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145): 하느님께 희망을 둔 행복
들어가면서
시편 146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나는 찬양시편이다. 뿐만 아니라 시편 146-150편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기에 다섯 편의 시편이 한 그룹을 형성하면서 시편집 전체를 끝맺고 있다. 그래서 이 시편들을 ‘종결할렐’이라고 부른다. 후기 유다교에서는 매일 아침 드리는 기도의 한 부분에 사용되었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제4주간 수요일 아침기도, 목자공통 제1저녁기도, 성인고통 제1저녁기도, 위령성무일도 아침기도, 예수 성심 대축일 제1저녁기도 때에 노래한다.
시편집에는 세 개의 할렐이 있다. 시편 133-118편은 ‘이집트 할렐’ 또는 ‘소 할렐’이라고 하는데 큰 축제들, 특히 파스카 만찬 때에 불렀던 것으로, 시편 135-136편은 ‘대 할렐’로서 파스카 축제 때에 소 할렐에 이어 불렀다. “할렐루야”라는 뜻은 ‘야훼를 찬양하여라!’라는 뜻이고, 이 시편도 찬양시편으로서 그 기본 틀에 따라 진행된다.
그 구조로는 1-2절에서는 찬양을 권고하고 찬양 동기를 제시한다. 3-4절은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것에 대해 말하고 5-10절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에 대하여 노래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할렐루야!”로 시편을 끝맺는다. 그 특징으로 3-4절에서 찬양시편의 고유성보다 지혜문학에 가까운 특징인 2인칭 복수(너희)를 향한 훈계가 나타난다. 또한 이 훈계는 “제후들”, “인간”을 “야곱의 하느님”이신 주님과 대조함으로써 찬양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즉 제후들을 믿는 것은 헛되며 그들은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하느님께서는 도움을 주실 수 있고, 인간이 그분께 희망을 둘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덧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으로서 능력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
5-6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연 질서를 보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7-9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행하시는 사회적, 정치적 해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두 부분에서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시편 저자는 창조와 인간 세상에 대한 통치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지막 10절에서는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왕권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우리는 시편의 단일성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여러 측면을 열거하는 것은 단순한 열거가 아닌,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이 시편은 지혜문학적인 어조로 “시온”에게 하나의 결단을, 곧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기를 요구한다.
Text 안에서
1-2절: 찬양권유
기도자는 먼저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찬양 하여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찬양하다”라는 동사는 주님을 찬미하는 공동체, 전례 공동체를 전제한다(시편 22,23(모임 한가운데);25,18(큰 모임). 그러므로 기도자는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온”이라는 공동체에 말하고 있다. 즉 시편저자가 홀로 노래하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공동체 앞에서 하는 찬양이다. 어쨌든 시편 146편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감사시편과 찬양시편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2절에서 시편 저자의 주님에 대한 찬양은 그의 삶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시편 88, 11-13).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생명이 최고선이다. 생명이 없다면 하느님께 대한 찬양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인간에게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지이다. 찬양이 멈추는 순간은 곧 죽음의 순간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는 한” 하느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찬양으로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고 그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이다.
1절에 나오는 “내 영혼(네폐쉬)” 그리스어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본래 ‘목구멍’의 의미로 뜻이 넓어져서 목, 숨결, 욕구, 갈망, 영혼, 그리고 한 사람을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시편저자는 이렇듯 살아 숨쉬는 인간, 갈구하는 인간인 “나”를 향하여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2절 후반에 “내가 있는 한”을 덧붙임으로 자신이 한평생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를 표현한다. 이러한 시편들은 죽음 또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일차적인 관심이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삶은 찬미라는 사실이요, 찬미는 생명의 노래라는 점이다.
