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입문
I. 욥기 입문
1. 책의 이름
욥기는 히브리 성경의 정경 목록의 성문서에 속한 것으로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중심 인물인 욥의 이름을 따서 책의 이름을 지었다. 욥은 저자가 독창적으로 만든 이름이 아니라, 기원 전 2천 년대 서부 셈족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다. 지혜문학 가운데 제일 앞자리에 놓여있는 이유는 다른 작품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이 신학적 관점이나 교훈적 성격에서 다른 지혜 전승 작품들과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욥기는 지금까지 지혜 전승들이 주장해 온 전통적 가르침, 특히 현세적 상선벌악에 대해 신앙과 삶의 실천면에서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리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의인의 고통 문제(이사야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욥/ 메시아:예수 그리스도) 다룬다.
욥 이름의 뜻에 대한 풀이는 여럿인데, 가령 ‘아바(회개하는 자)’, 돌아오다 또는 ‘아야브(미움받는 자)’로 풀이하기도 한다. 즉 ‘원수가 되다’, ‘적대시하다’로 마치 하느님의 원수가 받아야 할 고통을 겪는 그의 처지를 반영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욥이라는 이름은 이루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 중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 이해할 수 없는 참변 중에 묵묵히 인내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2. 저자 및 저술 연대
저자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보기 드문 천재 시인이 이 뛰어난 작품을 썼으리라고 보며, 특별히 무죄한 이들이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종교적 영혼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욥기는 기원전 5-3세기경에 최종적으로 엮였다고 본다.
3. 저술 배경과 목적
(유배에서 희망을 안고 돌아왔지만, 현실 앞에 놓여진
고통과 어려움으로 가득한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의 통치 강조)
사회 정치적 관점에서든 신학적 관점에서든, 비발론 유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상 때부터 이어져 오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였다. 희망했던 대로 이스라엘은 유배에서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토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과 삶을 다짐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예속된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느헤 9,36). 이런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토라를 토대로 한 폐쇠적인 민족주의가 가속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재건되었음에도 자주적 주권을 가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긴장감이 발생하였다. 또한 이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 제기와 논쟁을 통하여 세계사적 관점에서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욥기는 이러한 역사적 신학적 배경 안에서 형성된 작품이다.
욥기는 의롭게 살면 복을 받고 악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가르침대로 삶이 펼쳐지지 않은 것을 체험하며, 무죄한 이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고통이 인간 실존의 문제임을 일깨우고, 이유가 있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시기에 경외하여야 하며, 그분만이 올바르시기에 그분을 좇아 올바르게 살아야 함을 일깨워준다.(고통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여정이다)
욥기에서 자주 제기되는 문제는 “하느님의 정의에 입각하여 악에 대한 문제와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해결하고 정리할 수 있느냐?”(변신론적 문제)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창조 세계의 조직과 의미가 인간의 지혜로 파악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욥기가 제기하는 문제는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신학적 차원의 것이다.
실상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단편적이고 편협하다. 욥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되는 시련과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서 여러 예리한 질문을 한다. 반면 그의 세 친구는 한 목소리로 “하느님의 보상은 의인에게 축복으로, 악인에게는 징벌로 주어진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이는 ‘하느님에 의한 상선벌악’이라는 명제를 하나의 보장된 논리처럼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속적인 고통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욥의 불행도 하느님의 징벌이 아니라 그분께서 허락하신 시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고통과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욥이 하느님을 향한 충실함을 내적으로 되묻고 재확립하는 과정에서, 우주의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에 대한 깊고 참된 삶을 깨치는 ‘신앙적 발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앎 자체가 바로 역동적 사건임을 말해준다. 욥기는 유배이후 시대에도 지혜문학적 저술들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계속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욥기는 성경의 지혜문학 작품들을 단순히 교훈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활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지혜는 교육을 통해 전해지고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계시의 선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욥기는 인간에 대한 앎이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람이든, 모든 지혜는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며 이를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욥기는 토라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지혜인지 가르쳐주는 책이다. 지혜는 결코 하느님을 상선벌악의 보증처럼 한계 짓기 위한 ‘이론적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된 사랑으로 두려워하게 하고, 견고한 신앙과 충실함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는 ‘선물’이다.
