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문학과 잠언서(코헬렛·욥기)

코헬렛(4,1-17): 인간관계의 허무함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마리아 아나빔 2013. 10. 13. 16:10

 

 

 

                            코헬렛(4,1-17): 인간관계의 허무함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들어가면서

 

코헐렛 4, 1-17절은 태양 아래 일어나고 있는 인생의 허무와 자행되는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언급한다. 코헬렛의 저자는 먼저 억압받는 이들을 위로 해줄 사람이 없는 사회적 불의를 지적한다(,1절).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삶은 죽음과 태어나지 않는 상태가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태양 아래 자행되는 악한 일들을 행하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이다(2-3절).

 

또한 인간이 삶 속에서 행한 노고와 일의 성공 역시 시기의 결과이기에 허무와 바람을 잡는 일임을 그래서 차라리 평온으로 가득한 손이 더 낫다고 본다. 그는 또한 인간의 삶이 이처럼 허무한 것이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위로가 됨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근원적 존재임을 암시한다.

 

코헬렛의 저자는 태양 아래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인간이 추구하는 권력의 무상함을 지적한다. 설교자가 권력의 무상함을 외치는 것은 권력의 특성이 영원하지 않는 변화 무상함에 있다. 그래서 늙고 어리석은 임금보다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젊은이가 더 낫다고 한다(13-16절). 그러면서 설교자는 태양 아래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질서 잡히지 않고 허무하기만 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삶은 악을 저지르지 않고 허무하게 살지 않는 지혜로운 삶임을 권고한다(17절).

 

ex)

인간관계와 허무함 (4:1-16)

1. 억압자와 억압받는 이; 억압자에게서 나오는 폭력 때문에 이미 죽은 이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가 오히려 행복할 정도 (vv.1-3)

2. 헛된 수고를 낳게 만드는 시기와 그 허무함 (vv.4-6)

3. 혼자 사는 사람과 그 허무함 (vv.7-8)

4. 함께 사는 것의 장점과 보상 (vv.9-12)

5.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젊은이와 늙고 어리석은 임금 (vv.13-16)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 (4:17-5:6)

• 성전에 갈 때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란?(4:17)

• 서둘러 내뱉는 말의 위험 (5:1-2)

• 서원한 바를 실천하고,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서원하지 말라(5:3-5)

• 꿈에 대한 그릇된 믿음에 대한 경고 (5:2,6)

 

 

 

 

Text 안에서

 

 

1-8절: 인간관계의 허무함(평화와 절제의 필요)

 

1절은 태양 아래 억압받는 이들(약한 자, 기댈 곳이 없는 자, 미소한 사람들)에 대한 테마는 구약성경의 중요한 주제이고 예언자들 역시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격한 말로 비난한 것이 된다. 특히 고아와 과부, 이방인들에 대한 돌봄을 강조하고 지도자들의 그들에 대한 착취를 비난한다. 따라서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는 것은 사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설교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으로 설교자를 염세주의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과격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표현은 구약은 다른 여러 책들에서도 볼 수 있다(욥기 3,11-13; 예레 20,14-18).

 

또한 인간의 노고와 일의 성공 또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서로 남을 시기하고 쟁취하여 얻은 것이요. 그렇다고 궁극적으로 의인의 삶이나 악인의 삶 모두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이기에 허무라는 것이다(2,11참조). 그래서 평온으로 가득한 손이 노고와 바람 잡는 일로 가득한 손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일들로 분주했던 마르타의 삶과 오직 중요한 한 가지 하느님의 말씀을 중요히 여기며 살아가는 마르타의 삶을 같이 엿보게 한다. ‘어리석은 자는 두 손을 놓고 놀다가’라는 뜻은 자신의 팔짱을 끼고 앉아 놀다가 자신의 고기를 먹는다라는 당시 속담일 것이다. 즉 아무 일도 않는 게으른 자를 의미한다(잠언 6,10-11). 즉 일하지 않고 지금껏 벌어놓은 것만 소모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 몸을 수죽케 하는 것으로 일하지 않으면 죽음을 재촉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쓰라린 노동이라도 삶의 가치를 긍정하는 태도를 내포한다(5절). ‘평온으로 가득한 손’ 역시 속담으로 설교자는 생활을 즐기기 위하여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욕심 때문에 악착같이 서두르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잃는 것이라 가르친다(6절). 또한 어떤 일을 할지라도 절제를 지키며 마음의 안정을 잃지 말라는 것에 대한 지혜이다.

 

9-16절: 허무함 아래, 우리의 자세

 

태양 아래 모든 것이 어리석고 불의하고 헛된 노고이고 허무이지만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고 조언한다. 둘이란 의미 안에는 혼자로서 얻을 수 없는 보상이 내포되어 있다. 이 둘이란 의미는 또한 아내, 친구, 동료, 자식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영적 육적으로 자신의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대상도 된다. 우리의 수고와 노동이 죽음을 향하여 가기에 허무하다. 그러나 둘이란 우리의 수고와 노고에 대한 보상이요, 헛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나눔의 대상이 있음이 그나마 헛되게 살아질 것들을 보람으로 채운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하나가 넘어질 경우 일으켜주고 함께 고통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허무할 수 있는 인생을 그나마 의미와 보람과 위로로 채워줄 수 있다는 지혜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말은 오늘날 홀로 살아가고 함께하지 못하는 개인주의 문화를 가진 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둘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지지만’ 의 표현처럼 팔레스티나에서는 겨울이 되면 초라한 여인숙에서 둘이 한 이불 안에서 자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도 옛날 여러 식구들이 한 이불 안에서 잠을 잤다.

