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에> 대하여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는 말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를 지탱이게 해주는 정신적 지주가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떠한 것이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다가오는지 각자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전통사상에 있어서 ‘선비정신“이 바로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학식과 인품을 갖춘 도덕적 인간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선비정신은 가치관의 상실과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는 오늘날에 무엇보다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또한 그것이 한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완성의 모델로 제시되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후에 폐단을 가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더라도 그 시원적 기원의 정신에는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그 무엇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고유사상 가운데 선비정신에 세계에 대하여 조명해 봄으로써 그 정신의 좋은 것을 이 시대에 다시 심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가꾸어 재창조 하여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준비하고자 한다.
1. 선비정신의 개관
1.1. 선비의 개념
선비(士)라는 개념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선비란 신분적으로 양인(良人)이고, 경제적으로는 농촌지방의 중소지주층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국학이던 성리학을 공부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學人이었다. 선비들은 士의 단계에서 修己하고 大夫의 단계에서 治人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근본으로 삼아 학자관료인 사대부(士大夫)가 되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였다. 선비들은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수기를 이룬 후에 치인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수기가 전제되지 않은 치인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치인이란 남을 지배한다거나 통치한다는 권력개념보다는 자신을 닦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君子가 되어 民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봉사해위로 이해되었다고 하겠다.
선비들은 민본주의(民本主義)에 입각한 이상향의 건설을 지향하였다. 선비들이 추구한 이상향은 이 세상에 이미 실현된 바 있는 요순 3대의 통치시대에 근거하였다. 따라서 수기가 제대로 된 선비, 즉 군자가 치인의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은 이미 이상세계를 건설한 바 있는, 그래서 현실세계에 실현가능성이 열려있는 이상향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대동사회(大同社會)로 설정된다. 신분, 경제적 차별성은 완전히 극복될 수 없지만 크게 불 때 동질성을 추구하는 사회, 함께 어우러져 살며 공생공존을 추구하는 사회를 방향성으로 잡았다. 현세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긍정적 사고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향하여 분골쇄신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士大夫였다.
1.2. 선비의 어원과 성립과정
선비의 어원과 자의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이 말이 순수한 우리말인지, 아니면 중국의 한자어에서 유래된 말인지도 알 수 없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이전까지는 모두 한자어를 사용하여 표기하였기 때문에 순수한 우리말인 선비의 자어를 밝히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원에 대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선비는 한자어의 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선비’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선비의 ‘선’은 몽고어의 ‘어질다’는 말인 ‘sait’의 변형인 ‘sain’과 연관되고, ‘비’는 몽고어 및 만주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비’에서 온 말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한자의 士는 ‘벼슬한다’는 뜻인 士와 관련된 말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설문해자(說文解子)』에서는 士의 글자 뜻을 ‘일한다’ 또는 ‘ 섬긴다’는 뜻으로 보아 낮은 지위에서 일을 맡는 기능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士’는 ‘十’을 (수의 끝)과 ‘一’을 미루어 ‘十’에 합한다고 풀이하면 하나의 도리를 꿰뚫는다(五道一以貴之)는 뜻과 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의미에서 ‘士’는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만큼 우리말의 선비와 뜻이 통한다.
중국에서 ‘士’는 殷대에도 관직 명칭으로 나타나지만 周대에서는 봉건계급 속의 한 신분계급으로 드러났다. 곧 왕(천자), 제후, 대부, 사, 서인의 5등 봉건신분계급에서 ‘士’는 ‘大夫’보다 낮고 ‘서인’보다 높은 신분이며 관료의 직분으로서는 가장 하위에 속하는 계급이다. 또한 ‘士’는 특히 학업과 관련시켜 언급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禮記』는 ‘五士’제도가 보인다. 마을에서 학업에 뛰어난 ‘수사(秀士)’를 가려서 사도에게 추천하면 ‘선사(選士)’가 되고, 사도가 선사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국학에 추천하면 ‘俊士’가 되며, 선사와 준사 가운데서 학문이 성취된 자를 ‘조사(造士)’라 하고, 대락정(大樂正)이 조사 가운데 뛰어난 자를 왕에게 보고하고 사마(司馬)에게 추천하면 ‘進士’가 되며, 사마가 진사 가운데 현명한 자를 가려서 관직에 임명하는 것이다.
‘士’의 성격은 춘추 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유고사상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관직과 분리되어 인격의 측면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을 ‘士’의 집단으로 자각하였다. 그들은 관직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道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유교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선비로 확립하였다. 공자는 도에 뜻을 두어 거친 옷이나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격을 선비의 모습으로 강조하였다. 즉 선비는 관직이나 신분계급을 넘어서서 인격적인 덕성을 갖춘 존재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선비의 인격적 조건은 생명에 대한 욕망도 엄을 만큼 궁극적인 것으로 제시되는데 공자는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 라고 하였고, 증자(蒸子)도 “선비는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야 할 것이니, 그 임무는 무겁고 갈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仁으로써 자기 임무를 삼았으니 어찌 무겁지 않으랴.”하여 ‘仁’의 덕목을 지적하였다. 장자(子張)도 선비의 덕목으로 ‘의로움’의 덕목을 강조하였으며,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선비만이 할 수 있다.” 하여 ‘지조’를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士’는 신분 계급적 의미를 넘어서 유교적 인격체로 파악되고 있으며, 우리말의 선비가 지닌 인격적 성격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끝으로 선비는 유교이념을 담당한 인격이라는 뜻에서 ‘儒’로도 쓰인다. ‘士’는 신분적 의미에서는 바로 윗 계급인 대부와 결합하여 士大夫라 일컬어지며, 곧 ‘士’와 大夫는 신분의 상승과 하강이 가능한 연속적 관계이므로 통합하여 하나의 계급으로 삼은 것이다. 다른 한편 ‘士’가 인격적 의미에서는 유교적 인격체인 君子의 호칭과 결합시켜 四君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유교의 인격개념도 계층적 단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士’는 사회 기능적 의미에서 독서로 학문을 연마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士’는 일반의 생산 활동으로서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병칭되어, 士, 農, 工, 商의 이른바 四民속에서 첫머리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비는 백성과 결합하여 士民으로 일컬어지기도 하고, 서인들과 결합하여 사서인(士庶人)으로 일컬어지는 사실은 선비가 지배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대중들과 함께 피지배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 속에서도 우리말의 선비개념은 사군자의 인격적 성격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 된다.
1.3. 儒와 士와 선비의 관계
순수한 한국말의 ‘선비’를 한 장로 표기할 때 ‘士’와 ‘儒’ 두 자가 함께 쓰인다. 그것은 士가 ‘선비사’, 儒가 ‘선비유’로 같은 선비의 뜻을 갖는 까닭이다. 사에 대하여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서는 “예전에 사농을 칭하기를 士는 벼슬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조정에 벼슬하여 公家에 예속된 것을 모두 士라 하나, 선생의 도를 배워서 장차 벼슬에 나가려는 자도 士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당시 조정의 관리들이나 이를 위해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을 士로서 나타낸다. 儒에 대해서 중국의 『한서』에서는 “유가는 일개의 학파인데, 사도(司徒)(교육담당부서)의 벼슬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을 도와 음양을 순리에 따르며 교화를 밝히는 것으로 글을 육경 가운데서 노닐며 뜻은 仁義의 가에 머물러 하고 요순을 근본으로 삼아 그것을 존수하고 문왕과 무왕을 명법으로 하며, 공자를 모범으로 받들고 그 말을 소중히 하여 가장 높은 道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성리학을 국교로 받든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유가의 집단이며 당연히 맹자의 도를 따랐다. 그러니 선비들을 儒라고도 지칭할 수 있겠다. 다음의 내용들에서는 儒와 士가 동일한 의미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정경세의 『유복집』에서는 “선정신(先正臣)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五賢은 ‘호걸지사(豪傑之士)’ 동방의 라고 하였으며, 신흠의 『상촌집』에서는 “士가 사의 행실을 얻는 것은 儒인데 공자가 이른바 유행(儒行)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조선전기에 오현으로 추대된 성리학의 대가들을 ‘호걸지사(豪傑之士)’로 부른 것은 선비로서 ‘儒’와 ‘士’가 바로 ‘儒’임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후 세종 25년(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여러 문집에서 儒와 士를 선비로 번역하여 사용함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를 뜻하는 한자어로 士와 儒가 함께 사용되었다.
