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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에 비추어 본 복음적 정신과 수도 삶

마리아 아나빔 2010. 7. 6. 10:20

 

6. 선비정신의 현대적 의의

  

   전통사회에서 선비는 분명히 그 사회의 양심이요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 생명의 원동력인 원기라 지적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사회까지 그 시대적 양상에서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선비는 각 시대에서 지도적 구실을 하는 지성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해 왔다.

 

   이처럼 개화 이후에도 시대이념을 수호하고 이끌어 가는 주체로서 지성인의 구실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독립투쟁기에는 의사, 열사가 요구되고, 산업성장기에는 경영자, 기술자가 요구된다. 선비는 언제나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요 지성인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통의 선비상은 우리 시대에서도 의미 있는 선비의 조건을 제시해 준다. 즉 선비는 현실적, 감각적 요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신념을 실천하는데 꺾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성찰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중심의 구실이 있다. 선비는 이제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사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 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원천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밝은 사회를 선도해 가는 고귀한 정신적 인간모델로서 선비정신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러한 사람들이 왜곡된 가치 질서와 전도된 비민족적인 정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하여 이 산업사회 속에서도 선비정신을 갈구한다. 끝으로 선비정신의 현대적 조명을 위한 작업으로 ‘복음정신에 깃든 선비정신’과 ‘수도자와 선비’에 대한 작업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6.1. 복음정신에 깃든 선비 정신

 

   선비정신을 복음 정신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복음정신에 따라 복음 정신을 온전히 살았던 예수그리스도의 삶에 근거하여 살펴봄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특히 하느님 사랑에 근거하고 있는 복음 정신에서 선비정신을 풀이할 주제로 청빈, 기도함, 선주후아(先主後我), 사랑, 영원한 생명의 삶을 선정하였다.

 

6.1.1. 청렴

 

   예수님의 청빈함과 그 가르침에서 선비들의 청렴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선비들이 재물에 대해 주의했던 것은 재물이 사람의 모든 것을 쉽게 사로잡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재물에 압도당하면 사리판단이 흐려지고 사물을 올바르게 헤아리지 못한다. 이는 선비들에게 치명적인 결점이 되는 것이다. 재물을 탐함으로써 올바른 뜻을 세우지 못하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올바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미리 앞서서 재물의 탐닉에 맛들이는 그 시작을 철저히 멀리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만을 바라고 산 예수님의 모습에 견줄 수 있다. 예수님은 삶 안에서 하느님으로 삶을 가득 채우기 위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불필요한 것들과 함께 하고자 하질 않았다. 그릇된 욕심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재물에 대한 집착은 하느님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를 쉽게 빼앗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비들의 청렴함이 비록 하느님 만나는 방편이 아니었지만 그 추구함은 하느님이 세상에 내린 큰 가치, 즉 사람이 가야할 올바름을 지시해 주는 양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면 일면 복음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6.1.2. 극기와 수양

 

   선비들의 극기와 수양은 올바른 자아형성의 실천이었고 선비다움의 완성을 위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일면은 마치도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 만남을 생각게 한다. 즉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향하게 해주는 극기의 도구이며, 하느님의 뜻을 구하여 하느님의 맘에 드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는 수양의 도구였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이 바라는 올바른 인간됨의 길을 이루어 보여주었다.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선비들의 극기와 수양이 하느님의 자녀다움을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품성을 계발하고 성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서 구원의 열매에 근접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올바른 사람으로서, 선비다운 선비로 살아감이 주요한 목표였던 선비들은 이를 위해 시종 일관하는 자세로 매진해야 하였다. 사소한 마음씀과 행동 안에서도 올바른 것을 지향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을 다스려 나갔다. 참으로 선비들의 노력하는 자세와 그 뜻에 항구했던 노력은 기도 안에서 항구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열심과 비견된다 할 수 있다.