 

또한 외톨이가 아닌 둘이란 의미는 영적인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하더라도 유한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기에 인생은 설교자의 말대로 태양아래 허무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이신 분,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배우고 현세에서부터 그렇게 살아간다면 외톨이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유한한 내 삶을 영원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 혼자 극복해나가기 힘든 현세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

 

또한 ‘누가 하나를 공격하면 둘이서 그에게 맞설 수 있다’(12절)라는 이 격언은 단순히 둘보다 셋이 낫다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지금까지 말해 온바, 곧 혼자의 노력보다 공동 협력이 나음을 종합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식의 격언은 수메르 문헌에서도 우리 속담에서 볼 수 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것이 있다.

 

고대 수메르의 문헌에서도, 길가메쉬는 그의 친구 엔키도우와 힘을 합치면 거인 훔바바를 쓰러뜨릴 힘이 충분히 있다고 설명한다. “끌고 있는 배는 가라앉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 줄의 벼리는 아무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제 ‘나이 많은 어리석은 왕’과 ‘슬기로운 젊은이’의 모습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의 인간 권력의 무상함을 이야기 한다.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젊은이’(13-14절) 이야기는 혹은 에집트의 요셉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에 나오는 인물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당시의 사람은 젊은이(14절)을 지지하고 칭찬한다. 예는 역사적 사실에서 서서 젊어서 투옥되었으나, 그의 지혜로 말미암아 최고위층에 앉은 젊은이를 암시할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에도 일반적 사실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젊은이란 뜻은 넓은 의미를 가졌고, 어린이도(창세 21,8; 출애 2,3) 소년도(창세 4,23) 청년도(창세 37,30) 모두 젊은이라고 불렀다.

 

설교자는 새 왕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환영과 칭찬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그 왕을 모르므로 그 에 대하여 무관심하리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도 그 영예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위대한 왕의 영광과 명성도 시대와 함께 사라지니 헛되다고 가르친다(15절).

 

그러므로 설교자는 4장 17절에서 5장 6절에서 권고의 형식으로 종교적 생각을 한다. 특히 성전에서 순종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자의 제물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며, 기도하는 일과 서원을 하는 일에 있어 여러 가지 권고를 준다. 여기서 ‘성전’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하느님의 집’을 가리키기도 ‘회당’을 가리키기도 한다(사무엘 하 12,20; 이사 37,1). ‘발걸음을 조심하라’라는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 외에도 바로 걷는 것으로 도덕적 의미를 포함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신명 5,1-27; 6,4; 1사무 15,22) 과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임을 가르친다.

 

 

 

나오면서

 

 

 

코헬렛 2,1-6,9절까지는 코헬렛의 체험과 충고에 대한 보고이다. 2,1-26절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조건을 탈피하기 위해서 벌이는 노력이 소용없다는 결론을 얻고 곧 인생은 허무라고 말한다. 하지만 2,24에서는 코헬렛은 “자기 노고로 먹고 마시면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것 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인간의 노고에 대한 몫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2,10).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그 즐거움을 주시는 것 또한 알았다(2,26). 코헬렛의 체험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미 코헬렛은 2,24-26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즐거움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임을 깨닫고 또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정을 따라 주어지는 비밀스러운 세상에 대해 알아챘다. 이제 3,1-15절에서는 모든 것에 때가 있음을 가르친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3,11)”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경외할 수밖에”(3,14)없다고 말한다. 코헬렛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지혜가 있던 곳에 같이 서있다. 다만 잠언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지혜의 맥락아래 있었다면, 코헬렛에서는 이 구절이 인간이 이해할 수없는 세계와 관련해서 언급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어서 3,16-4,6절에서는 정의와 응보,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에 대해, 그래서 삶보다 죽음이 낫다는 것과 노고의 허무함에 대해 말한다. 그가 본 세상은 “공정의 자리에 불의가 있고, 정의의 자리에 불의가 있는”(3,16)곳이다.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죽을 운명에 놓인 것은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관찰하고 보고한 이러한 내용에서 결론, 즉 “자기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다”(3,22)는 깨달음을 유추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죽기 때문에 즐기는 것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어 억압받는 사람들의 억울함에 대해 말하면서 오히려 “오래 전에 죽은 고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4,2)고까 말함으로써 이런 고통을 세상에서 몰아내지 못하는 무력감을 나타내고 있다.

 

4,7-16절에서는 혼자보다 둘이 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인생의 노고가 덧없음을 알지만,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젊은이가 더 이상 조언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임금보다 낫다”(4,13)것도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을 권고하지 않는다.

 

4,17-6,9절에서는 종교적 권고와 함께 권력과 그 남용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한다. 특히 4,17-5,6에서는 거룩한 곳, 즉 하느님의 집을 방문할 때에 주의점, 하느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것, 하느님께 서원한 것을 충실히 채울 것, 그리고 경솔하게 죄를 짓지 말 것 등을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잠언에 나타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과 달리 인격적인 신뢰의 어조는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이 단락에서 코헬렛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께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코헬렛은 하느님께 행하는 기도와 서약을 결코 아무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 참고문헌: 구약성경 주해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0, pp.1821-1823.

                전도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265-268.

                시서와 지혜서, 성서와 함께, 영원한 도움 성서 연구소, 1981, pp.147-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