2. 「선비」의 역사적 유래
삼국시대 초기부터 유교문화가 점차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자 유교적 인격체인 선비의 덕성에 관한 이해가 성장하였다. 고구려 고국천왕(2세기 말엽) 때 을파소(乙巴素) 는 은둔하여 밭갈이하고 살다가 추천을 받아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서 그는 재상의 책임을 맡고서 나올 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 하였다. 을파소(乙巴素)는 자신의 처지를 선비로 자각하였고 선비의 나가고 물러서는 도리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봉건신분계층으로 ‘士’의 계급이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유교이념의 인격으로 ‘士’의 관념이 인식되었다. 삼국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士’의 활동도 점점 뚜렷해지게 된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太學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삼국에 각각 태학 또는 國學이 세워졌었다. 이 태학에서는 유교이념을 교육하여 선비를 양성하였다. 또한 태학에는 傳士를 두어 인재를 가르쳤으며, 박사제도는 경전에 관한 전문 지식인으로서 선비의 활동을 보여준다. 고구려 양양왕 때 태학박사 이문진과 백제 근초고왕 때 박가 고흥은 역사를 편찬, 기록 하였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널리 문사를 찾아서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당시에 역사의 기록과 편찬은 선비들의 임무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7세기에 활동하던 신라의 인물인 강수와 설총은 선비의 활동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강수는 탁월한 학문의 조예와 유교에 대한 신념을 지녔던 인물로서 삼국통일 시기에 외교문서를 다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였다. 비천한 출신의 아내를 맞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나무라는 아버지에게,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요, 도리를 배우고서도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라 대답한 것은 의리를 지키는 선비의 태도를 보여 준 것이다. 설총은 이두를 지어 경전을 해설하는 등 유교교육에 기여하였다. 그가 신문왕에게 「화왕가」를 지어서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여색을 멀리하도록 훈언 하였던 것도 선비의 태도를 보여준다.
고려 때에는 한층 더 교육제도가 정비되어 국자감을 비롯하여 지방의 12목에까지 전사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고, 과거제도가 정립되어 진사과와 명경과를 통해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었다. 관직제도에서도 홍림관, 학사원을 비롯하여 보문각, 숭문관, 홍문관, 집현전 등에도 學士 등 선비들이 맡는 관직이 있어서 문장과 강연강의 등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선비들의 공직활동도 뚜렷하게 확대되었고, 교육기관을 통한 선비의 양성도 확장되었다. 국자감을 중심으로 하는 관학이 쇠퇴할 때는 12송주의 사학이 융성하였던 사실을 볼 수 있다.
고려말엽 충렬왕 때 안충과 백거정 등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성리학 내지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유교이념의 새로운 학풍과 학통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이른바 도학이념이 정립되면서 선비의 자각도 심화된다. 곧 불교나 노장사상의 풍조를 배척하고 유교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개혁의식이 이들 도학이념의 선비들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색을 중심으로 정몽주, 이숭인 또는 길재의 고려말 ‘三隱’은 학문이나 의리 등에서 이 시대 선비의 모범으로 존숭되는 인물이었다.
조선 초에 들어와 유교이념을 통치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들은 유교이념의 담당자로서 자기확신을 정립하였다. 조선 초에 선비들은 고려말 節義를 지킨 인물인 정몽주를 추존하였고, 조선왕조에 절개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통에서 선비의식을 강화시켜갔다. 이들은 조선왕조 건국기의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고위관리로서 문벌을 이룬 훈구세력에 대하여 새로 진출하기 시작한 인물로서, 절의를 존숭하는 입장을 지닌 자신들을 사림파로 구분하는 선비의 공동체의식을 형성하였다. 사림파는 도학의 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하며 사회의 개혁의지를 발휘하였다. 이들은 훈구파의 관료세력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과격한 이상주의자로 배척하여 억압하는 데서 이른바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의 선비들이 엄청나게 희생을 치렀다. 조선시대는 유교이념이 지배한 시대인 만큼이나 선비들의 사회적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사화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시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에 의한 관료제도가 정착되었고, 사회의 지도적 계층에서 선비의 위치는 가장 중심적인 것이었다.
3. 선비의 생애와 활동
3.1. 조선시대 선비의 삶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선비들이 사회의 지도적 계층으로서 그 지위가 확립되었을 대에는 선비의 생활양식도 매우 엄격한 규범에 의하여 표준적인 정형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가면 임금의 바로 아래인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혹은 산림 속에 은거하여 있더라도 유교의 道를 강론하여 밝히고 수호하여 실천하는 의무를 지니는 중대한 책임을 지는 신분이었다. 따라서 이들 선비가 서민대중으로부터 받는 존숭은 지극하며 그 만큼 영향력도 컸었다. 선비는 도학의 이념을 담당하는 계층이므로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지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의리의 신념을 사회 속에 제시하고 실천해야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유교적 도덕규범들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서 대중들을 교화 하여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비는 집 밖에 나가거나 집 안에 들어오거나 항상 그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고 제시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임무를 실천해야 하는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띠는 이였다.
『소학』에서는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선비의 생애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기』 ‘내칙’을 인용한 고전적인 양식이다. 즉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10세가 되면 남자아이는 사랑에서 아버지와 자며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20세가 되면 관례를 하고 널리 배우고, 30세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며, 40세에는 벼슬에 나가고, 70세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애의 과정은 모든 인간의 평생과 비슷하지만, 선비에서 특징적인 것은 크게 학업과 벼슬살이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선비는 한평생 학업이 중단되는 일이 없으며, 특히 가정에서 받는 교육과 함께 밖으로 스승을 찾아가서 오랜 기간 동안 교육을 받는 사실은 선비가 타고난 신분으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수련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이요 학자로 이해되기도 한다. 선비가 배우는 학문의 범위는 정해진 것이 아니지만, 그 근본은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일의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 이였다.
유교의 학문은 일상의 卑近한 데에서 출발하지만 지극한 데에 이르면 인간심성의 이치와 하늘의 명령(天明)에 관한 고매한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적 축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를 확신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목표를 둔다.
선비가 공부하는 대상으로서 경전은 선비가 지향할 대상인 성인과 현인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다. 『소학』에서는 인륜을 밝히는 조목으로서 ‘五倫’을 제시하고, 자신을 공경하는 조목으로서 심술, 위엄, 의복, 음식에 관한 규범들을 제시하였다. 『大學』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주어진 ‘밝은 덕을 밝히는 일’(明明德)과 ‘백성들과 친애하는 일’(親民)의 사회적 과제를 가르친다. 선비는 항상 자신의 인격적 도덕성을 배양하지만 동시에 그 인격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선비의 공부는 이치를 탐구하는 지적인 일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위적 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였다. 선비는 자신의 덕을 사회 속에 실현하기 위해서 관직으로 나가야 할 필요를 갖기도 한다. 따라서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치고 벼슬할 기회를 찾는다. 대부분의 선비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며, 소수의 선비들만이 과거시험을 거쳐 관직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선비로서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관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관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관직에 나가면 상관을 받들어야 하고 더구나 가장 높은 권위인 임금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아래로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여기서 선비는 임금과의 관계에서 무조건적인 신하로서 복종과 충성을 바치지는 않는다. 선비는 임금과 사이에 의리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의리가 없으면 신하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바로 여기에 선비로서 관직에 나간 경우와 직업으로서 나간 경우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된다. 곧 선비는 언제나 관직에 나가서도 그 직책의 성격과 임금의 역할에 대해서 성찰하며 임금의 잘못이 있으면 훈언 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고, 바른 도리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거나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외면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해졌었다. 그것은 과거시험공부 곧 과업(科業)은 의리를 밝히는 도학공부와 심한 차이를 드러내는 사실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벼슬길에 나갈 의사가 없이 과거공부를 멀리하고 도학공부에 전념하는
태도를 선비의 고상한 태도로 여겼던 풍조가 있기도 했었다.