4. 편집과정
(지혜문학 가운데 유일하게 짜임새 있게 전개된 책)
학자들은 대부분 욥기가 고통을 겪는 한 의인에 대한 고대 민중설화를 토대로 엮어졌다고 본다. 또 전체 내용과 흐름 안에서 문장 유형이 상이하고 단절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여러 단계에 걸쳐 재편집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의 토대가 되는 고대 민중 설화부분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던 욥이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첫째부분(1,1-2,10)과 마지막 부분(42, 11-17)이다. 이 두부분이 유배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단일설화였다는 근거는 양쪽 모두 산문체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단절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유배 이후에 본래의 이야기를 서문과 결론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독백과 대화체로 이루어진, 욥기 세 친구(2,11-31,40)와 벌이는 논쟁과 하느님의 현현으로 결말을 맺는 하느님께 대한 욥의 도전(38,2-42,6)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시적 문체로 구성된 지혜찬가(28장)도 포함되어 있다. 엘리후의 연설(32, 1-37,24)도 독립된 전승으로서 후대에 추가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구성된 본문을 문장 형태로 구분하면, 산문체 설화부분(1,1-2,13; 42,7-17)과 시문학 형태의 논쟁 부분(3,1-42,6)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부분은 문장형태뿐 아니라 욥에 대한 묘사나 하느님에 대한 호칭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전반부에서 욥은 완전무결하고 성실하며 인내심이 강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후반부에셔는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반박하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방어하고 하느님의 행위를 비판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산문체 설화로된 부분에서는 하느님을 ‘야훼’로 , 시문학 형태로 된 부분에서는 ‘엘’, ‘엘로하’ 또는 ‘샷다이’라고 부른다. 이는 편집자가 새로운 단락 또는 상호관계된 논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종합적으로 이 책은 최종 편집까지 최소한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첫째는 욥의 이야기가 구두로 전해지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욥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과 합쳐지는 중간 편집 단계이다. 편집자는 먼저 창세기 22, 1-19에서 아브라함이 겪였던 시련을 본보기로 하여 욥의 시련이야기에 다른 새로운 요소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욥의 설화를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욥과 세 친구의 논쟁, 하느님께 대한 욥의 도전과 신의 현현 전승을 추가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세 친구가 등장하는 도입부(2,11-13)와 그들을 위한 욥의 속죄 제사 이야기를 담은 결론부(42, 7-10)를 덧붙였을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논쟁과 하느님의 현현 이야기는 의인의 고통에 하느님은 왜 침묵하시는지, 의인의 고통은 정당한 것인지,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의로울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를 더욱 푹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지혜찬가도 중간 편집 단계에서 추가되었을 것이다. 편집자는 이 찬가를 통하여 인간 존재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해 욥이 친구들과 하느님을 향해 반복적으로 제기했던 문제들을 강조한다. 또한 이 찬가는 이스라엘 안에서 지혜가 의인화되고 하느님께서 주신 토라와 동일시되는 신학적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참조: 잠언 1-9; 집회 24; 지혜 9;바룩 3,9-4,4).
