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입니다! (Buona sera!)
피시켈라 몬시뇰께 여러분이 이탈리아어를 알아듣는지 물었었는데, 여러분 모두 통역으로 들을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조금 안심이 되었어요.
피시켈라 몬시뇰의 말씀에 감사드리고, 몬시뇰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굉장히 일을 많이 하셨어요. 이 모임 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해’에 지금까지 해오셨고, 앞으로 해나가실 모든 일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피시켈라 몬시뇰께서 하신 말씀 중 한 마디가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그대로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몬시뇰께서는 여러분 모두 예수님께 ‘영원히’ 삶을 드리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지금 박수를 치고, 축제를 벌이지요. 결혼식이니... 하지만 신혼 기간이 끝나면 무슨 일이 생기나요?
어떤 신학생이, 아주 훌륭한 신학생이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는 그리스도께 봉사하고 싶지만 10년 동안 그렇게 하고, 나중에는 또 다른 삶을 시작해 보려 한다고요. 이건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 모두, 나이가 조금 더 든 우리도 이 ‘일시성’이라는 문화의 압박을 받고 있어요. 이건 위험합니다. 한 차례의 영원한 삶에 투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이 지속될 때까지만 결혼하겠다. 일단 수녀가 되겠지만, ‘잠시’ 동안, 얼마 동안만 하다가 그 다음에 한번 다시 봐야지.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가지만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모르지.
예수님과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어요!
저는 여러분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일시성’의 문화를 나무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타격을 주고 있어요.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결정적인 단 한 번의 선택이란 오늘날 매우 어렵기 때문이에요.
우리 시대에는 좀 더 쉬웠었지요.
당시의 문화가 한 번의 결정적인 선택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에요.
혼인 생활이건 봉헌된 생활이건 사제 생활이건 마찬가지로 그랬어요.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한 번의 결정적인 선택이란 쉽지 않아요.
우리는 이런 일시성의 문화의 희생자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어떻게 이 일시성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내면의 방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한번은 한 사제가, 훌륭한 사제인데, 그는 자신이 좋은 사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지요. 겸손했거든요.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끼고, 성모님께 많이 기도드리곤 했는데, 이런 말씀을 성모님께 드렸어요.
(스페인어로 말씀드릴게요. 아름다운 싯구이거든요.)
그는 성모님께 절대로 절대로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겠다고 하며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Esta tarde, Señora, la promesa es sincera. Por las dudas, no olvide dejar la llave afuera"
("어머니, 오늘 밤 약속은 진지합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열쇠를 바깥에 놓아두시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지만 이것은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생각하며, 성모님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늘 바깥에 열쇠를 놓아둔다면 그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
이건 안돼요. 우리는 안에서 문 잠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아직 확실치 않다면, 아마 시간을 조금 더 갖고 확실해지면, 예수님 안에서 확실해지면, 그렇지요. 예수님 없이 아무도 확실하지 않아요! 내가 확실해지면 문을 잠그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이해했어요?
일시성의 문화란 무엇인가요?
내가 여기 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메모해 둔 것을 보았어요.
여러분께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그 말은 ‘기쁨’이에요.
항상 봉헌된 사람이나 신학생, 수도자, 젊은이들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어요. 항상 기쁨이 있어요! 그건 생생한 기쁨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이에요. 그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지 세상의 기쁨이 아닙니다. 여기 기쁨이 있어요! 그런데 기쁨은 어디에서 태어납니까? 그 기쁨이 태어나는 것은... 그러니까 토요일 저녁 집에 돌아가서 옛 친구들과 춤추러 갈까요? 이렇게 하면 이 기쁨이 태어납니까? 신학생일 경우? 아니요? 아니면 그런가요?