 

6.1.3. 선주후아(先主後我)

 

   자기 자신을 위한 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는 없는 것이 사람이며 이것이 올바르지 않음은 너무나 분명함을 알고 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힘들 때도 있지만 그것이 가장 바르고 타당한 것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는 만인의 구원인 것이다. 그러기에 때때로 욕심 많은 나 자신을 더 큰일을 위해서 제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비들은 자신들의 삶 안에서 이를 너무도 잘 실천하였다. 개인의 일신보다는 모든 이들의 영달을 위해 애썼고 모든 이들이 이룬 공로를 부당히 자기의 것으로 가로채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사사로움보다 공적인 것을 앞세웠다. 선비들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만인을 배려하고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았던 것이다. 하느님을 앞에 놓은 시선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 하겠다. 그 시선 안에서 사람은 자기의 욕심에 빠져들지 않고 더 큰 것을 바라보게 된다. 자기 자신을 뒤로 물릴 줄 알았던 선비들은 명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하느님을 느끼는 시선에 어느 정도 다 달았던 것이다.

 

6.1.4. 경리중의(經利重義)

 

   복음정신을 따라 산다는 것은 곁에서 관망하는 자세로 있는 다는 것이 아니다. 직접 몸으로 나서는 투신의 삶을 사는 것이 복음 정신적 삶인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을 위하여 아낌없이 자신을 내맡겼다. 사랑을 위한 이 아낌없는 투신이 선비들에게서 드러난다. 바로 선비들이 義를 고수하는 모습에서 보여 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랑을 중히 여겼다면 선비들은 義를 중하게 여겼다. 선비들은 올바름, 즉 義를 소중히 여겼으며 義에 대한 충실함이 참으로 남달랐다. 義는 선비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義 는 선비의 판별기준이었다. 선비에게 義가 있으면 그는 선비이고 이것이 없다면 선비가 아닌 것이었다. 그러기에 義를 위해 본능적으로 탐나는 여러 이익들도 물리칠 수 있었고 급기야는 생명도 義를 위해 바칠 수 있었다. 즉 선비들은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이상적인 가치를 지녔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내걸었던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바로 찾아나갔던 것이다.

   무엇가에 투신하는 선비들의 모습이 참으로 숭고하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면서도 사람다움의 큰 이치를 위하여, 만세의 의로움을 위해 不義에 저항하는 선비들의 자세가 깊은 감명을 준다. 이러한 大義를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그러한 모습이 보여 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히 주어진 것에 대한 철저함은 신앙 안에서 절대자에 대한 충실함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기에 義를 고수하는 선비들을 신앙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6.1.5. 超然한 삶

 

   복음 정신을 깊이 꿰뚫는다면 세상에 하느님과 함께 함만으로도 기쁨이 넘치고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 세상은 그 자체로 행복이 가득한 곳이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헛됨에 쉽게 빠져들어 무언가를 모으고 무언가를 누려야 행복해지는 줄 알고 있다. 사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삶을 풍족하고 넉넉하게 해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러할 지라도 근원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세상 욕심에서 멀찌감치 있던 선비들은 흡사 복음정신을 사는 듯하다. 하느님만을 구하며 세상의 것에 욕심내지 않고 살았던 예수님과 같이 삶을 유유하게 살아간 듯 하다. 선비들은 세상의 잘납네 하는 것을 잡사로 여기며 인간 삶의 번잡스러움에서 떠나 자신과 자연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 즐겼다. 삶의 즐거움은 어떤 물질에서 연유되는 것도 아니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진작부터 알았기 때문이었다.

   선비들은 삶의 즐거움이 세상에 나온 나에게서 출발하여 내 주변에 이미 널려 있음을 깨달았기에 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 고양을 위해 애썼다. 온전한 인격의 성숙을 통해 사람을 바로 보고 사불을 바로 보면서 삶 안에 벌어지는 자그마한 향연을 지나치거나 놓치지 않으며 누렸던 것이다. 그러기에 선비들은 삶 안에서 욕심 낼 일없이 자신의 삶을 귀하게 살아갔으니 이는 하느님 안에 모든 것을 바라고 그 가르침 안에서 인격적 풍미를 온전히 발하며 사는 신앙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선비들은 인간적 성숙을 풍요롭게 하면서 세상에 대한 긍정과 자연에 대한 찬미로 삶을 누렸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들의 삶은 세상 것에 욕심내지 않는 순수함을 살 수 있었으며 영원을 향유하는 구도자적인 삶을 이루었던 것이다.

