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131(130) 시편: 신뢰에 찬 동심

마리아 아나빔 2013. 2. 27. 11:25

 

 

 

                                      131(130) 시편: 신뢰에 찬 동심

 

들어가면서

 

이 순례의 시편, 자기 통제를 얻고, 젖떨어진 어린이가 어머니 품에 온 몸을 맡기듯, 내부의 평화 안에서, 하느님의 품 안에 평온히 쉬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주님, 저의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이것은 중용의 평범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특히 온갖 허영심을 버리고, 밝은 균형이 잡힌 사람의 영적 정복을 바라고보 있는 것이다. 시편작가는 희망과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의 결과인 그 같은 평화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청하며 기도를 마무리 한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이 시편을 동정녀 마리아와 교회가 실행한 그리스도교적 겸손의 표현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길로 삼으시고, 보여 주신 영적 어린이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즉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며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들이라 했다(마태 18, 1-5 참조).

 

어른에 비하면 어린이는 단순 소박한 가운데 살고, 자기 자신을 중대시하지 않고, 여러 가지 허영심도 없다. 어른보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두 마음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온전히 신뢰하고 복종한다. 어른도 노력하여 어린이와 같이 이런 태도로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 따라서 영적인 의미에서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성숙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교회 영성의 기초적인 면의 하나는, 이 시편에 묘사되어 있는 겸손과 영적 어린이의 태도이다. 그것은 또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일러 주는, 성덕으로 가는 바른 길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지혜 있는 사람, 어진 사람에게 감추시고 소박한 사람들에게 나타내 주신 것을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우리의 영적 영정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의 하나다. 여기에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 생활은 많은 사소한 일로 이루어져 있으나, 마음은 평화롭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섭리에 대한 어린이와 같은 위탁에 뒷받침되고 있다.

 

 

Text 안에서

 

시편 131편은 형식상, 그리고 내용상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문법상 1절은 부정문, 2절은 긍정문, 그리고 3절은 명령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네 행으로 되어 있는 1절은 히브리말로 각 문장의 앞에 세워진 삼중의 ‘로’(아니)라는 부정부사에 의해서 부정문이 되고 있으며, 우리말 번역에서는 ‘않고’, ‘않나이다’로 옮겨진다. 2절은 히브리말로 ‘임-로’(오히려)로 시작하여 긍정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로써 1절과 2절이 부정문-긍정문으로 대조적인 배열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반에 3절은 형식과 내용상 1-2절과 다르다. 지금까지는 시편작가의 ‘나’가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지만, 3절에서는 시편작가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게 말을 한다. 내용도 1-2절과 같이 개인적이지 않고 이제는 일반적이고, 그러나 1-2절을 바탕으로 한 내용을 선포한다. 그래서 시편 131은 형식을 주안점으로 했을 때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절(부정)- 2절(긍정)- 3절(합)

 

1절은 삼중의 부정관사로써 어떤 자세와 행동을 부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마음”과 “눈”이 언급되고, 그리고 이것들을 종합하면서 걷는 동작이 말해진다. 이로써 부정되는 자세와 행동은 특히 그의 ‘걸음’을 표현하는 ‘걷다’(따라나서다)라는 동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 동사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특히 시편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쓰인다. 이 마음, 눈, 걸음에 2절에서는 “영혼”이 더 해진다.

 

‘마음이 오만하다’ 그리고 이와 대구법적으로 쓰인 ‘눈이 높다’라는 표현은 일정한 자세를 나타낸다. 그러나 비단 마음가짐만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곧 행동의 원천, 행동의 근거와 바탕을 말한다. 이 자세는 단순히 잘난 체하는 자세, 눈 높 은 자세를 말하지 않는다. 오만한 마음과 높은 눈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주로 부정적 의미에서 하느님과 관련된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또는 하느님께 대한 경쟁적인 자세를 의미하는데,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자주 나오듯, 하느님께 대한 죄로 단정되어 하느님으로부터의 벌을 자초한다. 그 한 예로서 이사 2, 11-18)을 들 수 있다.

 

“ 사람의 거만한 눈은 숙여지고, 인간의 오만은 꺾이리니 그날에 야훼 홀로 드높으시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오시는 날, 뽐내고 거만한 자를 모두 꺾으시는 날, 높은 자리에 않은 자를 모두 끌어내리시는 날,.. 사람의 거만은 꺾이고 인간의 오만은 숙여지리니 그날에 야훼 홀로 드높으시고 우상들은 모조리 사라지리라.”

 

이러한 하느님을 거스르는 마음가짐과 자세는 1절의 후반부에 와서 “따라 나서다”라는 동사와, “거창한 것들- 놀라운 것들”이라는 명사의 한 쌍으로 계속된다. 동사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오만한 마음, 높은 눈에서 나오는 행동들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마음과 눈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양상들이다.