누구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기쁨은 우리가 가진 것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최신형 스마트폰을 찾아보자. 아님 더 빠른 스쿠터나, 눈이 띄는 자동차... 그런데 여러분께 말하는데, 나는 사제나 수녀가 최신형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볼 때 정말 마음이 안 좋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건 안돼요! 여러분은 이걸 생각하세요. 그럼 신부님, 이제 저희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하나요? 자전거도 좋지요! 알프레드 몬시뇰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세요. 이분은 자전거로 다니세요. 나는 자동차가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어요. 할 일도 많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하니까요. 하지만 좀 더 검소한 것으로 택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 멋진 차를 좋아한다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기아로 죽어가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그저 그것만이라도 생각해보세요!
기쁨은 우리가 가진 것들로부터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서 오지 않아요! 또 다른 사람들은 더욱 강한 감각을 자극하는 스릴 넘치는 극단적인 체험을 하는데서 온다고들 합니다.
젊은이들은 칼날 위를 지나는 것을 좋아하지요. 정말 그걸 좋아해요! 또 유행의 첨단을 걷는 의상과 근사한 바에서 즐기는데서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수녀님들이 그런 장소에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젊은이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에요.
또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를 잘 사귀는 것에서 찾아서 이 사람 저 사람을 가볍게 사귑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불안입니다. 확신이 없어요. “시험 삼아 하는” 사랑입니다.
더 계속 열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무시할 수 없는 이런 현실에 처해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어떤 열망을 충족시키고, 어떤 감정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피상적인 기쁨이며 보다 깊은 곳까지 내려오지 않습니다. 깊은 기쁨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도취감으로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기쁨은 한 순간의 도취감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것이에요!
진정한 기쁨은 어떤 사물이나 소유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만남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태어나며, 자신이 받아들여졌으며 이해받고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것에서, 그리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에서 태어납니다.
한 순간의 관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방이 한 사람의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만남의 무상성에서 태어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야.” 꼭 말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소중하단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믿는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기쁨이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신 순간의 기쁨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 우리 기쁨의 비결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느끼고, 그분에게 우리는 그저 숫자가 아니라 인격체임을 느끼며,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분이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되는 것은 먼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라고들 말하는데 저는 그런 신학생이나 수련자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석연치 않아요! 그게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 마음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는데, 그것이 나를 초조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는 “네”라고 답합니다.
기도 중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많은 표식들을 통해서나 여정 중에 만난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분과의 만남의 기쁨, 그분의 부르심의 기쁨은 자신을 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어줍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게 해 줍니다.
토마스 성인은 "bonum est diffusivum sui"라고 하셨는데, 그다지 어려운 라틴어는 아니지요. ‘선은 번져나간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쁨도 번져나갑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그분 사랑을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봉사하면서 그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쁨은, 진정한 기쁨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전염시킵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심각하고 지나치게 우울한 신학생이나 수련자가 있다면, 거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봉사로 이끄는 기쁨이며,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만나도록 이끌어주는 기쁨입니다. 이게 부족해요! 슬픔 속에는 성덕이 없습니다. 없어요!
데레사 성녀는... 여기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그분을 잘 알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성인은 서글픈 성인이다!” 별 가치가 없어요.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신학생이나 사제, 수녀나 수련자를 보면 마치 그들 인생이 푹 젖은 담요를, 그 무거운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밑으로 끌어내리지요. 정말 문제가 있습니다!
수녀나 사제들은 제발 “식초에 절인 고추”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지 마세요.
기쁨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이걸 생각하세요. 사제에게, 사제라고 말했는데, 신학생이 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사제나 수녀에게 기쁨이 부족할 때 그는 슬픕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심리적인 문제인 걸”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럴 수도 있어요. 맞아요. 그런 일도 있지요. 몇몇 가엾은 사람들은 병이 생기지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대개는 심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불만족의 문제인가요? 아, 맞아요! 그런데 그 기쁨 부족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나요? 독신생활의 문제입니다.
설명해드리지요.
여러분 신학생들, 수녀님들은 여러분의 사랑을 예수님께 봉헌해요. 커다란 사랑이지요.
마음은 예수님을 위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정결 서원을 하게 하지요.
독신 서원이지요. 그런데 정결 서원과 독신 서원은 서원 때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 되어요... 이것은 하나의 여정으로 계속 성숙해 가면서 사목자의 부성애와 사목자의 모성애를 향해 나아갑니다.