선비는 관교생활에서도 매우 독특한 활동을 하게 된다. 처음부터 학문으로 확립한 신념과 포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것인 만큼 선비의 관직에 대한 태도는 관직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과 신념을 혀는 것 이였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주로 맡은 관직으로 청환의 직책이 있었다.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거나 언로를 맡아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직책이었다. 때로는 선비들이 부모를 봉양하고 학문을 할 수 있는 한가로운 직책으로 지방의 수령을 자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비들의 가장 활발한 관직활동으로는 경연관, 언관, 사관을 들 수 있다. 경연관은 임금을 교육시키며 시사문제에 대한 논평까지 맡아서 통치이념의 형성에 가장 강한 영향을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언관은 임금의 실정을 직간하며 공론을 임금에게 전달하여 통치행위에 정당성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일원이 간관으로서 간언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선비는 어느 자리에서나 간언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권리요, 임무로 삼고 있었다. 사관은 춘추관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이지만, 특히 선비는 사필을 들었을 때 선과 악을 직필함으로써 임금을 비롯한 어떠한 권력의 불의도 은폐하지 않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따라서 사관이 임금의 측근에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임금의 행동을 규제하는 힘이 되며 기록한 역사는 후세에 경계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선비들은 관직에 나간 경우에도 정치가 도리를 벗어나든지 임금이 간언을 맏아들이지 않으면 관직을 사면하고 돌아왔다.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사직상소는 선비의 빈번한 행동양식이 되었다. 여기서 나아가고 물러서는 진퇴의 태도나 출처(出處)의 의리가 제기되었다. 선비에게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거부적 비판정신을 확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경우를 흔히 처사(處士)라 일컬었다. 처사는 물러나 집에 머무르는 경우도 가리키기도 한다. 다만 나아가 벼슬하는 경우에 비하여 물러나 집에 머물고 있는 처사가 더욱 높은 존경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는 벼슬에 나가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림 속에서 스승을 만나 학문과 도리를 연마하고 후진을 가르치며 벗들과 도의를 권면하였다. 학문에 깊은 조예를 이루어 후생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도리를 제시할 수 있으면 ‘先生’으로 일컬어졌었다. 선생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호칭인 ‘公’에 비교해 보아도 훨씬 더 높은 존숭을 받았다. 따라서 벼슬에 나간 선비도 여가에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성취하여 선생으로 일컬어지기를 바라는 경우도 많았었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거나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데 전념하고 있는 경우를 ‘山林’ 또는 ‘산림처사’라 하였다. 이들 산림은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그들을 대표하는 ‘산림종장’은 정치적 영향력이 막대하였다. 산림은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으면 임금은 이들이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 경우로서 높은 관직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때 산림의 선비는 거듭 사퇴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이나 현실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높은 관직으로 불려 나간 선비들은 곧 물러나는 경우가 많으나 한번 이상 관직에 부려 나간 선비는 징사(徵士)라 일컬어졌었다.
선비가 물러나 사는 곳은 번잡한 거리가아니라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서실을 짓고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는데 적합하도록 마련하였다. 흔히 매우 빈곤한 선비가 누추한 마을에 사는 경우도 있었다. 선비들은 향촌에서도 서로 공동체를 이루어 의례를 통해 만났었다. 즉 사상견예, 황사예(鄕士禮), 향음주례(鄕飮酒禮)는 선비들이 향촌에서 회합하는 의례였다. 특히 선비들은 유교의 도통을 존숭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참배하기 위한 모임이 있었고, 서원을 중심으로 그 지방의 선현을 재향하기 위한 모임도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가 국가의 기관으로서 관학적 성격이 강하다면, 서원과 서당에서는 선비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제향을 비롯한 의례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이와 더불어 함께 학문을 강론하는 강학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선비들이 노년에는 제자들을 육성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아서 학통을 형성하였을 때는 학통이 하나의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선비들은 자신의 감회를 ‘詩’로 표현하는 일이 일상적 이였다. 선비들의 모임이 시호(詩會)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흔하였다. 물론 선비는 시만 지어서는 도학의 선비가 되기에 부족한 문사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나 선비의 시는 호탕하거나 애상적인 것이기보다는 단아하고 성실함을 지키는 선비다운 자세가 구별되기도 한다. 선비는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을 통하여 전하기도 하지만 직접 저술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 선비의 숭고한 임무였다. ‘한 시대에 나가서 도를 시행하고’ ‘후세에 말씀을 내려주어 가르침을 베푸는 일’ 은 선비가 지향하는 두 가지 기본적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진유(眞儒), 곧 진실한 선비는 이 두 가지 역할을 겸할 수 있는 것이라 지적되기도 한다. 선비들은 자신의 저술을 생존 때에 반포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저술은 죽은 뒤에 후손과 제자들이 편찬한 유고의 성격을 띤 것 이였다. 선비는 자신의 신념을 한 시대만이 아니라 만세에 전하려는 확신을 지닌 인격체라 할 수 있다.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도를 실천하는 노력의 과정이 선비의 일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3.2. 선비의 몸가짐
선비의 긍정적인 면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선비의 몸가짐이라 할 수 있겠다. 선비가 거동하면 반드시 예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면 먼저 義에 합당한지 아니한지를 살피는 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선비는 이롭지 못한 일을 하면서 까지 부귀를 탐내지 않는다. 선비는 차라리 不義에 항거하여 죽음을 택할지언정 살아서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선비는 벼슬이 없어 빈궁한 생활을 해도 선비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이 없고 겸양의 禮로써 자신을 지키며 글 읽는데 전념하여 잡념을 잊는 것이 선비 된 도리였다.
선비는 말은 적더라도 실행에 여유를 가져야 하며, 말만을 앞세우고 실천에 옮기지 못함은 선비의 행실을 그르치는 것이다. 선비는 禮, 義, 廉 恥를 사유(四維)를 숭상하였다. 四維는 『관자(管子)』에 나오는 말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네 가지 수칙이었으며, 이 禮, 義, 廉 恥는 선비들로 하여금 名節을 닦게 하여 물욕을 방지하고 비위를 억제케 하여 세도에 유익하고 국체를 國體를 부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비라면 누구나 지켜야 된다는 것이 선비들의 공통된 마음가짐이기도 하였다. 선비들은 四維 중에 禮, 義보다도 廉恥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염치(廉恥)는 선비의 大節이며, 선비 된 자가 廉恥가 없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졸부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염치를 중시하였다. 염치는 선비들의 숭검(崇儉)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선비의 평생의 업은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것이 아니며, 世交를 정갈하게 하고 풍속을 두텁게 하기 위하여서는 염치를 알아야 되는 것이다.
간혹 선비의 청렴(淸廉)이 여인의 정결과도 동일시되는 것은 선비가 조금의 오점이라도 있게 되면 정결하지 못한 여인과 마찬가지로 종신토록 흠이 되어 선비 구실을 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비가 중시하는 사유(四維) 가운데 예의는 시대의 거리감과 사회 가치관의 변화로 현대 사회에서 모두 수용할 수도 없으며, 수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도 많을 것이나, 선비의 염치만은 오늘날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신적인 유산이라 하겠다.
이상은 선비의 몸가짐은 선비의 전형을 말한 것이라 모든 선비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라 하겠으나, 선비로서 행세하려면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선비의 긍정적인 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선비의 직분이 ‘行道’, 즉 도를 행하는 데 있지 은거독선(隱居獨善)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이 아니다. 선비가 隱居獨善하는 것은 현실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그러할 뿐이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선비가 벼슬에 나가서 도를 행함은 능력이 미칠 때 한한 것이며,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재야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므로 선비는 항상 자기의 德이 닦아지지 않음을 걱정하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며, 배움이 넓지 못함을 탓할 뿐이지, 맡은 일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는 법이다.
선비의 마음가짐은 가식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순정을 생활의 귀감으로 삼아야 했다. 그러므로 선비는 지키는 것이 있어 거처하되 이해득실에 따라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따라서 선비가 벼슬을 못 얻어 극도로 가난하더라도 그 세운 뜻은 더욱 엄격하며, 그 절개 또한 뛰어나서 자기의 지킴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이상은 선비전형에 대한 진면목을 말한 것이라 모든 선비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선비의 올바른 몸가짐이란 점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4. 선비의 정신세계
이 퇴계는 선비를 세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는 존재로 지적하였다. 그는 선비의 입장을 세속적 권세에 대조시켜서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義로써 한다.”라고 특징을 드러내 주었다. 선비는 유교이념을 수호하는 임무를 지녔기 때문에 유고이념 자체가 자로 선비정신을 핵심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선비는 부와 귀의 세속적 가치를 따르지 않고 인의의 유교이념을 신봉한다. 특히 세속적 가치를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이익이라 한다면 선비가 지향하는 가치는 인간의 성품에 내재된 의리라 할 수 있다. ‘仁’이 선비의 기본이념임에 틀림없지만 역사적으로 선비가 가장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義’를 추구하는 의리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한 주장에서 명백히 의리와 이익이 대립되는 ‘의리지변(義利之辨)’과 군자와 소인이 대립되는 ‘군자소인지변(君子小人之辨)’의 분별의식이 확립되었다.
5세기초 신라의 눌지왕 때 박제상은 임금의 부탁을 받고 나서 “일이 쉬운지 어려운지 헤아려서 행동한다면 이를 충성스럽지 못한다 하고, 죽게 될지 살 수 있을지를 꽤한 다음에 행동한다면 이를 용감하지 못하다고 한다.” 라고 한 말에서도 의리를 위하여서는 쉽고 어려움이나 살고 죽을 것을 가리지 않는 강인성을 보여 주고 있다. “살기 위하여 ‘仁’을 해치지 않으며, 죽음으로써 ‘仁’을 이룬다."라고 공자가 지사(志士)를 규정한 언급에서도 선비는 생명보다 더욱 귀한 가치를 신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맹자도 살고 싶은 욕망과 의를 지키고 싶은 욕구를 겸할 수 없을 때는 ”살기를 버리고 의리를 선택하라고 가르쳐 의리를 생명보다 높이 평가했다.