3-4절: 인간에 대한 신뢰
2인칭 복수로 향한 권고로 되어 있는 3절의 문장은, 기도자의 말을 듣고 있는 공동체가 있으며, 기도자는 하느님을 찬양하기 전에 먼저 인간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 헛됨을 말한다. 다른 여러 시편에서는 하느님 신뢰에 권고를 두는 반면, 여기서는 하느님께 피신하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에 강조점을 둔다. 시편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시편집은 그들에게 기댈 곳을 사람에게서 찾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께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후들”은 정치적인 개념이다. 그들은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일 뿐이다. 이러한 제후들의 무능력함이 시편 마지막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다스리심’과 대조된다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다스리심, 즉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통치도 순전히 종교적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제후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인지 외세의 지배자들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시편저자는 정치적 세력이 인간을, 특히 가난한 이들을 구원해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말 안에는 역사를 통해 겪어 온 임금들과 국가들에 대한 부정적이면서도 매우 실체적인 체험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에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 했듯이 말이다.
“제후”와 병행을 이루는 “인간”이란 말은 “인간의 아들”로써 히브리말 “아담”에서 나온 말이며, 4절에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의 “흙”은 히브리말 ‘아다마’이다. 아담- 아다마, 인간- 흙 등은 인간의 유한성과 연약함,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무력함, 인간의 기본조건에 속한다는 사실이다(창세 3,19). 그러기에 이런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것이 헛됨을 말한다. 시편 118편의 “믿다”와 병행을 이루는 “피신하다”라는 구절은 “주님께 피신하다”라는 표현으로 죄를 지었거나 고발을 당하여 쫓기는 사람이 성전에 피신하던 데서 유래한다. 즉 위험한 순간 그 누구도 아닌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께 신뢰함을 의미한다.
5-10절: 하느님에 대한 신뢰
5절에서는 주님께 의지하는 이의 복됨의 이유로 하느님의 능력을 말한다. 이로써 듣는 이 “시온”은 제후들에게,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것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권한다. 5절의 “행복하여라”는 마태 5장의 참된 행복과 같은 하나의 행복선언이다. 이는 시편 1에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이들의 행복, 시편 2에서 주님께 피신하는 이들의 행복하다고 한 가르침과 가깝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편 146편의 행복선언은 “야곱의 하느님을 도움으로 삼는 이”,“자기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를 향한다. 여기서 사용된 “도움” “희망”이라는 단어들은 그 ‘복된 이’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 아쉬울 것 없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가 아님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주님의 도움은 삶의 모든 순간에 가만히 옆에서 계시고 보이지 않게 떠받쳐 주실 뿐만 아니라 강한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분이다. 그런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은 그들의 믿음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거슬러 주님께 신뢰를 둘 수 있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제후들보다 더 행복하다.
여기서 “야곱의 하느님”은 창세기에 나오는 성조 야곱의 역사를 바탕으로 이해 할 수 있는데, 하느님은 야곱을 모든 위험 속에서 지켜주시겠다고 했던(베텔에서 행해졌던 경신례) 야곱의 하느님을 도움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지상을 순례하는 당신 백성과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민족의 역사를 통해 체험한 하느님의 모습이다. 6-9절은 하느님의 여러 특성, 특히 창조와 구원의 업적을 찬양의 동기로, 그리고 그분께 희망을 두는 동기로 제시한다. 시편저자가 창조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창조와 구원의 연속성 때문이다. 하느님의 창조 업적이 태초의 한순간에 그치고 지금의 이 세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창조신앙은 주로 창세기와 제2이사야서에 볼 수 있는데 모두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추상적인 철학적 사유나 자연 과학적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다.
이것은 특히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유배 간 이후로 민족사의 어두운 순간을 겪던 이스라엘을 지탱해 준 것은 자신들의 하느님이 이스라엘 땅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었다.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은 그들의 신 마르둑이 이스라엘의 하느님보다 강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이에 맞서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은 온 세상을 당신의 계획에 따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이다(지속적 창조; 하느님은 모든 선의 제1원인시며, 창조자로서 존재하고 실존하는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머물러 계시며 그들이 존재하도록 계속 유지하신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즉 창조의 첫 순간은 하느님 통치의 첫 순간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하느님의 업적들은 그 창조의 연장선상에 들어 있는 것이다.