사제가 그의 공동체의 아버지가 아닐 때, 수녀가 그와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아닐 때, 슬퍼집니다. 이것이 문제예요. 이 때문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목 생활에서 슬픔의 근원은 바로 부성애와 모성애의 부족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이 봉헌을 잘못 살아가는 데서 나옵니다.
많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제나 수녀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가톨릭적이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아니에요! 이것이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기쁨.
저는 이 수녀님을 부끄럽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첫 줄에 앉은 나이든 수녀님을 향해) 여기 앞줄 바리케이트 앞에 계셨는데, 가엾게도 많은 군중에 압도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표정이시더군요. 그분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수녀님! 아마 오랜 세월 동안 봉헌된 생활을 해 오셨을텐데,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계셨어요. 미소 짓고 계셨죠. 이런 압박감을 불평하지 않으셨어요.
여러분 이런 예들을, 이런 많은 기쁜 수녀님들, 기쁜 사제들을 발견하시면, 그것은 그들이 많은 열매를 맺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을 주고, 주고 또 주었기 때문일 거라고, 이런 삶을 낳는 것은 그 삶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쁨 안에서 발견합니다! 기쁩니다. 전혀 슬프지 않고 말입니다. 이것이 사목적 생산력입니다.
복음의 기쁜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진실되고 일관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이 진실성입니다.
예수님은 위선자들에 대해 많이 질책하셨습니다.
위선자들,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 분명히 얘기하자면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진실성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이런 진실하고 일관되고 싶어 하는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 사제들에게서 진실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거나 진실되지 않은 수녀님들을 볼 때 역겨워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어른들의, 양성자들의 책임입니다.
여러분 여기 계신 양성자들은 젊은이들에게 일관성의 모범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일관된 젊은이들을 원합니까? 우리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주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에게 바리사이들에 대해 하셨던 말씀을 우리에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
일관성과 진실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이 길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내가 늘 하는 얘기 중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로도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를 파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정확한 문구는 이렇습니다.
“복음을 늘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필요하다면 말로 하십시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삶의 진실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풍요로움이 온갖 악을 만들어 놓은 이 세상에서 우리 사제들, 우리 수녀들, 우리 모두도 우리의 가난으로 일관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교육기관이나 본당기구, 그 밖의 그 어떤 기관이든 그 주된 관심이 돈에 있는 것을 발견하면, 이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아요! 그건 하나의 모순이에요!
우리는 일관되고 진정성을 지녀야 합니다. 이 길을 따르기 위해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복음을 우리의 모범으로 설교하고 그 다음 말로 설교합시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복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도 두려움 없이 바로잡고 싶은 우리의 결함과 주님께서 아시는 우리의 한계도 있지만 관대함도 지니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해 드립시다.
결함이나 한계, 그리고 좀 더 덧붙이자면, 죄들도 지니고...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 이 강당에 죄인이 아닌 사람 누구 있나요?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 번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군요. 아무도 없어요. 여기부터 저 끝까지... 모두!
그런데 나는 나의 죄를 어떻게 지니고 다니나요? 여러분에게 이것을 충고해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고백신부에게 투명성을 지니세요. 항상. 모든 것을 말하세요. 두려움을 갖지 마세요. “신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한번 시험해 보기 위해, 그의 동족들에게 메시아를 발견했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이 여자의 행실을 알고 있었어요.
고백신부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세요. 이런 투명성은 좋은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겸손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신부님 저는 이런 감정을 계속 지녔고, 이런 것을 했고, 미워했고”, 그게 무엇이든 말하세요. 진실을 그냥 반쯤만 말하지 말고 숨김없이 말하세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고백신부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진실을 알고 계셔요. 그분만이 여러분을 항상 용서하세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을 여러분이 그분께 말씀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투명성이 필요해요! 신학생이나 수녀가 오늘은 오점을 씻기 위해 이 신부에게 고백하고, 내일은 또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 이렇게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자기 진실을 숨기기 위한 고백신부 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명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말을 듣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항상 고백신부 안에 계신 예수님 앞에서 이런 투명성을 지니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은총입니다.
