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삶의 갈릴래아 에서
주님 부활의 삶을 누리기 위해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사순시기이란?
1. 전례적 의미
- 교회에서 40일 동안 재를 지키는 규정으로 4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재를 지켜야 한다는 사상은 없었다. 원래 재를 지키는 의미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합당하게 맞기해서 오랜 관습으로 내려온 것으로 하루나 이틀을 지키는 것이 있었고 성주간만 지키는 것이 있었다.
4세기 말에는 3주간 동안 지키기도 했지만, 7세기에 와서 40일재를 지키는 사상이 강하게 등장하였다. 그래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여 재를 지키게 되었다.
- 여기서 사순시기의 ‘사순(40일)’이란 부활 축일 전의 6주간, 즉(4x 7)-6(주일)=36일과 여기에 4알 (재의 수요일까지 역산)을 더한 숫자이다.
- 성서에 나타난 40 혹은 4라는 수는 중대한 사건을 목전에 두고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한다. 또한 이 준비 여하에 따라서 이 사건이 인간들에게 흥망 성쇠를 가늠함을 뜻한다. 구약시대 ‘40주야’로 내린 홍수가 그랬고(창세7,8)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십계명판을 받기 정에 ‘40주야’ 엄재하였으며(신명 9,18) 예언자 엘리야가 호렙 산에 갈 때 천사가 준 음식을 먹고 ‘40주야’ 동안 걸어서 갔다.(열왕 19,7-8) 신약에도 예수님께서 ‘40주야’ 금식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40주간’ 자상에 머무셨다.
- 그러므로 ‘40 이라는 수’는 참회와 속죄로 우리 생활 전체의 혁신을 촉구하면서 신비롭고도 살아 계신 하느님과 만나기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하는 뜻이며, 중대한 사건을 앞에 두고 타당한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순”시기는 바로 참회와 속죄의 시기며 은총의 시기며 희망에 부풀어 영원한 삶의 보증인 예수 부활 대축일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시기다.
2. 영적인 의미
사순절의 영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분과의 우리들의 관계를 위하여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무엇보다 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이 사랑의 관계를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점이며 그분 계시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한다고 말 할 수겠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그동안의 그들 사이의 사랑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하고, 그들이 처음으로 서로의 가슴속에 불타올랐던 첫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며 서로를 위하여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까지도 함께 하기위한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사랑을 통한 그분의 사랑을 잘 알아듣기 위하여 사순시기에 교회가 특히 이 시기에 강조하고 있는 몇 가지의 성서적 말씀 안에서 사순시기의 의미를 알아들어 봅시다.
사순시기의 가장 큰 테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회개와 용서’이다.
- 삶 안에서 크게 회개한 경험이 있는가?
- 누군가를 용서한 경험이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I. 회개의 의미
성서적 의미의 회개로 구약적 의미는 히브리어 낱말 동사로 슈브(SUB)로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 “길을 돌리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종교적으로 이 낱말은 악을 피하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결곡 회개의 본질이다. 즉 생활을 바꾸어 생활 전체에 새로운 뱡향을 설정하는 하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참회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행위 사이에 좀더 뚜렷한 구분이 생긴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로 귀의하면서 실제로 생활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epistrephein과 내적 뱡향 전환을 나타내는 metanoia(후회, 참회)를 나란히 사용한다.
1) 은 열매 맺기 위한 회개( 루가 13, 1-9)
- 두 가지 재앙: 하나는 빌라도가 희생제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모두 다 죽어 버린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져 깔려 북은 열여덟 사람에 관한 일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드시면서 이 일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 회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지금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들의 모습도 그렇게 죽어간 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 없으니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만을 생각하며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끊임없이 베풀어 주셨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학살이나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의 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따라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죽어간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너희들’ 역시 조금이라도 빨리 회개하라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골자이다.
-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우리는 의혹을 가질 수 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자라나는 환경이 염연히 다른 나무인데 주인은 왜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고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잘라버리라고 할까에 대한 의문이다. 또한 삼년 동안 열매를 맺지도 않은 나무에게 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을 까이다. 여기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포도밭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복음에서 말하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삼 년 동안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주인의 무관심은 사실 끝없이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나무를 자르려는 주인은 심판이신 하느님,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하는 포도 지배인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까지 사랑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어떻게 보면 나무를 잘라 버리라는 주인의 말이 무섭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역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분이시라는 걸 의심해서는 안 된다.
무화과나무의 이 비유는 회개하고 빨리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의 정이 담긴 말씀이다. 그러므로 아직 회개하지 않고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빨리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사랑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 겠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는 하느님 사랑의 응답에 보답하기 위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우리들의 마음을 돌아보고 다지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맺는 이에게 더 좋은 축복과 은총을 주신다.
