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 1. - 2,10: 머리말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1. 여는 글
욥기 중심부에서 전개될 여러 가지 논쟁과 반론의 원인과 무대를 제공하는 본문은 전반부(1,6-22)와 후반부(2,1-10)로 나뉘며, 두 부분의 구조는 동일하다. 곧 사탄의 간계와 그에 대한 하느님의 동의가 이야기의 발단이며(1,6-12; 2,1-7),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사탄이 욥에게 시련을 가하는 이야기(1,13-19; 2,7)와 그에 대한 욥의 반응(1,20-22; 2,8-10)이 이어진다.
도덕적이든 신앙적이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욥(1,1-5,8;2,3)이 사탄의 계략에 의해 시련을 겪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하느님께서 충실한 의인 욥을 모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에 동의하신 것이다(1,9-12; 2,4-6참조). 이런 이유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의인의 고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말 욥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신앙 실천이 가능한지’, ‘하느님의 정의와 어긋나는 듯한 현실적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을 품게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3,1이하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비록 욥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지만 저자는 그를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의인의 본보기로 제시한다(1,8; 2,3).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보여주는 의로움과 신앙을 깊이 묵상하고 본받아야 한다.
Text 안에서
천상 어전에서(1,6-12)
이 부분은 천상 어전에서 하느님과 사탄이 욥의 충실함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며 2,1-7에 상응한다. 이야기는 “하루”(1,6)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도 같은 표현으로 시작된다(2,1). 욥기 타르굼(아람어 번역본)은 천상 어전 회의를 ‘천상 재판’으로 이해하며, 1,6과 2,1의 “하루는”이라는 표현을 각각 정월 초하루와 속죄의 날을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유대인들은 정월 초하루를 예비 심판의 날이라고 생각했고, 이 때 천상 재판에서 의인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고 악인의 이름은 지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판정이 보류된 이들에게는 속죄일(최종심판)까지 은혜의 기간이 주어진다고 여겼다. 따라서 “하루는”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시간적 배경과 천상 어전 회의가 암시하는 장소적 배경은 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의 갈림길에선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1,6)라는 표현은 하느님을 천상 임금으로 이해하던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1열왕 22,19-23 참조). 고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천상 신하들을 거느리고 천상 어전 회의를 주관하신다. 그런데 이 자리에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등장한다. 칠십인역은 “하느님의 아들들”을 “하느님의 천사들”이라고 옮겼다. 고대 근동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신전에 등록된 평신도들을 일컫는 표현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을 시중드는 천상 신하들 또는 칠십인역이 이해한 것처럼 천사들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함께 사탄이 천상 어전 회의에 참석한다. 히브리어 ‘사탄’은 ‘고발자’ 또는 ‘적대자’라는 뜻이다. 1-2장에서 이 용어가 11회 나오는데 모두 정관사와 함께 쓰였다. 이는 ‘사탄’이 현대적 의미에서처럼 하나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직무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그의 역할은 본문의 증언대로 사람들의 삶을 하느님께 보고하고 어떤 정책을 제안하거나 그분의 계획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을 지상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 욥을 모함하고 하느님과 욥의 관계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모습 때문에 후대에 가서 사탄의 의미가 하느님과 대적하여 악을 행하는 존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1,8)라는 물으신다. 하느님께서 ‘나의 종’이라고 부른 인물은 욥 외에도 아브라함(창세 26,24), 모세(민수 12,7), 다윗(2사무 3,18; 7,5.8),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주님의 종(이사 42,1-4;49,1-6; 50, 4-9; 52, 13-53,12) 등이 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 역사 안에서 특별한 봉사나 섬김의 직무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 욥을 그렇게 부르셨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역사 개입과 관련하여 욥이 어떤 소명을 받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욥을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앎을 세상에 밝혀주는 하느님의 도구, 곧 그분의 종으로 세워 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눈여겨보았느냐?”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네 마음에 두었느냐?“이다. 이 물음에는 욥에 대한 사탄의 생각을 묻는 의도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시고, 그를 당신 마음에 두셨다는 뜻도 담겨 있다. 또한 사탄이 욥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 이미 알고 계신 상태에서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암시하는 듯하다.
하느님께서는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없다.(1,8)라는 말씀으로 욥을 극찬하신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그와 같이 완전하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외면하는 사람은 땅위에 아무도 없다.”이다. “완전하고”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형용사 탐은 ‘무죄한’ 또는 ‘완전무결한’이라는 뜻이다. 욥이 하느님께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이유는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느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나선다. 욥이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이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욥과 그의 집과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주시고,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위에 넘쳐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10). 사탄의 말대로라면 욥은 사심 없이 하느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현세적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분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재앙이라도 닥치면 당장에 하느님을 저주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만일 욥이 그런 신앙으로 하느님을 경외했다면,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욥의 계획에 속아 그를 의인으로 인정하고 복을 주신 것이다. 사탄은 욥이 정말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보자고 하느님께 제안한다.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1,11).