신부님 저는 이런 죄를 지었고,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모든 말을 다 하세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안고 입맞춤해 주실 것입니다!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거라! 다시 돌아오면? 또 다시 고백하세요. 나는 내 경험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여러 봉헌된 사람들이 이런 투명성의 부족에서 오는 위선의 덫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했습니다.” 겸손하게 하세요. 그 성전 맨 뒤에 있던 세관처럼 하세요.
“저는 이렇게 했고, 이것을 했으며...” 그럼 주님께서 여러분의 입을 막아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 입을 막아주실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입을 막지는 마세요! 자신의 죄로부터 은총이 풍성히 쏟아집니다! 이런 투명성으로 은총에 문을 열어두세요!
성인들과 영성 생활의 대가들은 우리 삶에서 진실성이 자라나도록 도와주기 위해 매일의 양심성찰을 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고, 유용한 정도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나의 영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렇게 주님께, 그리고 후에는 고백신부에게, 영성 신부에게 열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피시켈라 주교님, 몇 시까지 시간이 있지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희는 내일까지는 분명 여기 있을 것입니다.
주교님께서 내일까지라고 하시는군요. 여러분 각자 샌드위치와 코카콜라를 들고 와야 겠어요. 내일까지 한다면 말이에요. 적어도...)
우리의 증거가 믿을만한 것이 되려면 일관성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문화적 준비 또한 필요합니다. 문화적 준비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희망에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맥락은 지속적으로 이런 “논리 부여”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 무엇도 당연시 하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무엇도 당연시 할 수 없습니다! 이 문명, 이 문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물론 부담이 크기도 합니다. 든든한 양성이 필요합니다. 삶의 모든 차원을 통합하는 균형잡힌 양성이 필요합니다. 인간적 차원, 영적 차원, 지적 차원, 그리고 사목적 차원을 통합하는 양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양성에는 네 가지 근본적인 기둥이 있습니다. 영적 양성, 혹은 영적인 삶, 지적인 삶, 이것은 “논리 부여”를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도직의 삶은 복음을 선포하러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네 번째. 이 마지막 것을 위해 수련 기간에건, 수도원에서건, 신학교에서건... 공동체에서의 양성이 필수적입니다.
저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최악의 신학교가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왜냐고요? 왜냐하면 이런 공동체적인 삶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기둥을 기억하세요. 영성적인 삶, 지적인 삶, 사도직의 삶, 그리고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이 네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이 네 기둥 위에 여러분 성소를 건설해야 합니다.
여기 이 공동체적인 삶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양성의 필수적인 부분인 우정과 형제애의 관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또 다른 문제가 여기에 끼어듭니다.
왜 내가 ‘우정과 형제애의 관계’라는 얘기를 하는가요. 여러 차례 저는 공동체, 신학생, 수도자 혹은 교구 공동체들에서 가장 흔하게 함께하는 화살기도란 험담인 곳을 보았습니다! 아주 지독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사람을 아예 “산 채 껍질을 벗깁니다.”
이것이 우리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세계입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 질투, 험담이 흔합니다. 장상에 대한 험담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고전이에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것이 무척 흔합니다. 무척 흔해요. 저도 그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어요. 여러 차례 그런 잘못을 저질렀죠, 여러 차례! 그것이 참 부끄럽습니다! 그게 부끄러워요.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잡담을 하고 다니는 것 말입니다. “그거 들었어요?... 그거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런 공동체는 지옥입니다! 바람직하지 못해요. 그러므로 우정과 형제애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친구들은 적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친구는 한 둘이지만... 모든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자매 혹은 형제와 뭔가가 있을 때, 그에게 직접 이야기 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걸 얘기함으로써 “그것을 더럽히지” 말도록 하세요. 그리고 험담은 아주 지독합니다! 험담 뒤에는, 험담 저변에는 시기와 질투, 야망이 있습니다. 그걸 생각하도록 하세요.
