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드 뽈의 삶과 길
(원 제 : Vincent de Paul : his life and way )
Fr. Hugh O´Donnell, C.M
(2002. 8. 1 홍 도미니꼬 신부,C.M. 번역)
1. 빈센트 I : 자유를 향한 여정
2. 루이즈 : 그 뜻밖의 선물
3. 빈센트 II : 사랑의 사도
4. 빈센트의 길
5. 경험, 믿음 그리고 실제적 지혜
6. 식별의 길
7. 빈센트의 창조력
빈센트 드 뽈은 소박이 나의 복음이라고 말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겸손도 이에 덧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랑의 사도였으므로 사랑도 그의 복음이라 불릴 수 있으리라.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빈센트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족들이나 부자들과도 가깝고 친밀하게 일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까지 열정적이었지만, 특별히 사랑의 딸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온화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하느님 섭리의 뒤꿈치를 밟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빈센트는 스스로의 뜻에 의지하는 성급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루어냈다. 사람들은 고아들과 갤리선의 죄수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안에 비친 빈센트의 모습만을 기억하기가 쉬운데, 사실 그는 평생의 열성을 쏟았던 강론과 교리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이 영적 가난에서 치유되기를 갈망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사제직의 영적 본질을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에, 그는 사제직에 대한 신원 의식이 사그라져 가는 형제사제들 안에 그 불길이 다시 당겨지도록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도와주었다. 연금술에 매료되어 있던 당시 사회에서, 빈센트는 삐에르 드 베륄의 고양된 영성을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도적 영성으로 변형시킨 영성의 연금술사였다. 빈센트는 자신의 협조자들이 가난한 이들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기쁨의 사도로 변해 가는 것을 바라보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파리는 그가 사랑하는 도시였지만 프랑스, 유럽의 나머지 지역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등도 그의 선교 범위 안에 있었다.
소박은 빈센트가 의식하고 있는 복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35년간 (1625-1660)의 활동범위와 전기작가들이 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으로 인해 소박과 오롯한 하느님 사랑이 모든 것을 다스렸던 빈센트의 가슴 속 장소를 만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빈센트의 생애는 두 부분 즉, 빈센트 I(1600-1625)과 빈센트 II(1625-1660)로 나뉠 수 있다. 빈센트 I은 조국의 아버지로 알려졌고, 사도적 열성으로 전교회원들과 사랑의 딸들을 프랑스 국경을 넘어서 폴란드, 알제리, 마다가스카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으로 보낸 그 빈센트이다. 빈센트 II는 전교회를 세웠고(1625), 루이즈 드 마리약과 더불어 사랑의 딸회를 창립하였다(1633). 빈센트Ⅱ는 루이즈 드 마리약과 함께 놀랍도록 창조적이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협력과 우정의 동반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우리 시대에 바야흐로 그 진가가 인정되고 알려지기 시작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대체 무엇이 빈센트로 하여금 복음과 가난한 이들과 성직자들에 대한 봉사에서 업적을 이루게 했는지 의아해 한다. 또한 지역, 국가, 세계로 뻗어나간 빈센트의 폭넓은 활동범위로 인해서, 온갖 종류의 필요에 응답한 그의 방법들로 인해서, 빈센트를 알고 서신을 교환하고 도움을 청하고 함께 협력했던 사람들의 숫자와 범위에 의해서, 그가 창립한 공동체들과 동지회들을 이끌었던 독창적인 정신으로 인해서, 그의 선교사적 열성과 가슴 속 불길로 인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이 모든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하느님께 온전히 승복함으로써 지닐 수 있었던 내적인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인해서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빈센트 II의 업적은 그가 성인품에 오르고 삼 세기 반 동안이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존경심에 사로잡히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무신론자들까지도 빈센트를 존경했다. 프레데릭 오자남은 “프랑스 혁명주의자들까지도 빈센트의 자비심을 찬양했고, 하느님을 사랑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과연 이런 힘과 천재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어떤 생명수의 샘이 그의 온갖 업적에 생명을 부여한 것일까? 그의 탁월한 열성과 영향력의 비밀은 19세부터 45세 까지 첫 25년간 사제로서의 빈센트Ⅰ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빈센트Ⅰ 안에서 우리는 점진적이고 아름다운 그의 영성의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빈센트가 그 시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이르게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영성적 변화 과정은 어쩌면 감추어진 것이면서도 전적으로 주목할 만한 여정이다. 우리는 이것을 빈센트의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여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빈센트가 서원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봉사에 자기 삶을 바치게 된 것은 정녕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서 진행되는 예수님의 구원활동 안에서 가난한 이들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신비적인 인식은 그의 평생의 선교사명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여정에서 이 부분은 차라리 빈센트의 “자유를 향한 여정”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분은 그의 사도적 천재성을 형성해준 하느님 사랑이라는 영성의 길을 명확히 하면서 그의 영성의 인격적이고 내면적인 깊이를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빈센트 I : 자유를 향한 여정
사제생활 초기에는 어떤 야망이 빈센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가 사제가 되려고 했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충분한 돈을 모아서 일찍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도울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하나의 직위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야망의 추구는 당시로서는 합당한 삶의 목표였겠지만 나중에는 그의 놀라운 활동의 은밀한 중심이 되었던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빈센트는 1580년 또는 1581년, 프랑스 남쪽 가스코니 지방의 뿌이에서 여섯 자녀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힘든 노동과 검소한 생활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여가는 충실한 농부 가정이었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그가 사제가 되도록 격려하면서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그는 1600년 9월 23일, 19세 혹은 20세 나이로 사제직에 서품되었다. 이것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사제로 서품되는 것을 금지한 트리엔트 공의회 선언에 대한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공의회 선언은 1615년까지는 프랑스에 공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제 서품은 빈센트가 타락했다거나 무책임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고, 사제가 된다는 것은 이른바 개인적인 야망이라는 다른 계획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 점에서 빈센트에게 있어서 사제직은 성소라기보다는 하나의 직업이었고 장래의 생활 방편이었다. 하지만 출세를 향한 그의 모든 희망들(두 차례의 로마 여행, 주교직에 대한 약속들, 유언으로 얻은 재산)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바로 1610년에 그는 만족스런 성직록을 얻는 데 유례없이 실패했다고 어머니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써보냈다.
그런 다음 빈센트는 1605~1607년 사이 2년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2년간에 대해 설명해주는 유일한 것은 그가 북 아프리카에서 포로로 잡혔다고 서술한 편지 한 통이다. 그는 자기가 배편으로 보르도에서 돌아오다가 해적에게 사로잡혀서 북 아프리카로 붙들려가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고 편지에 쓰고 있다. 그는 4명의 다른 주인들 밑에서 노예로 지냈으며, 그리스도 신자였으나 배교하였던 그의 마지막 주인을 다시 개종시켜서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쳐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몇몇 역사가나 전기 작가들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빈센트 스스로가 편지에 썼던 이 이야기는 과연 진실일까. 인생의 종착점에서 그 편지가 발견되었을 때 빈센트는 당황했고 번민했으며 동요되었다. 그리고 그 편지가 없어져 버리기를 바랐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알지 못한다. 포로생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 사건이 빈센트의 성직록에 대한 갈망을 조금도 바꾸지는 못한 셈이다. 왜냐하면 빈센트는 1608년 로마에서 꽤 괜찮은 성직록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노라고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포로생활 이야기가 가스코니 지방의 농담 잘하는 전형적인 기질 때문에, 또는 그의 전 은인으로부터 얻은 금전적 수익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마음에서 빈센트가 꾸며낸 것이라면, 이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내적인 사로잡힘, 개인적 부자유의 체험 그리고 그의 종국적 해방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자유를 향한 내적 여정의 한 비유라고 볼 수 있다.