 

6.2. 修道者와 선비

 

   오늘날 수도삶을 살아가는 많은 한국의 수도자들이 우리문화전통을 되살리면서 특히 선비정신 안에서 그 일치점을 찾고, 선비정신이 지닌 소중한 삶의 자세를 을 수도삶 안에서 살려낼 수 있기를 희망해 보는 마음으로 이 장을 정리하고 싶다.

 

6.2.1. 수도자와 선비의 일치

 

   한자어로 ‘수도자’라는 말에 포함된 의미는 우리의 전통사상인 유교이념과 쉽게 연결시켜 이해 할 수 있다. ‘修道’라는 말은 ‘도’를 닦는 것이요, 『중용』에서 이른바 “道를 닦는 것을 敎라 한다.”라는 말의 어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중용』에서는 하늘의 명령을 ‘성품’ (性)이라 하고, 그 성품을 따르는 것을 ‘道’라 하였다. 따라서 ‘道’는 하늘의 명령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 수도자가 닦아서 빛나게 드러내어야 하는 대상은 ‘하늘의 명령’이라 한다면, 그 방법은 ‘인간의 성품’을 통하여 드러내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과 세계를 주재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확인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명령을 받는 주체로서 인간의 성품 내지 영혼의 위치도 확고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된 자신의 성품을 올바르게 밝히지 못한다면 결코 하느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수도자는 하늘의 명령을 따르고, 하늘이 부여해 준 성품을 밝히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임부로 삼는다고 하겠다.

 

   “말씀(道)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1,1,)라는 구절에서 말씀과 ‘道’는 같은 의미로 해석괴고 있으며, 유교적 입장에서도 ‘道’는 하늘의 뜻에 따른 운행을 의미하는 동시에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道’는 인간의 성품 속에서 ‘德’으로 나타나며, ‘道’를 닦는 것은 곧 ‘德’을 닦음으로써 ‘道’를 밝힐 수 있는 것이요, 하늘도 알아서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道’와 ‘德’은 하늘과 인간의 다른 영역을 지시하면서도 일치시켜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修道者는 동시에 修德者이기도 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교의 선비는 바로 수도자이면서 수덕자인 역할을 맡은 인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비란 핵심적인 덕인 ‘仁’을 닦고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가 최초의 학문본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속에서 서양의 선교사인 자신의 성격을 ‘西士’(곧 서양선비)라 표현하고 있는 사실은 천주교의 수도자, 성직자를 ‘선비’로 일치시켜 확인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6.2.2. 수도와 수덕의 내용

 

   수도와 수덕을 일괄적이고 상호표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유교적 입장을 중심으로 전통사회의 선비의 수양 내지 수도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왕조시대의 도학자들은 修道 내지 修德을 존양 곧 存心養性(마음을 보종하고 성품을 배양함)과 省察(자기의 행동을 살피는 것)의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었다. 존양과 성찰을 마음 내면과 활동으로 영역을 나누어 볼 수 있고, 이 두 영역을 합쳐서 ‘존성(存省)’이라고도 일컫는다. 수덕이라 할 존성(존양과 성찰)은 인간의 내면적 심성의 연마와 활동 속에서의 반성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여도, 여기에는 ‘德’의 근원이 되는 하늘의 ‘道’에 대한 신념이 전제되어있다. 인간의 성품 자체가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수덕(수양, 존성)의 도학적 기본체계는 19세시의 유학자 김흥락(金興洛)이 제시한 것에 따르면, 立志, 居敬, 窮理, 力行을 들어 볼 수 있다.