세 번째 단계에서 최종 편집자는 욥에게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태도를 바꾸라고 종용하기 위해 세 친구들이 제기했던 문제들을 보완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주장하던 가치관들을 완화하기 위해 엘리후의 연설(32,1-37,24)을 추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세 단계가 형성되는 과정은 기원전 5-3세기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5. 구분
욥기는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내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은 욥이 마침내 복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욥기는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서문(1-2장): 산문으로 된 머리말
본문/ 운문으로 된 대화(3-31장): 욥과 세 친구의 대화
32-37장: 엘리후의 충고
38,1-42, 6: 주님과 욥의 대화
결문(42,7-17): 산문으로 된 맺음말(모든 것을 회복하는 욥)
II. 내용
1. 서문: 신앙의 어둔 밤(1-2장)
천상 회의에서 사탄은 우츠 사람 욥이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셔서 소유가 늘어났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라고 그를 헐뜯는다. 그리하여 욥을 시험해 보라는 하느님의 허락이 내리자, 사탄은 먼저 욥의 열 자녀와 재산을 모두 앗아간다. 그래도 욥이 하느님을 비난하지 않자, 사탄은 욥의 온몸에 심한 부스럼이 나게 한다. 잇달아 재난이 일어나자,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내뱉지만, 욥은 아내를 타이르며 현실을 수용한다. 한편 욥의 재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세 친구는 욥을 보고 이레 동안 통곡하며 슬퍼한다.
2. 본문: 운문으로 된 대화(3,1-42,6)
1) 욥과 세 친구의 세 차례 대화(3-31장)
참담함을 호소하는 욥의 부르짖음을 시작으로 세 친구가 각기 세 번에 걸쳐 담론을 펼친다. 이는 철저하게 인과응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 번째 대화: 욥과 세 친구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친구들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강조하지만, 욥은 자신이 현재 겪는 고난으로 볼 때 그렇지만은 않다고 향변한다.
욥기(3장): 무죄한 자신이 겪는 재난에 대해서 탄식 자신이 동정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 친구의 충고는 위로가 되지 못하고 또 다른 재난이 됨. 하느님께 호소
엘리파즈(4-5장): 전통적인 인과응보(개인보상 교리)주장. 악한 자를 멸하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심/ 의인-부와 건강, 악인- 가난과 질병/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회복가능
(욥(6-7장): 욥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에 대해 말함/ 자신의 처지 호소/ 하느님을 고엘(구원자)로 중재 요청
발닷(8장): 욥을 질책하고 냉소적으로 대함/ 인과응보(선조들의 지혜 전통)주장- 경험과 역사 교훈에 근거/ 욥이 불행한 원인 -자녀들의 죄 때문
욥기(9-10장): 인과응보 거부/ 전통 사상 거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기를 요청/ 욥의 탄식
초바르(11장): 인과 응보(불쾌감 표시) 주장/ 전통사상, 교리 지식에 근거 하느님께서는 죄를 있는 자만 단죄하심 욥의 유죄
두 번째 대화(12-20장): 앞과 같은 순서로 악인의 전형적인 운명에 관해 이야기 한다. 친구들은 욥이 잘못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벌을 받는 것이라고 계속 몰아세운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선다.
세 번 째 대화(21-27장): 욥은 두 친구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무고를 선언한다.
욥의 독백: 욥은 지혜를 찬미하며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라고 고백한다. 이어 예전에 누리던 행복과 현재 겪는 불행을 토로하며, 다시금 하느님께 눈을 돌려 진실을 밝혀 달라고 강하게 호소한다.
2) 엘리후의 충고(32-37장)
세 친구의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엘리후가 나서서 욥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하느님께서 부당한 고통을 내리고 침묵만 지키신다는 욥의 주장에 엘리후는, 하느님께서 꿈과 계시 등 여러 방법으로 인간에게 이야기하시지만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라고 답변한다. 또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통해 인간을 교육시키시는 분임을 알고 그 고통을 달게 받으라고 권유한다. 아울러 하느님께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강요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3) 주님과 욥의 대화(38-42,6)
이어 욥은 푹풍 속에 나타나셔서 창조 세계의 주재자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자기의 생각과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고백하며 뉘우친다.
욥의 3단계 답변
1.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이루신다(하느님의 자유와 권능)
2. 이전에 몰랐던 하느님의 신비와 사람의 한계를 깨닫는다.
3. 주님과 새롭게 만난다.
신앙이 성숙되어가는 욥
욥은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받는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끝까지 의지하였다. 사탄이 자신있게 말한 바와 정반대로 욥의 신앙은 참으로 사심 없는 신앙이 었다. 이같은 조건 없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중요한 특징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일러준다.