교회 성직록이라는 금전적 보상을 얻으려는 시도에 성공하지 못한 채 빈손의 빈센트는 1608년 파리로 오게 된다. 생애 처음으로 오게 된 이 도시는 그에게는 나머지 51년간 삶의 고향이 된다. 한 남성으로서 그리고 한 사제로서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좋은 성직수당을 얻어서 조기 은퇴를 하고자 하는 필생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그의 경력은 실패로 시작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하나의 삶의 지평이 막 열리고 있었다. 영성의 쇄신과 교회 개혁의 바람이 그 도시를 휩쓸고 있었다. 빈센트는 이러한 운동의 선봉에 선 사람들, 특히 빈센트가 영성지도자로 삼았고 나중에 추기경이 된 삐에르 드 베륄 신부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또한 소르본느 대학 교수였던 앙드레 뒤발 신부도 만났는데, 그는 빈센트에게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다음 30년간 영적 조언자가 되어주었다. 뒤발 신부는 영국 카푸친 회원이었던 캔필드의 베네딕토가 저술한 “완덕의 규칙”이란 책을 빈센트에게 소개해 주었다. 빈센트는 캔필드의 저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대한 이해를 깊게하고 하느님의 이끄심을 기다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빈센트는 그에게서 하느님 섭리의 뒤꿈치를 밟지 않는다는 천금같은 진리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빈센트는 그의 영적 여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야망은 줄어들고 하느님께로 향하면서 성소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파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빈센트와 한 방을 쓰던 한 판사가 자신의 돈을 훔쳤다고 빈센트를 고소하였다. 빈센트는 결백했지만 자신을 변호하지는 않았다. 공공연하게 비난받고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모욕을 당했지만 빈센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몇 년 후에 진범이 자백하게 되었다. 이 일화는 빈센트가 자신의 출세나 사회적 위상에 덜 연연해 하면서 그의 침묵하는 주님을 닮아가고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빈센트는 심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1612년,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면서 행복과 기쁨이 그의 삶에 흘러들었다. 그는 파리 북서쪽의 가난한 시골 본당인 클리쉬의 성 메다르드 성당으로 파견되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빈센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그는 사목생활을 사랑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그곳 주교에게 자기가 주교님이나 교황님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빈센트는 그 사람들로 인하여 믿음과 실천으로 새 삶을 살아가려는 용기를 얻게 되었고,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제생활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결실이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였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 드 베륄은 공디 가문의 자녀들을 위한 전속사제와 가정교사가 되도록 빈센트를 다시 파리로 불렀다. 클리쉬를 떠나기가 슬펐지만 빈센트는 자신의 진정한 성소를 발견하는 데 있어 공디 가족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이 시기에 빈센트의 한 동료사제가 신앙에 대한 회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빈센트에게 도움을 청했고 빈센트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조언을 주면서 결국에는, 첫 전기 작가에 의하면, 그 사제의 영적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사제는 개인적으로 회의를 벗어나게 되었으나 빈센트는 3-4년간이나 영적 어두움과 회의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의 시련이 때때로 너무나 심해서 빈센트는 사도신경을 서서 사제복의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손을 사도신경이 들어있는 가슴에 얹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표시하였다.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에 봉헌하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한 이후에야 빈센트는 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체험 안에서 빈센트는 자신의 가난의 깊이와 하느님 자비의 은혜로우심을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번민과 절망 그리고 고통의 연속된 체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과연 빈센트가 이제껏 만났던 이들 중 가장 가난한 이는 누구였을까? 그 질문에 주어진 답은 바로 빈센트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빈센트는 자신이 바로 그 가난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빈센트는 결코 자기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가난을 의식하면서 빈센트는 어떤 판단이나 경멸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만큼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무한한 자유, 그 자신 안에서의 자유, 이웃을 향한 자유, 특히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유가 있었다. 여기에 상응하는 질문이 또한 제기된다. 빈센트가 이제껏 만났던 이들 중 가장 부자는 누구였을까? 그 질문에 주어진 답은 역시 같은 빈센트 자신이었다. 그의 근본적인 가난에의 체험은 무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하느님의 자비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빈센트가 하느님을 절실히 필요로 했었기에 하느님 자비의 선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가 첫번째로 무엇을 위해 빈센트를 준비시키고 계셨는지는 1617년에 와서야 분명해졌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빈센트는 1617년 1월 25일 사도 바오로의 개종 축일에 폴빌 성당에서 첫 선교 강론을 하였다. 드 공디 가문의 영지에 있는 소작 농부들의 영적 나태함의 슬픈 현실이 그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이끌었다. 공디 부인과 함께 영지를 방문하면서, 빈센트는 좋은 평판을 지닌 한 남자의 고해를 듣게 되었는데 그는 이 기회가 없었더라면 영원한 죄의 상태에서 죽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디 부인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부인은 빈센트로 하여금 모든 본당신자들을 위하여 강론을 해주도록 부탁했고 빈센트는 총고해를 강론의 주제로 정했다. 삶의 전반에 대한 총고해와 회개를 요청하는 빈센트의 호소에 본당신자들의 반응은 대단히 압도적이어서 그는 근처의 아미앵에 예수회 신부의 지원을 요청해야만 했다. 빈센트의 첫 선교에서 수많은 본당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하였다.
이러한 체험은 예상치 않은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시골 지역에서 소외된 농부들의 영적 갈증에 직면한 빈센트는 더 이상 스스로를 한 가문을 위한 전속사제와 가정교사로서의 봉사에만 묶어둘 수 없었다. 빈센트는 어떻게 하였는가? 그는 피신하였다. 이 일이 일어난 해는 사건 많았던 같은 해 1617년이었다. 그는 베륄의 도움으로 파리와 공디 가족을 떠나서 파리 북서쪽 샤티옹 레 동브의 본당신부가 되었다. 그는 공디 가문을 떠나는 것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거절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더 이상 부자 가문의 식구로 남아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들의 곤경은 빈센트의 마음을 깊숙이 움직였다. 5년 전의 클리쉬에서처럼 빈센트는 다시 가난한 사람들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목 생활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빈센트의 애정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빈센트의 포로생활이 현실적이고 영적인 속박과 해방을 드러내고, 신앙적 회의의 시련이 가난한 이들 안에서 평온함을 찾게 된 가난한 자 빈센트를 드러낸다면, 샤티옹 레 동브의 사목생활은 그의 사목적 영성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준다.
그 본당에 거주하는 여섯 명의 신부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사목적 활동도 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또한 게으르고 표양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두 명의 좋은 사제만으로도 본당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음을 보고 빈센트는 리옹으로 가서 그의 보좌로 쓸 사제 한 사람을 구했다. 빈센트와 그의 보좌 신부의 사목적 열성과 충실함은 다른 사제들이 더욱 규칙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반시간씩 기도하기 시작했고 시종들을 해고시켰다. 예전에 클리쉬에서 했던 것처럼 동료 사제들을 더욱 신심 깊은 삶의 길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 빈센트의 첫 번째 일이었다.
빈센트는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시간과 교회와 숙소에서 지내는 시간으로 하루를 나누었다. 그는 하루의 반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치 사도들처럼 지냈고 나머지 반은 관상가로서 공부, 독서, 기도를 하면서 지냈다. 이런 조용한 시간에는 그 지방의 방언을 습득했고 몇 주 내에 그 방언으로 그가 사랑했던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어떤 종류의 기부이든 항상 만족했다. 그런 모습은 이전의 경험들에 비추어 볼 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본당은 여섯 달 만에 변화되었다.
