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들의 단상(2)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A life walking with God)
예언자는 고독한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너무 높고 그의 덩치는 너무 크고 그의 관심은 너무 치열해서 하느님밖에는 더불어 나눌 수가 없다. 이러한 예언자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의 때에 책임을 지고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을 열어 보인다.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 첫 번째 예언자이다. 시온과 자기 동족을 사랑한 그는 닥쳐올 일을 환상으로 보며 그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그러나 그는 계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와 불의를 저지르는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항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고, 잘못을 용서하며, 거역하는 짓을 눈감아 주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징벌을 선포한다(7,18).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일임을 상기 시킨다(6,8 참조).
하느님의 사람(A person belong to God)
예언자는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꿰뚫어보는 방법을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감정을 느끼는 법도 배워야 한다. 즉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그분의 영원하고 자애로운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아들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라고 탄식하며(20,7ㄴ.10) 그 동기가 하느님의 꾐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꾐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수행할 예언직의 고귀한 가치뿐 아니라 그 직분이 가져올 고통과 역경을 모두 보여준다. 그래서 한편으로 예언직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예언자로 부른 하느님의 권능과 힘에 압도되어 감히 거절하겠다는 말도 못한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하느님과 혼인 서약을 맺는 축복, 그분의 신부가 되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자신이 만군의 하느님과 약혼을 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꾐은 그로 하여금 예언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했으며, 앞날의 고통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소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자신감과 힘도 함께 준다.
하느님 안에 희망(A hope in God)
예언자들은 한 나라가 힘에 의존하는 것을 악으로 본,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물들이다. 제국의 막강한 힘은 주권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어 오만을 낳고 파괴와 몰락뿐만 아니라 범죄와 도덕적 부패까지 가져온다. 그래서 그들은 힘과 폭력의 숭배 대신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선택한다.
나훔, 하바쿡, 스바니아 예언자들은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들로서 강대국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다른 민족들을 징벌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권세를 잡으려고 탐욕에 취하여 자비심을 잃어버린 그들이 행한 범죄는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의인마저도 죽이는 상황 에서 예언자들은 신앙과 현실 사이에 갈등하며 하느님의 정의가 개입되기를 호소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고통과 시련의 현실상황을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주님의 날’을 희망하며 ‘성실함’으로 이겨내라고 격려한다.
가난한 이들의 예언자(A prophet of the poor)
동정(compassion)은 하느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의 뿌리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그 긴밀한 관심과 상황에 예언자는 동정의 태도로 반응한다. 이러한 동정은 구체적 상황과 인간 실존에 주목하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현존에 자기를 열며 더불어 살아가게 한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과 예언자들의 동정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은 ‘야훼의 가난한 이들’로서 하느님과 긴밀하고 특별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그분에 의해서 구원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메시아가 와서 완수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첫 설교 역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며 그분이 선포한 왕국을 상속할 사람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마태 5; 루카 6,20). 이러한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큰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봉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명을 위한 서원(Our profession for 'missio Dei')
사랑, 정의, 진리는 인생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의 분출이다. 그리고 그것을 식별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일이고 거기서 기쁨이 샘처럼 솟아난다. 예언자들에게 있어 사랑과 정의는 옳음과 그름의 단순한 행동양태가 아니다. 하느님의 속성이며, 인간 역사의 존재 여부의 차원이고, 그분이 이 역사에 참여하심에 그 비밀이 있다.
에제키엘은 예언자 중 처음으로 조상들과 연대된 공동체적 연대책임과 개인책임의 원칙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사이에는 개인책임의 논리보다는 공동체의 연대책임에 입각한 논리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에제 18, 탈출 20,5).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백성 전체의 책임이므로 이제 와서 회개한다고 처지가 달라질리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자포자기하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와 공평이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과거의 죄에 연연해하거나 그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회개하여 생명을 얻으라고 촉구한다(18,1-32).
위로의 원천이신 하느님(God, the Source of all comfort)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본성을 밝혀보려는 탐색가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통찰과 인간에 대한 그분의 관심이 주제이다. 인간의 행실과 사건들은 그분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며 즐겁게도 분노하게도 한다. 이처럼 하느님이 지성과 의지만이 아니라 인간사에 긴밀하게 반응하시는 분이란 생각은 예언자들의 특유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다.
“위로 하여라”(40,1)라는 말로 시작되는 제2 이사야서의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원망하고 용기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구원을 선포한다. 그는 실망한 백성에게 용기를 주며,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과 유일성, 절대주권과 그분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신앙을 일으킨다. 이 위로와 구원은 유배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해방자이신 하느님의 새로운 탈출(exodus)과 새로운 창조행위로서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인도자, 보호자(고엘)가 되어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하여 구원시킬 것임을 알린다(43;48;52). 하느님의 위로는 극진한 사랑으로 인한 것으로(49,13), 힘이 빠진 이에게 힘을 주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어(40,29), 즐거움에 넘치게 하고(51,3), 포로에서 풀어주어 시온과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한다.
주님의 날이 오기 까지(Before a day of the Lord)
예언자는 우리 귀에는 한 옥타브 높은 음계를 사용한다. 그는 ‘노래하는 성자’도 아니고 ‘도리를 가르치는 시인’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습격하는 이다. 양심이 끝나는 곳에서 그의 말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하까이, 즈카리아 그리고 말라키는 유배이후의 예언자들로서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과 ‘메시아 약속’이 새로운 성전 재건으로 실현되리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성전 재건과 함께 실현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실현된다. 이에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은 신앙에 대한 회의와 좌절을 느끼며 실의 속에 불만을 토로한다.
이러한 백성을 향하여 예언자들은 새로운 성전과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시대를 열어 주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은 백성들에게서 배척당하고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대속 제물로 내어주는 나귀를 따고 오시는 평화의 임금, 가난한 이들의 임금에 의해 실현될 것임을 선포한다(즈카 11,4- 12,13). 따라서 하느님께서 새 성전에 돌아오시는 사건은 예루살렘이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내적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임을 선포한다. 즉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 진실한 모습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회개의 삶을 요청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봉헌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하는 인간의 마음과 태도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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