신라의 화랑들이 무사에 가깝고 선비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의 정신에는 선비의 신념을 볼 수 있다. 황산벌 전쟁에서 김흠춘이 아들 반굴에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충성과 효도를 아울러 이를 수 있다.”고 훈계하는 데서도 의리의 실천을 지상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볼 수 있다. 선비는 문사를 주로 말하지만, 무사도 ‘士’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선비의 의리정신과 더불어 그 실천에서 생명조차 버릴 수 있는 신념의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전환하는 왕조교체기에 당시의 유학자와 선비들 사이에는 상반된 태도가 드러났었다. 즉 전통의 고려왕조를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과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 양쪽은 각각의 의리를 제시하였는데 즉 인간본성에 근거한 하늘의 명령인 도덕률, 공 ‘삼강오륜의 규범’에 따라 고려왕조를 지키겠다는 정몽주 등의 입장이 있었고, 다른 한편 하늘의 명령에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왕권을 바꿀 수 있다는 ‘혁명’의 의지를 지닌 정도전등의 입장이 있었다. 여기서 혁명기가 지나서 수성기인 세종시대에 들어오면서 선비의 의리는 강상적 충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비들은 정몽주와 길재를 잇는 도통을 선비정신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삼강오륜의 도덕규범을 불변의 강상(綱常)이라 받아들이고 이 강상을 의리의 중요한 형식으로 확인하는 것은 선비의 신념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의 태도는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다. 여성들에게는 효도와 충성에 더하여 정절이 요구되며, 강상을 지키며 학행이 갖추어질 때 ‘女士’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의리는 강상의 규범으로 나타나는 경우 이외에도 한층 더 큰 범위로서 ‘존양(尊攘)’의 의리를 들 수 있다. 존양은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중국중심의 의리이다. 이것은 ‘왕을 높이고 패자를 낮추는’ 이른바 ‘춘추의리(春秋義理)’와 일치하는 것이다. 유교이념에서는 의리의 가장 큰 문제는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고 중화문화와 오랑캐를 가려서 정통을 존중하고 중국문화를 지키는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선비의 의리정신에는 중화문화를 밝히고 존숭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삼았다. 따라서 정몽주의 의리정신이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보다도 오리려 원나라를 멀리하고 친명정책을 추구한 데 잇는 것을 평하기도 한다.
중화문화를 존숭하는 태도는 이른바 사대주의를 심화시켜서 선비들이 모화사상에 젖은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식은 사대주의에 젖어서 자신의 국가를 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유교이념의 중국 중심주의적 해석에 끌려들어서 자신의 국가를 변장의 제후국으로 하위적인 위치에 두고 중국을 높이며 중국문화를 이상으로 받드는 예속적인 한계점을 보였던 것이다.
선비들의 의리정신은 외민족의 침략을 당할 때 침략자를 불의한 집단으로 규정하여 의리에 따라 항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의 항전을 의병으로 인식하였던 것이 사실 이였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700명의 선비들을 모아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싸움에 임하여, “오늘은 다만 한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살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오직 ‘義’자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고 모두 함께 죽음을 맞았다. 이들은 ‘義’를 따라 죽은 것이며 이 순의정신은 선비정신의 발휘라 할 수 있다. 또한 병자호란 때 마지막 까지 화친과 항복을 거부하는 척화론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척화삼학사’의 한 사람인 홍익한은 심양에 끌러가서 청태종의 심문을 받았을 때에 “내가 지키는 것은 大義일 따름이니 성패와 존망은 논할 것이 없다.”고 대답하며 굴복하지 않다가 순절하였다. 이것은 선비정신의 강인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자 만주족인 청나라에 대한 항쟁의식과 특히 효종의 북벌론은 이 시대 선비들의 의리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 해준 경우라 할 수 있다. 의리는 성공할지 실패할지 헤아린 다음에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의리는 정당성을 제시하며 선비는 이 정당성의 명령에 따라 어떠한 장애와 고난도 감수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코 굽히지 않는 것이다. 선비정신은 의리정신으로 표현되는 데서 그 강인성이 드러난다. 의리는 변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 것이다. 신라의 눌췌는 백제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병졸들에게, “봄날 온화한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번성하지만 겨울의 추위가 닥쳐오면 소나무와 잣나무는 늦도록 잎이 지지 않는다. 이제 외로운 성은 원군도 없고 날로 더욱 위태로우니, 이것이 진실로 志士, 義夫가 절개를 다하고 이름을 드러낼 때이다.”라고 훈시하였으며, 분전하다가 주었다. 竹竹도 대야성에서 백제군사에 의하여 성이 함락될 때까지 항전하다가 항복을 권유받자,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죽죽이라 이름 지어 준 것은 내가 추운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으며 부러질지언정 굽힐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ㅂ고할 수 있겠는가.” 라고 결의를 밝혔다. 여기서 소나무와 잣나무가 겨울이 되어도 잎이 지지 않는 사실로 지조의 변함없음을 비유한 공자의 말씀은 선비정신의 강인한 지속성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선비는 결코 이기적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변한 도리와 사회의 전체를 위하여 헌신적인 자세를 가진다. 조선시대 선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조광조는 선비의 마음씀을 지적하여, “ 무릇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며, 일을 당해서는 과감히 실행하고 환난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바른 선비의 마음씀이다.”라고, 이에 비하여 소인의 태도를 지적하여, “ 자신을 위하여 도모하는 데 깊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주도하는 자는 감히 저항하는 지조와 곧은 말로 원망과 노여움을 부르지 못하며, 머리 숙여 아래 위를 살피고 이쪽저쪽을 주선하여 자신을 보존하고 처자를 온전히 하는 자가 대개 많으니 이들은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 하였다. 선비정신은 이기심을 넘어선 당당하고 떳떳함을 지닌다. 비굴하지 않고 꼿꼿하며 의심하지 않고 확고함을 지닌다.
이퇴계는 선비의 당당한 모습을 가리켜, “ 선비는 필부로서 천자와 벗하여도 참람하지 않고, 왕이나 公卿으로서 빈곤한 선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으니, 그것은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고 공경될 까닭이요, 節義의 명칭이 성립되는 까닭이라.”라 언급하였다. 이는 선비는 절의가 있으므로 당당하여 천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선비는 예법과 의리의 바탕이며 元氣가 깃든 자리이다.”라 하여 선비를 모든 예법, 의리의 주체요, 사회적 생명력의 천이라 본다. 선비는 신분적 존재를 훨씬 넘어서 하나의 생명력이요 의리정신의 담당자임을 밝힌 것이다.
이율곡은 선비를 정의하면서, “마음으로 옛 성현의 도를 사모하고, 몸은 유교인의 행실로 신칙하며, 입은 법도에 맞는 말을 하고, 公論을 지니는 자이다.”라고 지적하고, “士林이 조정에 있어서 사업을 베풀면 나라가 다스려지나, 사림이 조정에 있지 못하고 공허한 말을 하게 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라 하였다. 선비의 행동과 사회적 기능에서 보아도 선비는 유교이념을 신념으로 지키고 실현할 것을 추구하는 인격적 주체이다. 이들은 유교적 인격의 기본덕성을 전반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仁‘의 포용력과 조화정신은 선비의 화편하고 인자함으로 나타나며, 예의는 선비의 염치의식과 사양심으로 표현되고, 믿음은 선비의 넒은 교우를 통해서 드러난다. 선비는 평상시 화평하고 유순한 마음으로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중용을 지킨다. 그러나 의리의 정당성이 은폐될 때에는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엄격하게 비판하고 배척하는 정신을 결코 잃지 않는다.