샤티옹에서의 초기 사목 활동 중에 있었던 어떤 우연한 사건은 첫 번째 애덕동지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617년 8월, 빈센트가 주일미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본당신자가 그 본당의 한 가족 전체가 질병과 빈곤에 휩싸여 있다는 소식을 들고 왔다. 빈센트는 미사 중에 그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에 관한 강론을 했는데 그날 오후에 사람들은 그 가족에게 긴요한 음식과 필수품을 가져다줌으로써 압도적인 수의 신자들이 거기에 응답했다.
그래서 빈센트는 본당 내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관심 있는 여성들의 모임을 소집하게 되었다. 그는 부인들에게 자신들의 관용을 순서에 따라 질서 있게 베풀도록 촉구하였다. 부인들은 나중에는 첫 애덕동지회로 발전하는 한 모임을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는데, 애덕동지회는 파리에서 회원이 소집된 애덕부인회의 모태가 되었다. 빈센트가 부인들과 함께 일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 것이어서 그들과 협력하고 그들이 협의한 것을 실행에 옮기도록 도와주었으며, 거기서 회칙을 이끌어내어 입안토록 하였다. 달리 말하면, 빈센트는 도와는 주었지만 부인들이 스스로 조직하게 하였고 지엽적인 자율성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빈센트는 나중에 사제들을 위한 “화요회”를 조직하고 설립하기 위하여 파리의 성직자들과 같이 일하였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방식의 협력적 지도력을 보여준다. 그는 사제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도록 영감을 주었고 보좌해주었다. 위의 두 사례에서처럼, 빈센트는 남녀 모두에게 자유롭고, 촉진시키고, 가능성을 주며, 초점을 맞추고, 실천적이면서 다른 이들의 요청을 존중하는 지도 방식을 보여주었다.
첫 애덕동지회 회칙에 들어있는 어휘는 빈센트의 (영성적) 발전에 관해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드러내는데, 이 회칙을 계기로 “그리스도” 대신 “예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게 된다. 우리가 아는 한 이때까지는 빈센트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데 아직 익숙지 않았다. 빈센트는 이때부터 “예수”라는 인간적 이름을 하느님 아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면 사용하곤 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차원이 커져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단체의 모임이 있을 때, 빈센트는 부인들에게 애덕동지회와 같은 단체들은 수호성인 한 분을 정하는 것이 관례라고 지적하면서 어떤 분을 수호자로 모시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예수님을 우리의 수호자로 모십시다”라고 조언을 주었다. 애덕동지회 규칙에서도 빈센트는 부인들이 빵과 수프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역시 수호자로서 전구를 청하던 성모님의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1617년이라는 뜻깊은 해에 빈센트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차원에서 더욱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공디 부인은 파리의 집에서 빈센트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베륄 신부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빈센트는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고 누군가가 공디 가 아이들의 가정교사를 대신한다는 조건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에 동의하였다. 1617년 12월 23일 빈센트는 공디 가문의 정문에 도착하였다. 가난한 농부들에 대한 경험이 빈센트를 전적으로 변화시켰으므로 공디 가문에 돌아와서도 빈센트의 삶은 새로운 지향을 향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관심있는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다음 7년간 마을과 촌락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619년에 공디 대주교의 위촉을 받아 국왕 루이 13세로부터 갤리선 총 지도신부로 임명된 빈센트는 프랑스의 모든 갤리선 죄수들의 영적 복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1617년 그해는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유로 향한 그의 여정에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다. 이는 빈센트의 내면에 일어났던 극적인 변화와,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하느님의 도구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가 되게 한 회심의 과정을 증언해 준다. 1609년에 파리로 왔던 그 젊고 보잘것없던 신부가 겸손하고 열심한 샤티옹의 사목자로 변화되어, ‘예수’라는 이름이 그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빈센트는 얼마나 먼길을 여행했던가!
이 기간 동안 빈센트는 이중의 회심을 체험하였다. 첫째로, 그의 삶의 중심이 되어간 가난한 이들을 향한 회심을 하게 되었다. 그의 젊은 날의 야심들은 믿음의 세계에 굴복하였다. 그 믿음의 세계 안에서 그는 예수의 구속적 죽음을 통한 구원적 능력의 은혜로운 현존인 가난한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안게 되었다. 둘째로, 자신의 사제직에 대한 회심을 하게 되었다. 빈센트의 이러한 회심은 그의 여정에 대한 예기치 않았던 통찰을 많은 사람들에게 제시해주었다. 빈센트에게 있어 사제직은 하나의 경력이나 직업 그리고 조기 은퇴의 방법이었다. 사제직에 부여되는 사회적․경제적 특혜는 빈센트의 생각을 사로잡았고 그의 계획을 지배하였다. 점차로 빈센트는 사회적 경력으로서의 사제직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서의 사제직을 향한 회심을 하게 되었다.
그의 가난한 이들을 향한 회심과 사제직에 대한 회심 사이에는 하나의 내적 연관성이 존재하였다. 자기 사제 성소의 중심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면서 빈센트는 가난한 이들의 신비에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클리쉬, 폴빌, 샤티옹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 과정에 깊이 영향을 주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빈센트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한 사제로 충만하게 성숙되어 가는 길을 순조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가지의 그의 회심은 의미 있고 고무적인 것이었지만 그 여정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1617년부터 빈센트가 전교회를 창립하는 1625년 사이에 있었던 세 가지 사건들은 그의 평생의 과업을 위해 요구되었던 정화와 해방의 마지막 단계를 드러내준다.
