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4-5장): 엘리파즈의 담론
엘리파즈의 첫째 충고 (4-5장)
- 자신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 의존하여 충고함.
- 불행 앞에서 선 욥의 반응 비판 (4:5)
-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4:7)
- 엘리파즈가 밤의 환시를 통해 들은 목소리: “인간이 하느님보다 의로울 수 있으랴?
사람이 제 창조주보다 결백할 수 있으랴?”(4:17)
- 정녕 미련한 자는 역정 내다가 죽고 우둔한 자는 흥분하다가 숨진다네.(5:2)
… 나라면 하느님께 호소하고 내 일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겠네.(5:8)
…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는 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물리치지 말게나.(5:17)
그분께서는 아프게 하시지만 상처를 싸매 주시고 때리시지만 손수 치유해 주신다네.(5:18)
Text 안에서
엘리파즈의 담론은 욥의 절규에 대한 위로이고 충고인 듯하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님이 빠진 인간적 훈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욥이 주님께만 매달린 반면 엘리파즈는 자신 안에 이미 쌓아 둔 전통적 개념, 곧 상선벌악, 인과응보의 개념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상선벌악이 주님이 주시는 응답이라고 역설한다. 욥은 어떠했는가? 답을 들을 수 없어 주님께 ‘왜’냐고 연거푸 묻는다. 그런데 엘리파즈가 이에 대답한다. 이 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리파즈는 테만 사람이었다. 테만은 지혜의 고장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예레 49, 7참조). 그래서인지 엘리파즈의 담론에는 한마디 해야겠다는 훈계 성격이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훈계가 매우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겠니?(욥 4,2) 엘리파즈가 꼭 말하고 싶었던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보상신학이라는 전통적 사상이다(4, 2-11). 착한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고 악한 사람들에게만 불행이 들이닥친다는 사상이다.
문제는 엘리파즈가 생각하는 악한 사람의 ‘범주’이다. 깊은 잠에 빠진 밤에 엘리파즈는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이 어느 날 밤에 본 하나의 영상을 말하여 증명하려고 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꿈은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 주시는 하나의 방법이었다(1사무 28,6). “인간이 하느님보다 의로울 수 있으랴? 사람이 제 창조주보다 결백할 수 있으랴?”(4,17) 인간이라면 하느님 앞에 의롭지 못하기에, 모든 인간은 의로움이 부족하고 결백하지 못해 죄스럽다는 것에, 모든 인간은 의로움이 부족하고 결백하지 못해 죄스럽다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다. 엘리파즈는 천사들조차 잘못이 있다고 듣는다(4,18). 하느님께 가장 가까운 존재이니 천사들조차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하물며 인간의 불완전은 더 할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욥기에서 인생을 유랑민의 천막집에 비유한다(이사 38,12). 천막을 세우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면 천막이 쓰러지듯, 인생을 지탱하는 것을 끊으면 사람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줄을 거두면”은 말뚝을 뽑으면“으로 번역될 수 있다.
우리는 5장에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악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이를 엘리파즈의 입을 빌려 명확히 보여준다. ‘무릇 사람이란 재앙을 위해 태어나니’ 를 다시 번역해 보면 이렇다. ‘무릇 사람이란 재앙을 만드니’ 재앙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은 수동태로 번역된 것으로, 재앙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이 그 재앙을 ‘위해’ 태어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엘리파즈의 담론 안에서는 재앙은 땅에서 솟을 리 없고(5,6) 다만 사람이 악하기에 사람이 재앙을 만들어 낸다는 논리가 펼쳐진다. 따라서 엘리파즈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사람이 재앙을 위해서 태어났다기보다 사람이 재앙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사람이 재앙을 만드니’라는 번역이 더 맞다.
엘리파즈에 따르면 욥은 악한 사람이고, 시련은 그의 악함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다. 엘리파즈는 이 사실을 욥이 깨닫지 못한다고 여겨 하느님께 매달리라고 충고한다(5,8). 왜냐면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엘리파즈는 초월적인 분이신 하느님은 교활한 자들이 계획을 꺾으시고 가난한 이를 구하신다고 역설한다.(5,8-16). 그리고 욥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여보게,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는 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물리치지 말게나(5,17; 참조: 잠언 3,11).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욥에게 닥친 시련은 지혜롭다고 스스로 자만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미련함 때문이라는 말이 아닌가. 엘리파즈는 욥의 의로움을 의로움이 아난 악함으로 규정한다. 적어도 엘리파즈의 담론 안에서 욥은 의롭지 않다.
이제 엘리파즈의 담론은 죄인이고 악한 이로 보이는 욥이 처신해야 할 바를 보여준다(욥 5,18-27). 엘리파즈는 욥을 죄인으로 여기며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역설한다. 멸망이 닥쳐도 하느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것과 심지어 자녀들까지 다시금 많아질 것이라 말한다(5,25). 그러나 이러한 말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인 것이고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말이다. 지금 욥에게 자녀들이 없다. 그들은 죽었다. 욥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엘리파즈는 하느님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붙들고 있지만, 욥은 지금 시련의 ‘현실’ 안에 머물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극명한 차이가 엘리파즈이 담론에 뚜렷이 드러난다.
참고자료: 시서와 지혜서(구약성경의 이해), 박병규, 바오로딸, 2014, pp. 94-96.
주석성경(구약), 한국천주교주교회, pp. 1380-1384.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 욥기 주해서, 크리스챤, pp.32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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