4.1. 선비의 의식구조
선비의 정신세계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특히 전통 속에 빛나는 한국 선비들의 인간상에 대하여 대표되는 몇 가지 점들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4.1.1. 경천성향
선비는 그 스스로를 지키는 도덕과 남을 다스리는 정치가 어떤 규범이나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天明에 의해 이루어는 진다는 것이 선비들이 지니고 있는 경천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단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선비들이 지닌 신명사상 정치와 인사가 하늘에 계신 무형의 상제로부터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한데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기에 정치나 법률경제 등의 발달되지 않아도 소기의 이상적 목적을 이행하고 이상적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며,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선비들이 지닌 소중한 가치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천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객관적인 자연이 아니라 주관적인 동일체인 것이었고, 이 같은 신명은 또한 선비의 도덕을 감시하는 탐지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비들의 의식구조 안에는 경천사상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 정신에 의하여 그의 모든 삶과 일을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그 예들로서 기우관계 자료들 안에 있는 수령의 자학기도 즉, 한 고을이 가물며, 그 가뭄의 원인이 자신의 부덕이나 악정의 소치로 보고 그 죄책을 하느님에게 비는 형태의 기우제를 행하였으며, 천인상관사상(天人相關思想)은 자연현상은 인사현상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태고적 부터 있었는데. 이것은 특히 정치를 하는 군주, 상신, 지방관 수령 그리고 선비들의 의식세계 안에서도 있었으며, 이를테면 임금이 바른 정치를 하면 자연현상도 질서를 얻어 인간질서에 순응하여 비바람이 순조로운데, 임금의 행실이 바르지 않으면 자연현상에 역조가 생겨 천재의 이변이 생긴다고 하였다는 것인데 이러한 천인상관사상은 자연뿐만 아니라 제도개혁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사상에 강조되어 선들의 한 사고방식 형성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경천성향은 원한응천(怨恨應天) 및 선비고유의 것만 아닌 서민들이 손을 비벼 기도하는 것들 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상의 실례로 보아 한국의 문인신분층, 곧 목민하는 선비들은 그들의 정치와 도덕이 절대자인 천에 의해 규제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한국선비의 특질인 경천사상, 천명사상, 순천사상 등이 빚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4.1.2. 충의성향
충의 성향은 한국선비의 근본사상이라 할 수 있다. 충(忠)이란 글씨를 뜯어보면 가운데 ‘중(中)’ 자와 마음 ‘심(心)’자의 합의 문자로서 ‘중(中)’이란 한복판을 뜻하지만 아울러 가운데가 가득찬 상태, 가슴 속이 꽉차 빈틈이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허위가 없는 충실한 참마음이 중심이요, 충이다. 이러한 충의 정신은 투사될 많은 대상을 찾고 있으며, 그 투사체가 달라짐에 따라 가치도 또한 달라진다. 이를테면 의로운 일에 투사되었을 때는 節이 되고, 부모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효가 되며, 나라에 투사되었을 때는 충이되며, 어느 인간에게 투사되었을 때 仁이 되고, 도덕적 규범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禮가 된다.
이러한 충의 정신이 선비들의 의식구조 안에 깊이 자리 잡혀 있었고, 그러기에 수많은 선비들은 자신의 영리나 부귀 그리고 육체적인 것을 극소화하고 義나 節같은 정신적인 것을 극대화는 사고방식이 한국선비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군불사열전(二君不仕列傳)이 바로 그것인데 이에 선비들은 육체적 부귀영화는 짧고 정신적 행복은 영원하며 그 정신적 영원을 위해 비록 모든 세상이 모르고 있고, 또 욕하지 않더라도 단지 자기 양심에 오욕(汚辱)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가난한 초야생활을 택하거나 또 죽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한국 선비 생리의 한 단면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유학의 가르침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일신상의 영화나 개인적인 어떤 속성보다 의로움을 숭상하여 고차원의 정신적 안정을 얻는 유풍(儒風)의 소치라 할 수 있다.
4.1.3. 호국성향
선비들이 지닌 충의성향은 바로 이들로 하여금 호국성향(護國性向)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호국성향은 「양산가」라는 신라가요 안에서 그 맥을 찾을 수 있는데, 신라명장 김흠운은 신라 호국사상의 화신으로 휼륭하게 죽어갔고, 그의 죽음을 불러주는 양산가를 타고 그 호국정신이 은연중에 계승돼 내려 선비의 의식구조 안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선비정신 안에 스며있는 호국정신은 특히 국난 때마다 의거를 하고 의거에 참여하는 것은 주로 선비였다. 비록 군률이나 병법에 어두어 효과적인 호국은 하지 못했을망정 그의 의로운 기상은 선비사상의 소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선비의 호국사상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이 정신의 부자계승인데. 곧 부자의 일체관, 조상과의 혈연적 유대를 사상과 정신적 유대로 발전시켰던 강인한 조상관의 작용이 이 호국정신의 유전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빚어놓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선비의 호국사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한 의병운동에서 비롯하여 한말 화서, 이항로의 문하인맥으로 계승되었고, 한말의 의거는 모두 선비들에 의한 호국사상의 구현으로 현대인이 망각한 전통의 진주가 아닐 수 없다.
4.1.4. 의리성향
한국인은 흔희들 의리, 인정이 강하여 그 인간적 요인을 기강에 선행시킨다고 한다. 곧 인정이 통하는 종적 인간층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무릅쓴다는 점에서 한국적 인간관계의 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리성향은 선비의 이식구조 안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 되어있으며, 사회적, 국가적, 대의(大義)적 가치를 선택하느냐 가족적, 인정적 가치를 선택하느냐의 양자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숱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세했던가에 대하여 그 정신적 특수성을 선비의 정신세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인정과 의리 사이에서 긍정적인 가치와 부정적인 가치를 가름해 볼 수 있으며, 부정적인 가치란 어떤 인간관계에서 인정이나 의리를 유지하는 척함으로써 그 관계에서 얻어지는 공리적 면을 노리는 겨우, 그것은 부정적 가치요, 의리나 인정이 다른 목적에 이용당한 것이 된다. 반면 아무리 의리나 인정이 격식화되었다 하더라고 퇴색하기 쉬운 그런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의리와 인정을 확인하는 행위, 공리적인 저의나 여타의 목적이 개재되지 않는 그런 인정행위나 의리행위는 긍정적 가치를 형성하며 이 세상에 드문 미덕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덕목을 우리 선비들은 희귀하게 누렸던 것이고, 또한 이러한 의리정신은 우애적 경향을 드러내어 우애와 의리는 표리가 되어 한국인의 마음속에 체질화되었고, 의리정신에 바탕을 둔 우애는 죽음과 같은 종말에도 구애받지 않는 영속성의 것이 되는 가치를 형성하였으며. 그것이 나라에 대한 충성과 신화된 도리 그리고 선비들의 학문과 삶, 예의, 우정관계에 까지 깊이 스며들어 소중한 가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의리성향은 선비정신세계 및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도덕적으로 성숙시키고는 또 하나의 문화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4.1.5. 청빈성향
선비들의 의식구조 안에 깊이자리잡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청빈성향이다. 이것은 어쩌면 선비의 조건중의 하나일 만큼 선비들의 삶에 중심점이 되었고, 또한 그들은 청빈적 삶의 테두리를 고수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의 선비들이 儒冠이기에 모두가 청빈의 조건을 갖추진 못했다. 하지만 어느 만큼씩의 청빈 요소를 지녔으며, 그 가치관을 이상으로 삼고 살았다. 적어도 재산이 많은 선비행세는 할 수 없다는 개념만은 확고했다. 만약 재물이 생기면 그 재물을 버리고 선비로써 그 우위의 신분계급을 지키느냐 재물을 택함으로써 그의 신분계급을 낮추느냐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기에 모든 우리 선조들은 재력이 크다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력의 크기는 곧 인격적 가치와 효과를 위한 조건으로 청빈은 파약 돼야만 하기 때문이다. 부는 욕심을 낳고 오만을 낳고, 喪志를 불러일으키고, 게으르며, 사물의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곧 선비로서 배제해야 하는 조건의 모두가 부에서 비롯된다. 만약 선비의 조건인 청빈의 가치관이 행정을 맡든 정치를 맡든 이 선비들에게 결여돼 있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수탈의 역사로 일관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한국의 정치사는 시행착오 끝에 정치가들에게 청빈의 가치를 부여했으며, 이 가치는 때문에 법률이나 규범 이전의 차원에서 통치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청빈이 가져다준 외면적인 가치 이외에 내면적인 가치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곧 청빈은 고행이요, 본능의 억제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에게 부자연한 짓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청빈을 굳이 택하는 데는 항상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인격적 마이너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벼슬자리에서 牧民하는 선비가 이 부에 빠지면 그 마이너스는 피목민의 전체에게 균배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빈을 택한 선비는 인격으로 구제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한국 선비사상이 뼈대 가운데 하나로써 이 청빈의 가치는 아름다운 덕목이었고, 선비로서의 조건이 갖추어지기 위한 기조가 되는 것 이였다. 즉 선비에게 청빈은 節 이요, 儉이고, 質이며, 樸이고, 知足이 되는 것 이였다.