첫 사건은 1621년에 있었다. 빈센트는 천성적으로 어둡고 침울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정서적 태도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거기에서 해방시켜주시기를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소시옹에 피정을 하러 갔다. 그의 기도는 이루어졌고,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느님은 내면의 어두움으로부터 빈센트를 벗어나게 해주셨다. 이 일이 있기 몇 해 전부터 빈센트는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와 잔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 친교를 맺어왔는데, 그들 사이에는 깊은 우정이 싹트고 있었다. 베륄이 빈센트 초기 삶에서 어떤 전략적인 역할을 해주었듯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빈센트의 가슴에 하느님 사랑의 불을 당겨 주었고 온유함의 힘을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그들 사이의 친교는 빈센트가 피정을 하도록 무대를 마련해주었고, 그가 온유한 성격으로 점차 바뀌는 데 기여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고향방문
세 사건 중의 두 번째는 1623년에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업을 기꺼이 도맡아주는 공동체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빈센트는 1617년까지는 다른 사제들의 협조를 얻어 마을이나 촌락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갤리선 총지도신부로 임명되자 갤리선 죄수들에게도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1623년에는 보르도의 갤리선에 대한 선교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그곳은 그의 고향인 뿌이 근처에 있었다. 친구들의 지지와 격려에 힘입어 빈센트는 자기 가족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그가 고향을 떠난 지 23년만에 갖는 첫 고향 방문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다른 가족들과 친척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빈센트는 열흘 동안 머무르면서 다시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기쁨을 맛보았다. 마지막 날에는 가족들을 위해 미사를 드렸다. 그런 다음 빈센트는 유산이나 그밖에 그에게 돌아올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을 터이니, 가족들도 자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였다. 고향 마을을 빠져나온 길목에서 빈센트는 쓰라리게 울었으며 그 후 3개월 가량을 울면서 지냈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자기 가족들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한 채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의 부모는 가족들을 도울 수 있는 명분을 주는 은퇴를 하기 전까지의 여러 해를 빈센트에게 맡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서 빈센트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눈물은 비록 가족들과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서 살았지만 그들을 향해 깊게 흐르는 연민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빈센트는 가족들을 마음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그의 마음은 평화를 찾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사건은 1624년 말 혹은 1625년 초에 있었다. 이때는 전교회를 창립하기 너덧 달 전이었는데, 선교활동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던 빈센트는 오랜 영적 지도자인 뒤발 신부를 찾아가 그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는 뒤발 신부에게 공디 부인이 영지 내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하여 자금을 모아왔다는 것과 그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한 공동체를 찾아달라고 자기에게 부탁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예수회에서는 그러한 설립 취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다른 공동체들도 또한 거절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빈센트와 앙투완 뽀르따이 그리고 다른 몇몇 사제들은 선교활동과 교리교육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선교활동을 축복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였지만, 공디 부인은 자기가 죽기 전에 한 공동체가 창립되기를 바라면서 더욱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뒤발 신부는 빈센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다음 빈센트에게 하느님의 뜻은 명확한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하느님은 바로 빈센트 자신이 그 선교활동을 맡아 하도록 부르고 계셨던 것이다. 결국 빈센트는 그 부르심을 받아들여 시골 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또한 사제들의 양성을 돕는 전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1625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까지가 “빈센트 1"이다. 전교회를 창립했을 때 빈센트는 무한히 자유로웠고 개방되어 있었으며, 일생의 과업이 선명하게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17년간이라는 긴 여정이 있었다. 1608년에 파리에 도착해서부터 전교회를 창립하기까지, 그는 무한한 자유를 향한 커다란 성숙을 경험하였고,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초탈적 준비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교회는 하느님의 사업임에 틀림없었다. 여기에서 나머지 35년간의 삶을 살아갈 힘이 나왔던 것이다. 빈센트의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여정과 무한한 자유를 향한 여정은 사실상 하나의 여정이었다. 그 자신의 근원적인 가난과 하느님의 조건 없는 자비를 깊이 체험하고 나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니는 자유에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성령 안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빈센트의 비밀이다. 그 자신의 가난과 하느님 자비에 대한 체험은 빈센트 2의 시기에 보게 되는 놀라운 힘과 업적의 원천인 것이다.
루이즈 : 그 뜻밖의 선물
빈센트Ⅰ이라 일컬어지는 변화의 여정과는 별도로, 하느님은 빈센트의 삶에 루이즈 드 마리약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가져다 주셨다. 처음에는 루이즈가 빈센트에게 영적지도를 받으러 온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그들 인생의 나머지 기간 동안 서로에게 협조자이며 벗이 되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한 성덕과 사도직의 준비에 있어, 루이즈 없이도 빈센트가 제2의 여정에서 틀림없이 거대한 결실을 거둘만한 수준까지 그를 이끌어 오셨다. 그러나 사실상 빈센트는 루이즈 없이 그러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루이즈는 빈센트가 자유를 향한 내적 여정을 완성시키면서(빈센트Ⅰ), 공적 사목생활의 출발점에 서 있던(빈센트Ⅱ) 과도기에 빈센트의 삶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는 어느 면에서는 그들 관계의 시작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빈센트는 자기 일생의 과업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서 영적지도와 관련하여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루이즈 편에서 보면 상류사회와는 거리가 먼 시골뜨기 출신이라는 빈센트의 배경과 천성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는 자신의 감수성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그들 관계가 충만하게 발전되기 위해서는 아직 식별과정이 필요했다. 그들의 서로 다른 사회적 출신은 그들의 세계관을 예측할 수 없고 역설적인 방향으로 형성해 갔다. 빈센트가 대지에서 나온 남성이라면 루이즈는 도회지 여성이었다. 빈센트가 만사에는 시간과 계절이 있다고 믿었던 반면에 루이즈는 일을 즉시 처리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빈센트의 좀더 치밀한 접근방식은 그가 루이즈를 영적지도하던 초기(1625-1633)에 분명히 드러난다. 빈센트가 민감하고 소심한 루이즈를 안정시키려 했다는 일반적인 관점과는 다르게, 그의 영적지도에는 하나의 사려 깊은 의도가 있었다. 1623년에 있었던 성령강림 대축일 날의 신비적 체험 이후에 루이즈는 공동체생활을 포함한 특별한 소명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명에 관하여 그 시기와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앞날의 소명을 두고 불안해하는 루이즈를 대하면서, 빈센트는 의도적으로 그녀가 완전한 평화와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서 섭리로 내려주실 선물과 그 때를 신뢰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것이 그녀의 소명의 밑바탕을 이루게 될 것이었다.
세계관이 서로 다른 그 이상으로 기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그들의 신조에는 차이가 있었다. 조직과 세부사항에서 질서와 실제적 능력을 선호하는 점은 서로 같았지만, 빈센트가 ‘가슴형’의 사람으로서 애덕의 용광로였다면 루이즈는 ‘머리형’의 사람으로서 진보적인 사상가였다. 빈센트와 루이즈의 편지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나갈 때 ‘머리’와 ‘가슴’의 이러한 기본적 신조들은 새로운 관점에서 그 편지들을 읽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빈센트와 루이즈 그리고 그들의 점진적인 관계발전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서 가난한 이들을 섬김에 있어 상호관계와 협력과 우정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에 대한 풍부하고 결실있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빈센트와 루이즈 사이에서 자라났던 협력과 우정은 사람들의 온갖 종류의 필요에 대한 비범한 응답 속에서 열매맺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인식,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하는 삶의 길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애덕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되다고 하셨고 빈센트가 주인이시고 스승이라고 불렀던 가난한 이들이 구원 은총의 선택받은 중개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루이즈가 성취한 것에 관해서는 다음 편(루이즈 드 마리약, 영성적 자화상)에서 나오게 되고 빈센트가 이루어 놓은 것은 “빈센트II : 애덕의 사도”에서 지금 이어지게 된다.
빈센트 II : 사랑의 사도
1625년의 전교회 창립은 빈센트의 독립적이고 공적인 삶의 시작을 이루었다. 빈센트의 선교가 공적이고 항구한 기초를 다지게 되는 것은 오직 전교회의 창립과 더불어서였다. 전교회를 창립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단지 베륄 신부와 드 공디 가족만이 연관된 범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인연을 통하여 앙리 4세의 전 아내였던 마르그리트 발루아의 전속사제와 자선 관리인이 되었고, 폴빌, 클리쉬, 샤티옹에서 본당 사목을 했으며, 갤리선 총지도신부와 드 공디 가의 영지 내에서 선교활동과 같은 직책과 일을 할 수 있었다. 전교회를 창립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했던 주도적 일은 1617년 샤티옹에서 시작한 애덕동지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전교회를 창립하고 먼저 설립된 애덕동지회를 돌보면서 빈센트의 삶의 활동이 제자리를 잡아갔다.
빈센트는 전교회를 창립하기 위한 45,000리브르의 기부금을 드 공디 가족으로부터 받고 나서 그 공식인정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파리 대주교는 이 새 공동체를 1626년 4월 24일에 인가해 주었다. 깊은 협상과 몇 번의 난관을 거치고 난 7년 후에 전교회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았다. 초창기에 전교회는 더디게 성장했다. 시작할 때에는 오직 빈센트와 앙투완 뽀르따이 그리고 제3의 사제만이 회원으로 있었다. 전교회 초창기 시절에는 거주지였던 봉장팡 학원의 집을 대신 봐주기 위해서 이웃들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1632년에 전교회는 7명의 사제회원을 가졌고 더 넓은 주거지로 이사하게 되었다. 남아 있는 소수의 수도자들이 당시 파리에서 가장 큰 교회 영지였고 전교회원들이 지내기에는 너무도 컸던 생 라자르 수도원을 그들에게 기증하였다
1628년 보베의 주교가 서품대상자들의 사제 서품을 준비하기 위한 몇 일 간의 피정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전교회 활동은 첫 번째 확장을 이루었다. 그는 빈센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 결정을 내렸고 그런 다음 빈센트가 그 피정을 책임져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하나의 위대한 쇄신의 시작이었고, 그 때부터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 1660년까지 13,000~14,000명의 서품대상자들이 이 피정에 참여했다.