하느님을 찾음
1. 욥과 친구들 위에 손을 얹을 심판자로(9,33)
2. 욥의 무고에 대한 증인으로(16,18.21)
3. 살아 계신 구원자에 대한 희망으로(19,25.27)
3) 결문: 새로 얻은 삶(42, 7-17)
주 하느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가 당신에 대한 욥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꾸짖는다. 그분은 사실상 욥의 주장을 긍정한다. 그리하여 욥을 통해 번제를 드리고 욥에게 중재기도를 청하라고 지시한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자, 주 하느님께서는 욥의 소유를 전보다 배로 불려서 돌려준다. 욥의 형제들과 친지들도 찾아와 욥을 위로한다.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얻게 된 욥은 4대 손을 보면서 수를 누린다.
III. 욥기의 신학사상
1. 하느님의 권능과 정의(의인의 고통과 하느님)
욥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분명하다. 사탄의 의도로 시작된 고통이고 하느님은 허락만 하셨다. 따라서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느님은 고통에 대해서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 항변하는 욥은 그의 고통의 자리는 하느님을 만나고픈 열망의 자리로 바꾼다.
욥기는 하느님을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님으로 고백한다. 모든 등장인물이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며(26, 5-14; 36,22-37,22)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느님께서는 ‘주시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하는 분’이며(1, 21), 비천한 이를 일으키시고 교만한 이를 낮추시는 분이다(5,11-12). 또한 몇몇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으시며,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공의로운 분이다(34, 18-8).
그런데 욥은 여러 가지 현실적 경우를 들어 하느님의 권능이 무분별하게 펼쳐진다고 주장하며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세상을 창조하고 섭리하는 당신의 권능은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심오한 계획아래 실현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38,2 ; 이사 46,10; 잠언 19,21). 또 당신의 권능이 모든 피조물을 향한 각별한 배려와 사랑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축복과 피조물들을 향한 선의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가운데 하나인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교만하고 악한 이들을 벌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의인들을 구원하는 분이며, 이러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자연현상을 이용한다고 하신다(38, 2-40; 40,6-41, 26).
이처럼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의 권능과 정의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배려와 섭리를 통해 존속할 수 있으며(10,8-12), 하느님께서는 피조물 하나하나를 각별한 사랑으로 보살핀다. 따라서 하느님의 정의(자비의 또 다른 면)는 당신이 처음 계획하신 것을 변함없이 실현하시는 그분의 항구함 안에서 드러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그러한 권능과 정의 아래 놓여있다.
결론적으로 욥이 겪은 시련은 하느님께서 고통을 겪는 인간을 눈여겨보며 함께하시는 분임을 재확인한다. 하느님께서는 삶의 좌절시키려는 세력들과 대치해 있는 인간을 위해 싸우시는 분이다(탈출 14,13-14; 신명 7,17-19; 20,1-4). 그러므로 욥의 일화는 최종적으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매달리는 사람은 생명과 구원을 하시는 하느님이 보호하고 배려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2. 인간의 지혜(전통적 신앙만이 올바른가?)
고통을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일컬었던 이들, 곧 욥의 세 친구로 대표되는 ‘상선벌악’이라는 틀에 박힌 사고를 가졌던 세 친구의 사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들로 늘 변화하고 움직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는 무모함이 욥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고통대 축복, 행복과 불행, 건강과 질병의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다. 고통을 불러오고자 했던 사탄조차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은 누군가에게 정해지고 고정된 개념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내가 오로지 ‘모릅니다’로 고백하는 내 삶의 자리에서 이해되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능력 넘어서 계시는 알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의 지혜’에 대한 물음은 욥기에서 제기되는 주요 문제 중 하나이며, 특히 욥과 세 친구의 논쟁에서 두드러진다. 세 친구는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직선적이고 편협한 지식을 고수하기 위해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 과거 세대들이 전해준 교훈 등을 끌어들인다. 이들은 욥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욥에게 닥친 불행은 그가 지은 죄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꿰뚫고 있는 듯 처신하며, 사람이 어떻게 응답하고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욥은 세 친구의 지혜와 판단을 거부한다. 욥은 세 친구의 지혜가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 것이며 편협한 것이라고 지적한다(12,2참조).