7-9절에서는 ‘역사의 주인’으로서 그분이 행하신 수많은 일들이 열거된다. 즉 하느님께서 정의를 세우신다는 것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7절에서는 “억눌린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신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법적인 개념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사회에 정의를 세워 주시고 억울한 이의 권리를 되찾아 주신다는 의미이다. 고대 사회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였다. 함무라비 법전의 머리말에서도 함무라비 임금은 권세 있는 자들이 약한 이들을 억누르지 못하도록, 땅에 정의를 세우도록 신들이 자신에게 명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느님께서 억울한 이들에게 정의를 세워 주신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좋은 임금이시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시편저자의 의도 안에는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대의 근동의 여러 나라와 달리 임금이 법전을 선포하지 않는다. 모세오경의 법전들은 왕정이 수립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선포하신 것으로 제시된다.
이 시편에서 가난한 이들은 “붙잡힌 이들, 눈먼 이들, 꺾인 이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해방을 주신다고 하는데,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유배중의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갇힌 이들에게는 나오라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 내어라고 유배 중인 이스라엘 해방을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 본문의 경우는 백성 가운데 억눌리고 있는 이들에게 해방을 말한다(이사 61, 1-2;루가 4, 18-19). 특히 “고아, 과부, 이방인들”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들이다. 이것은 이들이 가부장적이고 토지 소유가 중요했던 고대 사회에서 권리를 지니지 못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부계 상속으로 아들이 대를 잇고 유산으로 땅을 물려받는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는 가진 것도 없고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능력도 없게 된다. 또한 “이방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꼭 혈연적으로 외국인이라는 개념보다는 어떤 지방에서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남의 땅에 몸을 붙이고 살고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특히 신명기 계통의 법전에서는 이러한 고아, 과부, 이방인에 대한 보호를 강조한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고 이들이 복된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희망 때문에 8절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의인들”이라고 일컫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목소리 없는’ 이들인 고아, 과부, 이방인의 인권이 무시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러한 이들을 억누르는 이들을 “악인들”이라하며 단순히 개인적으로 괴롭히거나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것만이 아닌 윤리적 종교적인 의미의 “주님의 원수들”(37, 20)로 하느님과 맞서고 있다. 하느님의 심판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 한 언제나 지고 살아야 할 문제, 곧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문제이다. 찬양시편에서 노래하는 것은 이처럼 종말론적 나라이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믿음으로써 이미 지금 그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찬양은 세상을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하는 “제후들”에게는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10절에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선포한다. 즉 모든 것을 ‘주님의 왕권’으로 수렴하며 그분께만 세상을 다스릴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써 하느님의 통치를 이야기 한다. 이러한 다스림은 특히(시편 93-100편) 성전의 전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가난한 이들의 인권이 하느님에 근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보호해 주는 이들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다스림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특히 시편 146편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데 있다면, 이를 실천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통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주체는 오직 하느님뿐이시며, 따라서 그분을 찬양하라는 권고는 정당했음을 재확인한다. 주님을 찬양할 주체로서 특별히 ‘시온’이 명시되는데 그분의 다스리심이 영원할 대상이 바로 시온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세상의 실제적 권력자는 인간 제후들 같지만, 그들은 흙으로 돌아갈 무기력한 존재들에 불과하다. 결국 그들을 조정하는 분은 그들을 창조한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하느님이시며, 이를 명시함으로써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노래가 146편이다. 그리고 찬양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할 때 시편이 말하는 진정한 신뢰, 곧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께 신뢰할 때, 거기서 행복이 흘러나오고, 그의 삶은 영원히 찬미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789-793.
당신 말씀, 나의 등불, 임성필, 성바오로출판사, 1992, pp. 266-281.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334.
시편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생활성서,안소근,
2011, pp. 92-114.
생활성서, 2012(9), 김혜윤, pp.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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