1633년에 빈센트는 파리의 여러 사제들과 협조하여 ‘화요 모임’을 시작하게 된다. 매주 한 그룹의 사제들이 생 라자르에 모였다. 빈센트가 그 모임을 총괄했고 일정시간의 기도 후에 사제가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서로간의 신념과 생각을 나누었다. 참석자들의 반응은 서로간에 용기를 주는 것이었기에 모임을 마치면서 모두들 새로운 열성으로 가득 차 옴을 느꼈었다. 화요모임은 사제직의 이상들을 키워 주었고 사제들간의 상호 협력 기반을 마련하는 위대한 결실을 가져왔다. 많은 미래의 주교들이 그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는 먼저 빈센트가 그들과의 친교를 맺는 계기가 되었고 이 미래의 주교들에게는 그들 사제직의 헌신을 깊게하고 성화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화요모임은 빈센트의 임종시까지 약 250명의 참석 회원을 가지는 규모로 성장했었다.
이 시기에 애덕동지회의 발전도 선교활동의 발전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샤티옹에서 시작된 이래 애덕회는 지역에 기반을 두고 조직화되었으며 더 나아가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응답하는 신축성을 가지게 된다. 창립 목적이었던 병자를 돌보는 것 외에도 애덕회는 1621년에 걸인들의 필요함에 응답하기 시작하면서 수감 죄수들과 갤리선 죄수들 그리고 결국에는 궁핍한 젊은 부부들과 기근, 전쟁의 희생자들에게까지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게 되었다.
부유한 애덕회 부인들의 자선은 놀라운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가지 문제점이 분명해졌다. 애덕 활동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귀부인들의 관리와 개인적 참여가 절실하였다. 귀부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과 선의만으로는 병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의 필수품을 청소하고 직접 준비하는 육체적 고된 일을 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예를 들면 몇몇 애덕부인회 회원들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일들을 시종들이 대신하게 하였다. 하지만 헌신은 사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영혼 그리고 조건없는 성실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하여 루이즈 드 마리약은 그녀의 사명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되었고 빈센트와 더불어 사랑의 딸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빈센트와 루이즈는 사랑의 딸 수녀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
진행되는 애덕활동을 감독하고 사랑의 딸회를 창립하면서도 빈센트는 방문회 수녀들의 영성지도에도 헌신하게 된다. 그는 창립자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성녀 잔 프란치스카 드 샹탈 원장수녀로부터 위임권을 넘겨받았다. 빈센트는 수녀들이 이 두 성인들의 정신 안에서 살아가도록 지도했고, 그들과 수녀들이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도록 힘썼다. 세월이 지나면서 네 곳의 봉쇄 수녀원들을 책임지게 되었다. 빈센트는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을 사랑했고 잔 수녀와는 영성 지도자로서의 관계에 있었기에 방문회 수녀들은 항상 빈센트의 마음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 다음 1633년에는 빈센트 삶에 있어서 그 창립활동들이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즉, 애덕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 서품자 피정, 그리고 화요모임이다. 빈센트는 이 시점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교회적이고 사회적인 사안들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빈센트는 1638년에 하나의 새롭고 긴급한 일이었던 버림받은 어린이 구제사업을 시작한다. 매년 약 300명이 더 되는 어린이들이 파리시내와 성 란드리 구호소에 버려졌다.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배고픔과 무관심으로 죽어갔다. 일을 시작하면서 빈센트는 루이즈에게 어린이들을 맡겼는데 얼마 후에는 빈센트와 루이즈가 그 사업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12명의 사랑의 딸 수녀가 그 일을 하도록 소임을 받았으며 어린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13 곳의 보호소가 세워졌다.
1639년을 시작하면서 빈센트는 첫 번째 위대한 애덕의 국민운동을 시작한다. 1월에 그는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로렌 지방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애덕부인회에게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그 후 10년간 구제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지원본부가 조직되고 배고프고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음식과 거처를 마련하고, 병든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자금을 지원했다. 빈센트는 생 라자르를 기반으로 힘을 쏟고 격려하며 조언을 하였고, 모두가 침착하게 대응하기를 간청했다. 그는 피난민들을 위해 선교활동을 조직하였고,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받아들였으며, 빈곤에 직면한 로렌 지방의 귀족들을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활성화했다. 그는 또한 평화를 호소하기 위하여 재상이었던 리쉴리외와 그 밖의 권력자들과의 친분을 이용하기도 했다.
결국에는 황폐함이 나라 곳곳으로 번져갔고 그럴수록 빈센트와 루이즈 가족들의 응답도 신속해졌다. 1639년에 시작한 로렌 지방에 대한 꾸준한 지원 외에도 피카르디, 샹파뉴, 일 드 프랑스 등의 다른 지역에서도 도움의 요청이 있었다. 30년 종교 전쟁과 프롱드로 알려진 내란이 시작된 이래 나라의 반 이상이 황폐해졌다. 질병과 살인 약탈이 일 드 프랑스 지방을 휩쓸던 1652년에는 3차 전선이 파리에서 시작됐다. 1639년 로렌지방에서 시작된 이래 가난한 이들의 절규는 빈센트가 1660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지방 곳곳을 다니도록 이끌었다.
그 애덕 활동의 범위는 오늘날 상상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1652년에는 생 라자르에서 매일 두 차례씩 거기에 모여든 가난한 이들에게 수프를 공급했다. 1652년 6월에는 사랑의 딸회 수녀들이 8,000명의 피난민들을 본원에서 급식시켰고 가까운 곳에 거주시켰다. 성 바오로 본당에서는 5,000명의 가난한 이들을 먹였고, 60~80명의 환자들을 간호했다. 자선활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잘 조직되었다. 음식과 의류의 기증품들은 정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집했다. 도시 외곽 거주지는 가난한 이들을 영육으로 사목하는 여러 수도 공동체들에게 구분되어 할당되었다. 애덕부인회는 주 단위로 모여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가난한 이들의 방문회수를 나누었다. 즉, 사제, 수도자, 사랑의 딸회, 애덕회가 전교회원들과 연계되어 지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파리로 쇄도하던 소외된 성직자들이 빈센트에 의해서 함께 모이게 되는데 그는 이들이 정기적인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빈센트는 악습에 물든 삶을 벗어나기 원하는 여자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해 한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그들을 방문회 수녀들의 책임에 맡겼다. 시골 지역의 여성들은 성 데니스 지역의 한 집에 머물면서 거주지와 음식 그리고 보호를 제공받았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랑의 응답에 대한 현실적인 실용성과 어려움들의 범위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다.