욥은 자신이 하느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신하지만 하느님께서 침묵사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욥이 하느님께 항변하게 된 원인이다(13,24; 시편 44,25)) 욥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송에 하느님을 부른다. 곧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깨달은 하느님에 대한 사람이, 그를 하느님과의 일치를 회복하기위한 싸움에 나서게 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욥은 세 친구의 확신을 부정하면서, 보이는 것만으로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파악할 수 없으며, 행여 그것을 깨닫 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극히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욥기는 하느님에 대한 참된 앎과 관련하여, 먼저 인간의 지식이 제한적이고 단편적이며 항구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촉구한다(21,7.30;24, 1.24;26,14). 이와 더불어 지혜는 오직 하느님께 속해 있고 인간의 지식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28,1-28). 곧 인간은 하느님과 내적 일치를 통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 사이에, 그리고 지혜로운 삶과 토라를 실천하는 삶 사이에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가르쳐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하여 세상을 알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욥기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지혜 사상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곧 ‘지혜는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있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전하는 욥의 인생 여정은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 하느님 안에 깊숙이 잠겨가는 과정이다.
3. 하느님의 신뢰와 욥의 충실함
욥기는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예전에 쌓아두었던 하느님에 대한 판단과 생각들을 불행과 고통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다시 한번 재정립해 보려는 것이 욥기의 의도이다.
솔직한 신앙과 자유로운 신앙이 필요하다. 부유함과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의 주인은 하느님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부유함과 행복이 사라졌어도 하느님과의 관계 만큼은 절대로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욥의 고통은 부유하과 행복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 나선 여정이었다. 좋은 것만 주시는 분에게 비난의 말을 던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부유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욥에게 하느님은 한결같은 존재이신 분이다. 신앙적 습성이 ‘익숙하고 좋은 것’에 고착되어 있다면, 욥은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의 신앙적 전이를 소개한다.
라삐들의 문헌에서 욥은 자주 아브라함에게 견주어 소개된다. 두 인물 모두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환대의 마음을 지녔다는 것이다. 욥은 나그네들이 음식을 먹고 쉬어갈 수 있도록 언제나 집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으며,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병자들을 돌보며,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욥이 아브라함에 견주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두 인물 모두 하느님께 주시는 시련을 겪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과 아브라함이 차이를 보이는 점들이 있다. 욥과 달리, 아브라함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 매달렸다(창세 18,16-33).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 앞에서 아브라함이 침묵으로 그 일을 받아들인 반면(창세 22,1-19), 욥은 시련을 거두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하느님께 항변하였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그다지 모범적이라 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곧 하느님에 대한 왜곡된 앎과 신앙을 거슬러,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세 친구와 논쟁을 벌이고, 하느님을 자신과의 논쟁에 초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욥과 세 친구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신뢰하는 의인에게만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친구는 욥을 설득하려했고, 욥은 자신이 하느님께 시련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실제로 욥은 고통을 겪을 만한 죄를 범한 적이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당신과 내기를 해보자는 사탄의 주장을 받아들이시고, 그의 생각과 판단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당신을 찬미하는 욥에게 시련을 허락하신 것이다. 비록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조건 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는 인간을 신뢰하신 것이다.
마침내 욥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솔직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드러내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신뢰는 인간을 더욱 굳건하게 확실한 믿음으로 이끌었으며,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변함없는 신앙은 세상과 역사의 현장에서 인간을 하느님의 동반자가 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참고문헌: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딸, 2007, pp.35-46.
성경 읽기 안내 구약 2, 성서와 함께, 2007, pp.17-2
시서와 지혜서, 박병규, 바오로 딸, 2014. p.7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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