한번은 어떤 분에게 들었는데, 영성 훈련 후.. 그분은 봉헌된 생활을 하는 수녀님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얘기입니다! 이 수녀님은 주님께 절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성덕을 향해 가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는 것.
“그런데 신부님, 문제가 있는데...” 그걸 장상에게 얘기하세요. 주교님께 얘기하세요. 그걸 바로잡아줄 수 있는 분에게 얘기하세요.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런 얘길 하지 마세요.
형제애!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번 말해보세요. 여러분 어머니나 아버지, 형제들에 대해 험담을 하겠어요? 그것만이라도 생각하세요. 생각해 보세요... 형제애! 그 형제적인 사랑을. 그러나 두 가지 양 극단이 있습니다. 이 우정과 형제애의 양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는데, 고립과 방종입니다. 고립에도 방종에도 빠지지 않도록 나를 도와주는 우정과 형제애이어야 합니다.
우정을 키우는 것은 귀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그 우정은 여러분을 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도록 교육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제, 수도자, 수녀는 절대 고립되어 있을 수 없으며 항상 만남에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정은 여러분 수도 가족들의 다양한 은사들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아주 커다란 자산입니다. 많은 성인들의 아름다운 우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잘라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인내심이 너무 큰 것 같군요!
[신학생들: "아니요오오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 밖으로 나와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두 출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의 만남, 곧 초월성을 향해 난 출구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난 출구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다닙니다. 여러분이 이 중 한 가지만 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를 생각합니다. 훌륭한 수녀님이셨지요. 그분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길을 나서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주님 앞에서 두 시간 씩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도 기도나 사목 활동을 벌이며 여러분 자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용기를 내어 기도하고 복음 선포를 위해 나가도록 하십시오.
저는 좀 더 밖으로 나가 전파하는 교회를 바랍니다. 너무 평온하지만은 않은 교회를요. 앞으로 나아가는 그 아름다운 교회를요. 요 며칠 동안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 산타마르타(교황님 숙소)의 아침 미사에 왔습니다. 이분들은 내게 인사하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저는 나이 든 수녀입니다. 40년 동안 챠드에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저는 저곳에...”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수녀님이 그 오랜 세월을 지내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기도 안에서 예수님과 만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로 가는 초월성을 향해 나아갔고, 사도직과 일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초월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 교회를 위해 여러분의 몫을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 충실히 머무른 가운데 그렇게 하세요. 여러분은 우리에게서 배우지 마세요. 그리 젊지 않은 우리들 말입니다. 우리 늙은이들이 종종 하는 그 스포츠를 배우지 마세요. 불평이란 스포츠이죠! 우리에게서 그 “불평의 여신” 숭배를 배우지 마세요. 그건 하나의 신적인 존재입니다. 늘 불평하는...
하지만 여러분은 긍정적이 되고, 영적인 삶을 가꾸는 동시에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특히 보다 경멸당하고, 보다 불우한 사람들을 만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밖으로 나와서 시대사조를 거슬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관상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을 여러분과 함께 모시도록 하십시오. 로사리오를 드리도록 하십시오. 제발... 그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항상 성모님을 여러분 집에 모시도록 하세요. 마치 요한 사도가 모셨듯이 말입니다.
성모님은 항상 여러분을 동반해 주시고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나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는 불쌍한 죄인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앞으로 나아갑시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일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그리고 기쁘게, 일관성을 지니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그 용기, 기도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 밖으로 나가고, 다른 사람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밖으로 나가는 그 용기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그 사목적 생산력을 지니고요!
제발 부탁인데 그 고약한 “노처녀” “노총각”들이 되지는 마세요! 자, 앞으로!
이제, 피시켈라 몬시뇰께 들었는데 여러분은 어제 각자 자신의 언어로 사도신경을 함께 드렸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우리 모두 형제들이고 우리에게는 같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제 각자 자신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를 함께 드립시다.
주님의 기도를 드리도록 합시다.
[주님의 기도 암송]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 분의 어머니도 계시지요. 각자의 언어로 성모송을 드립시다.
[성모송 암송]더 보기
출처 : 남양성모성지
글쓴이 : 이생각 저생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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