1643년 6월 빈센트가 63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아주 전적인 책임의 직분을 맡게 된다. 안 도트리슈(오스트리아의 앤) 여왕은 그의 남편 루이 13세가 죽고 나서 루이 14세가 미성년자였을 시기에 교계업무 협의회를 소집하게 되는데 빈센트를 회원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 모임에서 빈센트는 훌륭하고 자질이 있는 주교들을 선출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봉쇄 수도생활의 부흥을 보게 되며 얀세니즘을 다루었고, 국민들과 가난한 이들의 곤궁한 일상을 프랑스 정부 앞에 제시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사에 대한 헌신적인 참여와 가난한 이들의 다급한 절규에 응답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빈센트는 프랑스 국경을 넘어선 초대와 요구도 수용하였다. 전교회의 활동은 프랑스를 넘어 이탈리아(제노아, 튜린, 로마), 사르디니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그는 노예가 된 그리스도교 포로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기 위하여 전교회 사제들과 수사들을 튀니지와 알제리의 프랑스 영사 임원으로 있게 하였다. 1648년에는 한 무리의 선교사들이 마다가스카르로 향해 떠났고 1652년에는 사랑의 딸회 수녀들이 여왕의 부탁을 받고 폴란드로 파견됐다. 빈센트는 또한 사랑의 딸회 수녀들을 선교사로 파견해 달라는 강력한 요구에 따라 그들을 1656년에 마다가스카르로 보내는 것을 신중히 숙고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빈센트와 루이즈가 세상을 떠났기에 여러 해가 지난 뒤에서야 사랑의 딸회는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회의 본래적인 활동은 계속되었다. 화요모임은 생트, 마르세이유, 아를르, 튜린, 레 퓨이, 앙굴렌, 앙제, 보르도 그리고 발 뤼쉬를 포함하며 성장했다. 지방에 있는 사제들은 빈센트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서품 피정과 신학교는 성황을 이루었다. 빈센트는 또한 그 과정에서 본원이 거의 파산에 이를 정도로 수천 명의 평신도들을 피정시키기 위하여 생 라자르에 무료로 받아들였다.
꿈을 꾸고 기도하면서도 빈센트는 침대에서 숨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옷을 고스란히 입은 채로 마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쟁하며 무장한 것처럼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 1617년의 그날 이후로 가난한 자들 편에 서면서 그는 43년간을 죄와 비참함, 질병과 피로와 싸워왔었다. “그가 임종할 순간에 거기에 앉은 채로 그는 주님의 손 안에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맡겼습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멋있었고 더 당당했으며 거룩하게 보였습니다.” 라고 한 목격자는 말한다. 이는 1660년 9월 27일 새벽 4시 45분, 첫기도 시간이었다.
그의 육체적 수고의 내용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628년부터 1660년 까지 13,000~14,000명의 서품대상자들이 서품 피정에 참석했다. 2만 명의 피정자들이 생 라자르와 봉장팡 학원에서 머물렀다. 거의 만 명의 어린이들이 죽음의 순간에 구조되었다. 수십만 명의 가난한 이들이 도움을 받았다.
윤리적 결산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빈센트의 생존시에는 당시 하나의 새로운 이상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가장 뛰어난 성직 개혁가였다. 그의 쇄신 활동들은 그가 용기를 북돋았던 수도자들을 넘어서서 그가 개혁을 도와주었던 주교들에게까지 파급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빈센트는 복음선포의 감미로움과 단순함 즉, 복음의 힘에 관한 새로운 느낌을 다시 일으켰다.
빈센트의 길
예수회원들에게 “영신수련”의 세계를 남겼던 이냐시오 로욜라와는 사뭇 다르게 빈센트는 그의 방법을 약술하거나 그의 영성에 관해 편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외적인 것이 “일반 규칙서” 또는 “전교회 회헌”인데 이는 영성적 지혜, 복음의 단순성, 제자직, 예수님 사랑, 실용성, 경험 그리고 상식을 담고 있는 금광인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전교회원들과 33년을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분명하게 그들만을 위하여 썼다. 전교회는 항상 경계심 강하게 이것을 내적 삶의 부분으로서 간수해왔다. 이 책에서 “일반 규칙”을 보게 되는 것은 이것이 일반독자들을 위하여 처음 출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출판한 이유는 전교회가 새로운 관점으로 읽어 왔지만, 어떤 보화를 빈센트가 그들에게 남겼고, 아직 충분히 살아오지 못했던 그 규칙의 충만함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빈센트는 여전히 그의 공동체 외에는 “영신수련”에 버금가게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저술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의 길을 그의 삶과 서간들로부터 뽑아내어 조금씩 얻는 입장에 있다.
빈센트 영성의 유산을 발견하는 시발점은 바로 빈센트가 어떤 영성을 가지지 않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하나의 길을 가졌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지 단순한 말의 차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주 결정적으로 중대한 점이다. 빈센트는 사고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들은 어떤 출처가 아닌 사랑의 연속성에서 나온다. 빈센트는 경험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는 습관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사건들과 사람들이 서로 연관된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았었다. 그는 베륄의 고상한 영성을 넘어서서 시간과 역사, 사건들 그리고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절대적 신념에 이르게 되었다. 빈센트 영성의 길은 진보적이고 육화적이며 역사적이고 실존적이다. 하느님이 여기에 계시다. 그는 이를 캔필드의 베네딕토와 잔 루스브록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는 하느님이 임하시도록 그 섭리를 기다리는 인내와 신뢰를 지니게 된다. 체계화된 사고의 영성은 그의 성소적 선물이 아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디서 우리는 그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그의 최초전기작가인 루이 아벨리 주교와 매일 조금씩 더 빈센트의 정신을 연구하는데 헌신해왔던 이 시대 프랑스의 빈첸시안인 앙드레 도댕 신부가 우리를 안내해 줄 것이다. 그런 다음 아벨리와 도댕이 이끄는 그 길 다음에 빈센트가 우리에게 남겨준 몇 개의 수행실천들이 제시될 것이다.
경험, 믿음 그리고 실천적 지혜
앙드레 도댕 신부는 그의 명저, “성 빈센트 드 뽈과 애덕”에서 빈센트의 독창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최상의 기회는 그가 가장 편하게 느꼈고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대가라고 여겨졌던 다음의 세 영역에 있다고 시사한다, 즉 경험, 믿음 그리고 실제적 지혜이다.
빈센트는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 곧 그의 현실과의 연결이고 하느님과의 접촉이다. 그로서는 경험이 하느님 뜻의 전달 수단인 것이다. “스스로 선물하는 선을 행하도록 하십시다”라고 그는 호소했다. 그는 사건들과 상황들로부터 나오지 않는 위대한 생각들이나 계획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사건들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이 그를 인도하시는 길을 보여주고 응답하게 했다.
폴빌에서 임종을 앞둔 남자의 그 고해성사와 드 공디 부인의 시골사람들에 대한 영적 보살핌의 그 관심은 복음선포 선교와 전교회 창립의 새 장을 열었었다. 한 가족의 필요적 요구와 몇몇 여성들의 관대함은 빈센트로 하여금 첫 애덕 동지회로 발전되는 샤티옹 본당의 정기적인 구제지원이 필요함을 느끼게 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직에 스스로를 처음으로 바쳤던 마르그리트 나조의 대담하고 확신적인 솔선수범의 활동을 보면서 빈센트는 관용적인 시골여성들 안에서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성소적 은총을 확인하게 됐다. 보베 주교의 사목적 열망을 보면서 그 스스로 서품자들을 위한 피정을 첫 번째로 조직하도록 부름 받음을 느꼈다. 분명하게 하느님은 빈센트의 길을 상황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그에게 드러내셨다.