 

“거창한 것들- 놀라운 것들”은 무엇인가? 구약성경의 용도를 흝어보면 거의 항상 하느님과 관계가 있으며, 이와 함께 쓰이는 동사는 ‘하나, 이루다. 이룩하다’ 등의 뜻을 지닌 하나의 동사이다. 곧 “거창한 것들 - 놀라운 것들”은 하느님의 행동들이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들로서,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해방시키신 일,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일, 그리고 창조사업으로부터 시작해서 개인들에게 베푸신 구원 업적과 심판 행적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거창한 것들과 놀라운 것들을 따라 나서다’라는 말은 구체적인 행동들로 이루어진 행적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행적은 인간의 물리적, 정신적 능력을 벗어나 오직 하느님께만 해당하는 것들이다. 인간이 이러한 일들을 주제넘게 자기의 일로 하려 하거나 내세운다면, 이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며 부정하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1절은 이렇게 같은 한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곧 교만과 이에 따른 행동들이다.

 

1절에 대치되는 2절의 문장에서 기도자는 자기의 긍정적인 행동을 고백한다. 곡 갖가지 격양되고 고르지 못한 감정과 행동에서 자신을 해방한 상태, 자신을 가다듬어 이루어낸 조화와 평온의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화와 평온은 자기 자신의 안으로 향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밖에 잇는 더욱 높은 차원으로 향한다. 이는 하나의 기다림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시편 37, 7(주님 앞에 고요히 머물면서 그분을 고대하라) 에 나오는 자세와 비슷하다. 여기에서 ‘고요히 머물다’는 우리 시편의 ‘가라앉히다’와 같은 어근에서 나오는 동사이다.

 

이 조화와 평온을 시편작가는 2절의 후반부에서 젖뗀 아기의 그림으로써 묘사하고 있다. 젖먹이의 기간을 뒤로 한 아기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보타 훨씬 늦게 대 세 살 때 젖을 떼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한 아기를 뜻한다. 젖먹이일 때는 늘 젖을 달라고 소리 지르고 울고, 늘 엄마 품에 안겨 있으려고 떼를 쓴다. 그러나 젖을 뗀 다음에 아기는 이제 엄마로부터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이제 그렇게 자주 안길 수 없는 엄마 품에 다시 안김으로써 엄마 품의 사랑스러움을 더욱 강도 있게 느끼며 만족해한다. 그리고 아기는 때가 되면, 떼를 쓰지 않더라고 엄마가 먹을 것을 차려주실 것을 잘 안다. 아기는 모든 것이 다 엄마로부터 옴을 알고 이에 맞게 행동한다.

 

엄마 품에 안긴 젖뗀 아기의 자세는 온화한, 조화를 이룬, 곧 조용하고 신뢰에 찬 기다림을 의미한다. 이것이 3절에 와서 종합적으로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자세로서 표현된다. 곧 ‘주님께 고대하다’라는 말의 기다림과 고대, 이것이 바로 주님께 간청하고 구원을 바라는 인간의 주님께 대한 기본적인 자세이다. 이는 시편 130,7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스라엘아, 주님께 고대하여라. 주님은 자애가 있고 그분께는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3절은 형식상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명령형의 말이다. 이로써 시편작가는 하느님 앞에서 한 개인의 한계를 넘는다.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고백함과 아울러 하느님께 간청하는 인간의 근본 자세에로 그 공동체 전례를 인도한다.

 

 

나오면서

 

시편 131편을 가장 아름다운 시편들 중의 하나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본다.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평온, 평화를 가득 담은 한 폭의 동양화에 비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평온과 평화가 시편 131이 주는 가장 강한 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머나먼 길을 뒤로 한 사람의 평온이며 평화이다. 우리는 이 평온과 평화의 뒤에 있는 것들, 평온과 평화가 시편작가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하기까지의 그 긴 영정을 또한 보아야 하겠다.

 

1절에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행동들을 일면 이 기도자의 개인적인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하느님까지도 거스르면서 추구해왔던 명예, 부, 권력 등등이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교만과 죄와의 싸움이고 투쟁이다. 어쨌든 그는 이 투쟁을 통해서 포기하는 것을 배워왔으며, 이와 더불어 하느님과의 평화를 되찾았다. 하느님을 잊은 채, 또는 배격한 채, 자기만의 길과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이러한 긴 투쟁의 여정 끝에 이제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젖뗀 아기와 같이 평형과 균형, 평온과 평화를, 그리고 만족과 사랑을 되찾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편작가가 아주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생활을 하다가 이제 지쳐서 황혼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것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시편의 작가는 삶에서 은퇴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생동적인 생활을 할 사람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옴을 잘 알아,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바라는 바를 이루어나가리라. 곧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는 바를 이제 영혼의 평화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수행해 나가는 신앙인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시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묵상을 통한 각자의 몫으로 남기는 게 더 나으리라 본다. 이미 언급된 바 있지만 한 가지를 더 지적하자면, 우리 시편은 기도자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젖뗀 아기와 엄마로 비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시편 131은 영성적으로 상당히 높은 차원에 있다고 하겠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767-768.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 309.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p.180-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