하느님께서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여 욥을 제외한 그의 모든 소유를 사탄의 손에 맡기신다(1,12). 하느님께서 욥을 두고 사탄과 내기를 하신 이유는 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의 완전무결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 욥에게 두셨던 신뢰를 조금도 거두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첫째 시련(1,13-19)
이야기의 배경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바뀐다. 사탄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욥의 모든 소유를 차례차례 재빨리 파괴해 버린다.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1,16.17.18). 사탄은 누군가 개입할 틈도 주지 않고 욥의 모든 것을 뿌리째 파괴한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불행은 반복적인 표현을 통해 네 차례 묘사되었는데 점진적으로 큰 재앙으로 확대되어 가는 형태로 진행된다(가축, 머슴, 자녀들). 약탈자들과 자연의 힘 앞에서 욥은 고가(재산)와 함께 미래(자녀들)까지 모든 것을 잃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욥에게 주신 모든 복과 희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재앙의 도구로 소개된 “하느님의 불”(1,16)은 번개를 지칭하기 위해 고대 유대인들이 사용한 표현이다(민수 11,1-3;16,35; 1열왕 18, 38; 2열왕 1,10.12). 따라서 하느님께서 직접 재앙의 불을 내리셨다거나 그 불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다만 사탄이 계획한 욥의 시련이 하느님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주는 표현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하느님의”라는 표현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한’이라는 뜻을 지닌 단순한 수식어일 뿐이다. “아주 큰 성읍”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하느님에게도 거대한 성읍”이다. 여기서 ‘하느님에게도’ 는 말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수식어이다.
욥에게 닥친 모든 재앙은 평소 그의 행동이나 항구한 신앙과는 상반된 결과이며, 그 만큼 욥이 느낀 충격도 엄청났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욥의 반응(1,20-22)
연달아 전해지는 비보 때문에 어떤 반응을 보일 틈도 없었던 욥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고 땅에 엎드린다. 욥의 행동과 말(1,20-21)은 그가 당한 재난과 상응하는 성격을 지닌다. 옷을 찢는 행위는 인간이 본래 알몸으로 왔다는 것을 표현하며, 땅에 엎드리는 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물론 재난을 당한 비통한 마음과 머슴들과 자녀들의 죽음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며,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욥은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임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1,21ㄴ ㄷ)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리 돌아가리라.”는 표현은 단순히 ‘죽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빈손으로 죽는다. 욥은 누구나 반드시 겪는 태어남과 죽음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이기도 하다. 비록 모든 복을 앗아가는 재앙일지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므로 욥은 사탄의 계락에 말려들지 않고, 불행마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찬미를 돌리는 계기로 삼는다.
사탄의 생각과 달리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대로 욥은 아무런 사심도 이유도 없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는 ‘완전무결한 사람’임이 드러났다(1,22). 물론 하느님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처음부터 예측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욥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는 앞으로 전개될 논쟁들의 결과를 미리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천상 어전에서(2,1-7ㄱ)
하느님께서는 천상 어전 회의에 참석한 사탄에게 욥이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굳게 지키고 있다고 말씀하신다(2,3F). 그리고 욥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인데 사탄은 “까닭 없이”(2,3A) 욥을 파멸시키도록 당신을 부추겼다고 책망하신다.
사탄은 지난 결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새로운 계책을 내놓는다. 욥에 대한 하느님의 판단이 옳다는 것과 욥이 승리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탄은 오히려 “가죽은 가죽으로! 사람이란 제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놓기 마련입니다.”(2,4 ㄴ ㄷ)라고 하면서 아직 욥의 신앙이 기복적임을 주장한다. “가죽은 가죽으로!” (2,4ㄴ)라는 표현은 ‘법적인 교환 개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곧 “사람이란 제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놓기 마련입니다.”(2,4 ㄷ)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탄은 욥이 자기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가축, 머슴, 자녀들)을 내놓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욥이 하느님을 욕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무결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하느님께서 욥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시면,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욥이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본심을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탄의 새로운 계획을 받아들이신다(2,6). 그러나 첫 번째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사탄의 힘에 한계를 정하신다. “좋다. 그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의 목숨만은 남겨두어라.”(2,6ㄴ). 여기에는 하느님을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분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담겨있다(시편 25,20; 86, 2;97,10; 10;121,7).
둘째 재앙(2,7 S)
사탄은 하느님께서 주신 한계 안에서 “욥을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고약한 부스럼으로 쳤다.”(2,7). "부스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쉐힌‘은 ’나병‘이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각종 피부병을 통칭하는 말이다(탈출 9,9-10; 신명 28,27; 레위 13,2;2, 열왕 20,7). 고대 유대인들은 이러한 질병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계약에 불충실한 결과이므로(신명 28,35) 인간의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여겼다.