먼저 ‘立地’는 자신의 삶이 지향하는 목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확립하는 길이다. 유교의 전통 속에서 선비가 세상을 살면서 세우는 목표는 ‘成人’이 되는데 있다. 따라서 입지는 수도 내지 수덕의 출발점에서 자신을 지향하는 것이고, 삶의 모든 과정에서 확인하고 유지해 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입지를 얼마나 크고 높게 그리고 바르게 잡느냐 하는 것은 한 수도자가 일생을 통하여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결정해 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두 번째 조목은 ‘居敬’은 경건한 자세로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망의 불길은 잠깐만 방심하여도 무엇이든지 태워버리는 무서운 힘이 있다고 경계한다. 인간은 욕망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을 제거할 수 는 없지만, 욕망이 통제를 잃으면 자신의 영혼도 신체도 소멸시켜 버릴 수 있는 위험한 것이다. 수도와 수덕에서는 욕망의 절제가 필수적인 조건이다. 검소한 의복과 식사나 청빈한 생활은 수도자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가난함은 선비의 당연한 일”이라 지적하였고, “먹기를 배불리 하지 말고, 거처하기를 편안히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단지 욕망의 절제라는 차원을 넘어 더 높은 가치를 뚜렷하고 강력하게 드러내는 데 뜻이 있다.

   ‘敬’은 ‘한 가지에 주력하여 다른 데에 적응하지 않는 ’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입지를 통하여 확립된 삶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하여 다른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집중적이고 진지한 태도를 경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에 약간의 방심이나 태도도 허락하지 않으니, 항상 깨어 있는 긴장된 상태라고도 한다. 경건성은 또한 자신에 대한 자만이 아니라 자기보다 높은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비우는 겸허함을 요구한다.

 

   세 번째의 조목은 ‘窮理’이다. 궁리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요, 진리의 탐구라 할 수 있다. 진리가 빛으로 삶을 밝혀주지 못하면, 모든 수도 생활의 과정은 그르쳐지게 될 것이다. 유교의 성리학적 인식에서는 진리를 하늘과 인간의 성품에 일치시켰다. 진리의 탐구는 진리의 영역인 자연의 법칙과 존재의 궁극적 모습 및 인간의 도덕적 법칙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진리의 궁극적 근원은 하늘(하느님)에 있지만, 나타나는 세계는 자연과 인간 속에 걸쳐 있다.

 

   수도 내지 수덕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및 철학이나 윤리학 등 인문과학의 학문적 연마와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수도자는 동시에 학문연구 곧 진리 탐구를 하는 학자이기도 하여야 한다. 학문은 현학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자신의 삶의 빛으로 드러내어야 하는 작업이다. 치우친 편견은 아무리 강한 신앙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인간을 잘못 인도하여 인간을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을 불행에 빠뜨릴 수 있다. 천명에 대한 인식 또는 선의 올바른 기준을 명확히 인식하려는 노력은 수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조목은 ‘力行’이다 힘써 행하는 실천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나 진리도 실천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의 아름다움에 그치고, 추상적 관념에 머물고 말 것이다. 힘써 실천한다는 것은 끈기가 있어야 하며 강인한 의지를 요구한다. 인간이 나태해질 때 자신을 채찍질하는 의지의 역할은 수도자의 조건이요 덕목이 된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때로 자신에게 커다란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요, 역사적으로는 의롭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고 정의를 주장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따라서 행동은 결단을 필요로 하고 결단에는 용기가 뒤받침 되어야 한다. 용기 없이는 인간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앎과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변명하거나 타협하게 될 것이다. 수도자가 진리를 신념으로 간직하면서 불의와 악 앞에서 저항하고 투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며 진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사회에서 선비들은 직언을 두려움 없이 하고, 임금의 잘못을 칼날처럼 예리하게 비판하는 항의 상소를 올렸던 것은 용기가 신념의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지키고 실행하는 것은 선비의 의무요 수도자의 책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선비는 평소에 한없이 겸손하여야 한다. 자만이나 거친 행동은 선비다운 행동이 아니다.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마치 살얼음판을 건너듯이 조심하는 것이 선비의 모습이다. 이러한 선비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가장 작은 과오에도 부끄러움을 갖는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몸차림을 하고, 말과 몸짓이 침착하며 사리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만나서도 모든 동작이 예법에 맞아야 한다. 한 가지 정밀하지 못하거나 우아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마음이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것이 선비의 태도이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남에게 자기주장을 고집하거나 무례하게 상대방을 낮추고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몰염치한 행동을 하는 것은 선비로서, 수도자로서 부끄러워할 일이다. 선비는 항상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무례한 행동을 미워할 수 있는 인격이며, 그것은 수도자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선비의 ‘仁’의 임무를 살아가는 인격이나 수도자의 사랑을 임무로 살아가는 인격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고통 받고 가난한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는 선비들의 ‘仁’의 실현이 민본주의에 있었던 것과도 상통하다고 볼 수 있다.