4.1.6. 기절성향
우리 옛 선비사상의 기틀 가운데는 대의 속에 사리를 매몰시키는 氣節과 강직이 신선하게 숨쉬고 있었다. 특히 꽃이나 색다른 器物등 玩物을 상지한다 하여 정사를 다스린 사람이 완물을 즐기면 곧 정사를 기울게 하는 요소로 받아들였기로 완물로써 아첨하여 사리를 취하는 것을 소인시 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회이건 권위 앞에서는 의로움과 의롭지 않음과의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오히려 의로움으로써 그 권위자의 비위를 거슬르고 눈 밖에 나는 것보다 의롭지 않음을 통해 이 권위자에 아첨함으로써 눈 안에 들려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이러한 인간상정에서 의로움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 옛 선비의 기풍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절 있는 선비의 행동은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선비의 뼈대인 이 기절과 강직이 고식화 하여, 경우와 상황을 무시해서 행해짐으로써 부작용이 빚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옛 벼슬아치의 일생처럼 부디침이 심한 일생도 드물었다. 이것이 더러는 심했던 당파 때문이라지만 그보다 이 선비의 조건인 강직과 기절에 와서 부딪치는 상황과의 갈등과 알력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선비의 기절과 강직의 정신은 어쯤 현대인이 상실한 가장 소중한 전통적 황금 가운데 하나로서 선비의 조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1.7. 풍류성향
옛날 선비들이 유람을 할 때나 유배 길에 오르면 나무밑둥을 깎아 시를 쓰기 위한 낫을 휴대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이를 통칭 풍류낫 혹은 시도(詩刀)라 했으며, 만약 紙墨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불을 피워 숯을 만들고 그 숯을 바위의 오목한 곳에 넣고 갈아 숯먹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풍류 중에 우리 옛 선비들은 하룻밤 잠을 얻어 자는 역사나 부잣집 사랑방을 지어 또는 놀이간 친구의 집 하얀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지어 놓고 떠나가곤 했다. 기방에서는 기생의 치마폭을 벌리라 시키고 그곳에 四君子를 치고 시를 쓰기도 했다.
이 같이 이동하며 들기는 풍류를 동중풍이라 하고 이동하지 않고 즐기는 풍류를 부동풍이라 했다. 이러한 선비의 풍류는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쉰다는 것이다.” 라는 말에서도 풍류의 맛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는 달이 이미 떠올라 달빛이 방안을 비치어 그가 방안에서 기르고 있던 아름다운 국화꽃을 손님으로 맞아 달빛이 방안에 가득 차자 손님이 다 왔다고 소리치며 술을 내오라하고, 이 화분과의 사이에 술상을 차려놓고 대작하기를 은도배에 각기 두 잔씩을 국화에게 권하고 공도 녹취하였다는 이야기 안에서도 정적으로 극대화하는 풍류에서 옛 한국인이 찾은 어엿한 멋의 보편성이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강을 사이에 두고 대좌하여 각기 한 병씩 들고 온 술병과 안주로 잔을 들어 권한 체하고 받아 마신 시늉으로 대작 흥이 다하도록 마셨던 대작한 풍류 역시 동서고금에 전무후무한 멋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 선비들이 즐긴 선비는 수채화 같은 담담한 인생의 기미에 철쭉지팡이 같은 강인하고 앙한 의지의 뼈대가 드러나 보이는 인생 스케치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 같은 선비들의 풍류는 반드시 돈이 있어서만이 아닌, 가난하고 처지가 궁벽해도 이루어져 왔다는 덤에서 돋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비들의 풍류에는 홀수 풍류, 짝수 풍류 그리고 복수풍류 등이 있으며, 복수풍류란 뜻 맞는 사람들끼리 풍류계를 맺고 그 시사의 규약을 정하여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예들들면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여름 참외가 무르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련지에 연꽃이 만개하면 꽃구경하러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첫눈이 내리면 이례적으로 모이고, 또 한해가 저물 무렵 분에 매화가 피면 다시 한번 모이기로 했다.” 라는 다산 정약용 당대의 죽난시사(竹欄詩社)의 풍류계의 한 예에서 자세히 알 수 있겠다. 이 같은 詩社의 풍습은 이조 중엽이후, 한국 선비들 간에 보편화 되었고, 이웃이나 멀리 사는 명시인들을 초치하여 시사를 여는 것이 선비의 한 조건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것 같다. 또 학을 기르는 풍류의 시사가 있어, 이 선비들이 모일 때면 자기가 기르는 학을 안고 모이고, 그리고 학 같은 높은 기골의 학시(鶴詩)만을 써서 재주를 겨루기도 했다. 이 학시사(鶴詩社)는 선비의 기풍을 고양하고 유지시키는 풍류적인 뒷받침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밖에도 명시인 윤선도가 낙향해서 건설한 이상향살이도 한국풍류의 압권이었던 풍류향 보길도와 정약용이 유배살이 18년 만에 정들었던 강지 땅의 다신계(茶信契)의 멋도 있다. 이상과 선비의 풍류가 형성된 요인으로 첫째 선비사회에 詩가 생활화되어 있었고, 그 시상을 생활화 했던데 그 풍류의 개성이 부각되었다 할 수 있다. 즉 시가 곧 인격의 바로미터요, 본질의 평가기준이 됐으리 만큼 생활화 되었다는 것이 된다. 둘째, 문사 위주였던 유학이 김굉필, 조광조 등 유학자의 혁명으로 도학 위주로 변혁한 연후에 육체적 본능적인 것의 규제와 억제로 마음의 평정을 얻는 정적인 경지의 발견이 또한 한국적 풍류형성의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평정의 추구는 유학자로 하여금 善과 仙의 주정적 요인과 절충 융합하여 조용한 속에서 마음이 얻을 수 있는 극대의 것을 찾는 풍류가 생겼음직도 하다. 셋째, 잦은 유비와 은둔생활에 불가피했던 정치 사회의 여건이 선비들로 하여금 낙향하게 했고, 은둔지에서 그들이 생존할 수 있던 여가추구의 본능이 한국적 풍류형성을 제촉 했을 것으로 본다. 정약용의 다산계의 멋 안에서도 떠나간 스승에 대한 보은과 정의를, 그리고 문하생의 화목과 풍류를 그리고 조촐한 대로 담배하며 소박한 대로 아기자기한 선조들의 화합의 상태를 알게 해준다. 이 같은 화합의 보은 때문에 비록 떠나간 다산도 이곳을 잊지 못하여 시와 편지로 동암의 지붕은 잘 이었는지, 뜰에 심은 홍도가 죽지는 않았는지, 우물에 쌓은 돌은 무너지지나 않았는지, 못에 방생한 잉어는 얼마나 컸는지, 백련홍과 가는 길에 심었던 동백꽃은 잘자라고 있는지, 차는 철을 놓치지 않고 잘 따는지 하며 항상 마음만은 이 다산동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 같은 우리들의 선비들은 아름다운 화합의 전통을 계승하고 항유 하였으며, 삶 안에서 인생의 여백적 아름다움으로 풍류의 멋을 살리고 살았던 것이다.
4.1.8. 기 타
이 밖에서 선비들의 의식구조 안에 자리 잡아 그들의 삶을 이루었던 것들에는 많은 것이 있다. 존두 및 존체성향, 사대 및 신주숭상성향, 보수 및 저항성향, 관용 및 겸손성향, 청빈 및 검약성향, 도선 및 은둔성향, 지간 및 제욕성향, 그리고 계색성향 등이 한국 선비들의 의식구구조 안에 자리 잡아 그들이 선비적 삶의 한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한국 역사 속에서 면면하게 맥을 이어오면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 까지 지혜의 샘터로 인도하는 잠언서가 되어 주기도 한다고 할 수 있다.
4.2. 선비의 예절과 지혜
‘선비의 예절(士典)’은 자신을 깨우쳐 되도록 허물을 적게 할 목적을 위함이다. 따라서 한. 당의 선비들은 도수(度數)와 명물(名物)에 익숙하고 송 .원의 선비들은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에 밝았다. 그러나 글을 지어 후세에 교훈을 남긴 것은 매우 적었고, 특히 작은 예절에 대해 중심적으로 말한 것은 역시 적었다. 날마다 하는 행동에 법도를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래서 주자는 이를 걱정하여 『소학』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입교(立敎), 명륜(明倫)에서 심술(心術), 위복, 의복, 음식의 예절에 이르기까지 모두 작은 예절을 갖춘 것이었다.
이러한 예절은 선비에게 있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작은 예절을 닦음으로 허물을 줄이는 수양의 측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성행, 언어, 복식, 행동거지, 바른 몸가짐, 공부와 가르침, 인륜, 교제에 대하여 그리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의 예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로 그것이 소중히 여겨졌으며. 또한 그것은 삶의 지혜가 되어 오래도록 남겨지기도 했다.