경험에 밀접하게 이어지는 것은 활동이었다. 빈센트는 사도행전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시기 전에 행하셨다는 것에 주목했다(행전 1:1). 삶은 가르침에 앞서고 행동은 말에 앞선다. 일반 규칙서 서두에서 그는 복음을 살아감이 선교활동의 근원이 었던 예수님의 삶을 본받도록 전교회원들에게 호소했다. 빈센트는 삶과 활동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였기에 항상 삶과 활동을 최우선으로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1613년부터 1617까지 그의 의미 있는 경험들이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나타났기에 빈센트는 그가 살기 시작한 것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는 사건들에 아주 주의를 기울였고 특히 그 사건에 의미를 준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는 은총과 시련을 통해 정화의 길을 걸었기에 그 의미를 파악했고 그에 대한 응답을 해냈다. 그가 선교를 하면서 가난한 이들과 사제들의 무지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였기에 이에 답하는 길을 찾으려 했다. 그가 길을 걷는 박자와 발걸음들은 그의 편지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주 사용되는 이 말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하느님께 스스로를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 .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 . 선교를 계속하기 위해서 . . . 신학생들과 사제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인간 각자의 귀중함은 인간 남녀의 실존에 진리를 주는 활동 안에 머물고 있다. 빈센트에게 그러한 활동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분이 스스로 안에서 활동케 하며, 스스로가 그리스도에게로 드러나고, 그분을 위해 활동하는 것들 안에서 일관되어 있었다. 인 노미네 도미니, “그분의 이름으로. .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빈센트에게 활동은 어떤 진보적인 의미를 가졌다. 우리는 그가 아마도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실제와 일치시키는 오직 확실한 길은 말하자면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되기보다는 우리의 가진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발견하기 위해 행함으로써 그것들을 성화시켜야만 합니다.” 빈센트에게 하느님은 활동 안에 현존하신다. 하느님은 삶과 활동 안에서 찾아짐으로써 바로 여기에 계신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의 활동들 안에 살아 계시고 보여진다.
빈센트는 믿음에다 살아온 경험을 추가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삶의 보여지는 일들과 상황들 안에서 찾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그를 끌어당기는 것은 예수님이다.
그는 매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인지하고 복음의 구체적 가르침들과 약속들을 살려고 노력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예수님 삶의 선교사적 차원은 그의 그리스도 신비 인식의 초점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며 마을과 촌락을 두루 다녔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시선은 선교사인 그리스도에게 항상 고정되었다. 이 안에서 그는 마을 곳곳을 옮겨 다니며 나라 전체에 복음을 강론하는 전교회의 특성을 인식했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의 선교활동이 하느님의 말씀의 바로 그 파견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을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성부께서는 예수님이 매 순간에 세상에 선교사로 선교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 그분을 세상에 보내셨다. 빈센트는 그 스스로가 육화하신 말씀의 선교사 활동에 결합되기 위한 성소에로 불리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는 구속적인 선교를 위해 파견되셨다. 이는 예수님의 육화, 수난, 죽음으로 이어지는 자기 비움(케노시스)을 통하여 일어났었다. 이것이 바로 빈센트의 마음과 눈을 움직였던 믿음이었다. 그리고 빈센트는 그의 경험을 묵상했었다.
선교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빈센트의 믿음은 진보적이고 역동적이었으며이는 같은 선상에서 교회에 대한 진보적인 관점에도 이르렀다. 빈센트는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삶 중심에 있으며 구원의 특전을 받은 중개자로 이해했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박탈감, 집 없음, 배고픔, 고통, 걱정, 무지 또는 다른 이들의 은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 등으로 인하여 일그러진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빈센트는 우리가 믿음의 시선으로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고 (구원의 특전을 받은 중개자라는) 그 메달을 수여한다면 상황은 아주 다르게 보인다고 말했었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살아있는 표상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그가 전 여왕의 이름으로 자선을 베풀었지만 그가 클리쉬와 폴빌 그리고 샤티옹에서 사람들과 만나면서 스스로를 가난한 자로 여겼고, 결국 빈센트는 청빈과 겸손의 얼굴에 마음을 열기에 이르렀다. 빈센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어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예수 안에서 역설적으로 죽는다는 그 역설을 바로 그의 삶을 통하여 줄기차게 살았었다. 가난한 이들의 신비는 빈센트로 하여금 초연함과 겸손함의 길에 이르게 했고 믿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하였다.
빈센트의 제 삼 단계는 실제적 지혜이다. 누군가가 개인적 가치와 존엄성 그리고 삶이 활동 안에서 발견되어진다고 믿었듯이 세 가지 규칙들이 빈센트의 삶을 형성했다. 첫째는 항구한 지향의 순수함과 목적의 단일함이다. 이는 빈센트에게 하나의 구체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성령의 나눔 즉 사물에 대한 하느님의 관점을 나누어 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자주 말했다. 그는 그의 순수한 지향이 자신의 관심사들과 타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하느님 사업을 돌볼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돌보실 것이다”.
둘째 규칙은 활동이 효과적으로 양극단을 포용할 때 이를 자신을 드러내 주시는 하느님의 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자애로운 사랑은 항상 효과적인 사랑을 동반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하나의 허상이 된다. 이웃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의 이웃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자와 가난한 이라는 양극단의 사람들을 관용과 봉사 안에서 함께 가게 했다. 그는 활동하는 신비가였기에 깊은 내면과 신앙의 삶은 열심한 활동의 삶 안에서 보여지고 커갔다. 이 모든 면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단순하라고 말하셨던 그의 주님께 충실한 제자였다.
셋째 규칙은 자신의 존재에 하느님의 신뢰를 비추어 보는 것이었고 인간존재를 향한 대단한 신축성을 가지는 것이다. 활동에 관한 빈센트의 규칙은 항상 목표들에 맞게 확고부동했고 참을성이 있었으며 수단들에 맞갖는 융통성이 있었다.
하느님 사랑의 성령은 경험과 믿음 그리고 실제적 지혜를 향한 빈센트의 헌신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사랑으로 그분께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했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 아니시다.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다가가야 한다.
식별의 길
루이 아벨리 주교가 여정의 이 부분을 안내하여 줄 것이다. 1664년에 그는 빈센트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과 성향들은 대부분이 우리에게 좋게만 느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 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식별해야만 할까요. 우리는 먼저 그 모든 것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비추심을 구하십시오. 그런 다음 우리는 그것들의 목적, 동기, 수단 등을 깊이 성찰하면서 그것들이 우리의 선한 느낌과일치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들을 현명한 분들과 상의해보고 우리 윗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지혜의 보물과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이 제시하는 것을 행함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빈센트의 식별과정으로서 주목할 만한 통찰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시기가 있다. 첫째는 ‘초탈적 준비’(Unrestricted Readiness)이고, 둘째는 ‘확증을 심사숙고하는 것’이며, 셋째는 ‘상담을 하는 것’이다.
빈센트는 우리에게 기도로서 시작하고 초연함의 은혜를 청하기를 조언한다. 영성의 전통에서 초연함(무관심;indiffrence)이란 단어는 한 제자에게 어떤 심오하고 생명을 주는 완전한 개방의 성향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다른 부정적인 여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불어는 “disponibilite"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적절한 영어의 동의어가 우리에게는 없다. “Indiffrence"나 ”isponibilite"는 한 시종의 자질을 표현하고 아마도 오늘날에 가장 적합하게 “초탈적 준비(unrestricted readiness)"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기에 준비된 한 제자로서 필요한 첫째 성향이다. 빈센트는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섭리의 이끄심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길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로서는 자신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과 협상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에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초탈적 준비에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 될지라도 주님이 부르시는 것을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초탈적 준비의 자리에 있을 때에 우리는 두 번째 단계로 준비된다: 즉 시작, 과정, 결과, 행동 방향의 대가를 초연하고 열린 자세에서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에 미리 결심한 목표에 찬반을 가리는 더 이상의 확증을 정립시키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초탈적 준비는 우리를 우리의 개인적 사안을 떠나서 주님의 관점에서 확신을 심사숙고하도록 이끈다.