 

 

6.2.3. 수도자와 선비의 삶의 자세

 

   수도자는 유교전통의 선비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종교의 인격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겸손하고 경건하면서도 진리에 깊은 인식을 갖고서 과감하고 끈질긴 실천력을 갖는 인격으로 이해된다. 선비와 수도자는 불의를 부끄러워하며 단호하게 거부하는 용기가 있고,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이요 수호자이고, 역사를 외면하는 은둔적 초월주의자나 내세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지도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인격이다. 수도자가 이 세상에서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그가 군림하고 가르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몸소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결코 전쟁터에서 맨 후방에 않아서 지휘하는 사령관이 아니라, 가장 전방의 적진을 먼저 뛰어드는 선구자이다. 수도자는 세상의 모든 향락을 외면하고서 고통스러운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앞장 서 걷는 인물이기에, 그는 아무 명령도 하지 않지만 인간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 인격이다. 수도자는 마치 선지가 한 나라의 원기(생명력)이듯이 교회의 심장으로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는 인격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선비들 또한 그들의 삶 안에서 그들이 나름대로 생각한 하나의 정신적 가치에 전념하고자 세상의 헛됨을 멀리하고자 했으며 이를 실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생을 영위한 사람들을 위하여 항상 자신을 뒤로 놓을 줄도 알았으며 악이 팽배하는 不義에 저항하고 善이 세상에 가려지지 않도록 義를 위하여 죽음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삶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면서 삶 자체를 사랑하며 사는 법을 알았다. 이러한 정신 안에서 수도자와 선비의적 삶의 일치점을 찾을 수 있겠다.

 

 

맺 는 말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수기치인의 삶을 살면서 이상사회인 대동사회를 꿈꾸던 이들이다. 시대가 언제나 선비들을 올바름의 길에 머물러 있도록 배려해 주지 않았지만 선비들은 그들의 삶을 집중시켜 주는 선비 정신에 충실하였고 선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참다운 선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당면하는 어려움들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면서 이들은 자신이 세운 뜻을 굳혀 나갔고 올바름의 길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지 않고자 더욱 노력하며 살았다.

 

   이처럼 선비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는 철저함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겠는데 만약 선비들이 추구하는 바가 仁이나 義理나 대동사회가 아니고 사랑과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 나라였다면 그들의 삶은 성인들과 수도자의 삶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가치관 혼란과 상실로 인하여 어디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적당한 묘안이 없어 아쉬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선비들의 정신과 삶은 많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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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금장태, 『유학사상의 이해』, 집문당, 1996.

. 이규태, 『선비의 의식구조』, 신원문화사, 1991.

. 함경옥,『선비문화』, 한줄기, 1997.

. 최정호, 『멋과 한국인의 삶』, 나남출판사, 1997.

. 이덕무,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솔출판사, 1996.

. 박선과, 「선비정신에 대한 복음 정신적 고찰」, 가톨릭대학교 석사논문, 1999.

. 박성진, 「선비정신과 현대사회」우리신학연구소,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