그 가운데 선비의 예절에 대하여 몇 가지만을 생각하여 본다면, 「성행」에서 “선비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본심을 간직하고 착한 성품을 함양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욕심을 절제해야 한다. 그리고 의관은 반드시 정제하고 걸음걸이는 반드시 신중히 할 것이며, 말은 경솔하고 야비하게 하지 말고, 않고 서는 것은 방자하고 해이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일을 하는 데에는 공경으로써 하고 처신하는 데에는 경우 바르게 할 것이며, 허위를 조작하지 말고 남과 다투지 말 것이다. 그리고 착한 말을 들으면 신분의 비천을 따지지 말고 복종해야 하고, 과실이 있으면 조금도 기탄없이 고쳐야 한다.” 이것은 김종후의 학규(學規)이다.
「언어」에서 선비는 “ 언어는 소곤거려도 안 되고, 지껄여도 안 된다. 또 산만하게 해도 안 되고, 지체해도 안 되며, 길게 끌어도 안 되고, 뚝뚝 끊어지게 해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힘없이 해도 안 되고, 성급하게 해도 또한 안 된다. 특히 속된 말이 한번 입에서 나오면 선비의 품행은 즉시 떨어진다.” 그러므로 선비의 언어는 온후한 말로 잘 주선하여 과오를 범하지 않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식」에 있어서 선비의 예절은 “ 남과 함께 앉았을 때 어떤 사람이 술과 음식, 과일을 주거든 반드시 고루 나누어 먹어야지, 혼자 먹거나 또는 옆 사람이 달라고 할까 봐 바삐 싸서 넣거나 해서는 안 된다. 탐식하는 사람은 차라리 오래 간직했다가 쉬고 곰팡이가 나면 땅에 버릴지언정 남에게 주지 않는데, 이것은 인정에 가깝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색다른 음식이 있거든 아무리 적어도 노소, 귀천간에 고루 나누어 먹음으로써 화기애애하게 하라.” 그러므로 선비의 예절는 남을 생각하여 언제나 장소와 상황과 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여 사리에 맞는 행위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행동거지」에서 선비는 “군자는 행동거지가 온아하며, 개결하고, 자상하며, 너그러워야 한다. 말할 때에는 몸과 머리를 흔들지 말고, 손과 발, 무릎을 흔들지도 말라, 또한 눈을 깜박이거나 눈동자를 굴리지도 말고, 입술을 비쭉거리거나 침을 흘리지도 말라, 턱은 받치지도 말고 수염을 쓰다듬지도 말며, 혀를 내밀지도 말고 손바닥을 치지도 말라. 손가락을 튀기지도 말고 허리띠 끝을 돌리지도 말라. 선비는 소소한 근심으로 얼굴을 찡그려 우는 형상을 해서는 안 되고, 야간 성낼 일에 고함질러 꾸짖는 얼굴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선비는 언제나 자신 혼자 있든, 사람들과 함께 있든 바름 몸가짐과 행동거지로 행위하고, 그러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고 학문을 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어리석은 사람, 빈곤한 사람, 병든 사람, 어수룩한 사람, 상복 입은 사람 그리고 아이들을 보면 더욱 정성스러운 마음과 부드러운 말씨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비는 「공부와 가르침」에 있어서도 “선비는 독서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에서 반드시 성현의 행동과 가르침을 이끌어 준칙으로 삼아 잘못됨이 없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비들의 공부와 가르침은 모두가 성현이 되기 위한 것에 있으며, 그러기에 “남보다 유능하가는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겸손해지고, 남보다 나으려는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평탄해지며, 사치스러움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질투하는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화평해진다. 그러므로 선비는 자신을 자랑하는 말, 꾸미는 말, 근거 없는 말 등을 일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비의 공부는 언어와 행동을 자기 자신의 신심에 부합되게 하는 수양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렇게 또한 몸소 자신의 모범으로 타인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륜」에서 선비는 “ 부자와 형제에게 과실이 있을 경우, 자제는 간쟁해야 하고 부형은 훈책 해야 한다. 그 과실의 대소에 따라 명백히 말해주고 원망과 성냄을 오래 간직하지 말라. 슬며시 나무라는 뜻으로 타일러서는 안 되고, 또한 간접적으로 듣게 해도 안 된다. 남이 헐뜯는 말은 변명할 수 있으나 부모의 말씀은 변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기는 일은 한번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를 섬기는 자는 마땅히 언제나 조심하고 공경해야 하고, 자식을 사랑해야 할 부모로서도 또한 자식을 성취시킬 것을 깊이 생각하여, 자식이 대악의 이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미세한 과실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꾸짖기가 쉽다. 그러나 조용히 경계해야 하고 큰소리와 사나운 얼굴로 서로 나무라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한 가정에서 부자 형제가 혹 각기 얻은 재물이 있거든 쓸 때에는 네 것 내 것 구별 없이 뒤 섞어 써야 한다.” 이렇듯이 선비들은 인륜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며, 삶을 살았고, 그것을 인간 모든 관계 안에서 중정(中正)을 유지 하려고 했다. 선비들은 봄가을로 여가 있는 날에 간단하게 주식을 준비하여 집안의 노소를 한방에 모아 고사와 오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근검치생(勤儉治生)과 개과징분(改過懲忿)의 일을 언급한다. 또 술이 얼근하면 애들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어른은 시를 읆으며, 부인들은 실없이 웃지 말고 삼가 듣는 삶의 자세들은 칭송하며 살았다.
「교제에 대하여」에서도 선비들은 뜻이 같은 사람들 끼리 서로 사귐을 청하고, 서로 굳센 기운들을 겨루고 나누었다. 이러한 벗의 사귐에서 “벼슬로 서로 유혹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 의지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다. 장기, 바둑이나 놓고 술이나 마시고 해학하며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시문과 서화와 기예로 서로 잘한다고 허여하는 사람도 벗이 아니다. 오직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을 서로 부지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입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라고 칭하며 사귐에 있어서 거짓되지 않은 진실한 인품과 절제 있는 바른 태도와 예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선비는 특히 자기 의견과 다른 의견을 만났을 때는 기를 쓰며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끝으로 선비의 예의 가운데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서 “ 자제들이 과오를 범하거든 다정스럽게 경계해야 하고, 절대로 때를 지나 성내면 안 된다. 더불어 자제나 아랫사람이 우연히 과오를 범했을 때에는 즉석에서 경계하거나 꾸짖고 가슴속에 간직하지 말라. 또한 아내와 자식에게 비록 여의치 않은 점이 있더라도 아랫사람들에게 하듯이 큰소리로 나무라서는 안 되며, 집안사람들에게 사랑과 미움을 치우쳐 보여서는 안 된다. 어린 사람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그 잘못을 경중에 따라 은밀히 경계하거나 꾸짖어야지 거센 목소리에 노기 띤 얼굴로 중언부언하여 착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은혜와 위엄을 다 잃을 뿐만 아니라 인정과 의리에 손상이 있을 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으로 책을 읽고 이웃과 화목하면서 어른을 공경하며 사물과 현상의 이치를 깨우쳐 진리로 나아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었고, 또한 그들 안에는 삶의 지혜가 있었다.
5. 선비정신의 근대적 성찰
도학이 정착하면서 선비의식은 어떤 시대보다도 선명하고 자각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사회적으로도 선비가 주도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마침내 선비가 정치의 담당자로 부상하여 사림정치를 하게 된 선조 때에는 사림들 자체가 내부이 분열을 일으키고 대립하게 되었다. 이른바 당쟁이 시작되다 당파는 계속하여 핵분열을 거듭하였고, 서로 비난하던 주장들이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당쟁의 출발점에서 보면 선비정신의 기본이념에 따라 ‘君子 小人論’으로 비판하는 입장이다. 선비가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군자라 칭하고 남을 소인으로 비난하면서 서로 격심한 적대감을 일으켰다. 선비가 권력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견제 할 때는 순수한 입장을 지켰으나, 권력의 주체가 되었을 때 선비는 엄청난
권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선비의 신념이 도리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경우를 넘어서 실질적으로 권력의 권위를 지녔을 때 선비는 지배자로서 서민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것은 선비의 타락상이요, 선비의 진실한 모습의 상실이다. 또한 선비는 국가권력에 참여하지 않을 때에는 지방의 향촌에서 온갖 특권을 누렸다. 국가가 선지를 우대하도록 요구하였고 선비는 봉사자가 아니라 권력의 향유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선비는 사회의 문화와 규범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선비의 문화적 기준은 한문자의 중국문화에 젖어 민족문화의 자주성과는 유리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유교문화가 점점 세련되면서 서민문화는 더욱 위축되거나 유리되는 분열을 일으켰다. 이른바 방상의 차별이 더욱 위축되거나 유리되는 분열을 일으켰다. 이른바 반상의 차별이 더욱더 철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주의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조화가 점차 쇠퇴하고 계층 사이의 분열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선비문화의 중요한 특징인 규범체계는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확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이 규범들이 선비의 계층적 범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강화될 때 특히 의례는 형식화하기 시작되었고, 의례를 매우 섬세하게 조직하고 의례의 완벽한 집행자가 아니면 신분적인 권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대부의 예의범절은 매우 고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너무 형식주의에 빠지면서 실질적 효율성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러한 선비문화가 도학파의 정통성이 강화되면서 더욱 확고하게 정착되었고, 동시에 폐단을 낳았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도학적 관념성과 형식성에 대한 반성을 하고 실질적 효율성에 대한 관심을 높였던 새로운 학풍이 대두되었다.