세 번째로 아마도 빈센트의 길의 독특한 측면은 지혜로운 남녀들로부터 상담을 구하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많은 경우에 이를 실천하였다. 앙드레 뒤발 신부는 그가 1638년에 서거하기까지 빈센트의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빈센트가 전교회를 창립할 즈음에 그는 뒤발 신부에게 갔었고 그의 곤란한 상황을 알렸다.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1617년에 드 공디 부인은 45,000리브르를 준비했었고 나에게 그의 영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곳에서 전교활동을 하는 한 수도회를 찾아 달라고 했었습니다. 드 공디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녀가 죽기 전에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지요. 어떤 수도회도 그 일을 맡을 수 있거나 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나와 뽀르따이 신부 그리고 몇몇 다른 신부들은 이미 그 전교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아주 대단히 우리 일을 축복하고 계셨습니다.” 빈센트가 뒤발 신부에게 그의 곤경에 관해 말하는 것을 끝마쳤을 때에 뒤발 신부는 그에게 말했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이를 유의하는 사람에게 많은 상급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면담을 마치고 나서 빈센트는 그 일을 하는 다른 수도회를 찾는 것을 멈추고 전교회를 창립했다. 그는 또한 뒤발 신부의 충고와 지도를 받아들여 생 라자르 수도원이 그에게 기증되었을 때에 이를 받아 들였다. 그의 소박한 목적들에 비해서는 너무 컸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했었다. 빈센트는 하느님의 뜻이 단지 사건들과 삶의 상황들뿐 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과의 상담 안에서도 드러난다고 믿었었다.
이것이 빈센트의 길의 그 실체였다. 이는 믿음의 빛에서 보아온 경험에서 시작했고, 복음의 역설적인 원칙들에 인도된 활동으로 옮겨갔었다. 그는 그의 영혼을 초탈적 준비에 개방함으로써 식별에 들어갔고, 그의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에 정보, 자료, 위험, 이익 그리고 계획의 성과를 면밀히 검토했었다. 중대한 순간의 문제에서이것이 행해졌을 때에 그는 한두 사람의 현자들에게 상담을 청했었다. 빈센트의 길은 역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 안에 뿌리를 내린다. 이는 역사적이고 실존적이며, 구체적이고 역동적이면서 삶과 신비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그는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와 인간실존의 길에서 하느님을 찾았었다. 그는 하느님이 여기에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부터 배워왔었다.
빈센트의 창조력
빈센트의 길은 선교와 일반 사람을 향한 여러 가지 쇄신적인 접근들 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발견한다. 이는 그의 설교 방법, 기도, 기도의 되풀이, 공동 침묵기도 그리고 협력이다.
대단히 문학적이고 화려한 그 당시의 설교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빈센트는 그가 “작은 방법”으로 불렀던 것을 창안했다. 선교활동에서 단순하지만 강하고 효과적이었고 활동하는 빈센트의 실제적인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 방법에는 세 단계들이 있다, 즉 정의와 동기들 그리고 수단들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복음 대목과 덕 또는 악행의 의미들을 숙고하도록 설명해주면서 시작했다. 두 번째로 특히 성서와 실제적 경험에 근거하여 설교자는 특정한 덕이나 악을 실천하거나 피하는 것에 관한 동기부여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덕을 살아가거나 악습을 피하기 위한 실제적인 수단들을 질문 속에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온전한 단순함 속에서 “작은 방법”은 정신과 마음 그리고 의지에 와 닿기 때문에 강한 힘을 지녔다. 이것은 믿음의 정열과 설교 사목에 대한 확신의 힘을 회복시켰다. 또한 “작은 방법”은 사랑의 딸회가 그들 가르침들의 한 방법으로 채택하기도 했던 기도의 한 방법에 관한 빈센트의 생각의 핵심을 형성했다.
아마도 빈센트의 천재성은 “기도 되풀이”의 개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빈센트는 정기적으로 전교회원들과 사랑의 딸 수녀 모두에게 그들 회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그들의 기도를 나누도록 부탁했다. 그는 어느 전교회원이나 사랑의 딸 수녀에게 질문하곤 했다, 신부님 또는 수녀님, 오늘 아침에 당신의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질문 받은 사람은 완전한 단순함의 정신으로 우러나서 모인 자리의 다른 이들 앞에서 그들의 기도를 나누도록 초대되었다. 빈센트는 그런 다음 그것을 성찰하면서 듣거나 말해진 것에 대한 칭찬이나 사의를 표했다. 때로는 나눈 내용에 대해 아주 감동해서 그의 흡족함을 표시했다. 그런 다음 그는 그 주제를 더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시간을 두고 체계화되었던 초창기적인 놀라운 수행실천이었다. 하지만 많은 방법들이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다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빈센트의 “기도의 되풀이”라는 수행실천은 역시 하느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그의 심오한 확신을 명백히 한 것이었다. 하느님은 나의 형제자매들의 기도 안에서 여기에 계신다. 하느님은 단순함의 정신 안에서 나누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 가운데 여기에 계신다.
빈센트는 전교회 회원들이 매일 아침 공동으로 모여 한 시간씩 기도하도록 하였다. 그는 사랑의 딸 수녀들도 같은 방식으로 공동으로 아침에 30분 저녁에 30분씩 기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개인적인 침묵기도의 요청이었다. 주목할 만하게도 그와 같은 시기에 영국해협을 넘어서서 일반적으로 우정회의 창립자로 알려진 그레고리오 팍스 또는 퀘이커교도들도 비슷한 형태의 기도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에는 어떤 신비적 천재성이 깃든다. 이는 개인기도는 사적으로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는 논리의 주장을 벗어난다. 이 기도의 힘은 우리 시대에 다시 재발견되고 있다.
끝으로, 빈센트의 영성은 전적으로 세례성사 안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의 사제 영성마저도 마음으로부터 세례(성사) 적이다. 그는 우리의 성소가 서로가 구성원인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고 그의 부활에로 들어가는 세례를 받는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빈센트는 많은 사람들의 성소적 선물에 개방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회적 계급으로부터 사람들의 선물을 확인하고 인정하며 소집하는 놀라운 성소적 선물을 가졌었다. 예를 들면 한 혁명기간 중에 그는 그 시기의 모든 문화적 기대감과는 다르게 마르그리트 나조의 성소적 선물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녀를 가난한 병자들의 한 봉사자로서 맞아들였다. 그의 능력은 특히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분명하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봉사 안에서 교회의 선교에 참여하는 새롭고 쇄신적인 그녀들의 부르심을 확인했고 경의를 표했었다. 그리고 다음 편에서 듣게 될 루이즈 마리약의 그 성소적 선물은 가장 극적인 경우이다.
빈센트의 길은 오늘날 아주 중요하다. 비록 빈센트가 그의 시대의 사건들과 상황들에 응답했었던 17세기에 아주 걸맞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우리를 17 세기를 넘어서서, 하느님이 우리 시대의 사건과 상황 안에서 보여주시는 것에 우리가 전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도록 불림받은 삶으로 이끌어 준다. 만약 빈센트가 우리에게 마지막 말을 한다면, 그는 아마도 우리에게 섭리를 기다리고 마음 전체로 행동하라는 이중적 역설을 남길 것이다. 사실상, 빈센트는 하느님이 이끄실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런 다음 우리가 하느님의 이끄심을 확인하고 나서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마음을 다하여 주면서, 하느님 섭리의 인도하심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신뢰를 두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즉 하느님이 여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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