불의에 눈을 감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서 폭력, 고통, 억압의 문제를 제외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탄원의 기도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진솔하게 하느님 앞에 내놓도록 도와주는 것이 된다.

 

‘시편, 삶의 악보’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에서 절망하지 않고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시편 57,9)것이라고 한 쳉어의 말은 현재의 불완전한 삶 속에서도 미래의 완성을,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선취하게 한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 789-793.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318-319.

                시편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생활성서,안소근, 2011, pp. 148-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