2) 자비로운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루가 15, 1-3, 11-32)
이 복음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사순시기에 꼭 듣게 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특별히 사순시기 우리의 자세가 하느님 앞에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복음이다. 아버지의 재산에서 자신의 몫을 받아 떠나서 방탕한 생활로 그 돈을 다 써 버린 뒤 온갖 고생하고서야 겨우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아들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회개하며 돌아오는 죄인들을 품에 안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타락한 생활에는 관심조차 없고, 물려줬던 재산을 어디에 탕진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일일이 캐묻거나, 꾸짖거나,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며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다는 기쁨을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그리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순 시기의 참된 회개의 의미는 타락한 아들이 돌아온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가눌 길 없어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시는 그분의 사랑, 이러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달는 시간들 이며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여 이웃에게 이 체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은총의 시간과 구원의 시간이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자신의 삶의 체험을 통한 경험들 안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살고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이시다.’라는 답을 얻는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보다 다른 친구들을 더 사랑하셔서 더 많은 재능과 더 좋은 것들을 그들에게만 주시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다. 마치 이 복음의 큰 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복음 속의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II. 용서의 의미
성서적 의미에서 죄인이란, 빚을 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하시어(Salah: 민수 14,19)빚을 면제한다고 되어 있다. 이 면제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어떤 것이든 더 이상 죄로 뵈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자기 뒤로 던져버리고(이사 38,17, 제거하고(히브 nasa) 보상하고, 사라지게(이사 6,7)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채무자가 지불 능력이 없어서 면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신다.(루가 7,42; 마태 18,25-27)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의 대상은 성령의 은사와 동시에 은사의 첫 결과인 아페시스(aphesis) 라고 하는 죄의 용서였다. 면제라는 말 이외에 깨끗이 하다. 씻다. 의롭게 하다라는 말들도 있다. 이것들은 사도들의 서간에 나타나는데, 용서한다는 말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으로 화해, 일치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1) 사랑하는 것인 용서 (요한 8, 1-11)
사순 시기 우리가 듣게 되는 또 다른 복음의 말씀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 하시는데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사랑한다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레위기 20장 10절을 들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의 처벌보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생각이 더 켰다. 예수께서 율법에 따라 연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면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온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고, 만일 여인을 놓아주라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을 정통으로 거부하는 입장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은 ‘죄 없는 이는 돌을 던지고, 죄 있는 자는 여인을 용서하라’는 것으로 문제의 초점을 옮기게 된다. 사실 간음이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죄를 짓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살아간다.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어떻게 남을 처벌할 수 있겠는가? 용서를 청하는 사람에게 용서 말고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속의 여인만을 사랑하셔서 용서 받을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돌을 들고 모여 들었던 그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의 죄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죄만을 생각했던 모진 마음을 깨닫게 하셨고, 남을 처단하려는 잔인한 마음을 내려놓게 하셨으며, 율법의 완성은 법의 집행이 아닌 사랑의 실천, 곧 용서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 마음에서 비롯된 무서운 증오의 돌을 내려놓게 만드셨다. 즉 그들이 죄를 지을 기회를 내려놓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인에게도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르심으로써 무섭고 잔인했던 이 사건을 해결하셨다.
우리는 과연 살아가면서 가끔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맘에 들지 않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의 돌로 내려친 적은 없나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나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세상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또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그런데 한낱 인간인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말이 될까?
결론으로
사순 시기는 자신이 가던 길에서 완전히 뱡향을 돌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기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와 아무 상관없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편하다고 여기고 있는가? 만약에 하느님을 아빠 엄마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다시 돌아오는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는 그분께로 쉽게 돌아 설 수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를 보면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손이 한쪽은 남자, 다른 쪽은 여자의 손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엄하면서도 사랑을 가득 담은 인자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어떠한 조건도 내세우지 않으시는 자비와 사랑 그리고 용서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품으로 우리 모두 달려가 안기는 때가 바로 사순시기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에 동참하며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만남은 나 자신을 알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살았던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 힘들고 괴로워도 더 나아진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질서 지어 주시는 분이시니 그분께서 우리를 질서 지어 주실 것을 믿으며, 또 우리가 변화 될 것을 믿으며 남은 사순시기도 열심히 지내 주님과의 추억과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삶의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내가 새 일을 시작하려 한다.” 이사43, 18-19
예수님의 부활은 이 말씀처럼 바로 새로운 일을 하시는 것이다. 잘못한 사람을 벌하는 것이 정의라고 우리가 배웠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살아왔던 그 정의를 사랑과 용서라는 이름으로 뒤집는 것이다. 그 새로운 일을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새로워질 것이다. 새로 태어날 것이다. 우리 모두의 손에서 누군가를 향해 들었던 돌을 내려 놓읍시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갈릴래아에서 주님 부활의 삶을 누리기 위해 하느님께로 돌아갑시다.
이제 사순시기의 절정인 성주간이 시작된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께서 수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뚜벅뚜벅 예루살렘 성읍으로 입성하는 모습을 오늘 지켜보았다. 그 모습은 30대 초반의 초라한 나그네가 급조한 당나귀 위에 앉아 타박타박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다. 그곳에 실제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며 그에 실망하여 야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기쁨과 승리의 미소를 짓는 수많은 반대의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가슴속에 차오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죄에 시달리고 힘들어 하는 우리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예루살렘에 죽으러 예루살렘을 입성하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바로 우리가 사순시기 동안 내내 들었던 하느님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모습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그들에게 조차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셨을 때와 똑 같이 그들에게 온화한 미소만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이때 마음이 괴롭고 복잡하셨겠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사랑으로 가득 차올라 점점 더 굳은 의지로 변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진심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던 소외 받고 가난한 이웃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새겨보시며 예수님의 마음은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겠다는 각오로 변화셨고 그 각오의 힘으로 힘을 내어 한 걸음 한 걸음 나귀 위에 죽음을 향하여 앞으로 걸어 나가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나뭇가지를 흔들며 진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며 그분의 부활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기쁨의 환호를 인사하며 만납시다.
- 마리아 아나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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