이것이 곧 실학의 등장이다. 또한 실학사상을 이끌어 갔던 세력도 역시 선비들이다. 그러나 실학파의 선비들은 도락적 선비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예리하게 반성하고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실학파의 학자들 사이에 사대부 내지 양반에 대한 사회적 기능과 지위를 재평가하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박지원은 「양반전」을 통하여 선비는 도덕규범만 담당하고 생산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에 참여하여 산업을 성장시키는 데서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으로 지적하였다. 재화의 생산은 인간생활에 필수적인데 선비가 의리만을 내세워 재화를 귀천한 것으로 보는 의식을 비판하였다. 곧 재화의 생산 활동이 바로 도덕적임을 인정하며, 오히려 생산은 하지 않고 놀고먹는 해우이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선비가 유식계층이 되고 있음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다. 이익, 정약용도 선비의 무위도식을 비판하였다. 그것은 道義를 연마하는 선비의 임무가 노동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을 천시할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강조한 하는 것이요, 노동의 신성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주장이다. 박지원은 소설을 통하여 사대부의 기만성을 비판하고 「양반전」에서는 군자가 명예와 세력과 이익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그것을 독점하려는 심술이라고 꿰뚫어 보았다. 「호질」에서도 위선적인 도학자인 주인공을 호랑이의 입을 빌려서 질책하면서 “선비는 아첨하는 자이다.”라 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비의 참된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선비가 작위를 가지면 선비를 버리고 대부나 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위도 ‘사’에 부착되는 것이다. 천자도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 몸은 선비이니, 천자를 원사라 한다.”라 하여 일반적으로 인격적 개념으로 확인하였다.
박대용 역시 선비를 분류하면서 과거시험으로 출세하는 재사와 글재주로 이름을 얻는 문사와 경전에 밝고 행동을 점잖게 꾸미는 경사를 열거하고 나서, “선비는 인의에 잦고 예법을 따르며, 천하의 부귀로도 그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누추한 마음의 근심으로도 즐거움을 대신하지 못하며, 천자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벗 삼지 못하며, 현달하면 은택이 사해에 미치고, 물러나면 도를 천녀토록 밝히는 진사이다.”라고 하였다. 선비의 바른 기풍을 추구하는 것은 도학자들 사이에도 있었지만, 선비의 허위적 면모를 성찰하고 진실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였다.
한말에 이르러서는 도학이 다시 활기를 찾아 융성함을 보였다. 곧 선비 정신이 쇠퇴할 때 유교이념도 은폐되고 선비정신이 살아날 때 유교이념도 활력을 찾는다. 한말에 이른바 척사위정파 선비들은 이 시대의 기본과 제를 유교이념의 전통에 배반되는 이념들을 거부하고 도학의 이념을 수호하는 것임을 밝혔다. 도학정통에 상반되는 이단으로서 천주교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였고, 도학적 의리에 배반되는 오랑캐로서 서양의 침략세력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도의 정통성에 대한 신념과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지녔다.
병인양요(1866)를 당하자 척사위정론의 대표적 인물인 이항로는 “선비로서 한번 이상 왕명을 받은 자는 평일에 있어서는 마땅히 사퇴하는 것으로써 의리를 삼아야 하지만, 일단 국가에 환란이 있게 된 때에는 즉각 달려가 협력하는 것으로서 의리를 삼아야 한다.”라 하여, 위기의 상황에 선비의 적극적인 참여자세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서양문물의 침투가 가중되면서 서양의 위협을 정치적인 것에 앞서서 문화적 내지 도덕적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는 유교이념의 입장을 확인하였다. 서양문화를 인간의 욕망을 개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재화를 융통하게 하고 여성을 자유로 접촉하게 하는 통화, 통색의 성격으로 규정지었다. 따라서 서양문화를 오랑캐의 것으로 규정하며, 서양선교사를 종래에 서사라 부르던 것을 서호(西胡)라 불러야 할 것으로 주장하여 선비와 오랑캐를 엄격히 구분하는 배타적 비판의식을 보여 주었다.
정부가 개항과 더불어 개화정책을 취하게 되자 한말 도학자들은 정부의 입장에 순응하지 않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선비의 자리는 천위요, 그 임무는 천직이요, 천자라도 선비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선비의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선비의 지조는 왕권 위에 있음을 밝혀, “천직은 무겁고 임금의 명령은 가볍다.”라 하여 왕명이 부당 할 때 거부할 수 있는 선비의 근거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직분인 천직을 강조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강화되자 도학파의 선비들이 일본에 저항하여 항거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들은 을미의병을 일으키면서 선비의 저항정신을 밝혔다. “죽음은 선비의 의리이다.”라는 신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선비가 국가존망의 위기에 침략자에 대한 항의로 의병을 일으키는 것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선비가 국가변란의 위기에 대처하는 3가지 방법으로서, 하나는 의병을 일으켜 거역하는 무리를 쓸어 내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이요, 둘째는 떠나서 옛 제도를 지키는 거지수호요, 셋째는 죽음으로써 지조를 온전히 하는 지명수지의 행동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시대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키거나 자결을 하여 지조를 강경하세 드러내며, 또는 산속으로 은거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전통제도를 고수함으로써 선비의 절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도학의 척사위정론이 저항정신에 사로잡혀 보수저이고 폐쇄적인 수구론을 주장한데 대하여, 시대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자강정책을 추구하는 개화파가 대두하였다. 온건한 개화파는 유교적 신념을 기반으로 하면서 서양근대문물의 수용을 시도하였다. 이 수용론에서 한걸음 나아가 유교개혁사상이 출현하고 있다. 유교전통의 폐단에 대해 과감한 비판과 반성을 거쳐서 혁신적 유교정신을 수립하고자 도모하는 입장이었다. 이들 유교개혁사상가는 이 시대에 애국계몽사상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박은식은 구습에 젖은 4가지 사회집단으로서 그 첫째를 ‘유림가’로 지적하였다. 그는 당시의 일반여론이 유림을 비판하는 문제점을 열거하였다. 곧 고누(固陋)하여 時宜에 어둡고, 자기도취에 젖어 백성과 나라를 망각하며, 옛날 책만 영구하고 새 이치를 연구하지 않으며, 공허하게 의리를 논하고 경제를 강구하지 않는 점 등의 조목을 들어 유림이 개명한 시대의 일대 장애물이 됨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박은식의 입자에서는 전통적인 선비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당시에 전통의 습관을 고수하는 고루한 유림을 비판한 것이다. 그 만큼 당시의 유림들은 고루한 장애물로 철저한 비판을 받았지만, 이에 반하여 새로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개혁운동을 하는 계몽 사상가들이 이 시대 선비상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박은식은 정부와 유림의 부패상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비판하면서 전반적으로 당시 유교적 제도와 명분의식이 허위에 젖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장지연이 유교개혁을 전재하면서 진화, 평등, 겨선(兼善), 강립(强立), 박포(博包), 지성(至誠)의 6대주의로 개혁원리를 제시하였던 점에서도, 새로운 선비상은 진보와 평등의 이념을 추구하는 근대적 가치의 담당자로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애국 계몽 사상가들은 ‘선비’의 신분적 특권과 전통적 역할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대중교육과 전문교육을 통하여 새롭게 출현하게 되는 청년세대의 지성에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억압기에 애국 계몽 사상가들이 사회전면에 나서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때, 다른 한편 전통도학의 선비들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산간에 은둔하여 끈질기게 일제의 억압정책에 항거하였다. 일제의 민적(民籍) 등록을 거부하고 창시의 강요에도 저항하였다. 일제하에 살던 유림의 선비는 일본의 동화정책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단발의 강행에 응하지 않았고 일본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인이 설치하였다 하여 철도조차 이용하지 않았고, 신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도 않았다. 이러한 저항정신을 선비들의 강인한 민족의식을 발현한 것으로 존중할 수 있지만, 이미 변혁된 사회에서 지도적 기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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