욥의 반응(2, 8-10)
이번에도 욥의 반응은 행위와 말로 이루어진다. 욥은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았다(2,8).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는 행위는 가려움을 덜기 위한 것일 수 도 있고 슬픔과 괴로움의 표시일 수도 있다. 욥의 경우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한 몸짓일 가능성이 크다. ‘젯더미 속에 앉는’ 행위가 자학 또는 자책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잿더미 안에”라는 표현을 “도시 밖 오물(똥)더미 위에”라고 번역한다. 마을이나 도시 안에는 오물을 모아두는 장소나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시 밖 일정한 장소에 그것들을 모아 태웠다. 이곳은 조문객들이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학대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칠십인역의 해석에 따르면 욥은 오물더미에 앉아서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욥의 아내가 등장한다(2,9). 그녀는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신 완전무결한 욥과 대조적으로 시련에 굴복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옆에 있던 아내의 반응은 욥이 얼마나 큰 고통 중에 있는지 잘 대변해 준다. 또 한편 아내의 충고는 기복적인 신앙을 옹호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남편이 당하는 불의한 고통을 대변하여 하느님의 정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욥은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는 편이 낫다고 부추기는 아내에게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 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 ㄴ) 라고 반문한다. 복이든 재앙이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실현되며 인간은 그분의 섭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받다’라는 동사가 1인칭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뼈들은 두 번째 시련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욥의 아내도 완전무결했다고 생각한다.”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2,10)라는 표현은 욥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일 수도 있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욥이 하느님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며 입으로 항변하는 논쟁 부분)를 미리 암시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욥기에 대한 묵상
1) 올바른 믿음과 흠 없는 삶
저자 욥을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1,3)이며, 자녀들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1,4-5)이라고 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욥을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그러나 사탄은 욥의 신앙을 기복적이라고 평가한다. 욥에 대한 하느님과 사탄의 상반된 평가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신앙이란 아무런 조건이나 바람없이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 앞에서 흠 없음을 지켜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복과 보호의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아무 조건없는 신앙 또는 응답을 바라지 않는 신앙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창조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님이고 구원의 원천이시기에 그분께서 바라시는 삶을 실천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조건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욥도 하느님께서 생명과 은총의 샘이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흠 없는 삶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사탄이 말하는 기복 신앙과 거리가 멀다. 기복신앙은 하느님께 잘 보여 더 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려는 이기적인 신앙이다. 그러나 욥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느님을 섬긴 것이 아니다. 이는 욥이 시련을 겪은 후에도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완전무결함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1,21-22;2,10).
욥이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된 이유는 그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올바로 깨닫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그분 보시기에 좋은 삶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주셨기 때문에 또는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해 그분 앞에서 흠 없는 삶을 산것이 아니다. 하느님만이 생명과 구원의 원천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분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 곧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욥의 신앙은 우리에게 ‘믿음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깨닫게 한다. 믿음의 출발점은 바로 세상과 인류를 만들고 섭리하시는 생명과 구원의 주님, 곧 하느님 안에 있다. 욥처럼 하느님 앞에서 출발한 믿음만이 세상 풍파의 역경을 이겨내고 하느님 안에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다.
2) 시련에 대처하는 신앙인의 자세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1,21)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하느님 앞에서 흠 없는 삶을 살았던 욥이 사탄의 간계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그렇게 시작된 욥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하느님과 사탄의 대결은 두 번 다 하느님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욥의 시련은 현세적 상선벌악의 원칙을 고집했던 고대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흔들어 놓았으며, 시련(재앙이나 불행)개념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시련은 하느님의 길을 벗어난 삶의 대가로 주어지는 징벌이었다(4,7-8; 8,3-7; 11,2). 그런데 욥은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모든 것을 빼앗기는 재앙을 당했으며 저주받은 자의 상징인 악성 피부병까지 걸렸다. 이 모든 불행은 까닭 없이 욥을 파멸시키도록 하느님을 부추긴 사탄의 계(2,3)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욥에게 재앙이 실현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일시적으로나마 사탄에게 욥의 운명을 맡기신 하느님의 결정이었다(1,12; 2,6).
하느님께서 사탄의 요구대로 욥에게 시련을 허락하신 이유는 사탄의 말처럼 욥이 정말 기복 신앙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으며, 당신 스스로 사탄에게 그것을 증언하셨다. 사탄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시고, 욥에 대한 당신의 판단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욥에게 시련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욥의 신뢰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사탄의 대결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욥은 자신에게 닥칠 시련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하느님께서 자신을 깊이 신뢰하신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욥은 사탄이 계획한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을 잃지 않았다(1,21-22; 2,10).
욥은 첫 번째 시련을 겪은 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1,21)라고 반응하였다. 두 번째 시련을 겪은 후에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라고 반응하였다. 욥에게 시련은 인간의 본성이 ‘알몸’임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알몸인 인간이 나고 자라고 죽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욥은 시련 안에서 생명을 주고 거두시는 분, 알몸인 인간을 풍요롭게 했다가도 빈털터리로 만드실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도 하느님의 권능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며, 그분의 섭리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련은 욥에게 인간의 본질과 하느님의 본성을 깨달게 하는 체험의 장이었으며,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다. 물론 3장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하느님께 항변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이 1-2장에서 소개된 욥의 모습을 거짓 또는 가식적인 것으로 재평가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시련의 의미를 묻고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느님께 매달리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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